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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隨筆) ㅡ 자신의 경험이나 느낌 따위를 일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기술한 산문 형식의 글.
에세이(essay) ㅡ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듣고 본 것, 체험한 것, 느낀 것, 따위를 생각나는 대로 쓰는 산문 형식의 짤막한 글.
수필은 에세이가 아니다. 에세이를 문학적 에세이와 비문학적 에세이로 구분하는데, 수필은 문학적 에세이에만 국한된다.
수필은 자기의 체험을 재구성과 형상화라는 과정을 거쳐 예술적 감동을 획득한 글이다.
신변 잡사를 단순히 기록하면 '신변 잡기'가 된다.
하지만 같은 신변 잡사라 하더라도 언어적 형상화를 통하여 문학성을 획득하면 수필이 된다. 즉 체험을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하여 독자에게 감동을 주는 소재 중심의 문학이다.
(말뜻은 알겠는데 완전 공감은 되질 않는다. 언어적 형상화와 '문학성 획득'이 있어야만 감동을 주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단순한 진솔성ᆞ참신함으로도 감동을 받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필도 때로는 비판도 서슴지 않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정이 있는 비판이다.)
수필의 미(美)는 균제(均齊)의 미다. 치우침이 없는 조화의 미학, 알맞게 생략하고 알맞게 비약한다. 비유를 원용하되 산문의 명료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이며, 이야기 형식을 취하되 체험에 바탕을 둘 뿐 허구에 기대지 않아야 한다. 한 잔의 차(茶)를 앞에 놓고 친구와 정담을 나누듯이 직접적인 자기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직접성, 그것이 우리에게 신뢰성을 준다.
읽을수록 따뜻해지는 아름다운 우리 수필들.
수필은 부드러운 귀엣말 같은 친근감이 있고, 속내를 드러내는 솔직함이 있으며, 나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깊은 통찰에서 오는 삶의 예지가 있다.
수필은 시(詩)처럼 뜨겁지는 않지만 소설(小說)처럼 차갑지도 않다. 따뜻하다.
이 따뜻한 체온을 우리는 사랑해야 한다.
다만 수필은 '생각나는 대로 쓰는 글'로 오해하고 있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음을 꼭 알아야 한다.
- '손광성의 수필쓰기' 에서 발췌하여 적었다.
내가 쓰는 글은 생활수기도 못되는 신변잡기일 뿐이다.
언젠가는 나도 내밀만한 근사한 수필 한 두 편쯤은 쓰고 싶긴 하다.
일터 내 방(房)에서 초하(初夏)의 한낮을 무료하게 보내다가,
새로운 주제 속에 통찰과 사유, 사고의 전환으로, 가히 수필의 정수라고 할 '짐승에 관한 세 가지 이야기'를 수필방에 게시해 본다.
글쓴이의 글솜씨가 부럽다........
짐승에 관한 세 가지 이야기 / 이 희 자
<1>
"짐승만도 못하다는 것과 짐승보다 더하다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심한 욕일까?"
인터넷 우스개란에 올라와 있는 말이다. 그 재치 있는 말놀음에 한참 웃고 나니 그와 관련 있는 우스개가 하나 떠 올랐다.
어떤 남녀가 길을 가다가 날이 저물어 여인숙에 들었다.
공교롭게도 방이 하나밖에 없어서 한방을 쓰게 되었다. 잠자기 전, 방 가운데 줄을 걸고 커텐을 친 여자가 말했다.
"당신, 이쪽으로 넘어오면 짐승이에요."
아무 일 없이 밤이 새고 날이 밝았다. 줄을 걷으며 여자가 또 한 번 말했다. "짐승만도 못한 인간."
그날 밤 만약 무슨 일이 벌어졌더라면 그 남자는 짐승보다 더하다는 말을 들었을까?
