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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20일 금요일
제1독서 : 이사 7,10-14
복 음 : 루카 1,26-38
26 여섯째 달에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27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28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29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30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31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32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33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35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36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37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38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오늘의 묵상>
김재덕 베드로 신부
“하느님께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
성모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가 전한 이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스스로 ‘주님의 종’이라고 고백하며,
지금 당장은 하느님의 뜻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하느님의 섭리에 모든 것을 맡기며 ‘순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순명과 함께, 우리를 구원하실 예수님께서 성모님의 태중에 잉대되셨습니다.
성모님처럼 하느님을 신뢰하는 신앙인이 되십시오.
성경은 분명하게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이사 55,8)
하느님의 뜻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고 받아들이기 쉬운 방법으로만 주어지지 않습니다.
때로는 그분의 말씀이 우리를 아프게 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실천하기 어렵고, 현실과 맞지 않는 말씀으로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순명하는 믿음으로
당신 말씀을 대할 때 예수님을 만나게 해 주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반드시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신비를 믿고 있는 그분의 자녀들입니다.
성모님의 믿음을 본받아 우리도 하느님 말씀에 순명하는 믿음,
그분의 말씀이 우리에게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믿음으로
예수님의 성탄을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저의 스마트폰은 늘 무음입니다.
아무래도 많은 사람을 만나고, 또 미사를 비롯한 각종 성사를 집전해야 하므로
스마트폰은 늘 무음으로 맞춰놓습니다. 그래서 곧바로 연락되지 않습니다.
SNS 문자 메시지도 그날 저녁이 돼서야 확인하게 됩니다.
누구는 제발 빨리 좀 봐달라 하고, 또 자기를 무시하는 것 같다고 말씀하시지만,
저는 무음으로 해 놓는 것을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음이 아닐 때, 모든 신경이 바뀌게 되기 때문입니다.
노동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주 5일, 하루 여덟 시간 근무’는
1926년, 미국 자동차 포드의 창시자 헨리 포드가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스마트폰으로 인해, ‘365일 대기’ 중이 되는 것 같습니다.
미사 때 가끔 스마트폰이 울립니다. 그때 제대를 향하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바뀝니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데 갑자기 SNS 메시지 알림 소리가 들리면 역시 대화가 끊어지고 맙니다.
정말로 급한 연락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급한 연락이 그렇게 매 순간 올까요?
어쩌면 ‘급한 연락이 와라.’라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아주 급한 연락보다 지금 자기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여전히 제 스마트폰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합니다.
새로운 소식은 제가 찾아봐야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바로 앞의 사람에게 충실할 수 있고, 무엇보다 주님께 집중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커다란 장점이 많은데 과연 스마트폰의 무음을 바꿔야 할까요?
어디에 집중하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주님께 집중하고, 또 주님의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른 것들로 인해 집중할 수 없다면,
집중할 수 있도록 나의 방법들을 바꿔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세상의 것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도 알 수 없고, 주님께 대한 체험도 거의 없습니다.
당연히 주님도 알지 못하게 됩니다.
어제 복음에서 사제 즈카르야는 천사의 메시지를 믿지 않아서 벙어리가 되고 맙니다.
주님께 집중해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어떤 메시지를 들어도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나이의 많고 적음을 따지는 세상에 집중하고 있어서 믿지 못했습니다.
그에 반해, 성모님께서는 굳은 믿음을 보여주십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주님께 집중하고 있으니, 처녀가 아기를 가질 수 없다는 세상의 기준은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굳은 믿음을 통해 하느님의 일이 자기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디에 집중하고 있을까요?
세상이 아닌 주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예고합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이사 7,14)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이사야의 예고대로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 마리아에게서
예수님께서 잉태하게 된 경위를 말해줍니다.
이를 ‘세례자 요한의 탄생 예고’와 비교해 보면,
‘주님의 탄생예고’는 성전 안 ‘성소’에서 전해진 세례자 요한의 탄생 예고와는 달리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았던 “이방인의 갈릴래아"(마태 4,15)에 있는
작은 동네 나자렛의 시골 처녀의 ‘집’에서 전해집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거처를 성전 안이 아니라, 사람들 가운데 두시게 됩니다.
