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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14일 토요일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제1독서 : 집회 48,1-4.9-11
복 음 : 마태 17,10-13
산에서 내려올 때에 10 제자들이 예수님께,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하고 물었다.
11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12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13 그제야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깨달았다.
<오늘의 묵상>
김재덕 베드로 신부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 17,12).
믿음이 없는 이들에게 세례자 요한은 엘리야로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신은 정해진 때를 대비하여,
주님의 분노가 터지기 전에 그것을 진정시키고,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되돌리며,
야곱의 지파들을 재건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집회 48,10)라는 말씀이
세례자 요한을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그가 구세주 예수님을 준비시키고자 왔다는 사실도 전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마태 17,12).
예수님 또한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 세례자 요한처럼 다루어질 것입니다.
죄인들이 그분께 돌아와 회개하는 모습을 보여도,
그분의 말씀과 기적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드러나도,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구원자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도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카야파라는 대사제의 저택에 모여,
속임수를 써서 예수님을 붙잡아 죽이려고 공모하였다”(26,3-4).
정작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던 사람들은 바로 ‘하느님의 일을 하던 사람들’,
‘하느님과 아주 가까워 보이는 이들’이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중요한 일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늘 하느님 구원의 신비를 알아볼 수 있는 믿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루하루 성실하게 성체 앞에 머물며 기도하는 삶,
주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며 자신을 돌아보고
그 말씀을 실천하는 삶 안에서 믿음은 자라고 커 나갑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며 그분을 향한 우리의 믿음을 점검하면 좋겠습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죄와 벌,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등의 대작을 남긴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대작을 남긴 이유를 들으셨습니까?
다름 아닌 빚 때문이었습니다. 알코올 의존증으로 많은 빚을 졌기 때문입니다.
또 ‘고리오 영감’을 쓴 프랑스 작가 오노레 데 발자크도 도박 빚에 쫓겨서
억지로 글을 썼고 그 글로 엄청난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위대한 대작은 때로 이렇게 조급하고 불안할 때 나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위기가 기회’라는 말도 있는 것이 아닐까요?
따라서 위기라면서 포기하고 좌절에 빠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다가올 새로운 기회를 찾아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 아님을 당신 부활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도 꾸준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실제로 이 꾸준함으로 뉴스 기사의 한쪽을 채우는 사람이 참으로 많습니다.
쉰 살이 넘어 사이클 마니아가 되었다는 이야기,
예순 중반에 머슬 마니아 대회에 참석하신 분, 일흔이 넘어 대학교에 입학하신 분 등등
정말로 많습니다. 이분들이 탁월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탁월함보다 꾸준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사회적 시계를 중시합니다.
그래서 20대에는 취업하고, 30대에는 결혼하고, 40대에는 내 집 마련 같은 과업에 집착합니다.
그리고 6~70대에는 은퇴와 노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꼭 그럴까요? 나의 시계와 사회적 시계는 분명히 다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꾸준함을 가지고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후회 없는 삶을 살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엘리야가 이미 왔어도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으며,
이제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받을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왜 사람들은 예언자 엘리야의 모습으로 온 세례자 요한을 알아보지 못하고,
또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세상의 눈으로만 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꾸준함을 가지고 하느님께 집중해야 하는데,
그들은 하느님을 말하면서도 세상의 관점으로만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세례자 요한도 또 예수님도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혼란으로 가득 찬 세상처럼 보입니다.
어렵고 힘든 사람은 더 늘어가는 것만 같습니다.
그렇다고 좌절하고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도 직접 그 모든 고통과 시련을 당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어렵고 힘들어도 꾸준함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뒤에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우리의 구원이 펼쳐집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타볼산에서의 거룩한 변모 후 산에서 내려올 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마태 17,10)
엘리야의 재림에 대해서는 이미 <말라키서>(3,1,23)에서는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모세에게 내린 율법과 규정을 기억하라는 말(3,22)과 함께 언급됩니다.
그러니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의 관계에 대한 물음입니다.
