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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17일 화요일
제1독서 : 창세 49.1-2.8-10
복 음 : 마태 1,1-17
1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2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낳고 이사악은 야곱을 낳았으며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들을 낳았다.
3 유다는 타마르에게서 페레츠와 제라를 낳고 페레츠는 헤츠론을 낳았으며 헤츠론은 람을 낳았다.
4 람은 암미나답을 낳고 암미나답은 나흐손을 낳았으며 나흐손은 살몬을 낳았다.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즈를 낳고 보아즈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았다.
오벳은 이사이를 낳고 6 이사이는 다윗 임금을 낳았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7 솔로몬은 르하브암을 낳았으며
르하브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삽을 낳았다.
8 아삽은 여호사팟을 낳고 여호사팟은 여호람을 낳았으며
여호람은 우찌야를 낳았다.
9 우찌야는 요탐을 낳고 요탐은 아하즈를 낳았으며 아하즈는 히즈키야를 낳았다.
10 히즈키야는 므나쎄를 낳고 므나쎄는 아몬을 낳았으며 아몬은 요시야를 낳았다.
11 요시야는 바빌론 유배 때에 여호야킨과 그 동생들을 낳았다.
12 바빌론 유배 뒤에 여호야킨은 스알티엘을 낳고 스알티엘은 즈루빠벨을 낳았다.
13 즈루빠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야킴을 낳았으며 엘야킴은 아조르를 낳았다.
14 아조르는 차독을 낳고 차독은 아킴을 낳았으며 아킴은 엘리웃을 낳았다.
15 엘리웃은 엘아자르를 낳고 엘아자르는 마탄을 낳았으며 마탄은 야곱을 낳았다.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17 그리하여 이 모든 세대의 수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가 십사 대이고,
다윗부터 바빌론 유배까지가 십사 대이며,
바빌론 유배부터 그리스도까지가 십사 대이다.
<오늘의 묵상>
김재덕 베드로 신부
예수님의 족보에 나오는 몇몇 인물들을 살펴봅시다.
야곱은 형인 에사우에게 돌아갈 축복을 가로챘고,
유다는 며느리인 타마르에게서 페레츠와 제라를 낳았습니다.
라합은 예리코의 창녀였고, 롯은 이방 여인이었습니다.
다윗은 밧 세바를 차지하려고 우리야를 전쟁에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솔로몬은 지혜로운 임금이었지만, 노년에 자신의 외국인 아내들 때문에 우상숭배에 빠져 살았습니다.
그 뒤에 나오는 인물들도 대부분 하느님께 성실한 믿음을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 향하는 역사는 죄인들의 역사였고, 나라는 망하고 유배를 가게 된 실패의 역사였습니다.
그런데 이 역사의 마지막에 성모님께서 계십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하느님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시는 성모님의 믿음 때문에,
죄로 가득 찬 역사가, 모든 것이 실패한 듯 보이는 역사가,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 향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삶도 예수님의 족보와 같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죄로 가득 찼던 순간도, 하느님께 버림받은 것처럼 느껴졌던 순간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모님처럼 ‘하느님 말씀이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믿음’을 가지게 될 때,
우리 삶도 족보의 증언처럼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로 향하는 하느님 구원의 역사로 변화될 것입니다.
결코 절망하지 마십시오.
성모님의 믿음을 실천하십시오.
여러분의 삶은 죄로 가득 찬 역사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여러분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향하는 새로운 족보’가 될 것입니다.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마태 1,16)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일반적인 침팬지 공동체는 20~30마리로 구성되고,
드물게는 150~200마리까지 늘어나기도 한다고 합니다.
고인류인 네안데르탈인과 고대 사피엔스도 이와 비슷했습니다.
그런데 약 7,000년 전 호모 사피엔스는
무리와 협력하는 전례 없는 능력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로써 무역이 이루어졌고, 예술이 등장했으며,
무엇보다 먼 지역으로 이동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그 이유를 인류학자들은 스토리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즉, 이야기 능력이 생기면서 뇌 구조와 언어 능력에 변화가 이루어졌고,
이로써 소규모가 아닌 대규모로 연결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능력이 우리를 지구상 가장 힘 있는 종족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런 이야기 능력은 누구에게나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혼자 하는 혼잣말로 이루어질까요?