그런데 천사의 인사말은 마리아가 이미 “은총이 가득한 이”(루카 1,28)였음을 말해줍니다.
곧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기 전에, 믿음으로 충만했음을 말해줍니다.
그리하여 즈카르야는 ‘의심’하여 자신의 목소리까지 잃어버리고 벙어리가 되었지만,
마리아는 ‘믿음’으로 응답하여 구원의 말씀을 품으셨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마리아는 몸으로 우리 주님을 잉태하시기 전에 마음으로 먼저 잉태하셨다."
또 즈카르야에게는 아기가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루카 1,17)이라는 ‘사명’이 예고되지만,
마리아에게는 아기가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외아드님”(루카 1,35)이라
불리게 될 것이라는 ‘신원’이 예고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성령께서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루카 1,35)으로 이루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마리아의 응답을 통해 드러납니다.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나이다.”(루카 1,38)
오늘은 여기에서 드러나는 ‘마리아의 희망’에 대해서만 보고자 합니다.
이는 마리아 자신이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 그것을 저도 바랍니다.’라는 뜻입니다,
곧 ‘그분의 희망을 희망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리아의 희망과 하느님의 희망이 같아진 것입니다.
그것은 그분께서 원하신 바를 이루시도록 그분의 뜻에 승복하는 일이요,
그분의 뜻을 자신의 뜻으로 품고 자신의 희망이 아니라
그분의 희망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일이요,
당신의 사랑을 이루시도록 자신을 그분께 허용하고 수락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이 하느님의 희망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되고,
그분의 은총이 이루어지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그분이 하시는 일에 함께 일하는 협조자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집으로 삼으십니다.
저희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시고, 저희 안에서 사십니다.
바로 이것이 저희가 마리아와 함께 진정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 안에 하느님의 희망이 있다는 이 사실이 말입니다.
우리를 희망하는 분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이 사실 말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큰 기쁨인지요!
내가 바로 하느님의 집이요 놀이터요 일터라니!
이는 마치 잠에서 깨어난 야곱의 탄성(Eureka!), 그 깨달음의 외침과 같습니다.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곳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의 문이로구나.”(창세 28,17)
오늘 우리는 참으로 기쁘고 행복합니다.
바야흐로 성탄의 기쁨이 몰려옵니다. 희망이 이미 수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바로 주님의 희망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희망이 진정,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주님!
참으로 큰 기쁨입니다.
제 안에 사랑이 있다는 이 사실, 참으로 놀랍고 아찔한 감미로움입니다.
이제는 그 사랑에 승복하게 하소서.
그 사랑 안에 머무르게 하소서.
그 사랑을 퍼내게 하소서. 아멘.
곰곰이 생각하고 맡겨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믿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확인한 후 그에 대해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보지 않고도 '그렇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믿기 위해 아는 것이 인간적이라면, 알기 위해 믿는 것은 신성에 가깝다”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합니다”(요한 20, 29).
성경을 보면 천사를 통해 하느님의 메시지를 들은 즈카르야는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루카1,18) 의심하고,
그 메시지가 참되다는 것을 증명하는 표징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메시지가 이루어지는 날까지 벙어리로 지내야 하였고, 비로소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먼저 곰곰이 생각하였습니다.
무턱대고 하느님의 섭리를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곰곰이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런 다음에야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으려 하였습니다.
일단 받아들이고,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1,34). 라는
마리아의 질문은 곧’ 어떻게 해서 처녀가 어머니가 될 수 있단 말인가?’하는 우리의 물음이기도 합니다.
그에 대한 천사의 대답은 명확합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1,37).
사실 이 대답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친히 하셨던 말씀입니다.
“‘어찌하여 사라는 웃으면서, 내가 이미 늙었는데, 정말로 아이를 낳을 수 있으랴? 하느냐?
너무 어려워 주님이 못 할 일이라도 있다는 말이냐?
내가 내년 이맘때에 너에게 돌아올 터인데,
그때에는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창세18,13-14).
