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12월 15일 대림 제3주간 월요일
제1독서 : 민수 24,2-7.15-17
복 음 : 마태 21,23-27
23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서 가르치고 계실 때,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24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25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하였다.
“‘하늘에서 왔다.’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우리에게 말할 것이오.
26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 하자니 군중이 두렵소.
그들이 모두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니 말이오.”
27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오늘의 묵상>
김재덕 베드로 신부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예수님의 물음에 의논합니다.
“‘하늘에서 왔다.’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하고 우리에게 말할 것이오.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 하자니 군중이 두렵고.
그들이 모두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니 말이오.”(마태 21,25-26)
이들의 마음 안에는 ‘다른 이들에게 받게 되는 평가’와 ‘체면’에 대한 생각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모르겠소.”(21,27)
하느님을 의식하는 신앙생활이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를 중요하게 여기면 하느님 앞에서 진실함을 잃어 버리게 됩니다.
‘이 죄를 고백하면 신부님께서 나를 어떻게 생각하실까?’라는 생각 때문에
용서를 청해야 할 때 “모르겠소.”라고 대답해 버립니다.
하느님을 찾아야 할 순간에도, 그분의 말씀이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순간에도,
한사코 “모르겠소.”라고 대답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합니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21,27)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며 “모르겠소.”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예수님게서는 더 이상 하실 말씀이 없으십니다.
만일 신앙생활이 메말라 가고 기도 안에서 하느님 체험이 사라지고 있다면,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을 의식하고 있는지, 아니면 복음에 등장하는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처럼
다른 것들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세상에서 가장 비싼 피자 가격은 얼마일까요?
보통 2~3만 원 정도니까, 아무리 비싸도 10만 원은 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가격인 피자가 있습니다.
2010년 5월 22일에 프로그래머 라스줄로 핸예츠가 1만 비트코인으로 피자 두 판을 산 것입니다.
이것이 비트코인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상거래였습니다.
2024년 12월 현재, 1비트코인은 1억 4천5백만 원입니다.
그렇다면 프로그래머 핸예츠가 샀던 피자의 가격은 1조 원이 넘습니다.
피자 한 판에 7천억 원이 넘는다고 하니 정말 비싼 피자가 아닐까요?
비트코인의 가치가 이렇게 변할 줄 몰랐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미래의 일을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지금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큰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인지를
조금만 미래로 가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의 추억이 소중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어렸을 때는 그 시간을 소중하다고 생각했을까요?
주님의 가치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주님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세상의 것들을 더 윗자리에 놓고 있는 우리입니다.
하지만 먼 훗날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서는
세상 것이 먼저일까요? 아니면 주님이 먼저일까요?
지금 당장은 그 가치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묵상해 보면
자기에게 어떤 가치가 가장 필요한 가치인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서 권한에 관한 질문을 합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즉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소위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철부지들 같아 보이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봤던 것입니다.
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일까요?
권한, 자격을 운운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권한과 자격만을 바라봤던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의 권한, 자격이 아닌,
이 세상 안에서의 권한과 자격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라는 질문에, “모르겠소.”라고 답합니다.
하늘에서 왔다고 하면 왜 믿지 않았냐고 할 것이고,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면
하늘에서 온 사람으로 믿고 있었던 군중들의 질타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가치만을 따지게 되면, 당연히 주님을 알아볼 수 없게 됩니다.
주님의 가치가 자기에게 어떤 결정적 역할을 하는지도 알 수 없게 됩니다.
스스로 자기를 계시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와 묵상이 중요합니다.
주님의 가치를 알고 이 주님과 함께 살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성탄이 곧 다가옵니다. 이제 열흘 남짓 남았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발라암은 신탁을 통해 선포합니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민수 24,17)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권한에 대한 논쟁을 전해줍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이 주님을 두고 저울질을 합니다.
곧 예수님의 성전 정화에 대한 권한을 따집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요?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마태 21,23)
원래 ‘권한’ 혹은 ‘권위’를 말할 때, “권”은 저울을 말한다고 합니다.
