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태조 이성계 설화 설화 : 정치적 선전내용이 대부분
이성계 설화(李成桂 說話)는 고려의 무신이면서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에 관한 설화로 『조선왕조실록』과 『대동야승』·『동사강목』·『연려실기술』·『성호사설』· 『용비어천가』 등의 자료에 상세하게 전하는 신화이다.
줄거리
고려 후기로 들어오면서 왜구는 고려를 침략하여 지리산에 진을 치고 노략질을 일삼았다. 조정에서는 이성계와 퉁두란에게 왜구를 토벌할 것을 명하였다. 일본군 장수 아지발도는 나이가 어린데도 무예가 뛰어나고 두꺼운 갑옷과 투구를 쓰고 있어서 화살을 쏘아도 잡을 수가 없었다.
이성계는 아지발도를 잡으려고 며칠째 황산에서 기다리는데, 아지발도는 꼭 황산 앞에서 자기들 진지로 되돌아가 계속 실패만 하였다. 나중에 안 이야기지만, 아지발도는 조선을 침략하기 전에 누이로부터 조선의 황산을 조심하지 않으면 죽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하루는 아지발도가 자고 있는데, 아직 새벽이 되지도 않았는데 닭이 울었다. 아지발도는 닭이 우니까 새벽인가 싶어 일어나 고남산 쪽으로 올라갔다. 이성계는 ‘옳다!’ 싶어서 마침 그곳을 지나가는 할머니를 시켜서 아지발도 앞으로 보냈다.
아지발도가 “여기 어디에 황산이란 곳이 있느냐?” 하고 물으니 할머니는, “여기엔 황산이란 곳이 없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그랬더니 아지발도는 안심하고 계속 앞으로 걸어왔다.
이윽고 날이 완전히 밝을 무렵 아지발도가 황산으로 올라오므로 퉁두란이 화살을 쏴서 아지발도의 투구를 맞추었다. 아지발도는 땅에 나뒹굴며 입을 벌렸다. 이때 이성계가 아지발도의 목구멍에 활을 쏘아 아지발도를 죽였다. 그래서 아지발도는 황산에서 많은 피를 흘리고 죽었다. 아직도 황산다리 아래 바위가 벌건데, 사람들은 그것이 아지발도의 피라고 하면서 그 바위를 피바위라고 부른다. 이성계가 아지발도를 죽인 것을 계기로 고남산은 태조봉이라고도 불린다.
태조 이성계가 미시(微時)에 함흥에서 친상을 당하였으나 좋은 지관을 만나지 못하여 아직 산지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 종아이가 나무를 하러 산으로 갔다가 길에 앉아 쉬던 스님과 상좌를 만났는데, 그 중 스님이 말하길 “저기 아래 것은 장상(將相)이 날 자리에 불과하나 위의 것은 당세에 왕후(王侯)가 날 자리”라고 귀띔같이 하는 말을 듣게 되었다.
종아이가 빨리 달려가 태조에게 고하니, 태조는 즉시 말을 달려 10여 리를 쫓아갔다. 이윽고 두 사람을 만난 태조는 말에서 내려 공손히 절하고 자신의 집으로 가기를 요청하였다. 처음에는 사양하던 두 사람도 태조의 거듭된 간청에는 어쩔 수 없어 동행을 허락하고야 말았다. 그리하여 두 사람을 자신의 집으로 모신 태조는 정성을 다하여 융숭히 대접한 뒤 친상을 당한 자신의 처지를 말하고 산지를 보아 줄 것을 청원하였다.
스님은 “구름같이 떠돌아다니는 중이 무슨 산술(山術)을 알겠습니까?” 하고 거절하였으나, 상좌가 “남의 성의를 차마 저버릴 수 없으니, 저번 그 자리를 가리켜 주면 좋겠습니다.”고 권유하여, 결국 스님도 왕후의 혈을 일러 주고 가 버렸다. 그곳이 환조(桓祖)의 능침인 정화릉 터였으며, 스님은 나옹(懶翁), 상좌는 무학(無學)이었다고 한다.