그리고 마리아의 그에 대한 대답도 확실합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이는 목숨을 걸고 예수님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든 일은 진정으로 당신께 온전히 봉헌하는 이들 안에서 이루어집니다“(우리야).
‘제가 무엇을 해 보겠습니다’ 하는 대답이 아니라,
‘당신이 알아서 저를 연장으로 쓰십시오’하는 겸손의 내어 맡김입니다.
우리도 마리아처럼 곰곰이 생각하고 되새긴 후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그리고 맡기면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됩니다.
기적이나 표징을 요구하지 말고 먼저 믿으면
애당초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더 위대한 일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시련과 고통 안에서 더욱 빛나게 됩니다.
마리아의 대답은 바로 목숨을 내놓는 기도였습니다.
당시 시대 상황으로써는 ‘처녀가 임신을 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지만 당신의 일을 인간과 더불어, 인간을 도구 삼아 하십니다.
인간의 자발적인 협력안에서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탄생은
하느님의 은총과 룩한 어머니 마리아의 믿음 안에서 이루어진 열매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의 믿음에 따르는 순명을 통하여 예수님을 낳아드려야 할 때입니다.
주님의 성탄을 기다리는 만큼 우리의 믿음이 더해지길 희망하며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저를 당신의 도구로 쓰십시오.’하고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달라스 교구 시노드에 참석했습니다.
3박 4일 동안, 3년 동안 준비한 시노드 결의 사항에 대한 투표가 있었습니다.
투표는 아주 중요한 것, 중요한 것, 덜 중요한 것으로 나누어서 투표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본당 행사에서 간식을 주는 것에 대한 투표가 있었습니다.
아주 중요하다는 의견, 중요하다는 의견, 덜 중요하다는 의견으로 투표했습니다.
교리 교육에 시대의 상황에 관한 것들을 반영하는 것에 대한 투표도 있었습니다.
낙태, 인종차별, 이민자, 환경 문제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이 필요한가에 대한 투표였습니다.
교구장님은 시노드의 투표를 참조해서 달라스 교구의 사목에 반영하겠다고 했습니다.
매일 아침 미사가 있었고, 미사 중에 주교님은 ‘희망’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희망은 절망 중에도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했던 희망입니다.
메시아는 3번에 걸쳐 우리에게 오신다고 했습니다.
2,000년 전에 오셨고, 지금 우리의 마음에 오시고, 마지막 때에 오실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희망을 품고, 깨어 기다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성서 말씀은 구약과 신약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아하즈 왕은 유다 왕국의 위기에 직면했으나,
하느님께서 주신 징조를 거부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라는 표징(임마누엘)을 주셨지만,
아하즈는 이를 믿지 못하고 자신의 정치적 계산과 외교적 전략(앗시리아와 동맹)에 의존했습니다.
아하즈의 의심은 하느님보다 세상의 힘을 더 신뢰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 역시 하느님의 약속 대신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들에 기대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의 계획을 듣고 놀라움을 표현하지만(“어떻게 그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곧바로 순명하며 “말씀대로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상황(혼인 전 임신으로 인한 사회적 위험)과 이해를 넘어,
전적으로 하느님께 의지하며 자신의 삶을 내어드렸습니다.
마리아의 순명은 인간의 연약함 속에서도 하느님의 사랑과 계획을 신뢰할 때
어떤 열매가 맺히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야구 경기는 투수와 포수가 공을 던지고 받는 경기입니다.
그러기에 투수와 포수는 서로 호흡이 잘 맞아야 합니다.
포수는 투수가 던지는 방향을 정확하게 알아야 하고,
투수는 포수가 잘 받을 수 있도록 미리 던질 곳을 약속합니다.
던지는 공의 유형도 직구인지, 변화구인지 사전에 약속합니다.
이것이 투수와 포수가 함께 공유하는 사인입니다.
사인이 맞지 않으면 아무리 유능한 포수도 공을 잘 받을 수 없습니다.
사인이 맞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투수도 정확한 곳으로 공을 던질 수 없습니다.