저울의 눈금은 어느 것이 딱 들어맞고,
어느 것이 딱 들어맞지 않는 것인지를 판가름해 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저울은 ‘하늘’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저울은 사람의 저울과는 사뭇 다릅니다.
사람의 저울은 물건의 경중을 가려서 판가름해 내지만,
하늘의 저울은 “하늘의 뜻”을 따르고 있는지를 판가름해 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이 주님을 두고 저울질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반문하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마태 21,25)
그들은 자신들의 대답이 가져올 위험을 생각하며 망설였습니다.
그리고는 결국, “모르겠소.” 하고 대답합니다.
“모르겠소.”라는 이 말마디가 가슴을 쿵 내리칩니다.
이는 진실하지도 솔직하지도 못하고, 비겁하고 위선적이고,
눈치 보며 회피하는 계산적인 평소의 나의 말 마디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둠에 가린 제 마음을 질책하십니다.
가려진 거짓을 들추시고, 제 오만함을 꼼짝달싹 못하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죄를 일깨워주십니다.
제가 저 자신의 저울로 예수님을 저울질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는 오늘도 제 자신의 저울로 다른 이들을 저울질하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게 합니다.
사실, 타인을 저울질하다가, 제 자신이 저울질 당하게 됩니다.
은밀히 감추어진 속내가 드러나게 됩니다. 오만함으로 쌓여 있는 속셈이 들통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저울질하는 바로 그 순간, 막상 저울에 올려진 이는
타인의 눈치를 보느라 가려진 제 자신의 위선의 무게일 뿐일 것입니다.
그러니 오만함과 자신의 속셈과 거짓과 위선으로 치장하고 있는 자신을 들여다보고,
이제는 저울 위에 타인을 올려놓기보다 자기 자신을 올려놓아야 할 일입니다.
이제는 남을 저울질하기보다, 자신이 주님의 저울인 “아버지의 뜻”에
합당하게 처신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할 일입니다.
오늘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사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타인의 권한을 따지기보다 그에 대한 나의 사랑을 따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 그에게 나의 사랑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볼 수 있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마태 21,23)
주님!
타인의 권한을 따지기보다
그에 대한 내 사랑의 무게를 따지게 하소서!
타인의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
나의 사랑이 얼마나 필요한 지를 가리게 하소서.
타인을 저울질하기보다
가려진 제 위선의 무게임을 재게 하소서.
저울 위에 타인을 올려놓기보다
오만함으로 쌓여 있는 제 속셈과 거짓을 올려놓게 하소서! 아멘.
주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이스라엘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기적을 베풀고 말씀을 전하시는 예수님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하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반문하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한 후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대답은 ‘눈 가리고 아웅’한 것입니다.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때로는 우리도 진실을 외면할 때가 있습니다.
아닌 줄을 알면서도 나의 이기심과 어리석음에 지배당할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는다고 하면서도 나의 뜻을 굽히지 않을 때가 있고,
때로는 내 뜻을 주님의 뜻 인양 내세우기도 합니다.
주님의 뜻을 헤아리고 내가 그분에게 맞춰야 하지만 합리화 거리를 찾습니다.
주님을 나의 들러리로 세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생각도 그분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분 앞에는 말 한마디도 숨길 수 없습니다”(집회42,20).
“세상에서 사람이 하는 일에는 두 가지가 있을 뿐인데
하나는 주님의 일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의 일”(이현주)입니다.
신앙인으로써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사람의 일이 앞서는 것을 보면 아직도 믿음의 길이 멀기만 합니다.
빛으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면서 사람의 일을 줄이고
하느님의 일을 늘리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께서 주신 소명과 권한에 모두를 걸었듯이
우리도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알고
그 사명에 충실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신자들의 유형이 여러 가지인데
‘백설공주형'이 있답니다.