그런데 같은 말이 그 말을 쓰는 순간의 화자의 심정에 따라 정반대의 가치로 새겨지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여자는 처음에 남자가 수컷의 본능에 따라 행동하면 짐승으로 여기겠다고 했다. 그러더니 나중에는 그 본능에 따라 행동하지 않았음을 비웃는다. 그러니 남자란 여자들의 내숭 뒤에 숨겨진 의미를 잘 파악해서 때에 따라 본능의 움직임에 충실해야 짐승보다 못하다는 수모를 면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짐승이란 말은 '몸에 털이 나고 네 발을 가진 동물'로 사전에 나와 있다. 두 번째 뜻은 거칠고 야만스런 사람을 일컫는다. 여자가 말한 것은 나중의 뜻이다. 나는 이 낱말이 언제부터 사람에 대한 비유로 쓰였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언어란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 짓는 가장 문명적인 표정의 하나이니, 곧 삼라만상을 인간의 눈으로 보고, 인간의 사고로 재단한 뒤의 표현일 수밖에 없다.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짐승의 특성을 야만스럽다고 했지만, 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이 자연스러운 게 아닐까? 오히려 인간이 충동적으로 저지르는 행동보다 절제된 것일 수도 있다.
앞에서 든 우스개를 뒤집어 말해보자. 암수 한 쌍의 짐승이 한 우리에 있다. 그러나 동물은 종족 번식을 위해서만 교미를 하는지라 그런 밤,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아무 일 없다. 만에 하나 오로지 쾌락만을 위해 성욕을 주체하지 못하는 짐승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사람 같은 놈'이라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결국 우스개에 쓰인 짐승 같다는 말은 따지고 보면 사람의 경우에나 해당될 뿐이라는 이야기다. 위선을 모르는 동물의 눈으로 볼 때는, 저의 타고난 왕성한 생명력을 윤리와 관습이라는 줄로 얽어매어야지만 모듬살이를 지탱할 수 있는 나약하고 불쌍한 존재가 곧 인간일지도 모른다.
<2>
어느 집이나 겪는 일일 테지만 아이들이 자라는 동안 집안에는 온갖 작은 동물 등을 키우게 된다. 아이들은 그것들을 기르면서 정을 들이는 법을 알게 되고, 죽음이라거나 이별이라거나 하는 낯선 말에도 익숙해진다. 우리 집에는 병아리나 햄스터니 열대어니 하는 자잘한 동물들을 거쳐 지금은 어른 손바닥만하게 자란 청거북 한 마리가 열대어 어항을 차지하고 있다. 아이들이 나가고 없는 시간에 먹이를 주면서 나는 그놈에게 말을 걸기도 하고, 눈을 맞추기도 한다. 그때 그 눈을 빤히 바라보고 있노라면(아시겠지만 거북은 다소 징그러운 줄무늬에 비해 작은 눈이 맑고 예쁘다. 그 윤기!) 그 놈 역시 나를 빤히 올려다보면서 무언가 '생각'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떨치기 어렵다. 그 눈으로 볼 때 우리 인간들은 희한하게도 생겼으리라. 눈 위에 붙은 필요 없는 털, 쓸데없이 솟은 코(거북이는 콧구멍만 뚜렷하다), 고기를 낚아채기에는 너무 연해 보이는 입술..... 나아가 어항 속을 헤엄쳐 다니면서 나를 볼 때는 내가 공기 속을 헤엄쳐 다니는 것처럼 보이리라는 데까지.생각이 비약한다. 우리 가족이 우리 집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이 생활공간은 거북이로서는 제 집이기도 한다. 여기에 한 걸음 나아가면, 우리가 딛고 있는 이 대지는 인간뿐 아니라 다른 생명들이 살고 있는 공간 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우리가 그들을 관찰하듯, 인간을 관찰하는 눈 또한 어찌 없다고 할 것인가.
그런데 동물이 사람을 볼 때는, 사람이 동물을 보는 만큼 이질적으로 보이지는 않는 모양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느 해 여름에 나는 오리건에서 넉 달간 산림감시원 노릇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늘 혼자였고 거의 벌거벗다시피 했습니다. 주위에는 전혀 인적이 없었으니까요. 나는 산림 깊숙한 곳에 있었어요. 그 여름이 끝날 무렵 내 피부는 아주 보기 좋게 그을었고 내 마음은 무척이나 차분하게 가라앉았습니다.
