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는 철저하게 小乘의 길, 즉 사회보다는 개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므로 퇴계에게 있어서는 어떤 위대한 진리도 어떤 영웅적 사업도 자기 자신에게 있어서 참됨(眞)을 절실하게 體認함이 없이는 의미를 가지기 어렵다.
퇴계 이황.
유난히 춥고 눈도 많이 내렸던 올 겨울, 필자는 잊기 어려운 두 가지 일을 경험했다.
첫째는 2011년 1월 20, 21일 양일간 한국정치사상학회 동계 세미나에 참석한 일이고, 둘째는 외조부상(喪)을 당한 일이다. 외할아버지께서는 1월 24일 작고(作故)하셨다.
한국정치사상학회 동계 세미나는 경상북도 안동에서 개최되었다. 퇴계(退溪)의 자취를 경험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그런 의미에서 <키워드로 풀어보는 조선의 선비정신> 3월의 선비는 퇴계 이황(退溪 李滉·1501~1570)으로 정했다. 그러나 키워드가 문제였다. 퇴계라는 큰 산맥을 하나의 키워드로 정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퇴계의 경우 우리가 사용할 모든 키워드를 다 가져다 써도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살아봐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낱말의 뜻을 사전적 의미로 인식하고, 그 인식을 가지고 국어시험에서 말의 의미를 찾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말이 가지고 있는 참의미는 살아보지 않고는, 다시 말해서 직접 맛보지 않고서는 알기 어렵다는 것을 필자는 경험했다. 바로 95세의 연세로 돌아가신 필자의 외할아버지를 통해서 말이다.
그분을 통해 처음 배운 단어는 해로(偕老)였다. 벌써 오래 전에 자손들은 외할아버지 내외분께 결혼 60주년 기념인 회혼례(回婚禮)를 열어 드렸었다. 그때 필자는 ‘함께 늙어 간다’는 사전적인 의미로만 이해하던 ‘해로’라는 말을 직접 몸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이번에 외할아버지가 떠나시면서 가르쳐 주신 말은 고종명(考終命)이었다.
유교에서는 다섯 가지 복으로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 등을 들고 있다. 고종명! 자기에게 주어진 명(命)대로 살다가 편안하게 떠난다는 고종명은 말같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외할아버지는 고종명을 몸소 보여주시고 정말 편안하게 떠나셨다. 며칠간 혼수상태로 계시긴 하였지만 조금도 고통스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다.
여기서 필자가 개인사를 나열한 이유는 어린 시절의 필자를 유난히 예뻐하셨던 외할아버지와의 이별이 슬퍼서이기도 하지만, 필자의 소임인 <키워드로 풀어보는 조선의 선비정신>을 쓰는 과정에서, 학회의 여행으로 퇴계를 선정하고 난 후 구체적인 사례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고종명’이라는 단어가 필자에게 화두(話頭)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퇴계의 자취를 따라가는 것은 마치 백두대간(白頭大幹)을 종주(縱走)하는 일과 같다. 백두대간을 한 번에 종주하기란 여간 벅찬 일이 아니다. 몇 번에 나누어 종주하는 것이 보통이므로 이 글에서 두 가지 장면에 초점을 맞춘다.
하나는 퇴계의 서거(逝去) 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출처(出處)와 관계된 장면이다.
이 두 가지 장면과 ‘인(仁)’이라는 글자를 연결시키는 것으로 퇴계라는 거대한 산맥의 봉우리 한 개와 골짜기 한 곳을 여행해 보고자 한다. 인이라는 글자를 정의하기보다는 퇴계의 구체적 모습을 생생하게 복원해 내는 과정을 통해서 퇴계의 진면목과 더불어 인이라는 개념도 실제적인 모습으로 우리 앞에 보일 것으로 기대한다.
퇴계의 마지막 나날
《퇴계집》에는 퇴계선생의 <고종기(考終記)>가 비교적 생생하게 실려 있다. 마침 우리 학회가 도산서원(陶山書院)을 방문했던 날짜는 음력으로 12월 18일이었다. 퇴계는 12월 8일 서거하였다. 퇴계선생이 서거한 바로 그즈음에 우리는 도산서원에 있었다. 이제 향(香)을 사르는 마음으로 퇴계의 <고종기>를 읽어 본다.
퇴계는 서거 한 달 전인 경오년(庚午年·1570년) 11월 9일 종가(宗家) 제사에 참여하여 그곳에서 머물 때 감기에 걸린 것이 악화되고 만다. 이때 퇴계는 70세였다. 기후가 편치 않으니 제사에 참석하지 말기를 권하는 자제들에게 퇴계는, “내가 이제 늙어 제사를 지낼 날이 많지 않으니 참석하지 않을 수 없다”며 참석한 것이다.
11월 15일. 퇴계는 자리에 누운 채 기대승(奇大升·1527~1572)이 보낸 편지에 답장을 보낸다. 퇴계보다 26세 연하인 기대승과 퇴계와의 8년간에 걸친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은 한국 유학사(儒學史)에서 유명하다.
하지만 이 글에서 이 논쟁의 내용은 다루지 않기로 한다. 다만 이승을 떠나는 퇴계의 마지막 학문 활동인 이 편지에서 퇴계는 치지격물(致知格物)에 관한 자신의 기존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시인한 내용을 자제로 하여금 정서(正書)하게 하여 기대승 등에게 보냈다는 내용만을 밝힌다.