야구 선수들은 훈련을 통해서 서로 사인을 숙지합니다.
그래야만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함께 더불어 살아가면서 상식과 양식이라는 사인을 공유해야 합니다.
관용과 인내라는 사인을 나누어야 합니다.
용서와 사랑이라는 사인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징표를 보여주시는 하느님과 그 징표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내가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본다면
하느님께서는 내 가족들을 통해서, 내가 만나는 이웃을 통해서,
흘러가는 구름과 부는 바람을 통해서 표징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이제 곧 성탄입니다.
내 믿음의 눈에 이물질이 묻어 있으면 성탄의 기쁨을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내 사랑의 눈에 먼지가 잔뜩 묻어 있으면 주님 성탄의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내 희망의 눈에 고통의 비가 내리면 주님의 성탄을 제대로 볼 수 없을 것입니다.
해마다 계절이 오고 가듯이, 매일 태양이 뜨고 지듯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순환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눈을 뜨고 있어도 내 마음에 욕망의 먼지가 묻어 있다면,
내 마음에 분노의 이물질이 쌓여 있다면, 내 마음에 열등감의 비가 내린다면
우리는 늘 새롭게 다가오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대림 시기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성찰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야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사람이 되신 예수님을 제대로 맞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하즈처럼 의심의 눈으로 하느님의 표징을 보지 말고,
성모 마리아처럼 순명의 눈으로 하느님의 표징을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조욱현 토마 신부
예수님의 탄생 예고가 이어지고 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28절)
이런 인사는 마리아에게만 주어진 인사였다.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28절)
주님께서는 마리아를 보러 오시는 것이 아니라,
태어남의 신비를 통해 마리아에게로 내려오신다.
마리아는 천사를 바라보던 그 자리에서
하늘의 심판관을 몸에 받아 모시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하느님께서는 한 처녀를 당신의 어머니로 만드셨고, 당신 여종을 어머니로 삼으셨다.
온 세상도 하느님을 품지 못하지만, 하느님은 온전히 그 품에 오시어 사람이 되셨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31절)
천사는 마리아에게 거룩한 신비를 드러내 줄 아기에 대하여 말한다.
마리아는 처녀로서 어머니가 될 것이다.
그 아기는 하느님의 아들이자 사람의 아들이 되실 분이다.
예수라는 이름은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고, 세상을 다시 창조하실 분이시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34절).
이 물음은 동정 잉태라는 신비에 대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천사는 성령께서 마리아에게 내려오시어 잉태하리라고 한다.
마리아가 열매를 맺게 하신 분은 성령이시다.
마리아에게 내려와 그리스도를 잉태하게 하신 성령께서
이제는 새로운 피조물의 양식인 빵과 포도주에 내리시어,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거룩한 성찬례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어 믿는 이들의 몸이 되라고 우리를 부르신다.
마리아의 잉태는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요한 1,13)
성령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38절)
마리아는 하느님께 순종함으로써 하와의 불복종을 되돌려 놓는다.
그리하여 한 천사였던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첫 번째 처녀의 타락이
다른 천사의 말을 받아들인 처녀 마리아의 믿음으로 극복되고 있다.
마리아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다. 마리아는 평범한 한 시골 처녀였다.
우리와 같은 한 사람이고 평범한 삶을 사는 인간이었다.
그 마리아가 그렇게 하느님께 자신의 신앙을 고백할 수 있었다면,
우리도 마리아와 같이 고백하고 실천해야 한다.
믿음의 사람은 속세 사람들과 이렇게 구분된다.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주님 탄생 예고의 깊은 순간을 듣게 됩니다.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하시리라는 놀라운 메시지를 전합니다.
마리아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응답하셨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도 인간적으로 “이게 가능할까?”라고 의문을 품으셨을 것입니다.
천사는 그녀의 믿음을 강화하기 위해 그녀의 친척 엘리사벳의 기적적인 이야기를 전하며,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나이가 많아 아들을 배었으니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 불리던 이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6-37)라고 말했습니다.