여기에는 엘리야가 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예수님이 메시아일 수 있느냐는
율법학자들의 주장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지금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마태 17,11)라고
엘리야의 사명을 말씀하십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마태 17,12)
예수님께서는 먼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을 엘리야로 알아보지 못했음을 말씀하시면서,
마찬가지로 이미 와 있는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한 그들은
이미 와 있는 메시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세례자 요한도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요한 1,26)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듯이,
이제 당신께서도 그렇게 제멋대로 다루어지고 고난받게 될 것을 예고하십니다.
결국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함은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함을 말해주는 동시에
엘리아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암시해 줍니다.
그렇습니다.
엘리야도 메시아도 ‘이미’ 왔지만,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우리 가운데 와 계신 분을 알아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알아보는 영적인 눈을 떠야 할 일입니다.
특히 성탄을 준비하면서 ‘먼저’ 우리에게 와서,
우리를 바로잡는 엘리야의 인도를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제멋대로 다루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만약 오늘 우리가 완고함과 비뚤어진 마음과 악의로 형제들을 거부하고 배척한다면,
그분은 오늘 우리에게 그렇게 제멋대로 다루어지고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은 '이미' 우리 가운데 와 계신 그분을
버림받지 않고 박해받지 않도록 해 드려야 할 일입니다.
더 이상은 그분을 제멋대로 다루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겪으신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에서, 있기 마련인 고난에
당황하거나 좌절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음에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의 편지에서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의 영광이 나타 날 때에도
여러분은 기뻐하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1베드 4,13)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 17,12)
주님!
제 눈이 가려져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함은
빛을 피하고 어둠을 좋아한 어리석음이었습니다.
제 가슴이 굳어져 당신을 맞아들이지 못함은
진리보다 제 자신으로 꽉 채운 완고함과 오만이었습니다.
빛이요 진리이신 주님!
저를 밝히소서.
제 어리석음과 완고함을 걷어내소서.
오만불손함을 태우소서.
제가 밝아져 더 이상은 당신을 제멋대로 다루지 않게 하소서. 아멘.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
반영억 라파엘 신부
유다인들은 메시아가 오기에 앞서 그가 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전령이요 선구자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마지막 예언서인 말라기서를 보면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말라3,23-24).고 적혀있습니다.
이 본문은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의 신앙의 바탕이 되었고,
사람들은 엘리야가 ‘이미 왔는데’,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름은 다르지만, 세례자 요한이 바로 메시아에 앞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인데 그를 몰라본 것입니다.
사실 누군가를 알아보려면 열린 마음이 필요합니다.
루카 복음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루카 1,16-17). 하고
천사의 이야기를 전함으로써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예고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요한은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1,23). 라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요한은 하느님 나라를 위해 백성들을 준비시킨
마지막 때의 예언자로서 엘리야의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시대의 표징을 알아보지 못하고 요한을 제멋대로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헤로데는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음에도
헤로디아의 딸에게 헛된 맹세를 하여 결국 요한의 목을 베도록 명하였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마르6,26).
그러나 헤로데만이 그를 죽였는가?
생각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잘못은 모두에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요한의 외침을 따르기를 거부하고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회를 주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헤로디아는 헤로데 동생인 필리포스의 아내입니다. 그러나 헤로데와 혼인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러 차례 말했습니다.
이것을 알고 있는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 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사실 헤로디아의 마음이 우리 안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길을 거부하고 내 마음대로 하려는 욕심과 똥고집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마음을 바꾸지 못한다면 우리도 요한을 죽인 공범자나 다름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대의 징표를 읽고 마음을 하느님께로 돌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언자도 메시아도 결코 만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의 죽음이 단순히 한 왕의 방자한 변덕과 경솔한 맹세의 결과가 아니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요한12,24) 메시아적인 구원의 죽음이었지만,
이것을 깨우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제자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 삶이었습니다.
따라서 죽음을 통해 새로운 생명이 온다는 진리를 알면,
예수님을 따름에 있어 고통의 길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은 예수님께서 살아간 삶을 살아가는 기회가 됩니다”(함께야).
그러므로 막연히 내가 그려놓은 주님을 기다리지 말고 주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오시든지
제대로 알아볼 수 있도록 깨어있어야 하겠습니다.