12월 2일. 퇴계의 병세가 악화되었다. 약을 복용한 뒤 퇴계는 그날이 마침 ‘장인의 제삿날이니 고기반찬을 놓지 말 것’을 지시하였다.
12월 3일. 병세가 위독해지자 퇴계는 자제들로 하여금 타인(他人)의 서적들을 잃어버리지 말고 남김없이 돌려줄 것을 지시하였다. 그는 또한 맏손자 안도(安道)에게 다른 사람이 빌려간 경주본(慶州本) 《심경(心經)》을 교정한 책을 찾아와서 경주 집경전(集經殿) 참봉 한안명(韓安命)에게 보내 고치게 하였다. 그리고 이날 퇴계는 이질로 인해 방안에서 설사를 하고 만다. 퇴계는 방안에 있는 화분의 매화에게 미안하다면서 자신을 돌보아 주던 제자로 하여금 매화화분을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을 부탁하였다.
퇴계의 매화 사랑이야 유명한 일이지만 자신을 돌보아 주던 제자보다도 매화에게 미안함을 느끼는 퇴계의 자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퇴계의 유언
서거 4일 전(12월 4일). 조카로 하여금 자신의 사후(死後)의 일에 관하여 유계(遺戒)를 받아 적게 하였다. 유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예장(禮葬)을 사양할 것. 만약 예조(禮曹)에서 예장을 하겠다고 하면 유언이라고 자세히 전해 반드시 사양하라.
2. 유밀과(油密果)를 쓰지 말라.
3. 비석을 세우지 말고 다만 조그만 돌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만 쓰고, 뒷면에는 고향과 세계(世系)와 지행(志行)과 출처의 대강만을 간략히 쓰라. 이런 일을 기대승 같은 사람에게 부탁하면 그는 반드시 사실에도 없는 일을 늘어놓아 세상에 웃음거리를 만들 것이므로, 내가 일찍부터 스스로 명문(銘文)을 지었으니, 그 명문대로 쓰는 것이 좋겠다.
4. 선대(先代)의 명문을 완성하지 못한 것이 한으로 남는다. 준비는 다 되었으니 집안 여러 사람에게 물어서 새겨 세우게 하라.
5. 사람들이 사방에서 보고 들을 것이니, 장례의 모든 일을 반드시 예를 아는 유식한 사람에게 널리 묻고 두루 의논해서, 지금 세상에도 맞고, 옛날 예법에도 틀리지 않도록 하라.
마지막으로 집안일을 처리하는 두어 가지를 덧붙여서 자신의 유언을 마무리하였다. 이때 퇴계는 천식이 심했는데, 여기까지 오자 시원하게 병이 몸에서 떠난 듯하였고, 다 쓰자 퇴계 스스로 한 번 훑어보고 봉(封)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이에 조카가 봉하고 도장을 찍자 다시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다. 이날 오후에는 제자들을 만나 보려 하여, 자제들이 그만두기를 청했으나, “생사(生死)가 갈리는 마당에 안 볼 수 없다(死生之際 不可不見)” 하고 웃옷을 입고 제자들을 만났다.
서거 3일 전(12월 5일). 조카에게 “조정에서 대간(臺諫)들이 을사사화(乙巳士禍)의 잘못된 훈공(勳功)을 삭제하자”는 주장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묻고, “아직까지 윤허가 내리지 않았다”는 대답에 탄식을 하였다.
서거 하루 전(12월 7일). 병이 위중해진 퇴계는 제자 이덕홍(李德弘)에게 서적을 맡아 달라는 당부를 하였다.
12월 8일. 이날 아침, 퇴계는 자신의 설사로 인해 미안함을 느꼈던 그 매화 화분에 물을 주라고 하였다. 이날은 날씨가 쾌청하였는데 오후 5시경이 되자 갑자기 흰 눈이 집 위에 한 치 가량 쌓였다. 이때 퇴계는 자리를 정돈하게 하고 부축하여 일어나 않은 채로 서거하였다. 그리고 그의 서거와 함께 눈이 개었다.
이상이 퇴계의 <고종기> 내용이다. 퇴계는 자신의 삶을 마감하면서 먼저 학문 활동에서의 미진한 부분을 정리하였다. 그리고 문중(門中)의 일을 마무리하였으며, 제자들과 가족들과의 이별을 준비하였다.
얼마나 인간적인가? 이보다 얼마나 더 완전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
여기서 필자는 2009년 2월 선종한 고(故) 김수환(金壽煥) 추기경의 죽음과 함께 촉발된 것으로 알려진 ‘웰다잉(well-dying)’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정승으로 거론되자 서둘러 낙향
이퇴계가 학문을 닦으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던 도산서원.
이제 퇴계의 출처에 대해 살펴보자. 1567년 명종(明宗)이 승하하고 16세의 소년 왕 선조(宣祖)가 등극했다. 선조는 퇴계를 예조(禮曹)판서에 임명했다. 하지만 퇴계는 한사코 사양하였다. 그 이전에 명종이 여러 번을 불렀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가지 않던 퇴계는 명종 22년(1567년) 6월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일을 맡아 달라고 명종이 부르자 이것까지 사양할 수 없어서 상경(上京)했었다.