엘리사벳의 믿음과 하느님의 능력의 증거는
마리아가 구원의 역사 속 자신의 역할을 받아들이는 데 힘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여신 마리아는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는 진리의 살아 있는 증인이 되십니다.
이 순간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과 세상의 사람들 사이의 차이를 보게 됩니다.
세상은 “이게 과연 가능할까?”라고 묻지만,
믿음의 사람은 “아멘,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응답합니다.
이 점을 보여주는 예로 조니 에릭슨 타다(Joni Eareckson Tada)의 이야기를 생각해 봅시다.
1967년, 젊은 시절 조니는 다이빙 사고로 목 아래가 마비되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절망에 빠진 그녀는 생을 포기하려고까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상황에서 감사하라는 선교사의 권고를 통해
조니는 고통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깊은 기도의 순간, 그녀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환상을 보았고,
그분의 고통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조니는 나중에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가 약할수록 더 많이 하느님께 의지해야 하며,
그분께 의지할수록 그분의 강함을 더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이 경험은 그녀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켰습니다.
그녀는 원망 대신 감사로 고통을 받아들이며
수많은 장애인들에게 희망과 영감을 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믿음을 통해 조니는 세상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일을 이루었습니다.
깊은 고통을 기쁨과 용기의 원천으로 바꾼 것입니다.
또 다른 놀라운 예는 말랄라 유사프자이(Malala Yousafzai)의 이야기입니다.
1997년 파키스탄에서 태어난 말랄라는 마이완드의 말랄라(Malalai of Maiwand)처럼
용감한 삶을 살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믿음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여자로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삶을 살았습니다.
이 이름은 탈레반의 억압 속에서도 교육과 정의에 대한 믿음은 말랄라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2012년, 그녀는 학교 버스에서 머리에 총상을 입는 끔찍한 암살 시도를 겪었습니다.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16세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녀의 믿음은 그녀를 세상을 놀라게 하는 일로 이끌었고,
높은 이상에 대한 믿음을 통해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제 일생의 목표는 전 세계의 모든 여자아이가
12년 동안 안전하고 질 높은 교육을 받도록 돕는 것입니다.
교육의 기회를 얻지 못한 여자아이들은 전 세계에 1억 3천만 명이나 있습니다.”
“어린 여자아이가 저런 일을 하는 것이 가능해?”
믿음만 있으면 가능합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이처럼 성녀 잔다르크(Joan of Arc)의 이야기도 믿음의 변혁적인 힘을 보여줍니다.
1425년, 어린 소녀였던 잔은 천사와 성인들의 환시를 경험하며
프랑스를 구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단지 농부의 딸에 불과했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을 믿고 따랐습니다.
1429년, 잔은 군대를 이끌며 그 시대 여성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해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두렵지 않습니다. 나는 이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흔들림 없는 믿음은 그녀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세대를 초월하여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그녀의 삶은 믿음이 세상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일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마지막으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Saint Francis of Assisi)의 예를 들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초기 삶에서 부와 세속적인 즐거움에 빠져 살았습니다.
그러나 1205년, 그는 산 다미아노(San Damiano)의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던 중
“내 교회를 다시 세워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다미아노 성당을 물리적으로 재건하는 일에 집중했지만,
점차 예수님께서 가톨릭교회의 영적인 기반을 새롭게 하라는
부르심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필요한 일부터 시작하라. 그다음에 가능한 일을 하라.
그러면 갑자기 불가능한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가난을 받아들이고 복음을 철저히 실천하며 교회를 쇄신했습니다.
그의 믿음은 상상도 못 했던 일을 이루게 했고,
세상에 가난과 사랑에 대한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심지어 개신교에서도 프란치스코 성인은 존경합니다. 놀랍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단순한 경배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세상의 기대를 초월한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를 부르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여 세상에 희망과 영감을 줍니다.
믿음의 사람은 결코 세상 속에 숨겨져 있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사람들에게 “아!” 하는
탄성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우리도 성모 마리아처럼, 그리고 성모 마리아에게 영감을 준 엘리사벳처럼
하느님의 부르심에 온전히 “아멘”으로 응답하며,
믿음의 힘을 세상에 놀라움으로 증거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믿음에게 마음을 승락에게 입술을 창조주께 태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주님 성탄을 앞두고 천사가 아주 바쁩니다.