이성계가 등극하기 전에 꿈에 신인(神人)이 내려와 "그대의 자질은 문무를 겸비했으며 덕망과 식견이 있어 백성이 촉망한 지 오래되었으니 이 자를 가지고 다스리라.”하며 금척을 주었다.
옛날에 무예가 뛰어났지만 아직 벼슬자리에는 등용되지 못한 어떤 장수가 있었다. 그에게는 천하 명마가 한 필 있어 언제나 그 말을 타고 산천을 달리며 무예를 닦았다. 자기 말의 뛰어남에 자부심을 느낀 장수는 말의 능력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 화살과 말의 빠르기를 겨루는 내기를 하였다.
장수를 태운 말이 목적지에 도착했으나 화살이 보이지 않으므로, 장수는 말이 화살보다 늦은 줄로 알고 화가 나서 말의 목을 베었다. 바로 그 순간 화살이 날아와 꽂혔다. 장수는 자신의 실수로 아까운 명마를 잃게 되었다고 후회하면서 말의 무덤을 세워 주었다.
문자 점(文字占)으로 이에 관하여 성공과 실패, 또는 해석의 다양성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다. 한문 글자 하나를 그대로 해석하거나 또는 분해하여 점을 치는 파자점(破字占)과, 어구나 시구로 점을 치는 것이 있다.
대표적인 문자의 파자점이 전해오는데 ‘문(問)’ 자를 짚은 이성계는 “問(문)은 좌군우군(左君右君)하니 인군지상(人君之相)이라.”고 하여 어느 편으로나 임금 ‘군(君)’ 자이므로 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같은 사주(四柱), 곧 이성계와 생년월일시가 같은 거지에게는 “문(問)은 문중유구(門中有口)하니, 또는 괘구어문(掛口於門, 문 안에 입을 걸었다는 뜻)하니 걸인지상(乞人之相)이라.”고 하여 대문에 입을 내밀고 사는 거지 팔자라고 예언하였다 한다.
사제 간에 실수한 파자점이야기로, 제자는 산중의 밥상 음식을 ‘前行 後行 左右行’이라 하니 ‘게’라고 풀었는데, 스승은 산중에는 게가 없으니 ‘가재’라 풀고, 또 ‘巳(사)’ 자를 제자는 뱀은 기니까 국수 음식으로 풀었는데, 스승은 한밤중에 뱀이 똬리를 틀고 있으니 동그란 밀전병으로 푼 예도 있다.
꿈에 나타난 광경이나 문자를 해석하는 해몽자점(解夢字占)의 예를 들면, 충청남도 논산시 부인면(지금의 부적면)의 유래에서, 이성계의 집이 무너져서 서까래 세 개가 포개진 꿈을 꾸고 점을 잘 치는 부인에게 물으니, 바로 왕이 되는 꿈으로 등극하겠다고 해몽하여 그대로 되자 지명을 부인면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꿈을 문자로 만들어서 점을 치는 과정을 거친 예로 함경남도 안변에 있는 석왕사(釋王寺)의 유래담도 같은 내용인데 자점을 말한 사람이 무학대사(無學大師)라는 것이 다르다.
의미
이성계 설화는 말무덤 설화부터 시작하여 이성계를 신화적 능력을 갖춘 위대한 인물로 묘사한 설화는 그의 빼어난 능력이 왕조의 창업에 이르게 되었으므로 조선 왕조 건국이 당연하다는 논리로써 정통성을 확보하자는 정치 선전의 일환으로 창작된 것들이다. 이와 같은 내용의 설화들은 의도적으로 창작되고 거듭 전승되면서 폭넓게 수용된다. 그리고 건국의 시조들을 찬양하고, 조선왕조의 창업을 합리화하자는 내용의 설화를 노래로 창작한 것이 바로 『용비어천가』이다.