이때 이조좌랑(吏曹佐郞)이었던 율곡(栗谷)은 퇴계에게 물러가지 말고 어린 선조 임금에게 힘이 되어 줄 것을 간곡하게 청했다. “할 일이 많고 어려움이 쌓여 있는 이때 물러나는 것은 도리가 아닙니다”라는 율곡에게 퇴계는, “도리는 아니지만 몸이 늙어 병들었고, 무엇보다도 나는 그릇이 아니네”라고 답한다. 율곡은 다시, “실제적인 일들은 다른 사람들이 처리할 것이니 선생님은 경연(經筵)에 참석해 주시기만 해도 분위기가 달라집니다”라고 간청을 했다. 하지만 퇴계는, “내 재주로는 남에게 이익이 미치지 못하고 내 몸에 절망만 더해질 뿐이네”라며 도산으로 퇴거(退去)해 버린다.
율곡의 간곡한 만류도 뿌리치고, 임금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게다가 승하한 명종의 장례를 치르지도 않은 상태에서 퇴계는 귀향했다. 그러자 당시 사람들이 모두 퇴계를 의심하였다.
영의정 이준경(李浚慶·1499~1572)은 이와 같은 퇴계의 태도를 ‘산새’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사실 이 점은 필자도 마찬가지였다. 《율곡집》을 읽으면서 필자는 퇴계의 정치와 권력을 대하는 결벽증에 가까운 태도를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그런데 《퇴계집》에는 퇴계가 이때 서둘러 낙향(落鄕)을 한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기대승이 새로 왕이 된 선조를 만날 때마다 “퇴계의 도덕과 행의(行義)는 정자와 주자에 견주어도 부끄럽지 않으니, 급히 불러서 도(道)를 행하고 세상을 구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거듭 주장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기대승의 말에 부담을 느끼던 퇴계에게 마침 한 제자가 와서 “기대승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이제는 ‘퇴계를 정승(政丞)으로 임명해야 도가 행해질 수 있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리려 한다”는 말을 듣자, 퇴계는 주위에 알리지도 않은 채 낙향을 한 것이다. 이제 퇴계의 <고종기>에 나와 있는 그의 유언 가운데 기대승에게 자신의 후사를 맡기면 과장을 하여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고 특별히 언급한 이유도 알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선조는 거듭 퇴계를 부른다. 퇴계 역시 거듭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선조의 계속되는 요청에 1568년 7월 입궐하여 유명한 <성학십도(聖學十道)>를 선조에게 올리고 자신이 할 일은 이것뿐이라면서 8개월 만인 1569년 3월 또다시 귀향(歸鄕)해 버린다.
士禍의 시대
사대부(士大夫)란 사(士)와 대부(大夫)를 함께 일컫는 말이다. 선비(士)가 자신을 닦는(修己) 사람이라면, 대부란 벼슬에 나아가 치인(治人)하는 사람을 말한다. 결국 사대부란 수기치인(修己治人)하는 인간들을 일컫는다. 그런데 퇴계는 철저하게 선비의 삶을 고집하였다. 그에게 대부의 길은 너무나 불편한 것이었다.
왜 그랬을까? 물론 개인적인 기질의 측면이 있을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 그로 하여금 물러가게 만들었을 개연성이 높다.
퇴계의 시대는 바로 사화(士禍)의 시대였다. 무오(戊午·1498)사화는 퇴계가 출생하기 2년 전에 일어났다. 이후, 1504년의 갑자(甲子)사화, 1519년의 기묘(己卯)사화, 그리고 1545년의 을사사화를 퇴계는 모두 경험하였다. 게다가 50세가 되던 1550년에는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이었던 중형(仲兄) 이해(李瀣)가 이기(李?)의 모함(謀陷)으로 유배를 가던 중 장독(杖毒)으로 인해 사망하는 일까지 겪게 된다.
이를 통해 치인(治人)의 길에서 물러나고자 했던 퇴계의 모습이 조금은 이해가 간다. 퇴계라는 호는 을사사화 후 낙향해 살던 낙동강 상류의 토계(兎溪)를 퇴계로 고쳐서 사용한 것인데, 평생 ‘물러남’을 희망하면서 살았던 그의 행적을 대변하는 호(號)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퇴계가 초해 놓았던 자찬묘비명(自撰墓碑銘)의 일부를 살펴보자.
나면서 어리석고 자라서는 병도 많아 중간에 어쩌다가 학문을 즐겼는데 만년에 어쩌다가 벼슬을 탐했구나 학문은 구할수록 더욱더 멀어지고 벼슬은 마다해도 더욱더 주어졌네 나아가서 행하려니 넘어질 뿐이었고 물러나서 올바르게 지켰도다 (···) 근심 속에 낙이 있고 낙 속에 근심이 있는 법 조화 타고 돌아가니 무얼 다시 구하리오
이제 설사를 한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매화에게 보여주기 싫어하고 마지막 작별의 날 아침 그 매화에 물을 주고 떠나는 퇴계의 행동을 이해해 보기로 하자. 도산서원에서 필자의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매화나무였다. 퇴계가 거처했던 방 옆으로 조성된 계단식 정원에는 온통 매화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아직은 꽃을 피우지 않아 아쉬웠지만 그 나무들을 보는 것으로 반가웠다. 퇴계는 말한다.
