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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15일 대림 제3주일(자선 주일)
제1독서 : 스바 3,14-18ㄱ
제2독서 : 필리 4,4-7
복 음 : 루카 3,10-18
그때에 군중이 요한에게 10 물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11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12 세리들도 세례를 받으러 와서 그에게, “스승님,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자,
13 요한은 그들에게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 하고 일렀다.
14 군사들도 그에게 “저희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요한은 그들에게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하고 일렀다.
15 백성은 기대에 차 있었으므로, 모두 마음속으로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16 그래서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17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치우시어,
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
18 요한은 그 밖에도 여러 가지로 권고하면서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오늘의 묵상>
김재덕 베드로 신부
군중도, 세리들도, 군사들도 모두 세례자 요한에게 똑같이 묻습니다.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루카 3,10)
세례자 요한은 이 물음에 다른 답을 합니다.
군중에게는 이웃에 대한 무관심을 멈추고, 나누라고 합니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3,11).
세리들에게는 돈으로 저지르는 악을 멈추라고 말합니다.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3,13).
군사들에게는 폭력을 멈추고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3,14).
이러한 대답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웃에게 당연하게 저지르던 악행을 멈추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실 시간이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예수님을 맞이하는 준비는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습관적으로 저지르며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타협하던
크고 작은 죄악에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이 하느님께 돌아설 수 있고,
우리를 구원하시러 오시는 예수님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기뻐하라.’고 합니다.
“딸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스바 3,14).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필리 4,4).
예수님의 성탄이 다만 해마다 돌아오는 ‘기념일’이 아니라,
나를 구원하러 오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기쁨이 될 수 있도록,
세례자 요한의 권고를 마음에 새기며 성탄을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지금은 본당신부라서 외부 강의를 나가지 않지만,
몇 년 전만 해도 강의 청탁을 참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있었습니다.
“저희가 돈이 없어서 강사료를 드릴 수 없습니다.
그래도 오시는 분들 생각해서 강의해 주십시오.”
갈까요? 안 갈까요? 당연히 갑니다. 제가 필요하다는데 당연히 가야 합니다.
봉사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가고, 또 즐겁게 강의합니다.
하지만 특별한 소품을 준비하거나, 선물 같은 것은 준비하지 않습니다
(무조건 나눠주기에는 제가 그렇게 부자가 아닙니다).
이런 경우도 있었습니다.
“저희가 신부님 강사료로 ***원 잡았습니다. 강의해 주시겠습니까?”
강사료 액수가 상당히 컸습니다. 그리고 저를 위해 갖가지 배려를 해 주십니다.
갈까요? 안 갈까요? 역시 당연히 갑니다.
이 강의를 위한 준비를 아주 열심히 합니다.
이런 강의를 해달라면서 부탁하면 어떤 부탁이든 다 맞춰줍니다.
또 어떻게 하면 강의 듣는 분에게 도움이 될지 오랫동안 준비합니다.
완전히 다른 강의를 하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돈 때문일까요?
아는 분은 아시겠지만, 강의했다고 저에게 특별한 이득이 있지 않습니다.
강사료는 강의 때 나눠드리는 선물값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어려운 곳이나 필요한 곳에 모두 보냅니다.
특별히 돈 쓸데도 없고, 가지고 있어 봐야
욕심만 커지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두 경우가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를 인정해 주신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인정한다고 생각하니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맞습니다. 상대가 인정하면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떠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 자라고 있다는 것만 해도
우리를 사랑하고 인정하신다는 표시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우리를 인정하시고
계속해서 기회를 주시면서 배려해 주시는데,
우리는 과연 얼마나 최선을 다해 살고 있나요?
벌써 대림초의 불이 세 개나 켜졌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그만큼 가까워졌다는 것을 눈으로 보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우리의 모습은 과연 어떨까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례자 요한의 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모든 이를 위한 정확한 규범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회개하고 메시아의 오심을 준비하고자 한다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가난한 이들과 나누고,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말며, 아무에게도 빼앗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주님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면서 겸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세례자 요한이 이렇게 말하고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께 인정받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서 그 인정에 보답하기 위한 삶을 사셨습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끊임없이 요구만 하면서,
주님의 인정과 사랑에 반대되는 행동만 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대림 제3주일, 오늘을 우리는 '기쁨주일'이라 부릅니다.
대림초에는 핑크색 초에 불이 밝혀지고,
사제는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서 장미빛 분홍색 제의를 입었습니다.