죄송한 표현이지만, ‘백방으로 설치고 다니는 공포의 주둥이’랍니다.
주님의 말씀을 전하기에 바빠야 하는 데
오히려 남을 흉보고 헐뜯고 욕하는 사람이지요.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원망하고, 불평 불만하며 교만한 '원불교' 신자도 있지요.
그런가 하면, ‘우거지’형도 있습니다. ‘우아하고, 거룩하고, 지성적인’신자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데 기왕이면 ‘우거지 신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회는 2025년을 ‘희망의 희년’으로 선포하였습니다.
서울대교구의 교구장인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님은
2025년 사목 지침으로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이번 희년에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희망의 순례자’로 초대해 주셨습니다.
희년의 목적과 의미는 그저 ‘전대사를 얻는 좋은 기회’에 그치지 않고,
‘구원의 문’인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 만남을 뜨겁게 하는 해로 우리를 초대함에 있습니다.
이 뜻깊은 희년에 예수님과 더욱 깊은 만남을 이어가면서,
‘우리의 희망’인 예수 그리스도를 언제, 어디서나,
모든 이에게 선포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이번 ‘희년 선포 칙서’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에서
‘모든 희년 행사의 근본 요소는 순례’라고 하셨습니다.
‘전통적으로, 순례 여정을 나서는 것은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도보 순례는 침묵, 노력, 단순한 삶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데에 큰 보탬이 됩니다.’라는
교황님의 말씀대로, 순례는 ‘우리 인생이 바로 순례하는 여정’임을 묵상케 합니다.
도보 순례에서 흘리는 땀방울을 통해 우리네 삶에서 땀 흘리는
수고로움의 고귀한 의미도 되새기게 되고, 순례 여정을 함께 하는 우리가
모두 영원한 생명을 향해 시노드 여정을 함께하는 길동무임을 새삼 고맙게 느끼게도 됩니다.
나아가, 도보 순례는 이 세상에서 ‘지나가는 것’과 ‘영원한 것’을 묵상해 보는 소중한 시간이 됩니다.”
‘트렌드 코리아 2025’를 읽고 있습니다.
2025년의 ‘화두’는 ‘지킴과 바꿈’이라고 합니다.
아날로그 시대에는 ‘지킴’이 경쟁력이 있었습니다.
그 경쟁력을 잘 보여준 나라가 일본입니다.
일본은 대기업에 다니던 아들이 시골의 작은 식당을 운영하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식당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일본은 200년, 3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식당들이 많습니다.
일본은 그런 장인 정신으로 제조업을 발전시켰습니다.
한번 기업에 들어가면 평생, 직장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기업도 그런 직원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주었습니다.
1980년대에 일본은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 되었습니다.
한국은 그런 일본을 부러워했습니다. 한국의 문화, 예술, 경제는 일본을 모방하였습니다.
디지털 시대에는 ‘바꿈’이 경쟁력이 있습니다.
지킴으로는 일본을 따라잡을 수 없었던 한국은 과감하게 ‘혁신과 개혁’을 선택했습니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은 ‘아내 말고는 다 바꾸라고 하였습니다.’
디지털의 생태계에서 변화와 혁신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블루오션이 되었습니다.
일본은 아직도 팩스와 도장으로 기업을 운영하는 반면
한국은 전자결재와 인터넷으로 기업을 운영합니다.
일본은 아직도 음반 판매로 음악시장을 이끌어가는데
한국은 음원과 유튜브로 음악시장을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BTS, 유진스와 같은 가수들이 세계 음악시장에서 성공했습니다.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은 아날로그 시대와 디지털 시대를 모두 선도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신비와 하느님과 사람의 아들 관계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영적인 유대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개혁과 혁신’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안식일이 사람의 주인이 아니라,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다.”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그들에게 권위의 근거는 전통과 율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권위는 전통과 율법을 뛰어넘었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바로 율법과 전통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혈연으로 맺어지는 형제와 자매의 ‘틀’도 과감하게 바꾸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고 실천하는 사람이 모두 형제요 자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풀잎 끝에 맺혀 있는 이슬방울 같은 인생을,
피었다가 지고 마는 꽃잎 같은 인생을 영원한 생명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형벌의 도구였던 십자가를 영원한 생명의 표징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신학교에서 “Ecclesia semper reformanda est.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말을 배웠습니다.