아닙니다. 함께했을 때 그 이야기 능력은 배가 되며
그 안에서 커다란 힘을 이룰 수 있게 됩니다.
함께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면, 이 세상에서 발휘할 수 있는 힘을 스스로 없애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도 제자들과 또 군중들과 함께하셨습니다.
우리가 혼자 살 수 없음을 주님께서 직접 모범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당신이 직접 뽑은 제자들이지만, 주님을 팔아넘긴 사람도 있었고,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말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십자가 죽음 후에는 다락방에 숨어 벌벌 떨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다시는 상종 안 하셨을까요? 그들에게 부활을 보여주셨습니다.
당신을 거부했고 아픔을 주었어도 함께해야 할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족보를 자세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족보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뜻에 맞춰서 올바르게 살았던 사람이었을까요?
아닙니다. 하느님을 멀리하고 하느님 뜻에 반해서 잘못된 길로 나아갔던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는 이 역사를 끝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불안한 사람들의 역사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어떻게든 함께하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함께하면서 이야기를 계속 만들어내야 합니다.
때로는 나에게 커다란 아픔과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그들을 나의 역사 안에서 갈라치기를 하면서 함께할 사람을 줄여나간다면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과도 함께하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의 구원이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하기 위해서는 나의 이웃과 함께해야 합니다.
둘이나 셋이 모인 곳에 나도 함께하겠다는 주님의 말씀을 잊지 마십시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성탄이 임박해 옵니다.
대림 두 번째 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때가 차면 그분은 분명 오시겠지만, 그분이 오신다고 해서
모두가 그분을 영접하는 기쁨을 차지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제 우리 마음 안에 구유를 준비해 두고,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맞이할 채비를 차려야 할 때입니다.
마음의 간절함으로 “하늘은 이슬비처럼 의인을 내려다오.” 라고
마음을 모아 노래해야 할 때입니다.
오늘 말씀 전례는 본 기도에서 그 의미를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인성을 받아들이신 외아드님을 통하여 저희도 그 신성에 참여하게 하소서.”
이는 미사 중 예물 준비 기도를 바칠 때
사제가 성작에 포도주와 물을 부으며 혼자 드리는 기도문과 같습니다.
“이 물과 술이 하나가 되듯이,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하게 하소서.”
오늘 제1독서에서는 인성을 받아들이신 외아드님의 강생을 예고하고,
<복음>에서는 예고된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심을 알려줍니다.
사실 그분은 영원의 관점에서 볼 때,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보여주듯이
시간보다 앞서시며 아버지와 한 본질이시지만,
동시에 육에 따라 본다면 이 족보가 알려주듯이
인간의 가계에 속한 분이심을 말해줍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족보’는 그분 인성의 계보를 밝혀주는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참 인간이셨음을 알려줍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본성을 취하시고
인간의 방식으로 태어나셨음을 밝혀줌과 동시에 본기도에서 밝히듯이,
그분을 통하여 우리도 신성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밝혀줍니다.
우리는 이 족보를 통하여 보이는 인간의 역사 안에 흐르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역사를 봅니다.
곧 그들 모두가 자비의 사슬로 엮어졌음을 봅니다.
그리고 그 자비의 사슬 안에서 하느님의 감실을 봅니다.
곧 그들 모두는 예수님이 담겨 있는 성합들임을 봅니다.
우리 역시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는 당신 자비의 얼굴이 새겨져 있습니다.
저는 이 족보를 들을 때면 ‘성모님의 찬가’가 떠오릅니다.
"주님께서는 대대로 자비를 베푸실 것입니다."(루카 1,50)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으니,
약속하신 대로 그 자비를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토록 베푸실 것입니다.”(루카 1,54-55)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대대로 이어지고 영원합니다.
