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 깎는 남자
김영범
반듯하게 비질을 끝낸
눈밭처럼 하얀 사각의 정원
마당을 가로질러 선을 긋는 그 남자
언제나 평행이 되도록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 다가가지 않도록
다른 하나가 저 혼자 멀어지지 않도록
뭉툭하게 깎은 몽당연필 선 긋는 소리
찬 눈 속을 뚫고 나오는 복수초 하나를 그려 넣고
보도블록 작은 틈을 비집고 나온 민들레를 그려 넣고
눈물 많은 물봉선을 그려 넣는다.
박봉에 시달리는 가장을 그려 넣고
세상의 모순과 싸우는 이들을 그려 넣고
늘 당당하지만 여리디 여린 그녀를 그려 넣는다.
한 밤 잠 못 들고 질주하는 자동차의 경적 소리를 그려 넣고
새벽녘 현관 앞 신문 놓이는 소리를 그려 넣고
아침 안개를 뚫고 출근하는 발소리를 그려 넣는다.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소리들을 모아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올린
음표로 만든 그녀의 집,
방 한 칸 세 들어
연필을 깎는 남자
家出
“아빠 신동엽 아는 사람이야”
공주 우금티 지나 부여 가는 길
금강 변 따라 한 시인의 길을 찾아간다
작은 비문으로 남은 생이라도
소나무 몇 그루 든든한 벗 삼아 일가를 꾸렸으니
“아빠 정지용도 죽은 사람이지”
올 초등학교 들어가는 아들 녀석과
자꾸 작고한 시인들 이야기만 하다가
모텔에서 하루 밤 유숙하는데
피곤도 하련만 처음 와본 모텔이 마냥 신기하여
얼굴에 화색이 돋는다
여기는 TV도 크고 냉장고도 있고 정수기도 있고 또,
아들이 또 라고 말한 것은
맥주와 안주를 자동으로 판매하는 것인데
흥분제에만 빨간 불이 들어와 있는
오래전 작고한 기계였다
아들과 가출한 생애 첫 날
죽은 자와 詩 이야기로
그런대로 일가를 꾸렸으니
간만에 흥분되는 밤이다
김영범_ 충남 천안 출생. 2004년 《충북작가》신인상. 시집 『김씨의 발견』
딩아돌하 2011. 봄호
첫댓글 사그락사그락 연필 깎는 소리가 들리는 아침입니다.^^*
아들과 가출은 언제 해보나, 흥분되는군요 ㅋㅋㅋ
아주 詩적인 가출이라면 할 때마다 즐거울 것 같습니다. 어린시절 낫으로 연필을 깎아주던 아버지가 생각납니다.
거구의 아들이 조그마한 연필을 곱게 깎는 걸 보며 누구 줄거냐 물었더니 묻지말라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