“인(仁)이란 천지가 만물을 생육하는 마음으로서, 사람은 그것을 본성으로 타고났다.” 그러므로 이 인이야 말로 “사람의 이치”다. 그래서 인이란 결국 “사람들을 사랑하고 만물을 이롭게 하려는 따뜻한 마음”에 다름 아니다.
퇴계는 매화와 자신 사이의 간격을 없애 버림으로써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게 보내는 따뜻한 눈빛을 간직하고 있었다. 진정한 사랑은 이러한 측은지심(惻隱之心)에서 발원된다. 퇴계는 말한다.
“나의 몸에 충만한 측은지심이 만물에 관류하여 막힘없이 두루 통하는 것이 사랑의 본질”이라고.
퇴계의 학문은 벼슬을 하려는 학문이 아니라, 성현(聖賢)의 가르침을 체화(體化)하려는 학문이다.
남을 위한 학문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학문이며, 정치를 위한 학문이 아니라 수양을 위한 학문이다.
변화무쌍한 현실 세계의 반영인 정치를 뒤로하고 변함없고 순수한 학문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했던 퇴계의 태도는 철저히 소승적(小乘的)이었다.
대중을 교화하는 쪽에 무게를 두는 대승(大乘)불교에 대해 소승의 차원에서는 중생(衆生)의 구제를 위해 먼저 자신부터 해탈(解脫)해야 한다고 맞선다. 정답이 있을 수 없는 이 두 갈림길에서 퇴계는 철저하게 소승의 길, 즉 사회보다는 개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므로 퇴계에게 있어서는 어떤 위대한 진리도 어떤 영웅적 사업도 자기 자신에게 있어서 참됨(眞)을 절실하게 체인(體認)함이 없이는 의미를 가지기 어렵다.
퇴계가 도산에 처음으로 지은 집의 당호(堂號)가 바로 양진암(養眞庵)이었다는 점에서도 참됨을 향하는 퇴계의 자세를 살펴볼 수 있다.
퇴계가 추구한 정신세계는 인(仁)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과, 천지만물이 본래 나와 일체라는 것을 체득함으로써 나의 마음을 온전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퇴계의 사고는 윤리 도덕이라는 측면을 자신의 밖이 아닌, 바로 자기 안에서 구하는 방식으로 발전했다.
퇴계는 정치의 장(場)에 참여하게 되면 자신을 지킬 수 없다고 인식했기에 낙향을 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두 개인의 내면적 도덕만을 주목한다면 공동체 의식은 약화되기 마련이다. 이런 점에서 퇴계의 태도는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보다는 자신의 수양에 초점이 가게 되고 만다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주제에 대해서는 여기서 더 이상 논의하지 않기로 한다.
仁이란 무엇인가
‘해로(偕老)’를 글자상으로 알 때와 온 몸으로 인식할 때의 차이를 우리는 구분할 수 있다. 우리가 어질다(仁)는 단어의 의미를 《논어(論語)》를 수없이 반복하여 읽고 암기를 한다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공자는 인(仁)의 개념보다 인의 실천을 강조했다. 공자(孔子)는 인을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행위가 있어야 인이란 말이 있을 수 있다. 사랑이란 행위가 있기 전에는 인이란 없는 것이다. 퇴계가 인이라는 글자의 뜻풀이에 머물렀다면 어찌 퇴계가 되었겠는가.
맹자(孟子)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측은해하는 마음이 인의 실마리”라고 부연했다.
맹자에 따르면 인은 ‘측은지심’을 말하는 것으로, 어린아이가 우물을 향해서 기어갈 때 이를 차마 그냥 보고 있지 못하는 마음이다. 즉 생명을 아끼는 마음이다. 그래서 인(仁)이란 글자는 생명을 움트게 하는 ‘곡식의 씨눈’을 가리키는 뜻으로도 쓰였다. 실제로 복숭아씨를 도인(桃仁)이라 부르고, 살구씨는 행인(杏仁)이라 부르는 점에서 인은 흥미롭다.
한편 정명도(鄭明道·1032~1085)는 인을 “만물을 자신의 일부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그는 “만약 사물을 자신과 다른 것으로 여겨서 자신과는 상관이 없는 것으로 여기는 행위는 마치 수족의 마비로 인해 혈기가 통하지 않아 그것이 내 몸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것과도 같다”고 말한다.
지금도 한의학(韓醫學)에서 몸이 불편한 상태를 불인(不仁)이라고 표현한다. 마지막으로 퇴계가 그토록 닮고자 했던 주자(朱子·1130~1200)는 인을, “사랑의 원리이며 마음의 덕이다”라고 설명했다.
공자와 맹자 정자(程子)와 주자로 이어지는 인의 실상은 이제 매화를 향하는 퇴계의 눈길을 통해서 더욱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은가. 다시 말해 이 세상을 떠나면서 함께 생활하던 매화에게 물을 주고 가는 그 모습이 바로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인의 구체성이 아닐까.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완전한 인을 이루기 위해 퇴거를 하였고, 더 나아가 자연과의 사랑까지 추구한 퇴계의 영전(靈前)에 옷깃을 여민다. 그리고 이번에 떠나신 외조부의 영전에 정성을 모아서 명복(冥福)을 빈다.⊙
퇴계는 철저하게 小乘의 길, 즉 사회보다는 개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므로 퇴계에게 있어서는 어떤 위대한 진리도 어떤 영웅적 사업도 자기 자신에게 있어서 참됨(眞)을 절실하게 體認함이 없이는 의미를 가지기 어렵다.