8월 말경, 하루는 산딸기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란 곳에 쭈그리고 앉아 산딸기를 따먹고 있는데 갑자기 혀 같은 것이 내 어께를 핥는 거에요. 천천히 고개를 돌리고 보니까 사슴 한 마리가 내 잔등에 흐르고 있는 땀을 핥아먹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나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사슴은 내 옆으로 돌아와 산딸기를 따먹기 시작했어요. 우리는 한동안 조용히 산 딸기를 따먹었어요. 나는 무척이나 감동했습니다. 동물이 나를 그처럼 믿어주니!"
ㅡ 나탈리 골드버그 <당신도 작가가 될 수 있다> 중에서
나는 이 '우리는'이라는 낱말을 읽었을 때, 인간의 언어가 동물의 세계에서도 통용될 듯한 묘한 충격을 받았다.
사슴이야말로 '우리는 함께 산딸기를 따먹었다'라고 말할 법한 상황이지 않은가. 갈색으로 그을은 피부와 잔등에 솟아난 땀, 앞발로 산딸기를 따먹고 있는 인간이란 사슴의 눈에는 그저 한 마리 짐승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대자연 속에서 그 산림감시원은 짐승과 동격이 되었다. 그런데 그것이 참으로 자연스럽다.
<3>
그런 목가적인 장면이 아니어서 죄송하지만 나도 한 번, 내가 짐승처럼 생각되던 때가 있었다. 그것은 출산 때였다.
산달, 진통이 시작된다. 허겁지겁 차를 타고 병원으로 달려간다. 도착하자마자 옷을 모조리 벗기우고, 병원 이름이 줄줄이 새겨진 푸른 환자복이 걸쳐진다. 터질 듯이 솟아오른 배 아래로 가운 앞자락이 벌어지려 한다. 한 손으로는 배를 감싸안고, 한 손으로는 옷자락을 여미며 힘들게 수술실로 들어선다. 그리고는 진료대에 눕혀져 수술을 위한 처치가 시작된다. 바로 그 순간, 나는 옷보다 더한 무엇이 벗겨지는 느낌을 받았다. 벌거벗은 짐승, 옷으로 상징되는 모든 인간적 체면과 품위를 다 벗은 다음, '도살장'과도 같은 그 과정에 이르니 내가 다만 '새끼'를 낳으려는 암컷, 한 마리의 짐승에 지나지 않음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출산 지옥의 초입, 이성의 통제 아래 있을 때의 '생각'이다. 그 다음 과정은 영화나 소설을 통해 익숙한 장면들이다. 땀으로 범벅이 된 채 뒹굴고 울부짖고..... 그야말로 짐승과 다를 바 없다.
한 여류 소설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바다가 해를 울컥 낳듯, 그 좁은 가랑이 사이에 둥근 머리가 불쑥 솟구쳐 나올" 때까지 살이 찢기는 고통은 그치지 않는다. 그토록 "뜨겁고 붉고 그렇게도 둥근" 핏덩이가 내 몸 속에서 빠져나갈 때까지는.
내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여성은 출산을 겪으면서 자신이 결국은 한 마리 짐승이라는 뚜렷한 인식을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기묘한 일은 젖을 물리거나 아이를 보듬거나 하는, 여성으로서의 거의 본능적으로 알게 되는 육아의 과정을 겪으면서 조금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첫아이를 낳고 얼마 지나서였다. 텔레비젼 프로그램 '동물의 왕국'에서 얼룩말이 새끼를 낳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그 화면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세상에, 암컷으로 태어난 것들의 운명은 그토록 끔찍한 것이었다. 그 짐승은 선 채로 비척대며 그 과정을 견뎌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울부짖지도 않고 고통스런 표정조차 짓지 않았다. 사람보다 나았다. 한 생명을 탄생시키는 일에 있어 인간과 짐승이 같은 과정을 겪는 만큼, 짐승들의 모성애 역시 인간과 다를 바 없을 터이고, 그렇다면 짐승에게도 새끼를 낳는 것은 사람이 자식을 낳는 것만큼이나 숭고한 일이다. 인간이 그 같은 과정을 똑같이 치른다고 해서 치욕스럽게 느낄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날 나는 그런 자각에 이르렀다. 그러지 않았다면 아마 둘째를 가질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흉을 공연히 죄없는 짐승에게 빗대곤 한다. 그러나 짐승 같다는 말을 함부로 비하해서 쓸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머리속에서만 머물던 인간의 자아의식을 가슴께까지 끌어내려주지 않는가.