그리고 천사는 어제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즈카르야에게 얘기하고,
오늘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동정녀 마리아께 얘기합니다.
그런데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은 무엇입니까?
천사의 등장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일까요?
낯선 존재에 두려움을 느끼는 우리는 천사도 두려울 수도 있는데
동정녀 마리아도 그런 것이고 그런 두려움을 갖지 말라는 걸까요?
아니면 처녀가 아들을 낳을 거라는 말에 그대로 승낙하면,
엄청난 일들이 당신에게 닥칠 텐데 그것을 미리 생각하며
두려워하지 말라는 걸까요?
제 생각에 둘 다일 것입니다.
천사의 등장도 처음 경험하는 낯선 것이요,
아들을 잉태하는 것도 처음 경험하는 낯선 것이며,
하느님의 아들을 낳는 것은 더더욱 낯선 것이며 두려운 것일 겁니다.
그래서 대답이 쉽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어떤 대답을 할지 천사는 마리아의 입을 주시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대답에 우리의 구원이 달린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상황을 오늘 독서의 기도에서 베르나르도 아빠스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동정녀여, 당신은 잉태하여 아기를 낳으시리라는 전갈을 받으셨습니다.
이제 천사는 당신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를 보내 주신 하느님께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비참에 눌려 있는 우리마저 그 자비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이 승낙하시기만 한다면 우리는 즉시 해방될 것입니다.
당신의 짧은 응답으로 인해 회복되고 다시금 생명으로 부름받을 것입니다.
동정녀여, 속히 응답하소서. ‘말’을 하시고 하느님의 ‘말씀’을 잉태하소서.
일시적인 ‘말’을 하시고 영원한 ‘말씀’을 받으소서.
믿음에게 마음을,
승락에게 입술을,
창조주께 당신의 모태를 열어주소서.”
아무튼 마리아의 승낙을 노심초사하며 기다리는 천사에게
동정녀 마리아는 이렇게 응답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렇게 응당하신 마리아께서
우리도 당신을 본받아 응답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이고,
베르나르도 아빠스도 오늘 우리에게 똑같이 재촉할 것입니다.
믿음에게 마음을,
승락에게 입술을
창조주께 우리의 태를
새로운 일들의 시작
박상대 마르코 신부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예고한 어제 복음에 이어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고하는 복음이 봉독된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 예고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예고의 서막이었다.
요한의 탄생예고는 오직 그리스도의 탄생 예고 때문에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선구자는 선구자 다음에 도래하는 메시아에 의해 의미를 갖게 된다.
서막이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 本幕의 준비를 위해 존재하는 것과도 같다.
요한의 탄생예고로 말미암아 인간의 세상에 “새로운 무엇”이 시작되었다면
예수의 탄생예고는 “그 무엇”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선포하는 것이다.
바로 인간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 즉 구원자요 메시아가 도래한다는 것이다.
본막을 위한 서막의 존재, “무엇”의 예고된 “무엇”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작업은
두 개의 탄생 예고 사화를 비교해 봄으로써 가능해진다.
루카는 요한의 탄생 예고에서와 같이
예수의 탄생 예고에서도 시간과 장소를 명확히 하고 있다.
시간은 엘리사벳이 아기를 가진 지 정확히 여섯 달째 되는 때였다.
이는 새로운 무엇이 인간 세상에 시작된 지 6개월이 지난 때이다.
이제는 시작된 그 무엇이 도대체 무엇인지가 맑혀지는 때이다.
장소는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동네이다.
요한의 경우는 화려하고 웅장한 성도 예루살렘의 성전이었지만,
여기는 변두리 한 마을이다.
즈카르야는 분향을 위해 주님의 성소에 들어가
그곳에 나타난 천사 가브리엘을 만나게 되지만,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보내어 찾아온 천사 가브리엘의 방문을 받는다.