퇴계 이황.
유난히 춥고 눈도 많이 내렸던 올 겨울, 필자는 잊기 어려운 두 가지 일을 경험했다.
첫째는 2011년 1월 20, 21일 양일간 한국정치사상학회 동계 세미나에 참석한 일이고, 둘째는 외조부상(喪)을 당한 일이다. 외할아버지께서는 1월 24일 작고(作故)하셨다.
한국정치사상학회 동계 세미나는 경상북도 안동에서 개최되었다. 퇴계(退溪)의 자취를 경험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그런 의미에서 <키워드로 풀어보는 조선의 선비정신> 3월의 선비는 퇴계 이황(退溪 李滉·1501~1570)으로 정했다. 그러나 키워드가 문제였다. 퇴계라는 큰 산맥을 하나의 키워드로 정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퇴계의 경우 우리가 사용할 모든 키워드를 다 가져다 써도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살아봐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낱말의 뜻을 사전적 의미로 인식하고, 그 인식을 가지고 국어시험에서 말의 의미를 찾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말이 가지고 있는 참의미는 살아보지 않고는, 다시 말해서 직접 맛보지 않고서는 알기 어렵다는 것을 필자는 경험했다. 바로 95세의 연세로 돌아가신 필자의 외할아버지를 통해서 말이다.
그분을 통해 처음 배운 단어는 해로(偕老)였다. 벌써 오래 전에 자손들은 외할아버지 내외분께 결혼 60주년 기념인 회혼례(回婚禮)를 열어 드렸었다. 그때 필자는 ‘함께 늙어 간다’는 사전적인 의미로만 이해하던 ‘해로’라는 말을 직접 몸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이번에 외할아버지가 떠나시면서 가르쳐 주신 말은 고종명(考終命)이었다.
유교에서는 다섯 가지 복으로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 등을 들고 있다. 고종명! 자기에게 주어진 명(命)대로 살다가 편안하게 떠난다는 고종명은 말같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외할아버지는 고종명을 몸소 보여주시고 정말 편안하게 떠나셨다. 며칠간 혼수상태로 계시긴 하였지만 조금도 고통스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다.
여기서 필자가 개인사를 나열한 이유는 어린 시절의 필자를 유난히 예뻐하셨던 외할아버지와의 이별이 슬퍼서이기도 하지만, 필자의 소임인 <키워드로 풀어보는 조선의 선비정신>을 쓰는 과정에서, 학회의 여행으로 퇴계를 선정하고 난 후 구체적인 사례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고종명’이라는 단어가 필자에게 화두(話頭)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퇴계의 자취를 따라가는 것은 마치 백두대간(白頭大幹)을 종주(縱走)하는 일과 같다. 백두대간을 한 번에 종주하기란 여간 벅찬 일이 아니다. 몇 번에 나누어 종주하는 것이 보통이므로 이 글에서 두 가지 장면에 초점을 맞춘다.
하나는 퇴계의 서거(逝去) 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출처(出處)와 관계된 장면이다.
이 두 가지 장면과 ‘인(仁)’이라는 글자를 연결시키는 것으로 퇴계라는 거대한 산맥의 봉우리 한 개와 골짜기 한 곳을 여행해 보고자 한다. 인이라는 글자를 정의하기보다는 퇴계의 구체적 모습을 생생하게 복원해 내는 과정을 통해서 퇴계의 진면목과 더불어 인이라는 개념도 실제적인 모습으로 우리 앞에 보일 것으로 기대한다.
퇴계의 마지막 나날
《퇴계집》에는 퇴계선생의 <고종기(考終記)>가 비교적 생생하게 실려 있다. 마침 우리 학회가 도산서원(陶山書院)을 방문했던 날짜는 음력으로 12월 18일이었다. 퇴계는 12월 8일 서거하였다. 퇴계선생이 서거한 바로 그즈음에 우리는 도산서원에 있었다. 이제 향(香)을 사르는 마음으로 퇴계의 <고종기>를 읽어 본다.
퇴계는 서거 한 달 전인 경오년(庚午年·1570년) 11월 9일 종가(宗家) 제사에 참여하여 그곳에서 머물 때 감기에 걸린 것이 악화되고 만다. 이때 퇴계는 70세였다. 기후가 편치 않으니 제사에 참석하지 말기를 권하는 자제들에게 퇴계는, “내가 이제 늙어 제사를 지낼 날이 많지 않으니 참석하지 않을 수 없다”며 참석한 것이다.
11월 15일. 퇴계는 자리에 누운 채 기대승(奇大升·1527~1572)이 보낸 편지에 답장을 보낸다. 퇴계보다 26세 연하인 기대승과 퇴계와의 8년간에 걸친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은 한국 유학사(儒學史)에서 유명하다.
하지만 이 글에서 이 논쟁의 내용은 다루지 않기로 한다. 다만 이승을 떠나는 퇴계의 마지막 학문 활동인 이 편지에서 퇴계는 치지격물(致知格物)에 관한 자신의 기존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시인한 내용을 자제로 하여금 정서(正書)하게 하여 기대승 등에게 보냈다는 내용만을 밝힌다.