참으로 주님께서는 역사 안에 살아계시고 또한 제 안에 자비로 살아계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다윗의 자손이며 아브라함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마태 1,1)
주님!
보이는 인간의 역사 안에 보이지 않는 당신의 역사를 보게 하소서.
세세 대대로 베풀어진 당신의 자비를 보게 하소서.
그 자비의 사슬 안에서 당신의 감실을 보게 하소서.
그들 모두가 당신이 담겨 있는 성합임을 보게 하소서.
오늘, 제 심장의 고동 소리와 말과 발걸음과 손짓 모두가
당신의 자비를 엮어내는 사슬이 되게 하소서.
오늘, 제 안에 새겨진 당신 자비의 얼굴을 뵙게 하소서. 아멘.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반영억 라파엘 신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집안의 족보를 보면 여자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출가외인’이라는 생각이 담겨 있나 봅니다.
그리고 나이에 상관없이 아저씨뻘이니 형님뻘이니 하며 ‘촌수’를 따지곤 했습니다.
누가 출세하면 그것을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하며 호들갑을 떨고
먼 친척도 그때는 아주 가까운 것처럼 느끼며 자랑했습니다.
족보는 뿌리를 찾아 주는 데 많은 도움을 줍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미 그리스도의 족보에 여인이 등장했습니다.
그것도 훌륭한 사람이라고 여겨지지 않은 사람도 부끄럼 없이 올라있습니다.
시아버지와 동침하여 자식을 낳은 다말, 창녀로써 적군과 내통한 라합,
그리고 젊은 과부로 보아즈를 유혹했던 이방인인 룻,
자기 남편을 죽인 다윗의 자식을 낳은 우리야의 아내 바쎄바입니다.
감추고 싶은 죄인들이 등장함은 의미가 큽니다.
메시아의 가계가 끊어지지 않도록 기묘한 방법으로 대를 이어가셨다고 할 수 있고,
또한 의인과 죄인의 장벽이 무너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룻을 등장시킴으로써 구세주 그리스도는 유다인만의 메시아가 아니라
이방인의 메시아도 된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 계십니다.
결국 주님은 모든 이에게 구원을 주시려 인간 역사 안에 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계속 이어지는 족보의 끝에 나의 이름도 기록될 것입니다.
기왕이면 내로라하는 인물이 아니더라도 죄인으로 기록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아니 회개한 죄인으로 기록되기를 기도합니다.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10,20).
믿음으로 의롭게 된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역대 이스라엘 왕 가운데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 그분 마음에 드는 아들(마태3,17)로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기 위해 기름 부음 받은 자요,
주님의 영을 받은 이(루카4,18)입니다.
이제 그분의 자녀가 그분의 일을 해야 할 때입니다.
그분의 족보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기에 앞서 그분 마음에 드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뿌리는 어디인가요?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오늘은 12월 17일입니다.
주님의 성탄까지 7일 남았습니다.
지난 3주 동안의 대림 시기는
구원의 역사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바라보았습니다.
지난 3주 동안의 대림 시기 감사송은
구원의 역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지니는 의미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비천한 인간으로 처음 오실 때에는 구약에 마련된 임무를 완수하시고
저희에게 영원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나이다.
그리고 빛나는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에는 저희에게 반드시 상급을 주실 것이니
저희는 지금 깨어 그 약속을 기다리고 있나이다.”
구약에 마련된 임무는 무엇일까요?
대림 제1 주일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때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에 한 약속을 이루어 주겠다.
그날과 그때 내가 다윗을 위하여 정의의 싹을 돋아나게 하리니,
그가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룰 것이다.”
그렇습니다. 공정과 정의를 세우는 것이 구약에 마련된 임무였습니다.
대림 제2 주일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당신 영광 안에서 안전하게 나아가도록
높은 산과 오래된 언덕은 모두 낮아지고 골짜기는 메워져 평지가 되라고 명령하셨다.”
그렇습니다.
