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12월 18일 수요일
제1독서 : 예레 23,5-8
복 음 : 마태 1,18-24
1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19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20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22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23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24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오늘의 묵상>
김재덕 베드로 신부
요셉의 마음이 어떠하였을까요?
그가 마리아에게 느꼈을 배신감과 상처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마리아에게 일어난 일을 사람들에게 알릴 수도,
성문으로 끌어내어 돌을 던져 죽게 할 수도(신명 22,23-24 참조)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복수’를 선택하지 않습니다.
그는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합니다.
약혼한 여인이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졌고,
또 그 남자에게 가기를 바란다면 자유롭게 해 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꿈을 통하여 요셉은 하느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마태 1,20)
요셉은 마리아를 생각하여 내린 자신의 ‘옳은 결정’이
하느님의 계획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내 그는 하느님의 뜻에 그대로 순종하여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입니다.(1,24 참조)
‘의로운 사람’ 요셉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할 줄 아는 이였습니다.
또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여 내린 결정이 하느님의 계획에 어긋남을 알게 되자
그분의 뜻에 순종할 줄 아는 믿음을 가진 이였습니다.
이와 같은 그의 믿음은 ‘다윗의 후손’에서 구원자가 나오리라는
하느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우리도 요셉의 믿음을 본받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리 옳은 결정이라 생각하더라도 그것이 하느님의 뜻에 어긋난다면,
기꺼이 하느님의 뜻에 순종할 줄 아는 용기를 지녔으면 좋겠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1,24)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아기는 주먹을 꽉 쥔 채 태어납니다.
온몸에 힘이 꽉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서서히 주먹을 풀며 힘을 뺍니다.
그 뒤 계속 힘 뺀 모습을 보여줍니다. 잘 웃고 잘 웁니다.
긴장된 모습으로 계속 있지 않습니다.
또 얼마나 유연한지 다리를 180도로도 쉽게 찢을 수 있고,
발바닥 박수가 손바닥 박수만큼 편합니다.
수월하게 물에 뜨고, 빠르게 언어를 익힙니다.
모두 힘을 빼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세상 사는 것도 이렇게 힘을 빼야 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힘이 계속 들어가고 있습니다.
힘이 들어갈수록 사는 것이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수영 배울 때를 떠올려 봅니다.
처음 배울 때 강사는 계속 이렇게 말했습니다. “힘 빼요~~~”
이 말을 듣는다고 힘이 빠졌을까요?
힘을 빼야 한다고 머리에서는 알지만, 몸은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반복된 연습을 통해 힘을 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수영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물 위에 잘 뜨게 되었고, 앞으로도 쭉쭉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우리의 삶도 이렇게 힘을 주고 빼는 것의 반복이 아닐까 싶습니다.
문제는 진정한 성장은 힘을 뺐을 때 이루어 지는데
이를 깨닫지 못하고, 계속해서 힘만 주고 있습니다.
낑낑대면서 어렵고 힘들다고만 외치면서, 그 안에서 기쁨을 갖지 못합니다.
계속된 힘에 쉽게 지치는 것은 물론이고, 걱정과 불안만을 간직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에 커다란 힘을 갖게 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주님 안에서만 힘을 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자주 주님 곁에 머물지 않고 떠나려고 합니다.
계속 힘주는 삶을 살게 됩니다.
요셉 성인이 꿈에 천사의 메시지를 받게 됩니다.
성모님의 잉태 소식에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했을 때였습니다.
사랑하는 배우자의 잉태 소식에 얼마나 힘이 들어갔을까요?
그래서 주님의 천사가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마태 1,20)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으로 받아들였으므로
하느님의 뜻이 요셉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이 요셉의 모습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굳은 믿음을 안 가질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모든 것이 편하고 가볍기 때문입니다.
힘을 쭉 빼는 삶, 그래서 더 앞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힘 들어갈 일이 너무 많은 세상입니다.