12월 2일. 퇴계의 병세가 악화되었다. 약을 복용한 뒤 퇴계는 그날이 마침 ‘장인의 제삿날이니 고기반찬을 놓지 말 것’을 지시하였다.
12월 3일. 병세가 위독해지자 퇴계는 자제들로 하여금 타인(他人)의 서적들을 잃어버리지 말고 남김없이 돌려줄 것을 지시하였다. 그는 또한 맏손자 안도(安道)에게 다른 사람이 빌려간 경주본(慶州本) 《심경(心經)》을 교정한 책을 찾아와서 경주 집경전(集經殿) 참봉 한안명(韓安命)에게 보내 고치게 하였다. 그리고 이날 퇴계는 이질로 인해 방안에서 설사를 하고 만다. 퇴계는 방안에 있는 화분의 매화에게 미안하다면서 자신을 돌보아 주던 제자로 하여금 매화화분을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을 부탁하였다.
퇴계의 매화 사랑이야 유명한 일이지만 자신을 돌보아 주던 제자보다도 매화에게 미안함을 느끼는 퇴계의 자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퇴계의 유언
서거 4일 전(12월 4일). 조카로 하여금 자신의 사후(死後)의 일에 관하여 유계(遺戒)를 받아 적게 하였다. 유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예장(禮葬)을 사양할 것. 만약 예조(禮曹)에서 예장을 하겠다고 하면 유언이라고 자세히 전해 반드시 사양하라.
2. 유밀과(油密果)를 쓰지 말라.
3. 비석을 세우지 말고 다만 조그만 돌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만 쓰고, 뒷면에는 고향과 세계(世系)와 지행(志行)과 출처의 대강만을 간략히 쓰라. 이런 일을 기대승 같은 사람에게 부탁하면 그는 반드시 사실에도 없는 일을 늘어놓아 세상에 웃음거리를 만들 것이므로, 내가 일찍부터 스스로 명문(銘文)을 지었으니, 그 명문대로 쓰는 것이 좋겠다.
4. 선대(先代)의 명문을 완성하지 못한 것이 한으로 남는다. 준비는 다 되었으니 집안 여러 사람에게 물어서 새겨 세우게 하라.
5. 사람들이 사방에서 보고 들을 것이니, 장례의 모든 일을 반드시 예를 아는 유식한 사람에게 널리 묻고 두루 의논해서, 지금 세상에도 맞고, 옛날 예법에도 틀리지 않도록 하라.
마지막으로 집안일을 처리하는 두어 가지를 덧붙여서 자신의 유언을 마무리하였다. 이때 퇴계는 천식이 심했는데, 여기까지 오자 시원하게 병이 몸에서 떠난 듯하였고, 다 쓰자 퇴계 스스로 한 번 훑어보고 봉(封)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이에 조카가 봉하고 도장을 찍자 다시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다. 이날 오후에는 제자들을 만나 보려 하여, 자제들이 그만두기를 청했으나, “생사(生死)가 갈리는 마당에 안 볼 수 없다(死生之際 不可不見)” 하고 웃옷을 입고 제자들을 만났다.
서거 3일 전(12월 5일). 조카에게 “조정에서 대간(臺諫)들이 을사사화(乙巳士禍)의 잘못된 훈공(勳功)을 삭제하자”는 주장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묻고, “아직까지 윤허가 내리지 않았다”는 대답에 탄식을 하였다.
서거 하루 전(12월 7일). 병이 위중해진 퇴계는 제자 이덕홍(李德弘)에게 서적을 맡아 달라는 당부를 하였다.
12월 8일. 이날 아침, 퇴계는 자신의 설사로 인해 미안함을 느꼈던 그 매화 화분에 물을 주라고 하였다. 이날은 날씨가 쾌청하였는데 오후 5시경이 되자 갑자기 흰 눈이 집 위에 한 치 가량 쌓였다. 이때 퇴계는 자리를 정돈하게 하고 부축하여 일어나 않은 채로 서거하였다. 그리고 그의 서거와 함께 눈이 개었다.
이상이 퇴계의 <고종기> 내용이다. 퇴계는 자신의 삶을 마감하면서 먼저 학문 활동에서의 미진한 부분을 정리하였다. 그리고 문중(門中)의 일을 마무리하였으며, 제자들과 가족들과의 이별을 준비하였다.
얼마나 인간적인가? 이보다 얼마나 더 완전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
여기서 필자는 2009년 2월 선종한 고(故) 김수환(金壽煥) 추기경의 죽음과 함께 촉발된 것으로 알려진 ‘웰다잉(well-dying)’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정승으로 거론되자 서둘러 낙향
이퇴계가 학문을 닦으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던 도산서원.
이제 퇴계의 출처에 대해 살펴보자. 1567년 명종(明宗)이 승하하고 16세의 소년 왕 선조(宣祖)가 등극했다. 선조는 퇴계를 예조(禮曹)판서에 임명했다. 하지만 퇴계는 한사코 사양하였다. 그 이전에 명종이 여러 번을 불렀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가지 않던 퇴계는 명종 22년(1567년) 6월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일을 맡아 달라고 명종이 부르자 이것까지 사양할 수 없어서 상경(上京)했었다.