구약에 마련된 임무는 참된 평화와 참된 자유입니다.
하느님 앞에 우리는 모두 한 형제요, 자매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림 제2주일은 ‘인권 주일’이라고 합니다.
대림 제3 주일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 너에게 내리신 판결을 거두시고 너의 원수들을 쫓아내셨다.
이스라엘 임금 주님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니 다시는 네가 불행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그렇습니다.
구약에 마련된 임무는 가난한 이, 외로운 이, 굶주린 이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림 제3주일은 ‘자선 주일’이라고 합니다.
오늘부터 1주일은 구원의 역사에서 드러나는
예수님의 탄생보다는 예수님의 탄생 과정에 집중합니다.
나자렛의 작은 마을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그래서 감사송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모든 예언자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미리 알려주었고
동정 성모님께서는 극진한 사랑으로 그분을 품어 주셨으며
요한은 오실 분을 미리 알려주고 이미 와 계신 그분을 알려주었나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저희가 깨어 기도하고 기쁘게 찬미의 노래를 부르면서
성탄 축제를 준비하고 기다리게 하셨나이다.”
오늘부터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는 여정을 함께 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오신 곳은 화려한 궁궐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금수저로 오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많은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면서 오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거처할 방이 없어서 말구유로 오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목동들이 양을 돌보는 베들레헴의 들판으로 오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이스라엘의 대사제가 아닌, 멀리 동방에서 온 박사들의 경배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배경에는 권력, 명예, 성공, 능력, 업적이라는 병풍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곁에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했던 처녀 마리아가 있었습니다.
남모르게 파혼하려 했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따랐던 목수 요셉이 있었습니다.
밤을 새워 양들을 돌보던 목동들이 있었습니다.
고단한 여행을 마쳤던 동방의 박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곁에는 흙수저들이 있었습니다.
앞으로 예수님의 곁에 있을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갈릴래아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입니다.
죄인으로 취급받던 세리와 창녀들입니다.
죄를 지어서 돌에 맞을 뻔했던 여인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는 이유입니다.
루가복음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사명을 명확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대나무는 마디가 있습니다. 마디가 없는 대나무는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삶의 역경과 고난을 극복하고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상처일 수도 있지만,
우리의 삶을 지탱해 주는 삶의 마디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제 곧 성탄이 다가옵니다. 성탄은 그저, 즐겁고 기쁜 것만은 아닙니다.
성탄은 이제 하느님의 뜻대로 살도록 다짐하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행복은 용기 있는 사람들을 자주 찾아온다고 합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그리하여 이 모든 세대의 수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가 십사 대이고,
다윗부터 바빌론 유배까지가 십사 대이며,
바빌론 유배부터 그리스도까지가 십사 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조욱현 토마 신부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1절),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하느님이시며 참 인간이심을 믿도록 한 것이다.
마태오는 주님께서 육신으로 태어나신 두 번째 탄생에 관해 이야기한다.
여기서 아브라함과 다윗은 둘 다 육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계에서 훌륭한 선조였다.
주님께서는 할례로 유대 민족의 선조가 된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을 통해 모든 민족이 복을 받으리라고 약속하셨고,
이 약속은 아브라함의 가계에서 육신을 취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구원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이사이는 다윗 임금을 낳았다.”(6절)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한다.
다윗은 손이 뛰어난 또는 사랑받는 것으로 풀이된다.
그리스도는 이러한 분이셨다.
다윗은 행동으로, 자비로, 온화함으로, 그리스도를 예시하였다.
14대라는 말을 3번 하는데 여기에도
마태오가 의도적으로 족보를 14대씩 나눈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 족보에 이스라엘의 역사가 압축되어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역사를 면밀히 이끌어 가시며,
그 역사의 절정, 즉 때가 찼을 때,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사람이 되게 하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다윗 가문에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와 같은 인간임을 이 족보를 통해 알려주고 있다.
우리는 대림시기의 후반기에 접어들고 있다.