이성계는 고려의 영웅들처럼 말 잘 타고 활 잘 쏘며, 용맹이 뛰어난 무장이다. 그가 남북 외적과 싸워 나라를 구출한 활약상을 다룬 대목이 상당히 많다. 특히, 왜구를 토벌할 때의 광경을 묘사한 대목이 가장 박진감이 넘치며 흥미롭다. 설화마다 이성계의 용맹성과 뛰어난 활 솜씨, 현명함을 강조한다.
말을 타고 석벽을 올라가 왜구를 무찔렀는데, 다른 사람이라면 말을 몇 번 뛰어오르게 하여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한다. 뛰어난 활솜씨를 알리는 여러 각 편들은 주로 왜장 아지발도와의 싸움에서 상세히 묘사된다.
‘인월’·‘피바위’ 등의 지명은 이성계의 신통력과 관련되어 있다. 패주하는 적을 끝까지 추적하지 않고 살려 주는 덕장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주로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의 행적을 다루면서, 외적을 물리치고 민족을 위기에서 구출하였기에 새 왕조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정통성을 확보하였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
전라북도 남원시 산동면 이곡리에서 운봉의 황산대첩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 「아지발도 이야기」는 이성계의 남원 황산대첩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운봉 일대에는 황산대첩과 관련한 지명이 많이 유래하고 있다. 「아지발도 이야기」는 이성계의 놀라운 활솜씨와 이성계가 영계(靈界)의 도움을 받는 비범한 인물이었음을 전하는 이야기로, 역사적 사실에 신비성을 가미한 것으로 전래되고 있다.
이성계 설화중에 이태조구산지설화(李太祖求山地說話)는 조선 태조의 선조 묘지에 관련된 설화로 신이담(神異譚) 중의 풍수담(風水譚)에 속하는 설화 유형의 하나이다. 차천로(車天輅)의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 및 작자 미상의 『자경지함흥일기 慈慶志咸興日記』 등에 실려 전한다. 이 설화는 이성계의 조선조 건국을 합리화하려는 목적의식에서 꾸며 낸 이야기일 것으로 추측된다. 풍수설을 빌려 조선조의 건국이 결코 우연이 아닌 천명에 의한 것임을 강조하려 한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 있는 일은 『오산설림초고』보다 약 반세기 앞선 중국 명나라의 왕문록(王文錄)의 『용흥자기』(龍興慈記)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명태조인 주원장(朱元璋)의 선조 묘지에 얽힌 이야기로 수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민간에서는 이태조의 부친과 명태조의 부친이 함께 백두산에서 묘지를 구하였다든가, 또는 조선 출신인 주원장과 이성계가 각각 중국을 치러 나가다가 한 주막에서 만나 같이 술을 마셨다는 전설들이 전하는 것을 보면, 위 두 설화의 유사성도 무슨 곡절이 있을 듯하다. 사실로써 살핀다면 중국 남방 출신인 주원장과 함경도 출신인 이성계가 함께 술을 먹었을 리 없으며, 더구나 두 사람의 부친이 함께 묘지를 찾았을 리도 없다.
이와같은 설화는 금태조나 청태조가 모두 조선계였으며, 이성계와 주원장이 똑같이 한미한 집안 출신으로서 거의 동시에 국가를 창건하였다는 점에서 유추하여, 자연 이태조와 명태조를 함께 놓고 보려는 의식에서 생겨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두 기록의 유사성은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겠지만, 위와 같은 속신에서 비롯된 유사성은 전국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편 고려시대에 씌어진 『서운관비기』(書雲觀秘記)라는 책에 “이씨가 한양에 도읍하리라.”는 비기설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하던 중 한양 삼각산 아래 이곳에 오얏나무가 무성하다는 말을 듣고 이씨(李氏)가 흥할 징조라 여겨 오얏나무를 베는 벌리사(伐李使)를 보냈다고 하는데, 이로부터 이곳을 벌리(伐李)라고 칭하다가 번리(樊里)가 되었다고 전하면서 현재 서울특별시 강북구 번동의 지명 유래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