이때 이조좌랑(吏曹佐郞)이었던 율곡(栗谷)은 퇴계에게 물러가지 말고 어린 선조 임금에게 힘이 되어 줄 것을 간곡하게 청했다. “할 일이 많고 어려움이 쌓여 있는 이때 물러나는 것은 도리가 아닙니다”라는 율곡에게 퇴계는, “도리는 아니지만 몸이 늙어 병들었고, 무엇보다도 나는 그릇이 아니네”라고 답한다. 율곡은 다시, “실제적인 일들은 다른 사람들이 처리할 것이니 선생님은 경연(經筵)에 참석해 주시기만 해도 분위기가 달라집니다”라고 간청을 했다. 하지만 퇴계는, “내 재주로는 남에게 이익이 미치지 못하고 내 몸에 절망만 더해질 뿐이네”라며 도산으로 퇴거(退去)해 버린다.
율곡의 간곡한 만류도 뿌리치고, 임금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게다가 승하한 명종의 장례를 치르지도 않은 상태에서 퇴계는 귀향했다. 그러자 당시 사람들이 모두 퇴계를 의심하였다.
영의정 이준경(李浚慶·1499~1572)은 이와 같은 퇴계의 태도를 ‘산새’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사실 이 점은 필자도 마찬가지였다. 《율곡집》을 읽으면서 필자는 퇴계의 정치와 권력을 대하는 결벽증에 가까운 태도를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그런데 《퇴계집》에는 퇴계가 이때 서둘러 낙향(落鄕)을 한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기대승이 새로 왕이 된 선조를 만날 때마다 “퇴계의 도덕과 행의(行義)는 정자와 주자에 견주어도 부끄럽지 않으니, 급히 불러서 도(道)를 행하고 세상을 구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거듭 주장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기대승의 말에 부담을 느끼던 퇴계에게 마침 한 제자가 와서 “기대승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이제는 ‘퇴계를 정승(政丞)으로 임명해야 도가 행해질 수 있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리려 한다”는 말을 듣자, 퇴계는 주위에 알리지도 않은 채 낙향을 한 것이다. 이제 퇴계의 <고종기>에 나와 있는 그의 유언 가운데 기대승에게 자신의 후사를 맡기면 과장을 하여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고 특별히 언급한 이유도 알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선조는 거듭 퇴계를 부른다. 퇴계 역시 거듭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선조의 계속되는 요청에 1568년 7월 입궐하여 유명한 <성학십도(聖學十道)>를 선조에게 올리고 자신이 할 일은 이것뿐이라면서 8개월 만인 1569년 3월 또다시 귀향(歸鄕)해 버린다.
士禍의 시대
사대부(士大夫)란 사(士)와 대부(大夫)를 함께 일컫는 말이다. 선비(士)가 자신을 닦는(修己) 사람이라면, 대부란 벼슬에 나아가 치인(治人)하는 사람을 말한다. 결국 사대부란 수기치인(修己治人)하는 인간들을 일컫는다. 그런데 퇴계는 철저하게 선비의 삶을 고집하였다. 그에게 대부의 길은 너무나 불편한 것이었다.
왜 그랬을까? 물론 개인적인 기질의 측면이 있을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 그로 하여금 물러가게 만들었을 개연성이 높다.
퇴계의 시대는 바로 사화(士禍)의 시대였다. 무오(戊午·1498)사화는 퇴계가 출생하기 2년 전에 일어났다. 이후, 1504년의 갑자(甲子)사화, 1519년의 기묘(己卯)사화, 그리고 1545년의 을사사화를 퇴계는 모두 경험하였다. 게다가 50세가 되던 1550년에는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이었던 중형(仲兄) 이해(李瀣)가 이기(李?)의 모함(謀陷)으로 유배를 가던 중 장독(杖毒)으로 인해 사망하는 일까지 겪게 된다.
이를 통해 치인(治人)의 길에서 물러나고자 했던 퇴계의 모습이 조금은 이해가 간다. 퇴계라는 호는 을사사화 후 낙향해 살던 낙동강 상류의 토계(兎溪)를 퇴계로 고쳐서 사용한 것인데, 평생 ‘물러남’을 희망하면서 살았던 그의 행적을 대변하는 호(號)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퇴계가 초해 놓았던 자찬묘비명(自撰墓碑銘)의 일부를 살펴보자.
나면서 어리석고 자라서는 병도 많아 중간에 어쩌다가 학문을 즐겼는데 만년에 어쩌다가 벼슬을 탐했구나 학문은 구할수록 더욱더 멀어지고 벼슬은 마다해도 더욱더 주어졌네 나아가서 행하려니 넘어질 뿐이었고 물러나서 올바르게 지켰도다 (···) 근심 속에 낙이 있고 낙 속에 근심이 있는 법 조화 타고 돌아가니 무얼 다시 구하리오
이제 설사를 한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매화에게 보여주기 싫어하고 마지막 작별의 날 아침 그 매화에 물을 주고 떠나는 퇴계의 행동을 이해해 보기로 하자. 도산서원에서 필자의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매화나무였다. 퇴계가 거처했던 방 옆으로 조성된 계단식 정원에는 온통 매화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아직은 꽃을 피우지 않아 아쉬웠지만 그 나무들을 보는 것으로 반가웠다. 퇴계는 말한다.