“오, 주님! 저는 당신을 몰랐나이다. 다만 지상의 일들을 알고 맛보려 했나이다.
주 하느님! 모든 것을 바꾸어 주시어 당신 안에 편히 쉬게 하소서.”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해도 좋습니다.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내리면!”(십자가의 성 요한).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으나 알아보지 못하였다.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엘리야의 재림에 관해 이야기한다.
예수께서는 방금 제자들에게 당신의 거룩한 변모를 보여주셨다.
제자들은 영광스러운 변모가 그분의 영광으로 생각하고
왜 선구자인 엘리야가 나타나지 않는지 물었다.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10절)
예수님은 요한 세례자를 엘리야로 소개하시지만,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의 화해와 재건을 이룩하지 못하고 참수당했기 때문에
재림한 엘리야일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엘리야가 아직 재림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다음에 오실 메시아도 오지 않았다고 한다.
예수님은 메시아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세례자 요한을 재림한 엘리야로 생각하였다(11,14 참조).
그러나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기 전에 헤로데에게 죽임을 당했다(14,3-12).
이렇게 메시아의 선구자가 배척을 당한 것처럼, 메시아이신 예수께서도 배척을 당하셨다(11,16-19 참조).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12절) 그를 감옥에 가두고 처형한 헤로데와 그들이 공범자였다.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12절)
그런 다음 주님께서는 그들이 엘리야에게 한 것과 같은 일을 당신도 당하실 것이라고 하신다.
“엘리야가 이미 왔다.”(12절)는 말과 그에 대한 구원자의 설명을 듣고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임을 깨달았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두 번 오신다고 말한다. 첫 번째 오심은 지금 오심이다.
바오로 사도는
“과연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
이 은총이 우리를 교육하여, 불경함과 속된 욕망을 버리고
현세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해줍니다.”(티토 2,11-12)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 우리에게 오시는 그분을 잘 맞을 수 있도록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두 번째 오심에 대해 바오로는
“복된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우리의 위대하신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우리”(티토 2,13)라 한다.
엘리야나 메시아의 참모습은 희생적인 사랑과 봉사를 통해서 드러난다.
우리 자신이 엘리야가 되고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는
은총의 선물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의 독서와 복음에는 엘리야가 언급됩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꼽는 대표적 예언자 중 한 사람입니다.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마태 17,10)
주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 이후 산을 내려오던 제자들이 예수님께 여쭙니다.
그들은 방금 엘리야와 모세를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였지요.
엘리야의 출현으로 제자들은 스승이신 예수님의 예언자적 소명의 정통성과 연속성을 확인합니다.
제1독서는 엘리야 예언자에 대한 집회서의 대목입니다.
길지 않은 내용 중 "불"이란 말씀이 다섯 차례나 등장합니다.
"엘리야 예언자가 불처럼 일어섰는데"(집회 48,1).
"그의 말은 횃불처럼 타 올랐다."(집회 48,1).
"세 번씩이나 불을 내려보냈다."(집회 48,3).
"당신은 불 소용돌이 속에서"(집회 48,9). "불 마차에 태워 들어 올려졌습니다"(집회 48,9).
엘리야의 표상인 "불"은 정화와 열정, 사랑을 상징합니다.
죄와 악습을 태우고 살라 버려 정화시키고,
마음을 뜨겁게 하여 주님을 향하게 만들며, 성령 안에서 사랑이 되게 합니다.
그 자신이 곧 "불"인 엘리야의 사명은
"정해진 때를 대비하여 주님의 분노가 터지기 전에"(집회 48,10)
백성을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 17,12).
엘리야의 그 사명을 부여받은 이가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아합왕의 아내인 바알 숭배자 이제벨의 손아귀를 벗어나
불 마차에 태워져 승천한 것과 달리(1열왕 17장 -2열왕 2장 참조),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가 취한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부추김과
그 딸의 춤값으로 목이 베어져 순교하지요(마태 14,1-12 참조).
'아는 것'과 '알아보는 것' 사이의 간극이 얼마나 큰지요!