그럴수록 주님 안에서 힘을 쭉 빼도록 해야 합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믿음만이 우리의 삶을 행복으로
또 더 발전하는 삶으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제1독서는 주님의 오심을 장엄하게 선포합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
~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고 부르리라.”(예레 23,5-6)
복음에서는 그분을 모셔들인 요셉의 꿈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여기에서는 태어날 아기가 예고된 구세주 메시아임을
두 가지 예언의 성취를 통해 알려줍니다.
첫째는 그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사실이요,
둘째는 그가 동정녀에게서 태어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느님의 계획과 예언은
요셉의 믿음에 찬 결단과 행동을 통해서 성취됨을 보여줍니다.
복음에서는 요셉을 '의로운 사람'(마태 1,19)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의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그것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함으로써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요셉은 참으로 '하느님의 뜻'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믿되,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행동하되, 순명으로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 일이 거룩한 분의 개입으로 이루어진 일임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는 ‘의심’을 떨치고 ‘신비’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율법보다 높은 법, 곧 은총의 법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바야흐로 은총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해가 아직 뜨지는 않았지만, 이미 그 빛으로 밝아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요셉이 마리아의 순결을 의심하지 않도록
거룩한 신비를 알려주고 깨우쳐준 까닭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안락과 평안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대로 아내를 맞아들였습니다.(마태 1,24)
하지만 그는 결혼하기도 전에 아내를 포기해야만 했고,
아들을 얻기도 전에 이미 아들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구원계획의 조력자가 되었습니다.
천사는 단지 예고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약속으로 요셉을 이해시켜 주었습니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마태 1,21)
이렇게 그는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붙이는 영예를 받았습니다.
곧 아버지의 역할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사실 요셉은 오늘 복음에서뿐만 아니라,
복음서 전체에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행동하는 믿음과 순명’으로 구원받는 모든 이들의 양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습니다.(마태 1,22)
그렇습니다.
요셉은 그야말로 우리 ‘신앙의 모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요셉 성인과 함께 의심하기보다 신비를 받아들여 살아야 할 일입니다.
‘성령의 활동’을 받아들여, ‘행동하는 믿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쫒아 '의로움 사람'으로 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마태 1,20)
주님!
의심을 떨치고 신비를 받아들이게 하소서.
당신의 개입을 맞아들이게 하소서.
기이하고 황당하게 보여도 ‘당신의 뜻’에 가두어지게 하소서.
어처구니없고 터무니없게 보여도 ‘당신의 뜻’을 품고 살아가게 하소서.
제 안에, 오로지 ‘당신의 뜻’을 세우소서. 아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오늘은 ‘예수’라는 이름의 뜻과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의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 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하느님은 구원이시다’, ‘하느님은 구세주시다’ 라는 뜻을 갖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1,21)라는 말로 그 뜻을 암시하였습니다.
죄에서 구원된다는 것은 우상 숭배나 이단뿐 아니라 노예살이로부터의 해방이며,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되는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어버렸습니다”(로마3,23).
바로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소중한 사람으로 지닌,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이렇게 보면 ‘죄’라는 말은 인간이 구원받아야 할 모든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구원자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삽니다.
이것은 우리의 기쁨이요, 희망입니다.
언제나 우리를 구원으로 초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 이름은 이사야서 7장14절에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하고 예언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과 항상 함께 계신다는 지식은
이스라엘의 신앙 속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것이었고
그것은 이스라엘의 특징이자 영광이었습니다.
과거에 그러하였듯이 예언자들이 선포하는 미래에도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과 함께하실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사실, 성조들이 전쟁 중에 있을 때, 판관들의 시대에 제사당에 모인 군중 속에,
이스라엘의 왕들에게 기름을 부을 때, 예언자들이 사명을 수행할 때,
그리고 당신 약속을 지키시어 구원을 베푸실 때 하느님은 그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 생활을 할 때에도, 여전히 함께하셨고,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 마리아를 통한 구세주의 잉태를 알려주었을 때도 함께 하셨으며
그 예언의 성취를 이룬 오늘 예수님을 통해 우리 삶의 여정에도 함께하십니다.
“내가 너를 구원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
네가 물 한가운데를 지난다 해도 나 너와 함께 있고
강을 지난다 해도 너를 덮치지 않게 하리라.