“인(仁)이란 천지가 만물을 생육하는 마음으로서, 사람은 그것을 본성으로 타고났다.” 그러므로 이 인이야 말로 “사람의 이치”다. 그래서 인이란 결국 “사람들을 사랑하고 만물을 이롭게 하려는 따뜻한 마음”에 다름 아니다.
퇴계는 매화와 자신 사이의 간격을 없애 버림으로써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게 보내는 따뜻한 눈빛을 간직하고 있었다. 진정한 사랑은 이러한 측은지심(惻隱之心)에서 발원된다. 퇴계는 말한다.
“나의 몸에 충만한 측은지심이 만물에 관류하여 막힘없이 두루 통하는 것이 사랑의 본질”이라고.
퇴계의 학문은 벼슬을 하려는 학문이 아니라, 성현(聖賢)의 가르침을 체화(體化)하려는 학문이다.
남을 위한 학문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학문이며, 정치를 위한 학문이 아니라 수양을 위한 학문이다.
변화무쌍한 현실 세계의 반영인 정치를 뒤로하고 변함없고 순수한 학문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했던 퇴계의 태도는 철저히 소승적(小乘的)이었다.
대중을 교화하는 쪽에 무게를 두는 대승(大乘)불교에 대해 소승의 차원에서는 중생(衆生)의 구제를 위해 먼저 자신부터 해탈(解脫)해야 한다고 맞선다. 정답이 있을 수 없는 이 두 갈림길에서 퇴계는 철저하게 소승의 길, 즉 사회보다는 개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므로 퇴계에게 있어서는 어떤 위대한 진리도 어떤 영웅적 사업도 자기 자신에게 있어서 참됨(眞)을 절실하게 체인(體認)함이 없이는 의미를 가지기 어렵다.
퇴계가 도산에 처음으로 지은 집의 당호(堂號)가 바로 양진암(養眞庵)이었다는 점에서도 참됨을 향하는 퇴계의 자세를 살펴볼 수 있다.
퇴계가 추구한 정신세계는 인(仁)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과, 천지만물이 본래 나와 일체라는 것을 체득함으로써 나의 마음을 온전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퇴계의 사고는 윤리 도덕이라는 측면을 자신의 밖이 아닌, 바로 자기 안에서 구하는 방식으로 발전했다.
퇴계는 정치의 장(場)에 참여하게 되면 자신을 지킬 수 없다고 인식했기에 낙향을 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두 개인의 내면적 도덕만을 주목한다면 공동체 의식은 약화되기 마련이다. 이런 점에서 퇴계의 태도는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보다는 자신의 수양에 초점이 가게 되고 만다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주제에 대해서는 여기서 더 이상 논의하지 않기로 한다.
仁이란 무엇인가
‘해로(偕老)’를 글자상으로 알 때와 온 몸으로 인식할 때의 차이를 우리는 구분할 수 있다. 우리가 어질다(仁)는 단어의 의미를 《논어(論語)》를 수없이 반복하여 읽고 암기를 한다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공자는 인(仁)의 개념보다 인의 실천을 강조했다. 공자(孔子)는 인을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행위가 있어야 인이란 말이 있을 수 있다. 사랑이란 행위가 있기 전에는 인이란 없는 것이다. 퇴계가 인이라는 글자의 뜻풀이에 머물렀다면 어찌 퇴계가 되었겠는가.
맹자(孟子)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측은해하는 마음이 인의 실마리”라고 부연했다.
맹자에 따르면 인은 ‘측은지심’을 말하는 것으로, 어린아이가 우물을 향해서 기어갈 때 이를 차마 그냥 보고 있지 못하는 마음이다. 즉 생명을 아끼는 마음이다. 그래서 인(仁)이란 글자는 생명을 움트게 하는 ‘곡식의 씨눈’을 가리키는 뜻으로도 쓰였다. 실제로 복숭아씨를 도인(桃仁)이라 부르고, 살구씨는 행인(杏仁)이라 부르는 점에서 인은 흥미롭다.
한편 정명도(鄭明道·1032~1085)는 인을 “만물을 자신의 일부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그는 “만약 사물을 자신과 다른 것으로 여겨서 자신과는 상관이 없는 것으로 여기는 행위는 마치 수족의 마비로 인해 혈기가 통하지 않아 그것이 내 몸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것과도 같다”고 말한다.
지금도 한의학(韓醫學)에서 몸이 불편한 상태를 불인(不仁)이라고 표현한다. 마지막으로 퇴계가 그토록 닮고자 했던 주자(朱子·1130~1200)는 인을, “사랑의 원리이며 마음의 덕이다”라고 설명했다.
공자와 맹자 정자(程子)와 주자로 이어지는 인의 실상은 이제 매화를 향하는 퇴계의 눈길을 통해서 더욱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은가. 다시 말해 이 세상을 떠나면서 함께 생활하던 매화에게 물을 주고 가는 그 모습이 바로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인의 구체성이 아닐까.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완전한 인을 이루기 위해 퇴거를 하였고, 더 나아가 자연과의 사랑까지 추구한 퇴계의 영전(靈前)에 옷깃을 여민다. 그리고 이번에 떠나신 외조부의 영전에 정성을 모아서 명복(冥福)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