오늘의 전례도 온통 ‘기쁨’에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입당송, 본기도, 화답송, 복음 환호송, 독서 등
전례 전체가 곧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기뻐하라’는 말로 메아리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스바니아 예언서 3장의 마지막 부분인데,
이 부분은 바빌론 유배의 아픈 체험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예언자는 유배 생활의 고통 중에서도
기쁨을 이야기하고 축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 주님께서 네 한가운데 계시니,
~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리라.”(스바 3,15.17)
이처럼 그들이 유배의 고통 중에서도 축제의 기쁨을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께서 그들의 삶 안에 함께 계시며 새롭게 하신다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제2독서는 필리피 서간으로,
사도 바오로는 감옥의 고통 가운데서도 신자들에게 기쁨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필리 4,4)
사도 바오로의 기쁨 역시 스바니아처럼
오로지 함께 계시는 구세주 주님께만 희망을 두신 까닭이었습니다.
그 기쁨은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데서 오는 기쁨이었습니다.
기쁨의 원천이 그리스도께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그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기쁨이 사라질 수는 없습니다.
바로 그 가운데서도 주님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기쁨이 자신의 실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현존과 사랑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쁨’은 그분의 현존을 드러내는 향기라고 합니다.
그래서 기뻐하는 자가 곧 기쁨의 전달자가 되고,
바로 그가 곧 복음 선포자가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군중도 세리도 군사들도 세례자 요한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루카 3,10.12.14)
이는 실천적인 삶에 대한 요청입니다.
바로 이 실천적인 삶이 오늘 복음에서는
이웃에 대한 사랑, 곧 구체적인 '자선'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자선주일’이기도 합니다.
또한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면서,
그분이 오시면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은 생명의 풍요를 의미합니다.
반면, ‘불’은 성령의 활동을 통해 변화되는 힘을 상징합니다.
마치 불이 자기에게 닿는 모든 것을 태우고 변화시키듯이,
성령께서는 당신의 힘을 받아들이는 모든 것을
하느님의 생명으로 변화시킬 것입니다.
용서와 더불어 말입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은 비록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표시’로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결코 죄를 용서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성령을 불어넣을 그릇과 그 공간을 만들 수는 있었지만,
그 그릇에 용서로 새 생명을 불어넣는 일은
오직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용서받고 새 생명을 입은 우리의 마음이
기쁨으로 꽉 차올랐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이 몸으로 행실로 드러났으면 더더욱 좋겠습니다.
무엇보다도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대한 확신'을 나누는 것이
바로 우리의 기쁨이요, 자선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한국을 방문하셨을 때 수도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기쁨은 기도 생활과 하느님 말씀 묵상과 성사 거행과
공동체 생활에서 자라나는 선물입니다.
~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들인 여러분에게 그러한 기쁨은
십자가 위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라는 신비 안에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다른 무엇에서가 아니라,
바로 주님의 자비 안에서 늘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바로 지금 우리 한가운데 그렇게 함께 계시며
자비를 베풀어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기쁨의 노래를 불러야 할 일입니다.
사실 하느님 자비는 늘 저희와 함께 있지만,
저희는 자신의 어둠 속에 갇혀 그 자비를 외면할 때가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자비를 건네주려고 저희를 찾아 헤매건만
우리는 다른 곳을 찾아 헤매기가 일쑤입니다.
딴 곳에서 우물을 파고 있는 꼴입니다.
주님이 한 발짝 다가오면 오히려 두 발짝 멀리 도망칩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자비를 목말라하면서도
실상은 자비에게로 달려가지는 않는 꼴입니다.
하느님 자비 안에 안식과 위로가 있건만,
하느님 자비에 의지하기보다는 다른 인간적인 방도로 안식과 위로를 찾는다면,
그것은 허상을 쫓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자비는 우리의 거부로 상처 입게 될 것입니다.
주님!
이제는 당신의 자비를 거부하지 않게 하소서.
제 삶이 자비의 실행이 되게 하소서.
오늘, 누군가 한 사람에게라도 당신 자비의 기쁨을 건네주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루카 3,10)
주님!
당신은 늘 저와 함께 있었지만,
저는 제 안의 어둠 속에 숨어 당신을 외면했습니다.
당신은 저를 목말라했건만,
저는 당신에게로 달려가지 않았습니다.