교회는 시대적 상황에 맞추어 복음의 메시지를 새롭게 해석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이는 단순히 전통을 유지하거나 변화를 추구하는 것만이 아니라,
복음의 본질을 완전히 드러내고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구현하려는 소명을 뜻합니다.
교회가 항상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성찰하고 새로워지는 공동체로 남아야 함을 상기시키는 신학적 원리입니다.
이는 교회의 살아 있는 신앙과 시대적 책임,
그리고 하느님의 은혜 안에서의 지속적 변화와 성장을 이루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이 성찬에 참여한 저희가 덧없이 지나가는 현세를 살면서도
지금부터 천상 양식에 맛 들여 영원한 것을 사랑하게 하소서.”
요한은 누구에게서 권한을 받아 세례를 베풀었느냐?
조욱현 토마 신부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따져 묻는다.
그들은 위대한 기적들을 많이 보았다. 그 기적들은 그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들은 예수님께 누구의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묻는다.
그들은 아마 그 기적들의 결과가 미래에
어떠한 결과로 나타날지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사악함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질문을 던지신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24-25절)
그들은 이제 자기들의 대답이 가져올 위험을 생각하며 망설인다.
요한이 하늘에서 왔다고 하면, 그 답은 하늘이 보낸 증인을
믿지 않은 결과를 인정하는 것이 될 터였고,
또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면 군중에게 돌을 맞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답에 발목을 잡힐까 봐 두려워 “모르겠소.”(27절) 하고 대답한다.
사실 그들은 요한이 하늘에서 왔는지 사람에게서 왔는지 몰랐다.
그들에게 신앙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어두워진 마음은 빛에서 나온 것을 알아보지 못한다.
눈이 멀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영적으로 눈이 멀면 신앙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한다.
소리 없이 사냥하는 사냥꾼은 함정을 파면서
동시에 함정 옆에 결코 도망칠 수 없도록 그물을 쳐 놓는다고 한다.
사냥감이 도망을 못 가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도 덫을 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27절)고 하신다.
즉, 그들에게는 자격이 없으므로 말씀하시지 않겠다는 말씀이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당신의 신비를 드러내지 않으시면서도
당신을 신문하는 자들을 가르치시고,
합리적인 논증으로 상대의 교묘한 비난을 논박하고 계시다.
신앙을 가진 우리는 필요하다면 하늘이 무너져도 알고 있는 진실을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진리를 알려고 하는 태도를 보여야 하겠다.
어느 대학에서 유학하셨습니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존경하는 선배께서 오래전 겪은 참담한 체험입니다.
한 모임에 참석하셨는데, 뭔가 중요한 결정을 하고 실행하는 모임이었답니다.
거기에는 나름 좀 배웠다는 사람들이 다 모였는데,
모임 시작 때 쭉 돌아가면서 각자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특히 제일 관심을 끄는 질문은 “어느 대학에서 유학하셨습니까?”이었습니다.
들어보니 다들 말로만 듣던 엄청난 대학, 국내외 유수 대학에서
오랜 세월 공부한 박사님들이었습니다.
우리 신부님 차례가 되었는데, 솔직하게 이야기를 하셨답니다.
“저는 사제가 되기 위한 기본적인 신학 공부 외에 다른 학력은 없습니다.”
그랬더니, 회의 중간에 담당자께서 조용히 신부님에게 다가오시더니,
귓속말로 그러더랍니다. “다음 모임에는 안 나오셔도 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중요하게 여기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가 지금까지 쌓아온 학력, 경력, 자격증, 스펙입니다.