율법 학자들은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는 사실은 머리로 알고 있었지만,
메시아에 앞서 길을 준비하러 온 세례자 요한에게서
엘리야를 알아보지는(관상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니 세례자 요한이 "내 뒤에 오시는 분"(마태 3,11)에 대해
아무리 증언하고 선포해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볼 눈이 열릴 수 없었지요.
마침 오늘은 주님 향한 사랑의 불꽃으로
이글이글 타올랐던 십자가의 성 요한 기념일입니다.
덕분에 오늘 우리는 엘리야와 세례자 요한, 십자가의 성 요한이라는
세 개의 불덩이를 한자리에서 만났네요.
하느님께서 때에 맞춰 우리에게 보내 주신 성인들을 통해
우리는 정화되고 열정을 되찾아 열렬한 사랑으로 주님께 뛰어들게 됩니다.
이들은 우리가 주님을 알아보도록 눈을 열어 주는 불꽃입니다.
대림 제3주일을 앞두고 다시금 사랑의 불을 지피는 하루 되시길 빕니다.
여러분이 불타는 사랑으로 불이신 주님을 맞이하여
하나의 불길로 함께 타오를 수 있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루카 12,49)
제2의 엘리야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 잡을 것이다.”
“(그러나 그)엘리야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나는 엘리야를 알아보고 존중하는가?
나는 엘리야처럼 바로잡는 사람인가?
엘리야처럼 바로잡는 사람이 온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 같은가?
엘리야가 와서 지금처럼 어지러운 우리나라를 바로잡아준다면,
제정신이 아닌 지도자들을 정신 차리게 해준다면 환영하겠지요.
저뿐 아니라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런데 만일 환영하지 않는 분이 있다면 여러분도 제정신이 아니겠지요.
그런데 바로잡는 그분이 내게 온다면 그때는 어떨까요? 환영할까요?
솔직히 말해서 저는 환영하지는 못하고 마지못해 맞이할 것입니다.
사실 엘리야가 남을 바로잡아주는 것은 좋지만 나를 바로잡아주는 것은 싫고,
또 내 잘못을 내가 바로 잡는 것은 좋지만 남이 내 잘못을 바로잡아주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사랑일지라도 싫고, 환영하지 못합니다.
문제는 내가 나를 바로잡느냐, 바로잡을 수 있느냐 그것입니다.
내가 나를 바로잡는다면 주님도 엘리야도 오실 필요가 없고, 오시지도 않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살아온 대로 살려는 관성이 대단하고 나이 먹을수록 더 그렇습니다.
바로잡는 것이 불편하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현재의 자기를 부정하는 것은 고통스럽고, 바로잡는 것은 더 고통스럽습니다.
이는 오랫동안 잘못된 습관으로 심하게 굽은 척주를 교정할 때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되는데 바로 그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인이 아니기에 이처럼 바로잡는 예언자를 환영하지 못할지라도
그러한 우리 자신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억지로라도 맞이하는 우리가 돼야겠습니다.
다음은 우리가 엘리야가 되는 경우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2의 엘리야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엘리야처럼 바로잡을 자격이 없는 우리가
그래도 엘리야처럼 하라고 파견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거절하시겠습니까?
엘리야처럼 불같이 일어날 수 없는 사람이면 그 파견을 거절할 것입니다.
왜냐면 바로잡아주려고 할 때
‘어서 바로잡아주세요.’ ‘고맙습니다.’라고 할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바로잡아주려다가 죽임을 당할 수도 있고,
죽임당하지는 않더라도 오늘 축일을 지내는 십자가의 성 요한처럼
바로잡아주려던 사람들로부터 미움과 온갖 박해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다시 오는 엘리야가 되려면
자기 잘못을 고치는 데 급급한 사람이어서는 안 되고,
잘못을 같이 바로잡아가려는 열정이 불타오르지 않으면 안 되며,
그 열정이 고통을 무릅쓰고 더 나아가 삼켜버릴 정도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열정, Passion.
엘리야의 열정,
세례자 요한의 열정,
그리스도의 수난의 열정(Passion of Christ)을
이 대림절에 다시 생각하는 오늘 우리이고 제2의 엘리야들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