당신 자비 안에 안식과 위로가 있건만,
다른 인간적인 방도로 허상을 쫓았습니다.
당신이 한 발 다가오면, 저는 두 발 멀리 도망쳤습니다.
이제는 당신의 자비를 거부하지 않게 하소서.
제 삶이 자비의 실행이 되게 하소서.
그 실행으로, 상처 입으신 당신을 위로하게 하소서.
당신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아멘.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오늘은 대림 제3주일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기억하며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의 기회를 갖습니다.
이 시간 자선의 의미에 대해 묵상하는 가운데
하느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해 주시고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어느 겨울, 저녁 시간에 손님이 왔습니다.
젊은 부부가 사내아이를 데리고 왔는데,
사업에 실패하여 큰아이는 보육원에 맡기고 일자리를 찾아 떠돌고 있다며
4살 된 아이도 맡길 수만 있다면 맡기고 싶다고 하면서 하룻밤 재워달라고 청하였습니다.
낯선 사람이었지만 아기가 안쓰럽고, 마침 빈방이 있어서
잠자리를 준비하고 아이를 맡길 곳을 이리저리 알아봤는데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금일봉을 주고,
다음 날 다시 연락을 취할 것을 부탁하고는
점퍼와 목도리를 둘러 주고는 보냈는데 마음이 아팠습니다.
다음날 옆 본당 신부님으로부터 문자메시지가 와서 확인해 보니
제가 만난 분이 틀림없어 보였습니다.
밥을 사주고 여관에서 잠을 재우고 돈을 얼마 주고 보냈지만,
이대로 둬야 하느냐는 문자였습니다.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다음 날 다른 지역의 성당에서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들이 신부를 속이는 것인지, 신부들이 그를 신뢰하지 못하는 것인지?
어찌 되었든,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천사를 만나진 못하더라도
도움을 매몰차게 거절하지 못하는 신부님들이었습니다.
사실 신부가 이럴 때 곤란함을 느낍니다.
알면서도 속고, 모르면서도 속고, 이래서 속고 저래 속고
그래도 때가 되면 깨우칠 날이 오겠지?
나를 속여도, 다른 사람에게는 피해를 주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기도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걸인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요?
그를 무시하고 지나치진 않나요?
예수님처럼 그를 바라보고 있나요?
도움의 손길을 건넬 때, 그의 눈을 보나요?
그의 손을 잡아 그의 온기를 느껴본 적이 있나요?...
착각하지 맙시다. 자선은 단순히 무엇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선을 베풀 때 가장 큰 은총을 받는 이는 바로 그 손을 내민 사람입니다.
그 순간, 주님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게 되는 은총을 받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손님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하기도 하였습니다.”(히브리13,2) 하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5,42).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6,38).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축복해 주는 이는 자기도 흡족해지고,
마실 물을 주는 이는 자신도 흠뻑 마시게 됩니다’(잠언11,25).
받기 위해 준다면 참사랑이라고 할 수 없지만,
기회가 되면 지혜롭게 베풀어야 합니다.
자선은 이웃을 구체적으로 돕는 행위이지만
내 자신의 영생을 보장받는 것이기도 합니다.
“자선으로 씨를 뿌릴 때 거기서 거두는 열매로
천국의 곳간이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성 베드로 클리솔로그).
그러므로 이웃의 처지를 헤아리고 그들에게 도움을 줌으로써
그들에게 힘과 위로가 되어 주시고 동시에 영생의 복을 오늘로부터 누리시길 바랍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루카3,8)고 한 요한에게 군중이 묻습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루카3,10).
세리도, 군인들도 “그러면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같은 물음을 던졌습니다.
그에 대한 대답은
‘옷을 두 벌 가진 이는 못 가진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다른 이와 나눠야’ 하며,
세리는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말 것’이며
군인들도 ‘갈취하지 말고 자신의 봉급으로 만족하라’고 했습니다.
결국 자기 분수를 알고 분수에 맞게 처신하되
베푸는 삶, 정의로운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법을 잘 몰라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면 누구든지 지금 당장 실천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내리는 계명은
우리가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거나 멀리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신명 30,11-13참조).
여러분은 오늘 성당에 오시면서 거울을 보고 몸단장을 하고 오셨을 것입니다.
오늘뿐 아니라 수시로 거울을 봅니다.
그리고 무엇이 묻거나 잘못되었으면 바로 고칩니다.
저도 거울을 자주 봅니다.