예수님 시대 유다 사회 안에서 가방끈 긴 사람들 중
으뜸인 사람들이 있었으니, 수석 사제들이었습니다.
유다교를 대표하는 중요 인사들이자, 권위자들이었습니다.
한편 백성의 원로들은 정통 율법 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사람들로서,
유다인들 사이에서 막강한 정치력을 쥐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비록 로마 식민 통치하에서 제한된 권력이었지만
유다 사회 전반을 주름잡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눈엣가시 같은 인물이 등장했으니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보아하니 예수님은 정식 율법학교 졸업생도 아니었습니다.
누군가의 문하생도 아니었습니다. 교수 자격증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무자격자인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공식적인 허락이나 승인도 없이
성전에서 가르침을 펼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한 말씀 한 말씀에
백성들이 환호하고 열광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심기가 많이 불편해진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이 예수님께 몰려와서 따져댑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마태 21,23)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에게 있어서 목숨처럼 중요한 것이 있었는데 바로 권한이었습니다.
합당한 절차와 자격, 제도와 법이 그리도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공식적인 교사자격증도 없는 주제에 ‘야매’로 성전에서 가르치느냐?’며
예수님께 따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의 질문처럼
어리석은 질문은 다시 또 없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하느님 아버지와 모든 것을 공유하는 분이십니다.
지혜의 원천이신 분입니다. 세상 삼라만상의 모든 이치를 다 깨달은 분이십니다.
스승 중의 스승, 참스승이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모든 것, 모든 피조물 전체,
인류 전체에 대한 권한을 당신 손에 쥐고 계신 분입니다.
이런 예수님께 한없이 부족하고 철딱서니 없는 한 인간이
예수님의 자격유무에 대해서 따져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보면 정말이지 기가 차고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마치 5살짜리 유치원 아이가 한 분야를 완전히 터득한
대석학, 박사학위 심사를 심사하는 석좌교수에게
무슨 자격으로 가르치느냐고 따지고 있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차라리 아무 말을 않는 편이 최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말장난에 개의치 않으시고
당신의 길을 걸어가시는 것입니다.
노림수가 분명할뿐더러 잔뜩 꼬이고 꼬인 그들의 질문이
조금도 진실하지 않았기에 예수님께서는 대답을 거부하십니다.
질문이 진실해야 대답도 진실할 텐데
그들의 질문 자체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 질문을 던지려면 질문 자체가
진실된 질문이어야 하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질문이어야 합니다.
진리를 이해하기 위한 성의 있는 질문이어야 합니다.
사랑의 실천을 위한 질문, 영혼의 구원에 도달하기 위한 질문이어야 하는데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의 질문은 한 마디로 어리석은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무응답(無應答)은 사실 정답이었습니다.
영적으로 삐뚤어지지 않고 정직한 사람들은 모두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이 보내신 마지막 대예언자란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듯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성을 선포한 사람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고 있었을 때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그분의 성령께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며
예수님의 위격과 권한을 명백히 증거했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실 자격과 권한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로부터의 강력한 지지와 후원을 받고
세상 모든 인간의 권한 위에 서 계십니다.
불신자에게 유보된 예수의 정체
박상대 마르코 신부
대림시기에 봉독 되는 복음의 주요 내용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고 했다.
첫째는 메시아의 도래와 현존이 가져오는 징표들에 관한 내용으로서
예수께서 메시아로서 병자와 소경을 치유하고, 죄인의 죄를 사하며,
억눌린 백성들을 배려하고 위로하는 내용이다.
둘째는 메시아적 징표들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요구하는 내용으로서
그 태도는 믿음과 불신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을 선택할 경우 하느님 나라의 보장을 받는다.
셋째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를 대조하는 내용이다.
둘 다 구약성서에 계시된 자들로서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를 위한 특사요 선구자로,
예수는 야훼의 고난받는 종이요 메시아로 예언되었다.
이들 주요 내용을 잘 이해하는 방법으로 그날의 독서로 대부분 봉독 되는
이사야 예언서와의 연결을 도모하도록 권유하였다.