네가 불 한가운데를 걷는다 해도 너를 타지 않고 불꽃이 너를 태우지 못하리라”(이사43,1-2). 하신
하느님께서 오늘도 ‘우리와 함께’하시고 또한 내일을 열어주십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과 더불어
모든 시련과 고통, 어려움을 이겨내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그분은 한 번도 우리 곁을 떠나신 적이 없으십니다.
다만 우리가 알아보지 못했고, 숨었을 뿐입니다.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하였는데
“의로움은 항상 하느님께 마음을 두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생활하며
기쁘고 진실한 마음으로 율법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또한 의로운 사람은 지혜롭고 친절하며,
그의 성숙한 인간성이 하느님의 계율과 잘 융합하여 빛을 발합니다.
의인은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이상적인 사람입니다.
요셉은 자신이 겪고 있는 일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것을 조사하거나 해명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요셉의 당황, 고뇌, 의혹, 심사숙고, 마음의 동요에 대해 일체, 언급이 없습니다.
오히려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어 상대를 배려해 주는 모습입니다.
우리의 의로움은 어디 있을까요?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오늘 복음에서 천사 가브리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이는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라고 설명합니다.
구약에서 임마누엘은 희망의 약속입니다.
임마누엘은 아하즈 왕에게 주어진 징조로, 하느님의 신실하심과 구원의 약속을 상징합니다.
임마누엘의 이름은 당시 정치적, 영적 혼란 속에서
하느님이 여전히 자기의 백성과 함께하심을 드러냅니다.
이를 통해 하느님은 단지 먼 존재가 아니라,
언제나 곁에서 인류의 역사를 이끄시는 분임을 보여줍니다.
신약에서 임마누엘의 예언은 예수님의 탄생으로 완전히 성취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인간의 역사 안으로 들어오신 구체적인 사례입니다.
이는 단순한 동행이 아닌, 인간의 고통, 기쁨, 삶과 죽음의 모든 면에 참여하신 사건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임마누엘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실 뿐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새로운 생명으로 이끄신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저는 임마누엘에 대한 두 가지 체험이 있습니다.
1991년 9월 5일입니다.
저는 유행성 출혈열로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보름 넘게 입원했습니다.
제가 병원에 입원하고, 퇴원할 때까지 제 곁을 떠나지 않고 함께 계셨던 분이 있습니다.
어머니입니다. 어머니는 제가 열이 나면 수건을 물에 적셔서 닦아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힘들어하면 온몸을 주물러 주었습니다.
어머니의 헌신과 정성은 바로 ‘임마누엘’이었습니다.
저는 퇴원하면 어머니 곁에 임마누엘이 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그 다짐은 1달이 안 돼서 없었던 일이 되었습니다.
매일 어머니에게 안부 전화하겠다는 다짐도,
한 달에 한 번은 어머니와 함께 식사하겠다는 다짐도,
매달 용돈을 드리겠다는 다짐도 봄에 눈이 녹듯이, 제 마음에서 녹아내리고 말았습니다.
어머니는 그런 저의 행동에 대해서 한 번도 서운하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가 힘들었을 때, 고통스러웠을 때도 어머니를 통해서 저와 함께하셨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아플 때도, 어머니가 외로울 때도 사제라는 이유로 함께하지 못한 적이 많았습니다.
가난한 이의 모습으로 오신 주님과 함께하지 않았습니다.
굶주린 이의 모습으로 오신 주님과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2001년 12월 24일입니다.
성탄절을 맞이해서 가족 잔치가 있었습니다. 노래, 연극, 장기 자랑이 있었습니다.
저는 수녀님과 ‘하얀 성탄’을 불렀습니다.
노래를 너무 열심히 불렀는지, 미사 후에 나가보니 눈이 무릎까지 쌓였습니다.
어두운 밤이고, 길이 좋지 않아서 우리는 모두 성당에서 주님의 성탄을 축하하며 지냈습니다.
목동이 주님의 성탄을 축하했듯이, 동방박사들이 주님의 성탄을 축하했듯이,
우리는 전도 부치고, 찌개도 끓여서 예수님의 생일을 축하드렸습니다.
33년 사제 생활 중에 가장 잊지 못할 성탄 전야 미사였습니다.