아마 얼굴에 무엇이 묻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다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은 어디에 비춰봅니까? 거울에 비춰보면 보입니까?
우리 영혼의 상태를 거울에 비춰보면 그 상태를 낱낱이 볼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의 상태, 영혼의 상태를 비춰보는 거울은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이 우리 ‘영혼의 거울’입니다.
야고보서 1장21절 이하에 보면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사실 누가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그는 거울에 자기 얼굴 모습을 비추어 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자신을 비추어 보고서 물러가면, 어떻게 생겼었는지 곧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완전한 법 곧 자유의 법을 들여다보고 거기에 머물면,
듣고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실천에 옮겨 실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기의 그 실행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영혼의 거울인 성경 말씀에 나를 비춰보고 잘못되었으면 바로 고쳐야 합니다.
“저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어서
그 답을 얻었으면, 그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그대로 하면 축복이 주어지고, 행복해 집니다.
성경을 통해 ‘가진 것을, 먹을 것을, 나누어 주어라’.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용서하고 자비를 베풀어라’ 하는 말씀을 들었으면 그냥 넘어가지 말고
기도하면서 행동으로 옮겨야 하겠습니다.
어영부영, 우물쭈물, 할까말까? 망설일 수 없습니다.
오늘 2독서 말씀입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4,6-7).
주님의 말씀을 들었으면 그대로 행하십시오.
그리하면 반드시 행복해질 것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어느날 놀부 집에 스님께서 시주를 받으러 갔습니다.
그런데 코웃음을 치며 거절하였습니다.
그래서 스님이 눈을 감고 불경을 외었습니다.
네가 나를 외면 해도 나는 너에게 복을 빌어주마! 하고
“가나봐라 가나봐라 가나봐라”.
이 소리를 듣고 있던 놀부가 질세라
“주나봐라, 주나봐라. 주나봐라” 하였답니다.
지나가던 부인이 그 모습을 보고 “잘해봐라 잘해봐라 잘해봐라”했습니다.
마침 고승이 지나가게 되었는데
“웬만하면 주지그래. 웬만하면 주지그래. 웬만하면 주지그래” 하였답니다.
@기회가 되면 언제든지 민첩하게, 그리고 후회 없이 주십시오!
“자비는 결코 강요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조용히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하늘에서부터 저 낮은 곳으로 떨어져 내릴 뿐이다”(세엑스피어).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부주임 신부님이 새로운 미용실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장소는 시온마켓 2층이라고 했습니다.
시온마켓은 자주 갔었고, 2층에 있는 미용실도 금세 찾을 것 같았습니다.
조금 여유 있게 올라갔는데 20분을 돌아도 미용실을 찾지 못했습니다.
부주임 신부님한테 전화했습니다. 부주임 신부님이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시온마켓 2층은 미국 몰하고 연결되어 있어서 그리로 가면 찾을 수 없다고 합니다.
다시 내려가서 한국 몰 쪽으로 올라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다행히 약속 시간 전에 미용실에 도착했지만 당황했습니다.
미국 몰하고, 한국 몰하고 입구가 다른데 급한 성격에 미국 몰로 올라가서 그런 실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부주임 신부님과의 통화로 약속 장소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봉성체를 가면서 안타까운 사연을 들었습니다.
10년 전에 뇌출혈로 쓰러진 자매님이 곧 회복되어서 퇴원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다리가 아파서 누워있었고, 사정이 있어서 재활 치료를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10년 세월이 흐르면서 이제는 근육이 약해졌고, 걷지 못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봉성체를 마치고 자매님에게 앞으로 남은 날들이 많은데
계속 이렇게 누워있으면 자매님도, 가족들도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재활 치료를 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자매님과 가족들은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에게 어떻게 해야 하느님께로 갈 수 있는지 묻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군중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자선을 베풀라고 이야기합니다.
세리들에게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 정직하게 살라고 이야기합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이익을 취하지 말라고 합니다.
군사들에게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힘을 부당하게 사용하지 말라고 합니다. 무력은 적에게 사용하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의 거침 없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의 당당함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의 뜨거운 열정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이 오시기로 한 ‘메시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우리가 하느님께 갈 수 있는 길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겸손’입니다. 이웃에게 나누는 것, 하느님과 형제들 앞에 정직한 것,
정의를 실천하는 것, 겸손한 삶이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할 것입니다.
‘당랑거철(螳螂拒轍)’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자신의 처지와 분수를 모르고 거친 세상과 다투려는 사람입니다.
