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323)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 ③ 신춘문예 당선작 중에서 좋은 시 찾기 4-3/ 시인, 중앙대 문창과 교수 이승하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네이버블로그 http://blog.naver.com/lkk0091/ 꽃 이름, 팔레스타인 - 경종호
③ 신춘문예 당선작 중에서 좋은 시 찾기 4-3
이어서 전북일보 당선작을 봅니다.
산문시 풍으로 되어 있는데, 올해 당선작 중 유일하게 멀고먼 나라에서 행해지는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전체 4개 연으로 되어 있으니 앞 2연을 먼저 볼까요.
올해도, 고향엔 칡꽃이 흐드러졌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계집아이 몇이 고무줄놀이를 하고 놉니다. 고무줄이 튕튕 울릴 때마다, 호박이며, 박이며, 수세미 꽃이 핍니다. 어느새 검정 고무줄에도 꽃이 피어, 달맞이꽃으로 피어, 계집아이 몇은 노래를 부르며 툭툭 튀어 오릅니다. 미사일 날리듯 양지바른 골목길 벽돌 속에 아비와 오래비를 묻고 옵니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은 예루살렘으로 흐르는 계곡마다 넘쳐나는데 칡넝쿨 얽힌 이국의 틈으로 어김없이 달은 떠오릅니다. 어김없이 총알은 밀알처럼 떨어집니다.
―경종호, 〈꽃이름, 팔레스타인〉 전반부
칡꽃, 고무줄놀이, 호박, 박, 수세미 꽃, 달맞이꽃 등이 나와서 저는
이 시가 우리네 농촌 풍경을 묘사하는 시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미사일 날리듯 양지바른 골목길 벽돌 속에 아비와 오래비를 묻고 옵니다”부터는
시의 공간이 순식간에 이동합니다.
바로 예루살렘으로 순간 이동을 하는 것입니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은 예루살렘으로 흐르는 계곡마다 넘쳐나는데”에 다다르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이 이 시의 소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난민촌 습격, 학살, 폭탄 테러, 민간인 사상자, 보복 공격……. 뭐 이런 뉴스가 하루가 멀다 하고 전해지는
“예루살렘으로 흐르는 계곡”에서는 “총알이 밀알처럼 떨어집니다”.
보복이 보복을 낳은 끊임없는 악순환의 장소인 이스라엘 국경 지대에 있는 팔레스타인 난민촌에 가봅시다.
폭격기가 지나간 바위 밑 두 눈만 깜박이다, 꿈벅거리다, 풀이 되고 나무가 되어 버린 못생긴 계집아이는 어느새 어미가 되고 전사가 되어 아이를 안고 모래 틈을 가로지르며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의 군화에도 꽃이 피었습니다.
바위를 덮고, 돌산 넘쳐나는 꽃이 피었습니다. 동방 외간 사내가 보내는 꽃, 생리를 하고, 배란이 지나 생산을 하는 동안에도 그 꽃이 신화(神話)보다 더 질긴 꽃이었음을, 옆구리에 낀 아이가 그 꽃을 닮았다는 것을 몰랐어도 그녀는 좋았습니다.
―〈꽃이름, 팔레스타인〉 중반부
한국의 소녀처럼 고무줄놀이를 하던 “못난 계집아이”는
“어느새 어미가 되고 전사가 되어 아이를 안고 모래 틈을 가로지르며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녀는 장성하여 어미가 되었기에 아이를 안고 있었습니다만
그와 함께 전사(戰士)가 되었기에 모래 틈을 가로지르며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제3연의 마지막 문장 “그러자 그 여자의 군화에도 꽃이 피었습니다.”는 의미심장합니다.
역설적인 표현이지요.
군화와 꽃은 어울릴 수 없지만 어울릴 수 없는 두 개를 한데 묶어 어울리게 하는 기법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법은 바로 다음 연으로 이어집니다.
꽃은 바위를 덮고 돌산을 화려하게 수놓습니다.
“동방 외간 사내”는 여인의 연인이 아니겠습니까.