예전에 베네딕토 성인의 누이동생인 스콜라스티카 성녀는
오빠와 더 있고 싶어서 기도했더니, 밤새 비가 왔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스콜라스티카 성녀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베네딕토 성인은 밤을 새워 동생과 이야기하였습니다.
2001년 성탄에도 하느님께서는 눈을 내려 주셔서,
본당 교우들이 밤을 새워 예수님의 성탄을 축하드릴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임마누엘 주님께서 함께하셔서 저는 첫 본당 신부의 소임을 행복하게 마칠 수 있었습니다.
한 청년이 꿈속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살아온 길을 해변 위의 발자국으로 보게 되었고,
하느님께서 그와 함께 걸으셨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자기의 삶 중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힘든 시기에
발자국이 두 줄이 아니라 한 줄만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청년은 몹시 상심하며 하느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제가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웠을 때 왜 저를 홀로 두셨습니까?
제가 당신의 사랑을 의지했는데, 그때 당신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그러자 하느님께서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로 대답하셨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이야, 내가 너를 결코 떠난 적이 없단다.
네가 한 줄의 발자국만 보았던 그 시기에 나는 너를 품에 안고 걸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가 가장 힘들었을 때도 함께 하셨습니다.
제가 가장 기뻤을 때도 함께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약속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성체 성사, 말씀, 공동체 안에서 임마누엘의 현실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특히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은 함께하시는 분으로 다가오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임마누엘의 현실을 다른 이들과 나눌 수 있을까요?
사랑, 연대, 그리고 기도로서 하느님께서 함께하심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 고통받는 이웃들에게
하느님이 그들과 함께 계신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면 좋겠습니다.
임마누엘은 단지 과거의 예언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삶과 신앙 속에서도 매일 새롭게 체험해야 할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경위
조욱현 토마 신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18절)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태어나셨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일어날 새로운 태어남에 대한 암시가 있다.
우리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났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모두 그리스도와 약혼한 동정 교회에서 태어나며
마리아는 그래서 교회의 어머니이시다.
동정 교회는 성령으로 아들을 잉태하시고 낳으신 마리아의 표상이다.
우리는 여기서 의로운 요셉을 볼 수 있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잉태를 모르고 있던 요셉에게는 난감한 일이었다.
마리아를 자기 집에 받아들이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었고,
마리아의 일을 드러내는 것은 마리아를 죽음으로 내모는 일이었다.
요셉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요셉은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19절)
이때 꿈에 천사가 나타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20절)
요셉이 마리아의 순결을 의심하지 않도록 그 신비를 알려주셨다.
요셉은 자신이 의심이라는 악을 떨치고 신비라는 선을 받아들여야 함을 깨닫게 된다.
천사는 또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21절)
예수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이다.
이는 하느님께 어울리는 이름이다. “하느님이요 구원자는 나밖에 없다.”(참조: 이사 43,3; 호세 13,4).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23절)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해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고,
그분은 하느님으로 우리 가운데 계신 것을 보게 되리라는 뜻이다.
이렇게 요셉은 기쁘게 천사의 말을 따름으로써 하느님의 계획을 따른다.
우리도 언제나 하느님의 뜻에 협력하는 자세를 갖도록 하여야겠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면 가까이 다가가고 싶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마태오 복음 사가는 탄생하실 아기의 이름 두 가지를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등장하는 이름은 예수입니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 1,21)
예수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하느님은 구원이시다.’ ‘하느님은 구원자시다.’란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모세의 후계자로서 요르단 강 건너 약속된 구원의 땅
가나안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한 여호수아의 이름이었습니다.
또한 바빌론 유배 생활에서 돌아온 후 파괴된 이스라엘 성전과
의식을 재건하는데 앞장섰던 대사제 예수와의 이름이었습니다.
또한 엘르아잘과 시라의 아들로서
지혜 교사이자 집회서의 저자 역시 이름이 예수였습니다.
그들은 각기 나름대로의 고유한 방식으로
하느님의 구원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중개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께서는 역사상 그 누구도 행하지 못했던
포괄적이고 총체적인 구원을 가져오실 것입니다.