말의 의미처럼 작은 사마귀가 자신의 앞길을 막는다고 수레 앞에서 싸우려는 것과 같습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하지 않는데 김칫국 먼저 먹는 사람도 이와 비슷합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깨려는 사람을 말하기도 합니다.
‘당랑거철’의 고사는 결국 수레를 모는 사람이 사마귀를 피해서 갔다고 이야기합니다.
사마귀의 용기를 가상히 여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은 어쩌면 무모한 것처럼 보이는 ‘당랑거철’이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외친 세례자 요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신 예수님,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 모진 박해를 견디면서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은
모두 거대한 권력에 맞섰던 작은 촛불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의 외침이 있었기에 우리는 재물, 권력, 명예라는 ‘틀’을 벗어버리고
나눔, 희생, 사랑이라는 새로운 ‘틀’을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영원한 생명을 꿈꿀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털어내고 겨울을 준비하는 나무를 봅니다.
앙상한 가지만 남았습니다. 푸른 잎들은 모두 떨어져 버렸습니다.
만일 나뭇잎들이 떨어지지 않고 가지에 붙어있다면
나무는 긴 겨울을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나무들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생존의 지혜를 터득한 것입니다.
긴 겨울을 견딘 나무는 봄이 오면 새로운 잎이 생기고,
여름에 뜨거운 태양을 마음껏 받아들여 열매를 맺고, 나이테 하나를 더 만들어 냅니다.
오늘 대림 제3주일은 자선 주일입니다.
자선은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자선은 신앙인이라면 꼭 해야 하는 의무입니다.
나누는 것은 많이 가진 사람만의 몫이 아닙니다.
나누는 것은 많이 배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구원은 특정한 사람만이 받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께 의지하는 사람만이
나눌 수 있고, 그 안에서 기쁨을 얻을 수 있고
그런 사람만이 우리에게 구세주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저희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의 전례는 모두가 기쁨에의 초대의 내용이다.
이러한 기쁨을 주제로 하므로 기쁨의 주일, 장미 주일이라고 한다.
이러한 날 우리는 우리보다 어렵고 고통당하는 이웃을 생각하는 자선 주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주님께서 우리 안에 오실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의 내적인 변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기쁨의 동기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게 된”(요한 1,14) 강생의 신비에서 나오는 것이며,
하느님께서 항구히 우리 가운데 계시며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데 있다.
이 때문에 요한 세례자는 자기 뒤에 오시는 분에 대하여 준비시키고 있다.
복음에서 요한 세례자는 엄격한 권고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시키면서 자신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기쁨의 동기를 부여하고 있다.
오시는 분은 요한 세례자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16절)으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16절) 분으로 표현하고 있다.
즉, 구원을 베푸시는 그분을 맞이하는 것이 기쁨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한편 “손에 키를 드시고”(17절) 심판하시는 심판관이시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심판이란 말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그리스도께서 구원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는 의미이다(참조: 요한 3,17).
세례자 요한의 설교는 엄한 윤리적인 경고를 포함하고 있지만,
사실은 구원이 우리에게서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하는 조그마한 일들 안에 그리고 많든 적든 우리가 가진 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능력 속에 있다고 한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11절).
군인이든 세리이든 어떤 사람이건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올바르게 행동하느냐, 특히 사랑으로 행동하느냐 하는 것이다.
즉 우리는 매일 행동하고 말하는 가운데
항상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고 가르침으로써 마음을 밝혀주고 있다.
“회개”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회개는, 매 순간의 생활에서 자신의 가장 좋은 것을 드러냄으로써
순수하게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누구이든 간에 무슨 직업을 가졌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살며 활동하는 그곳에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즉 그분의 대림은 바로 우리의 삶 속에 있는 것이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 같은 사실이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다.
필립비서는 처음부터 함께 사는 기쁨, 복음을 전하는데 협력하는 기쁨,
그리고 믿음에 관한 기쁨 등에 대한 주제가 계속 이어진다.
(필립 1,4.18.25; 2,2.17.18.28.29; 3,1; 4,1.4,10 참조).
그것은 주님께서 오심이 내가 당하는 고통 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고통 안에 이미 와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겪는 육체적이든 영적이든 고통 중에 있는 바로 그때가
내 옆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느낄 수 있는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고통과 궁핍에 놓일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필립 4,6) 아뢸 때,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필립 4,7)가
우리의 마음과 생각 속에 스며든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쉽게 얻어지는 기쁨이 아니다.