대림시기를 시작하며 주님의 오심을 잘 준비한다고 노력하지만,
우리의 삶은 이 족보에 나타나는 의미에서와 같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신앙생활을 시작하여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히 따르는 삶으로 많은 은총 속에 사는 때도 있다.
그러나 주님의 뜻에서 벗어나 어려움을 겪는 때도 있다.
이 때문에 항상 주님께로 돌아가는 회개의 삶이 계속되어야 한다.
이제부터 주님의 구원을 기다리며 항상 회개하는 마음으로 그분께 나아가도록 하자.
구차한 우리 인간의 일상사 안에 살아계시며 현존하시는 하느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몇 년에 한 번씩 꼭 전화를 걸어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뿌리 찾기 협회’인지 뭔지 하는 단체인데, 얼마나 집요한지 모릅니다.
이번에 다시 잘 정리된 족보가 새롭게 출간되었으니,
가문을 생각해서라도 꼭 한 권 사달라며 골백번도 더 전화를 거십니다.
요즘은 족보, 하면 잘 거들떠보지도 않는데,
과거에 어르신들께서는 족보를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선친께서 두툼한 족보 책을 조심스럽게 보자기에 싸서
장롱 깊숙한 곳에 보관하시던 모습이 생생합니다.
집에 불이라도 나면 뛰쳐나오면서 제일 먼저 챙기는 것이 족보였습니다.
그다음이 집문서요 땅문서였습니다.
전쟁이 발발하고 피난길에 오를 때도 제일 먼저 족보를 챙겼습니다.
이렇게 가문의 역사와 전통, 선조들의 이름이 기록된 족보는
어르신들에게 생명과도 같은 책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에게도 족보라는 것, 마치 뿌리, 생명, 목숨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사 다닐 때마다, 유배 갈 때, 죽음의 길을 걸어갈 때조차도 족보를 가슴에 품고 다녔습니다.
그만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족보, 조상, 민족, 뿌리는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신약성경의 첫 부분인 마태오 복음서,
그 첫 장에는 그 유명한 예수님의 족보가 줄줄이 나열되고 있습니다.
복음서의 서두에 별 재미도 없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족보가 줄줄이 나열되고 있는 것,
대체 무슨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요?
왜 누군지도 잘 모르겠는 의미 없어 보이는 낯선 이름들이 복음서 서두를 장식하고 있을까요?
왜 복음서 첫 출발이 이토록 무미건조하고 흥미 없는 사람 이름으로 시작될까요?
그 이유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류 그 한가운데 현존해 계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류의 구세주께서는 인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계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들 사이에서 살아가시는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감히 우러러보지도 못한 정도의 천상 용모를 지니신 분,
우리 인간이 도저히 닿지 못하는 아득한 먼 곳에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예수님의 족보는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구세주 예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 위에
두 발로 굳건히 딛고 서 계시는 분,
다사다난한 우리 인간사, 폭풍 속 같은 우리 인생살이 한가운데 들어와
역사하시는 분이심을 예수님의 족보는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 그 안에 들어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예수님의 조상들 가운데는 인간의 위대함도 보이지만
인간의 타락과 죄의 어두운 그림자도 뚜렷이 바라볼 수 있습니다.
다윗의 간통 행위, 솔로몬의 배교 행위, 이스라엘 역대 왕들의 추문록,
왕실의 혈통 안에 버젓이 끼어들어 있는 이방 여인들의 이름도 들어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족보 안에는 상처투성이뿐인
인간의 역사, 인간의 고통, 인간의 아픔이 고스란히 포함되어 있습니다.
메시아의 재림은 비록 이스라엘이 몰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현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스라엘 측, 다시 말해서 인간 측의 불충분함에도 불구하고 도래합니다.
거듭되는 인간 측의 불충실과 배신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와 유대관계는 지속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 측의 불성실함에도 불구하고 항상 성실하십니다.
결국 우리 인간의 깊은 상처,
그 사이를 비집고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스며들어 오십니다.
우리 인간 측의 깊은 좌절을 딛고 하느님께서 일어서십니다.