두 번째 이름은 임마누엘입니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마태 1,23)
탄생하실 메시아께서는 이름부터 너무나 은혜롭고 감지덕지합니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실 주님이신데, 어떻게 구원하시는가?
항상 우리와 함께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면 가까이 다가가고 싶습니다.
함께 하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너무나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이다 보니,
우리에게 점점 더 가까이 오셨는데, 그분이 바로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이십니다.
성탄을 준비하며 우리 내면 깊숙이 어떠한 경우에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강렬한 임마누엘 주님 현존 의식을 지니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특히 노년기를 살아가는 분들, 남은 날들이
외적으로 볼 때는 조금은 우울하고 슬플 것입니다.
여기저기 탈이 나고, 점점 병원 신세를 지게 될 것입니다.
사랑했던 사람들도 한명 한명 떠나가고, 우리네 삶은 회색빛일 것입니다.
그럴수록 꼭 기억해야 할 대상이 임마누엘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꽃다운 이팔청춘 내 인생에도 함께하셨지만,
쪼그라든 노년기의 삶에도 굳건히 함께하십니다.
힘겨운 병고의 순간, 우리 인생을 총정리하는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도
임마누엘 주님께서는 반드시 함께하실 것입니다.
내가 받는 은총의 수준은 내가 하는 사랑의 수준과 같다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 요셉은 약혼자인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으려고 남몰래 파혼하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렇게 되면 마리아는 버림받은 여자가 되고
요셉은 임신시켜 놓고 약혼자를 버린 몹쓸 인간으로 낙인찍힙니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 이 결단의 순간에서
요셉은 자신을 배신한 마리아를 위해 자신이 죽는 것을 선택합니다.
이것이 의로움입니다. 그리고 그 의로움이 은총을 얻어냅니다.
요셉은 성모님의 남편이 되고 예수님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사랑만이 은총을 얻어냅니다.
인간의 사랑을 지향하는 아기는 인간의 사랑을 받지만,
늑대 정도의 사랑을 지향하는 늑대 새끼는 늑대가 할 수 있는 정도의 사랑을 받습니다.
사랑이 은총입니다.
요셉은 하늘의 은총을 원했던 것이고 하늘에 합당한 사람임을 증명해 내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신해 죄인임을 자처했듯이,
자신도 자기를 배신한 마리아를 위해 죄인임을 자처한 것입니다.
은총은 내가 지향하는 사랑의 크기만큼 주어지는 것입니다.
제프리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 중 하나인
‘면죄부 판매원 이야기(The Pardoner’s Tale)’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사람이 왜 은총을 잃는지 잘 표현됩니다.
이 이야기는 한 주점에서 술을 마시며 방탕한 삶을 살던 세 젊은이로 시작됩니다.
그들은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원인을 ‘죽음’의 탓으로 돌리며 비난합니다.
이들은 오만하게도 죽음을 찾아내 죽이겠다고 결심합니다.
길을 가던 중 이들은 한 노인을 만나게 됩니다.
노인은 그들에게 존중과 축복을 요청하지만,
이들은 그를 조롱하며 약하고 초라하다고 비웃습니다.
또한 죽음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 무례하게 묻습니다.
노인은 상징적으로 한 나무를 가리키며 거기서 죽음을 찾을 것이라 말합니다.
그 나무 아래서 죽음 대신 이들은 많은 금화를 발견합니다.
탐욕에 사로잡힌 이들은 처음의 목적을 잊고
그 금화를 자기들 것으로 만들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기심은 서로 간의 갈등으로 이어지며,
각자가 더 많은 몫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를 죽이려 합니다.
가장 어린 이는 도시로 가서 음식을 사 오면서 두 사람을 독살할 계획을 세웁니다.
반면 나머지 두 사람은 돌아온 그를 죽일 계획을 세웁니다.
젊은이가 돌아오자 두 사람은 그를 죽입니다.
이후 두 사람은 축하하며 독이 든 포도주를 마시고 결국 모두 죽게 됩니다.
결국, 이들은 죽음을 찾으러 갔다가 서로의 탐욕과 배신으로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타인을 가혹하게 판단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으로부터 멀어집니다.