그것은 극적인 사건이나 고통을 통해
그리고 형제들에게 자신을 내어주기 위해 자신을 잊어버릴 줄 아는 능력에서 생겨난다.
특히 고통 속에서 우리는 그때를 바로 은총의 때로 체험하는 경우가 많다.
그때가 은총의 때이기 때문에 고통의 신비라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우리는 기쁨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세례를 받고
성당에는 다닌다고 하여도 마음에 와닿는 것이 없다는 말만 한다.
성당에서 또 피정에서 아무리 아름다운 강론을 많이 듣는다고 하여도
그래서 그 순간 우리의 마음을 온통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고 해도
구체적인 나의 삶 속에서 그것이 의미를 갖고 실천되지 못하면
우리의 귀는 한없이 수준이 높아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우리의 신앙생활은 매일 똑같은 모습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이다.
이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이 기쁨을 나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기쁨이나 행복은 다른 사람이 만들어줄 수 없다.
오직 자신만이 만들어 누릴 수 있는 것이다.
항상 기쁨을 만들려 노력하고 그 기쁨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눌 수 있는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마더 데레사는 이렇게 말한다.
“기쁨은 기도이고 굳셈이고 사랑이며 사랑에 대한 갈증이다.
기쁨으로 우리는 생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기쁘게 베푸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기쁘게 베푸는 분은 더 많이 베푸십시오.
하느님께 그리고 사람들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의 감사 표시의 방법은
모든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은 마음이 사랑으로 타오를 때 자연히 생겨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기쁨을 망각하게 할 수 있는 그 어떤 슬픔도
여러분 안에 자리 잡지 못하게 하십시오.”
물의 세례를 받지 않고 불의 세례를 받으면 벌어지는 일
전삼용 요셉 신부
어떤 사람이 그릇 빚는 노인의 숙달된 솜씨와
작업대 위에 얹혀있는 갓 빚은 옹기들에 대하여 감탄하면서 감상했습니다.
모두가 근사하고 멋있는 모양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잠시 후 그는 옹기장이의 그 모든 수고가 헛되이 끝나 버린 것을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옹기들이 풀무 불에 들어갔을 때
일부 그릇들이 금이 가고 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왜 어떤 것들은 금이 가고 깨어지는지 알기 위해
옹기장이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하였습니다.
“같은 흙을 사용하면서 당신이 어느 것은 잘 빚고 어느 것은 못 빚었습니까?
아니면 어느 것에다가는 더 수고를 기울이고, 어느 것에는 수고를 기울이지 않았습니까?
그것도 아니면 그릇 만드는 과정에서 어느 것에는 어떤 재료가 부족했습니까?”
옹기장이는 다음과 같이 그에게 대답 하였습니다.
“옹기가 손상되는 이유는 그 그릇들이 불에 견딜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물의 세례와 성령의 불의 세례를 말합니다.
물의 세례란 무엇일까요?
그들은 모두 세례자 요한에게 몰려와서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라고 물어봅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들에게 올바른 삶을 일일이 가르쳐 줍니다.
이것이 물의 세례의 열매입니다.
‘그리스도께 파견된 자에게 순종하려는 의지’.
이것이 없이는 그리스도의 불의 세례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루르드에서 성모님은 베르나데트를 당신 대리자로 선택하셨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베르나데트에게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라고 묻지 않았다면
그들이 베르나데트가 손으로 파서 솟아 나오는 기적수의 효과를 볼 수 있었을까요?
믿음이 없어서 그 물을 마셔도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성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신 교회의 능력을 믿지 않고
교회에 순종하려는 의지가 없는 사람에게
성체성사의 효과가 나타날 수 있을까요?
교회를 믿지 않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밀떡 안에 하느님께서 들어오게 될 것임을
믿지 못하게 되고 그러면 성체성사를 하더라도 효과가 없습니다.
효과가 없는 것뿐만 아니라 가리옷 유다처럼
그 불을 감당할 수 없어 몸이 터져버릴 수 있습니다.
전에 하루도 빠짐없이 뽀뽀하고 자려는 의지로 80년 결혼생활 동안
한 번도 싸우지 않은 부부의 사례를 말씀드렸습니다.
이러한 의지 없이 결혼이라는 불의 세례는
오히려 두 사람에게 피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신 교회에
먼저 순종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체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준비입니다.