첫댓글 참 훌륭하신 글입니다...
어머니는 위대하다!
탁월한 도덕성, 공정함, 선에 대한 의지, 이것들이 미덕의 아름다운 요소들이라 생각입니다.
미덕은 인간이 만족하는 삶의 바탕 가운데서도 중심이 되리라는...
미덕을 갖춘 사람은 분별력이 있고 조심스러우며 이해심이 깊고 현명하며 참 된 용기가 있지요.
또 사려 깊고 즐겁게 살아가며,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빌바오 님.
처음 뵙는 분이시고, 사진활동을 하시는 분이신가 싶습니다.
저도 사진에 관한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으며, 오랫동안 사진생활을 하였습니다.
기회와 인연이 닿는다면 조금씩조금씩 다가 가며 나눔하고 싶으네요 ~
자작글이 아님에도 첫댓글 주심에 대단히 고맙습니다.
감사 드립니다.
인간과 짐승은 같은 동물이지요.
인간이 다만, 짐승보다 낫다는 우월감에
사람과 짐승을 구별해 놓은 것이지
짐승편에서 보면 마찬가지 입장일 것 같아요.
시골촌부님의 글의 뜻은 알겠으나
내일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조금 바빠서...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지요.
자신의 감정을 무시하지 말아야 하며, 마찬가지로 상대방의 감정 또한 그만큼 존중받아야 하겠지요.
사랑이 오고 가는 길은 감정의 흐름으로 인해 닦여지기 때문에,
이성의 개입을 감정의 영역에서 방어할 줄 알아야 하며, 그래야 진정한 사랑의 꽃을 피울 수가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감정 또한 자신의 감정과 마찬가지로 존중되어야 한다는.....
늘 수고하심에 존경의 마음입니다.
댓글 감사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제가 사는 이 곳 남녘에는 비가 내립니다.
다소나마 봄가뭄 해갈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석촌 님.
77세 喜壽 경하드립니다.
米壽 白壽 上壽까지 늘 강건, 건안하시기를 진심으로 바라겠습니다.
산문집 '꽃눈 뜨자 눈꽃 내려' 출간을 축하합니다.
시중 서점에서 구입하여 꼭 읽어 보겠습니다.
댓글 남겨주시어 감사 합니다.
고맙습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근본은 사람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해도 사람만은 잃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겠지요.
처음 뵙는 분이십니다.
자주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댓글 주심에 고맙고 감사 드립니다.
수필의 묘미를 잘 몰랐는데
인용하신
짐승에 관한 세가지 이야기를
읽다보니
수필의 미는 균제의 미란 개념을
조금은 이해한 듯 해서
감사드립니다^^
수필의 美는 均齊의 미라는 개념....
인생에 대한 관조와 체험을 개성적인 문체로 표현하여 붓 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쓴 글을 수필이라고 말하지요.
정해진 형식 없이 자신을 진실하게 드러내면서 멋과 운치를 곁들이는 산문 문학의 한 갈래이지요.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수필을 자유로운 산문이므로 특정한 형식적 제한을 받지 않는다고 흔히 말하지만,
'무형식의 형식' 이 있는, 그래서 형식을 무시한 채 아무렇게 써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 다양한 형식으로 쓸 수 있다는 의미로 생각해야 옳은 수필의 이해이겠지요.
풍경 님
게시글 고찰 가늠하시여 이해의 폭을 넓혀 주신 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