우리 인간 측의 멸망과 죽음을 기반으로 하느님께서 살아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구차한 우리 인간의 일상사 안에 살아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구질구질한 우리 인간 역사 안에 현존해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때로 결핍투성이인 우리 인간사 안에서
당신 사랑의 역사를 계속 써나가십니다.
왜 우리는 무엇이 행복인 줄 알면서도 어떤 날은 다른 행복을 추구할까?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엔 예수님의 족보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단순한 역사적 기록이 아닙니다.
그것은 태초부터 계획된 성취된 예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목적의 분명함 속에서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단순하게 말하면 이미 예언된 태어남과 가르침,
그리고 수난과 부활의 예언을 성취하는 삶이었습니다.
그 예언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으셨습니다.
자유가 없으셨기 때문일까요?
그 예언이 행복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매일의 행복을 약속하는 예언은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하다고 하셨고 그렇게 사셨습니다.
다른 이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나의 유일한 행복의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도 그 예언을 따라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이 예언에서 벗어날 때가 많습니다.
‘다른 길이 있지 않을까?’
왜 우리는 행복의 길을 알면서도 매일 헤맬까요?
우리 안에 있는 자아 때문입니다.
뱀은 자꾸 다른 행복의 길이 있다고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우리는 가끔 그 목소리를 듣고 불행을 선택합니다.
이와 관련된 좋은 영화는 ‘사랑의 블랙홀’입니다.
주인공 필 코너스는 똑같은 하루를 반복해서 살게 됩니다.
처음에는 그 단조로움을 혐오하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상황을 악용합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목적을 가지고 행동하기 시작하면서
— 다른 사람들을 돕고,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자신을 개선하면서 —
만족을 느끼고 결국 끝없는 반복에서 벗어납니다.
법칙은 존재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 반복되는 일상에서 행복의 법칙을 발견하고 그것을 키워갑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그 법칙을 믿지 않고 이랬다저랬다 하며 행복할 수 있는 시간을 낭비합니다.
이젠 우리가 “오늘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질문을 멈추고,
대신, “이건 우리가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를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를 설명하는 좋은 실험이 있습니다.
쥐와 인간이 제비뽑기를 계속해서 하면 100% 인간이 쥐에게 지고 만다는 결과의 실험입니다.
인간이 행복해질 수 없는 이유가 여기서 밝혀집니다.
A와 B, 두 개의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 안에 1,000원이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200번을 선택하여 얼마를 벌 수 있는지 알아보는 실험입니다.
당첨 확률은 A가 75%, B가 25%로 설정해 놓았습니다.
보통 100번 정도 하면 이런 확률을 인식하게 됩니다.
다음 100번에 모든 것이 결정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쥐에게는 돈 대신 먹을 것을 줍니다.
이때 쥐는 보통 사람보다 1만 2,500원이나 더 땁니다.
인간은 A에서 나오지 않는 25%까지 B에서 찾으려고 하다가
A만 누르면 받을 수 있는 돈보다 작게 받습니다.
그러나 쥐는 100번을 넘어가면 이 패턴,
곧 법칙을 알고 믿기 때문에 그냥 쭉 A만 누르는 것입니다.
3살 아이에게 시켜도 항상 어른을 이깁니다.
아기들은 자기 생각이 별로 없기에 법칙에 순응합니다.
우리 안에 주어진 자유는 우리 스스로 주어진 법칙보다 나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서로 사랑하라는 법칙을 가볍게 여깁니다.
그래서 오늘은 돈, 내일은 쾌락, 모레는 명예나 권력을 행복으로 여기고 추구해 봅니다.
매번 우리가 해 왔던 많은 경험들을 무시하면서. 어린이처럼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삶을 그대로 예언처럼 반복하면 매일 행복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예언을 성취하며 사셨던 이유는
그렇게 순수하게 행복의 법칙에 순종할 수 있을 때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수 있음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셨던 것입니다.
행복의 예언인 그리스도의 삶에서 벗어나지 맙시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