1943년, 미시시피의 한 감옥에서 클로드 뉴먼이라는 청년이 사형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죄목은 매복하여 한 남성을 총으로 살해한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사형을 앞두고 그는 다른 죄수의 목에 걸려 있는 메달을 보게 되었습니다.
클로드는 그 메달이 무엇인지 물었고, 그 죄수는 화를 내며 메달을 땅바닥에 던지며 말했습니다.
“가져가라.”
그 메달은 기적의 메달이었고,
클로드는 그것이 무엇인지 또는 누구를 상징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지만,
메달을 집어 기 목에 걸었습니다.
그날 밤, 그는 손목을 누군가가 건드리는 것 같은 느낌에 잠에서 깼습니다.
그리고 깨어난 그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빛나는 모습을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그 여인은 두려움에 떨던 클로드를 진정시키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어머니로 모시고, 내가 너의 어머니가 되길 원한다면,
가톨릭 신부를 부르도록 하여라.”
클로드는 자신이 유령을 본 것으로 생각하며
곧바로 가톨릭 신부를 불러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튿날 교정 사목 신부인 로버트 오리어리가 클로드를 만나러 왔습니다.
오리어리는 문맹이었던 클로드가 이미 성모님께 배워
고해성사와 성체성사의 의미를 명확히 이해하고 있고
자신이 개인적으로 성모님께 서약했던 내용까지 알고 있음에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클로드는 세례를 받고 사형당했지만,
기쁘게 주님 곁으로 갔고 이후 기적과 같은 일들도 많이 일어났습니다.
성모님은 당신을 유령으로 여기는 클로드를 사제에게 보내 당신에 대해 더 알게 하시고
교회를 통해 성사에 참여하며 당신께 나아오기를 바라셨습니다.
현대의 세례자는 가톨릭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안에 이미 오셨는데 왜 나는 기쁘지 않은가?
박재친 안셀모 신부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세례자 요한은 오실 참된 메시아 예수님을 향하여 겸손한 자세로 자신을 낮춥니다.
겸손과 비움은 참된 영적 기쁨의 원천입니다.
예수님을 마음의 중심에 둘 때, 우리는 그 어떤 고난에도 흔들리지 않고
내적 기쁨과 평화 가운데 머물 수 있습니다.
대림 3주, 기쁨의 주일인 오늘,
진정 나는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기쁨을 찾고 있는가,
아니면 세상이 주는 쾌락과 즐거움을 쫓으며 살고 있지는 않은가
반성하며 주님의 자비를 청하도록 합시다.
찬미 예수님!
대림절은 감사와 기쁨, 그리고 나눔을 통해 이미 오신 주님을 만나는 시기입니다.
대림 3주 세 번 째 분홍색 초가 밝혀졌습니다.
기쁨 주일인 오늘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시기 위해
인간이 되어 오시는 주님께 참된 기쁨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우선 그분 곁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분의 사랑을 느끼고 체험하기 위해
그분 곁에 머물며 기도하는 대림시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느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임하게 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이 기쁜 소식을 다른 이웃들에게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삶으로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나누며 그들을 기쁘게 해 주는 것
역시 이 대림 시기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도래한 하느님 나라를 믿고 받아들이며
하느님과 사람들에게 기쁨이 되어 주는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되는 것입니다.
자매 형제 여러분,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신약의 기쁨은
구약에서 나오는 하느님 체험에 대한 기쁨과 구원에 대한
기쁨을 넘어서는 세가지 중요한 차이 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모든 기쁨의 원천은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믿고 따름으로써
그분 나라에서 샘솟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고난을 통해 얻는 기쁨입니다.
산고의 고통 가운데 아기가 태어나듯이,
십자가의 고통 가운데에서 부활의 희망을 보게 되듯이,
우리는 일상의 고통 한가운데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종말론적인 기쁨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셨고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시리라는
희망에서 오는 초월적인 기쁨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샘솟는 이 기쁨,
고통을 넘어 모든 것 안에서 주님을 체험할 수 있는 이 기쁨은
세상의 만족이나 즐거움과 비교될 수 없는 기쁨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참된 영적 기쁨보다는 세상이 주는 쾌락과 즐거움에 빠지기도 하고,
현실의 위안만을 갈망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자신의 만족을 위해 다른 사람을 유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적 기쁨이 없는 쾌락의 끝은 허무임을 깨닫게 됩니다.