세 젊은이는 탐욕과 오만으로 서로를 적으로 보았고,
그 결과 행복과 구원의 기회를 모두 잃었습니다.
어떤 형이 큰 공을 세워 살인죄로 갇힌 동생을 위해
사면권을 받아 감옥을 찾은 형과 같습니다.
형은 동생을 떠보기 위해 풀려나면 무엇을 할 것이냐고 묻습니다.
동생은 자기를 신고한 사람과 판사를 죽이겠다고 말합니다.
형은 사면권을 동생에게 줄 수 없음을 깨닫고 사면권을 찢어버립니다.
은총은 더 높은 수준의 사랑의 단계에 있는 사람일수록 더 많이 주어집니다.
낮은 단계의 사랑 수준에 있는 사람은 그만큼 적은 은총이 주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섯 살짜리 아이에게 총이나 칼이 주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런 은총을 주는 사회가 있다면 그 사회가 잘못된 사회입니다.
구약에서 가장 큰 은총을 받는 예언을 받은 사람 중 하나는 유다입니다.
유다는 요셉이 막내 베냐민을 가둔다고 하자 동생 대신 자신이 갇히겠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은 이런 유다에게서 메시아가 태어나리라고 예언하십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신해 당신이 그 죄를 다 뒤집어쓰십니다.
우리도 하느님 나라에서 받는 은총을 받으려면
타인의 잘못을 나의 것으로 여길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쉽지 않습니다.
투르의 성 마르티노는 서기 316년,
현재의 헝가리 지역에서 태어나 로마 군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세례를 받지 않았음에도 춥고 가난한 거지에게 자기 외투의 반을 찢어서 주었습니다.
그날 밤, 마르티노는 꿈속에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마르티노가 거지에게 준 외투의 절반을 입고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곁에 있는 천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르티노는 아직 세례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나를 입혀주었다.”
잠에서 깨어난 마르티노는 경외심과 새롭게 다가온 믿음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는 거지에게 베푼 친절이 곧 그리스도께 드린 사랑의 행위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결국 투르의 주교가 되었고 성인이 되었습니다.
은총은 바로 누군가의 헐벗음을 자기 탓임을 느끼고
자기 옷을 그에게 입혀주는 일과 같습니다.
이것이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는 은총을 받을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알아도 막상 내가 피해 볼 상황이 되면 나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나에게 피해를 준 사람의 죄를 벗겨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국 자신하지 말고 이 세상에서 작은 덮음을 실천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연습이 필수입니다.
그렇게 타인의 잘못을 덮어주는 일로 나에게 크게 잘못한 이를 덮어준다면
요셉처럼 하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서공석 세례자 요한 신부
오늘 복음은 마태복음서가 전하는 예수 탄생의 이야기입니다.
복음서는 과거에 일어난 사실을 정확하게 보도하는 문서가 아닙니다.
복음서들은 초기 신앙인들이 예수로 말미암아 깨달은 신앙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기록한 문서입니다.
오늘 우리가 mf은 복음은 요셉과 마리아가 약혼한 사이이고,
두 사람이 동거하기 전에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고 말하였습니다.
물론 이 말은 수사기관의 기록도 아니고, 역사학적으로 考證된 사실도 아닙니다.
복음은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이사야서(7,14)의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말하기 위해
‘두 사람이 동거하기 전에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고 말하는 것뿐입니다.
복음서는 히브리어 단어 임마누엘도 설명합니다.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신앙은 믿어지지 않는 일을 사실이라고 믿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마리아가 요셉과 동거하기 전에 예수를 잉태한 사실을 믿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동정녀’ 혹은 ‘처녀’라는 말은 구약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하는 과정에 발생한 단어입니다.
기원전 2세기 지중해 연안 여러 나라들이 그리스어를 사용할 때,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성서가 그리스어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때 번역하는 사람들이 이사야서 히브리어 원본에 있는
‘젊은 여인’이라는 단어를 그리스어 ‘처녀’라는 단어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들은 마태오 복음서는 그 그리스어 번역본을 인용하여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신앙은 인간과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선을 제공합니다.
