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연이야기
공기 같은 불교, 부처님의 가피력
류희승 : 동덕여대 강사
어릴 적이라 아물아물하게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다. 어머니의 손을 꼬옥 잡고 더운 여름날 절에 도착했다. 한여름의 뜨거운 햇살 아래 지친 몸을 식히며 절 마당에 앉아 있었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는 내가 어린데도 불구하고 유난히 부처님께 절을 잘했다고 말씀하셨다.
대학에 진학할 때는 어렸을 적의 기억이 남아 있어서인지 서슴지 않고 종립학교를 택하게 되었다. 줄곧 외국어 과목에 관심이 많았고 소질이 있다는 칭찬을 받아서 영어영문학과에 진학했다. 대학 입학식 때의 사진을 보면 정각원과 문리대 앞 광장의 불상을 중심으로 찍은 사진이 많은데, 아마도 마음에 끌리는 바가 있었던 것 같다.
아침 일찍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하고 있노라면 반야심경을 독송하는 음성이 방송으로 흘러나오고 바로 1교시가 시작되었다. 그 덕분에 항상 마음의 번뇌를 가라앉히고 정결하게 하고 난 후에 하루 일과를 열 수 있었다.
한편 학교 도서관은 불교학 자료실이 있어서 불교자료를 많이 접할 수 있었는데, 1학년 때 불교학 개론 및 불교문화사가 필수 과목이었기에 자주 불교학 자료실을 찾았다. 비록 교양과목이었지만 고등학교 때까지 불교공부를 체계적으로 공부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여러 자료를 들춰보게 되었던 것이다.
도서관에서 대장경도 넘겨보고 불교학, 불교문화에 관한 책들을 접하게 되었다. 그 중 불교설화에 관한 책이 의외로 많지 않았는데 특히 일본 불교설화에 대한 책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불교는 인도, 중국, 우리 나라를 거쳐 일본으로 전파되었다. 그런데도 일본에는 불교 관련 자료의 정리가 잘 되어 있어서 일본불교의 자료를 참조하는 일이 상당히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되어 있는 일본불교설화집이 거의 없었다.
당시 일본어를 전혀 몰랐던 나는 우리 나라와 영향 관계가 있는 일본 불교설화자료의 목록조차 찾아볼 수 없는 현실을 직면하고 가슴이 답답했다. 갑자기 이 망망한 학문의 대해에서 눈먼 거북이가 떠다니는 나무 판자의 구멍에 머리를 내미는 것 같은 일을 하고 싶다는 욕망으로 가득 차 올랐다. 일본어를 공부해서 일본불교설화를 읽어보고 싶다는 욕망이 운명처럼 다가온 것이었다. 영문학은 전공이라 소홀히 할 수 없었고 일문학을 부전공으로 하여 일본문학을 읽을 수 있는 수준에까지 올랐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대학원은 일문과로 진학하였다. 그런데 공부하다보니 자료의 부족을 심하게 느꼈다. 일본에 가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염원을 하며 석사학위를 받게 되었다. 졸업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부분적으로 장학혜택을 받을 수 있는 시험에 합격하여 일본 유학을 하게 되었다.
일본에서 내 인생의 화두처럼 다가온 불교설화를 전공했는데, 박사과정을 마치고 논문을 쓰느라 8년이란 오랜 시간이 흘렀다. 길다면 긴 유학생활은 인고의 세월이었다. 또한 한 편 한 편 주옥 같은 일본중세불교설화를 읽어내려가는 기쁨을 만끽하는 즐거움도 있었다.
그러나 긴 유학생활에도 불구하고 우여곡절로 인하여 박사학위를 매듭짓지 못하고 귀국 길에 올랐을 때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 당시에 『발심집(發心集)』에 실려 있는 집착에 관한 설화가 떠올랐다.
어느 스님이 좋은 매화를 심어서 매우 소중히 여겼다. 오로지 붉은 매화만을 바라보며 즐기고 만약 다른 사람이 가지를 꺾으면 특히 슬퍼하고 꾸짖었다.
하루는 제자들이 바깥에 나가고 아무도 없을 때 가위로 이 매화나무를 뿌리부터 가지까지 잘라 위에는 모래를 뿌리고 흔적도 없이 해 두었다.
일부러 집착을 남기지 않으려는 것이 이 설화의 주제이나, 나의 경우에 빗대어 결실 없이 끝낸 유학생활을 매화나무 가지를 뿌리까지 잘라버린 행위와 동일시하며 현실에 집착하지 않고, 마음의 평온을 되찾으려 애썼다.
한편 일본에서 박사학위는 받지 못했지만, 귀국하여 나름대로 공부의 결실을 맺을 수 있어 부처님께 감사드렸다. 작년 부처님 오신 날에 즈음하여 내가 전공한 설화 가운데 하나인 『발심집』을 번역, 『일본중세불교설화』이라는 제목으로 불광출판부에서 출판하게 되어 감회가 깊었다.
지금까지 출판된 일본불교설화가 거의 없는 가운데 불교문화, 불교문학, 불교학 등 여러 가지 시점에서 읽혀질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비록 이 책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지는 못해 안타까웠지만, 학계 선배분들의 독려를 받았고, 좋은 불교설화자료집을 내줘서 고맙다는 찬사를 듣기도 했다.
그렇듯 전공에 관련된 책도 내고, 대학 강단에서 강의를 하면서 여러 학회에 발표를 하고 논문을 쓰는 동안 다시 국내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을 기회가 생겼다. 무척 망설였지만 많은 우여곡절을 떠올리기보다는 새로운 길을 선택하는 것이 마음 편했다.
일본에서 찾은 자료 및 발표논문, 학회에 실린 논문들을 하나하나 정리하고 새롭게 구성해서 이번에 박사학위를 받게 되었다. 이 논문은 『발심집』의 구조 및 다른 설화 작품과의 영향관계를 다룬 것으로서 일본어 원문을 인용한 부분은 모두 한글로 번역해 놓고 참고문헌을 실어 놓았다. 자칫하면 사장될 뻔했던 나의 노력과 수고가 불광출판부의 배려와 박사학위 취득으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어릴 적부터 항상 불교는 내 곁에 공기처럼 존재했던 것 같다. 알게 모르게 숨쉬듯 자연스럽게 스며든 신앙이 불교설화를 연구하는 인연으로까지 발전했고, 그것을 기점으로 해서 불교의 교리, 사상, 문학, 의례 등으로 체계적이고 심도 있게 성장해서 오늘과 같은 결실을 맺은 것이다.
겨자씨와 같은 불교와의 작은 인연이 어느덧 부처님의 가르침과 공덕을 전하는 불교설화를 연구하는 것으로 발전한 것은 부처님의 한없는 가피력이라 여기며 앞으로도 몸과 마음을 다하여 정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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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