쾌락은 순간 우리를 흥분시키지만 결국 모두를 자멸시키고 맙니다.
박완서의 <아주 오래된 농담> 중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우리 사이에 쾌락은 있었지만 기쁨은 없었다.
쾌락은 자꾸 탐하면 물리게 되어 있다.
우린 다 같이 지쳐가고 있었다.
우리에게 결핍된 것은 기쁨이었다.
피고 지는 꽃처럼,
퍼내고 나면 다시 솟는 샘물처럼,
새로 태어나는 기쁨이 우리 사이엔 없었다.”
세상이 주는 쾌락은 우리를 고갈시키지만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우리를 충만하게 합니다.
세상이 주는 쾌락은 채워지지 않는 공허와 불안을 남기지만
주님께서 주시는 영적 기쁨은 마르지 않는 샘처럼 우리 맘에 평화를 줍니다.
지금 나는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기쁨을 맛보기 위해 우리는 인내해야 합니다.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할 것을 구별하고 견디어 내야 합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인내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하기 위해서는
자신 안에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비워야 하는지 묵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군중과 세리, 군인에게
各者에 맞는 방법으로 참된 기쁨을 위한 회개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지금 나의 삶의 자리에서 나누어야 할 것, 만족해야 할 것들을 찾아보았으면 합니다.
지금 나의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에서 쾌락을 찾고 있다면
그것이 나에게는 무엇인지 찾아보아야 합니다.
육체적 쾌락, 심리적 쾌락, 영적인 쾌락 등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하느님께로부터 참된 기쁨을 찾을 수 있도록 이런 유혹들에 빠지지 않도록
그리고 다른 사람을 이런 유혹으로부터 지켜 줄 수 있도록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참 이것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불의 정화가 필요한가 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우리 삶의 주인이요 우리의 참된 기쁨의 원천이심을
겸손 되이 고백하고 우리의 전인적인 변화를 위해 자신의 전부를 성령께 맡겨 드리고,
우리의 악습을 불로 정화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세례는 물의 세례이지만,
오시는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먼저 우리의 세례는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주님의 은총 가운데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 딸이 되는 세례입니다.
예수님의 성령의 세례로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로 구원을 받았으며
그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 다음에 세례자 요한이 언급한 세례는 무엇이겠습니까?
“불의 세례!”
불의 세례는 마지막 날 받게 될 심판을 상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좀 더 영적인 의미에서 성령의 세례는
우리를 변화시켜 새 사람이 되게 하는 세례입니다.
불의 세례는 우리의 외적이고 거짓된 자아를 모두 태워버려
온전한 영적 재탄생을 하게 하는 세례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현실에 안주하며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오늘을,
자신이 만들어 놓은 감옥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성령의 불이 내릴 때,
우리는 완전히 다른 이가 됩니다.
주님의 밝은 빛이 불같은 사랑으로 우리를 뜨겁게 할 때,
“내 안에 있는 나”는 온전히 사라지고 “주님 안에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 앞에 온전히 발가벗겨진 나,” 이것이 바로 “나의 영적인 재탄생”입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발가벗고 우리 곁에 오셨듯이,
우리 역시 나에게서 죽고 주님 안에서 새롭게 태어날 때,
아기처럼 순수한 영적 의식으로 변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매 형제 여러분,
우리가 진정 영적인 새로운 탄생을 맞이할 때
우리 안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내적 기쁨이 샘솟게 됩니다.
사랑이신 예수님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기쁨의 참된 원천은 하느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이요,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기쁨이십니다.
그분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우리의 기쁨은 더욱 커지게 될 것이고
결국 하느님 안에서의 완전한 기쁨의 삶이 바로 우리의 구원인 것입니다.
이제 성탄절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함께 모인 여러분들 모두에게 숙제를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성탄을 보다 기쁘게 맞기 위해 성탄 전에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는 일을 한가지씩 했으면 합니다.
지금 나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리고 그가 혹은 그녀가 참으로 기뻐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나는 지금 얼마나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사랑이신 하느님,
이 대림 시기에 있는 그대로의 저희 자신을 받아들이고
겸손한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오신 당신의 그 무한한 겸손을 본받게 하소서.
주님,
저희에게 당신의 뜨거운 사랑의 불을 놓아주시어
날마다 당신 사랑으로 새롭게 태어나 기쁨과 감사로 살게 하소서. 아멘.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