신앙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믿고,
그분과의 연대성을 기반으로 인간과 세상을 새롭게 볼 것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은 그 연대성을 철저히 사신 분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으로부터 그 연대성을 배워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실천안에 나타나는 하느님은 인류가 상상하던 것과는 달랐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이 하신 기적에 놀라서 전능하신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실천하신 ‘불쌍히 여김’, ‘가엾이 여김’, ‘측은히 여김’을 보고
그것이 하느님과의 연대성을 사는 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유대교가 죄인이라고 버린 사람들, 경건하지 못하다고 외면한 사람들과 어울리고,
그들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가난한 사람, 굶주리는 사람, 천한 사람들을 가엾이 여겼습니다.
예수님의 그런 행위들 안에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보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당신의 아버지라 부르면서
아버지의 일을 행하는 아들이라고 스스로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신 일이 과연 하느님의 일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이 그분의 부활 사건입니다.
위대한 사람을 존경하고 따르는 것은, 정직한 인간이 하는 일입니다.
강한 사람에게 의지하는 것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일입니다.
재물을 많이 가진 사람과 친분을 갖는 것은 물질적 이득을 추구하는 사람의 생활 방식입니다.
예수님 안에 우리가 읽을 수 있는 삶은 그런 우리의 이야기와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위대하고, 강하고, 많이 가진 생명이라서 소중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베풀어주신 생명이라서 그것을 은혜롭게 생각하고,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서 그분과의 연대성 안에 살겠다는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입니다.
그 연대성은 우리 주변의 어떤 인간 생명도 외면하거나 버리지 말 것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이 살고 소중히 생각하신 연대성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생명을 베푸셨고 또 아끼십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신앙인은 하느님과의 연대성 안에서 다른 생명들을 보고 소중히 생각합니다.
성탄은 그런 삶을 산 예수님이 이 세상에 출생한 사실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 잉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출현은 하느님이 하신 새로운 일이었다는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을 담아 알리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당신의 삶 안에 함께 계시게 살았고,
그 삶을 배워 실천하는 우리들 안에도 하느님이 살아계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말합니다.
물질의 풍요로움에 마음을 빼앗기고, 권력의 화려함에 심취한 나머지
虛張聲勢라는 거품을 좇아 사는 인간의 삶 안에는
물질과 권력은 있어도, 하느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권위라는 허세도 없이, 물질의 풍요라는 허풍도 없이,
弱者의 초라함과 서민의 哀歡을 당신 것으로 하면서 인류 역사 안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돌보아 주면서
아버지이신 하느님과의 연대성을 산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도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같은 연대성을 살도록 가르쳤습니다.
사람들은 막강한 하느님을 찾았습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은 자기가 휘두르는 권력이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졌다고 믿었습니다.
싸움에 이긴 사람은 하느님이 주신 승리라고 믿었습니다.
재물을 가진 사람은 하느님이 주신 재물이라 생각하였습니다.
높은 지위를 얻은 사람은 하느님이 자기와 함께 계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은 높고 강하고, 승리하고, 재물을 주는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믿고 가르친 하느님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해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아버지라 부르던 하느님을 버리고,
사람들이 상상하던 하느님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은 강하고, 승리하고, 재물과 권력을 주는 분이라고
고집하던 사람들의 위협에도 예수님은 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생명을 잃으면서까지 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을 처형한 사람들은 그분을 십자가에 달아놓고,
내려오는 기적을 해보라고 조롱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용서하시라고 하느님에게 기도하면서 죽어 가셨습니다.
하느님은 강자와도, 승리자와도 함께 계시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은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으면서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실천한 예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하느님은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는 우리의 노력들 안에,
또 사람들의 불행과 고통을 퇴치하기 위해 봉사하는 우리의 노력들 안에 살아계십니다.
성탄이 다가왔습니다.
옛날 베들레헴의 구유에 탄생하셨던
그 생명이 우리의 삶 안에 살아계시도록 기도합시다.
불쌍히 여기고, 이웃을 돌보아 주며, 섬기는
우리의 보잘것없는 실천들 안에 하느님이 함께 계십니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