“동방 외간 사내가 보내는 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 꽃은 “신화보다 더 질긴 꽃”입니다.
꽃은 거룩함과 영광, 혹은 아름다움과 평화의 상징입니다.
무덤 앞에 꽃을 헌화하고 상을 받은 사람에게 선물하는 것은 이러한 꽃의 상징성 때문입니다.
시의 제목에 나와 있듯이 그 꽃의 이름은 팔레스타인입니다.
팔레스타인(Palestine)이란 ‘이스라엘의 땅’이란 뜻으로 하느님이 약속하신 땅이자 가장 거룩한 곳으로,
예로부터 유대 민족 독립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곳이 총성이 그치지 않는 피의 땅이 되고 말았습니다.
못생긴 계집아이였던 그녀는 생리를 하고, 배란이 지나 생산을 하는 동안에도 꽃의 이름이 팔레스타인임을,
그 꽃이 신화보다 더 질긴 꽃임을, 옆구리에 낀 아이가 그 꽃을 닮았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래도 그녀는 좋았던 것이지요. 전사이니까,
전사가 되어 아이를 안고 모래 틈을 가로지르며 달려가고 있으니까.
막강한 이스라엘에 대항하여 팔레스타인 민족이 응전할 수 있는 방법은
고작 폭양을 적재한 트럭을 몰고 건물 벽을 향해 달려가거나
주렁주렁 폭약이 매달린 외투를 입고 ‘폭탄 테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방법으로 자폭하여 죽는 여전사 가운데 여대생들이 꽤 있는 것으로 아는데 아기 엄마도 있는 모양입니다.
실로 눈물겨운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 시는 시 전체가 역설적이고 상징입니다.
필립 휠라이트가 말한 ‘시적 역설’이 바로 〈꽃 이름, 팔레스타인〉입니다.
전남일보 당선작 〈돌에 물을 준다〉(이선자)는 내면세계에 대한 묘사가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쓴 소설을 방불케 할 정도로 끈질기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3개 연으로 배치한 구성도 견고하고 낱낱의 표현도 이루 말할 수 없이 치밀합니다.
나를 건드리고 지나는 것들을 향해 손을 내밀 수도 없었고
뒤돌아볼 수도 없었다 나는 무거웠고 바람은 또 쉽게 지나갔다
움직일 수 없는 내게 바람은 어둠과 빛을 끌어다 주었다.
때로 등을 태워 검어지기도 했고 목이 말라 창백해지기도 했다
아무하고도 말을 할 수 없을 때, 긴 꼬챙이같이 가슴을 뚫고 오는
빗줄기로 먹고살았다 아픔도,
더더구나 외로움 같은 건 나를 지나는
사람들 이야기로만 쓰여졌다 나는 몸을 문질렀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숨소리도 없이 몸을 문질렀다
내 몸에 무늬가 생겼다
으깨진 시간의 무늬 사이로 숨이 나왔다.
―〈돌에 물을 준다〉 제2연
돌에 물을 주는 행위는 한마디로 말해 ‘부질없는 짓’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부질없는 행위를 통해 시인이 얼마나 처절하게 자기와의 싸움을 전개하고 있는가는 알게 됩니다.
황당무계한 행위이지만 시이기 때문에 독자를 설득하는 힘을 지니는 것입니다.
특히 제3연에 접어들어 너의 긴 길이 내 몸 속으로 들어오고 돌 속의 길이 나에게 물을 주는
전환은 눈이 부실 정도입니다.
다소간의 센티멘털리즘과 구체성 부족이 아쉽기는 하지만
이 시인은 확실한 자기세계를 갖고 있어 앞날이 기대됩니다. < ‘이승하 교수의 시쓰기 수업, 시(詩) 어떻게 쓸 것인가?(이승하, 도서출판 kim, 2017)’에서 옮겨 적음. (2022. 4.29.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323)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 ③ 신춘문예 당선작 중에서 좋은 시 찾기 4-3/ 시인, 중앙대 문창과 교수 이승하|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