즈카르야는 천사의 인사도 없이 바로 메시지를 전해 듣는다.
그러나 마리아는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는
천사의 인사를 받고 난 다음 메시지를 전해 듣는다.
놀라기는 둘 다 마찬가지였다.
즈카르야의 경우는 이미 늙은 엘리사벳이 아기를 가질 것이고,
마리아의 경우는 요셉과 약혼은 했지만
아직 남자를 모르는 처녀로서 스스로 아기를 가질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즈카르야는 의심이 앞서 믿을만한 표징을 요구했고,
마리아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그 방법을 묻는다.
즈카르야는 불신의 대가로 벙어리가 되어 이 일이 이루어지는 날까지 기다려야 했지만,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하면서
엄청난 메시지를 겸손과 순명으로 수용한다.
그 순간 예수는 이미 마리아 안에 잉태된 것이다.
마리아 안에 잉태된 아기는 “하느님은 구원이시다.”는 뜻을 가진 “예수”라 불릴 것이며,
그는 조상 다윗의 왕위를 받아 야곱의 후손을 영원히 다스리는 왕이 될 것이고,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예수는 위대한 분이 되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요 만민의 주님이 될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보다 먼저 와서 세상 사람들이
이 주님을 맞아들일 만한 백성이 되도록 준비시키는 임무를 받았다.
요한은 구약성서에서 흔히 있었던 아이를 낳지 못한,
그러나 나중에 야훼의 안배로 아이를 낳은 여인들,
즉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창세 11,30; 17,17; 18,11-14)
이사악의 아내 리브가(창세 25,21), 마노아의 아내요 삼손의 어머니(판관 13,2-3),
엘카나의 아내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1사무 1,5) 등과 같은 처지의 엘리사벳에게서 태어난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들 예수는 사상 초유의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다는 것이 오늘 복음의 핵심이다.
남자를 모르는 동정녀가 어떻게 아기를 가질 수 있을까 하는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뜨거운 토론의 대상이다. 학계에서도 이에 대한 설이 구구하다.
동정녀 잉태는 분명 우리 가톨릭교회의 “사도신경” 안에 자리 잡은 신앙 조목이다.
신앙 조목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말미암은
동정녀 잉태를 믿는다, 또는 믿어야 한다는 신앙 조목이다.
그런데 동정녀 잉태에 대한 토론의 여지가 있다는 것은
이 신앙의 조목이 事實史인지 意味史인지에 대한 구별이다
이 구별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구별은 칼로 물을 베는 것과 같다.
이는 감성과 이성이, 철학과 신화가, 로고스와 뮈토스가
동시에 인간 정신세계에 속해 있는 것과도 같다.
동정녀 잉태가 생물학적이고 물리적인 측면에서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건의 한편만을 이야기한 것이다.
사건은 다른 한편은 아직 이야기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따라서 동정녀 잉태의 문제를 인간의 측면에서 해결하려 들면,
시원한 답을 얻지 못한다.
동정녀 잉태는 세상 안에 통상 존재하는 수백만 잉태 중의 하나가 아니다.
남녀의 관계를 통한 생물학적 잉태만을 정상적으로 인정하는 세상의 눈은
동정녀 잉태를 생물학적 이변으로 밖에 볼 수 없다는 말이다.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하느님께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이 되시는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와 인간 마리아의 수용에 있다.
하느님이 인간이 될 수 있는 방법은 인간의 육을 취하는 길이며,
육을 취한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방법은 인간적 관계를 배제하는 길이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스스로 마리아를 찾아가 동의를 구하셨고,
마리아의 동정성을 겸손과 순명으로 받으신 것이다.
구약의 石女들은 그 청이 하느님에 의해 받아들여지나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찾아가 청을 건넴으로써
마리아는 다른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은총을 가득히 받은 여인이 된 것이다.
주님의 성탄은 이렇게 하느님께서 인간을 찾아오는 사건이다.
우리 안에 인간이 되시고자 청을 넣으러 오시는 것이다.
인간이 되시려는 하느님의 청에 나는 과연 무엇이라 답을 드리겠는가?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