이제 대림 제3주간의 복음(12월 16일까지)은 모두가 세례자 요한과 관련된 것이다.
복음은 메시아의 도래를 위한 선구자로 세례자 요한을 등장시키고
그의 정체성을 밝히면서 광야와 요르단강에서 회개의 설교와 세례를 베풀게 한다.
그러나 복음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따라서 복음은 선구자의 중요한 역할을 부각시키면서
그 이상으로 메시아의 정체와 권위가 출중함을 보여준다.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복음이 우선 메시아를 준비하는 요한의 선구자적 역할을 보도하고,
그다음에 메시아의 역사적 도래, 그리고 메시아의 활동을
단순히 시간상의 순서로 열거하려는 목적만 가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복음은 특정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언제나 영향력을 가진다는 말이다.
그래서 메시아 예수의 ‘이미 오심’을 준비하는 세례자 요한의 선구자적 역할은
人子의 ‘다시 오심’에로 연장될 수 있는 것이다.
좀 더 다른 각도에서 이야기해 보자.
역사적 사건의 측면에서 볼 때, 세례자 요한의 선구자적 역할은
메시아 예수의 공생활로 말미암은 신약의 시작으로 끝나며,
신약은 그리스도 예수의 메시아적 역할, 즉 공생활, 수난, 죽음, 부활로 끝난다.
그러나 구세사적 측면에서 볼 때,
요한과 예수의 역할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지속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시공을 초월할 수 있는 두 분의 역할은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경륜 속에
하느님 스스로가 세례자 요한과 아들 예수에게 부여한 사명과 권한 때문이다.
이 사명과 권한이 두 분의 역할과 활동을
인간 구원과 관련하여 정당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오늘 복음이 바로 그 권위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예수의 권위에 대한 예수와 백성의 지도자들 사이에 벌어진 논쟁의 정확한 시점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후 이틀째 되는 날이다.
마르코복음에서는 사흘째 되는 날로 편집되었다.(마르 11,1-33)
논쟁의 원인이 되는 ‘이런 일’이란 예수께서 입성 직후 행하신 성전 정화 사건을 말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행하신 예수님의 전체 행적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예수님의 권한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하느님으로부터의 권한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직접적인 답변을 회피하시고,
그들이 알아 듣기 훨씬 쉬운 방법을 택하신다.
그것은 바로 세례자 요한의 권한에 대한 반문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을 믿고 회개의 세례를 받았지만
백성의 지도자들과 대사제들은 세례자의 말을 믿지 않았다.
예수님의 반문이 그들을 진퇴양난에 빠트려 ‘모르겠다.’는 대답을 얻어냈지만,
사실상 그들은 속으로 세례자 요한을 불신함으로써 예수까지도 불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르겠다.’는 대답은 사실상 직무 유기에 해당한다.
대사제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무엇이 하느님의 일이고
무엇이 아닌지를 분별하여 백성들에게 제시해야 하는 임무를 가진 자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세례자 요한의 권한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른다고 함으로써
자신들의 직무를 다하지 못함은 물론, 예수가 누구이며,
어떤 권한으로 지금까지 놀라운 행적을 해왔는지에 대하여 알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된다.
이렇듯 불신자에게 예수님의 참된 정체성은 유보된다.
예수님의 대답은 적어도 말씀을 들으려 하고 받아들이려 하는 자에게만 주어진다.
이에 선행되어야 할 일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세례자 요한에 대한 신뢰이다.
세례자 요한을 통하여 일어나는 하느님의 사건에 대한 믿음 없이
예수께 대한 믿음을 얻기란 힘들다.
우리 중에 세례자 요한에 대하여 모른다고 말할 사람은 없다.
오늘날 세례자 요한이라는 인물과 그의 선구자적 역할과 활동을 신뢰한다는 것은
곧 메시아의 탄생을 준비하는 회개와 쇄신의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