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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21일 토요일
제1독서 : 아가 2,8-14
복 음 : 루카 1,39-45
39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40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42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4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44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45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오늘의 묵상>
김재덕 베드로 신부
성모님께서는 다섯 달 동안 숨어 지내던 엘리사벳에게 ‘서둘러’ 찾아가십니다.
그러자 놀라운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태중에 계시는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만남입니다. 이 만남에 ‘성령’께서도 함께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엘리사벳의 입을 통하여 성모님께 ‘행복 선언’을 하십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루카 1,45)
성모님께서는 우리를 예수님과 만나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성부 하느님께서는 성모님과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에 성령을 가득히 부어 주시며,
우리도 엘리사벳이 체험하였던 것처럼, 성모님을 통하여 예수님을 바라보며,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1,43)라는
고백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몽포르의 루도비코 성인의 말씀을 들어 봅시다.
“우리가 하느님께 올라가기 위해서는 세 계단이 있다.
그 첫 계단은 우리에게 가장 가깝고 우리의 능력에 알맞은 마리아이시다.
둘째 계단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셋째 계단은 하느님 아버지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리 기도의 중개자이신 마리아를 거쳐야 하고
영원하신 하느님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리 구원의 중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야 한다.”(『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 86항)
성모님께 도움을 청하고, 성모님을 삶 가운데로 초대하십시오.
여러분도 엘리사벳처럼 성령으로 가득 차
성모님을 통하여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는 기쁨을 반드시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느 작가의 체험이 담긴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이 작가는 매일 가는 카페에서 작업하는데, 그날따라 글이 써지지 않았습니다.
창의력이 부족한 자기 자신을 꾸짖으며 ‘망했다’를 외치고 있는데,
그 카페 구석에 덩치 큰 어떤 남자가 울상을 하며 머리를 쥐어뜯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남자는 다시 노트북 자판을 원수 두들기듯 치고
또 잠시 뒤에 괴로워하며 머리를 쥐어뜯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남자가 그 유명한 ‘봉준호 감독’이었습니다.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4관왕이라는 새 역사를 쓴
천재 감독이라 할 수 있는 봉준호 감독도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기의 재능 없음을 한탄하는데,
이름도 없는 자기가 괴로워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봉준호 감독을 비롯한, 다른 성공한 사람 역시 ‘나’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계속 나아갔다는 것이 아닐까요?
사실 다른 사람은 나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은 어떤 고통과 시련도 없이 편안히 모든 것을 누리고 있다며 부러워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봉준호 감독도 괴로워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지난번에 제주도로 지구 연수를 다녀왔습니다.
제주도의 돌담을 보다가 언젠가 읽은 책의 내용이 생각났습니다.
이 돌담에는 빈틈이 참 많은데, 그 이유는 그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야
바람에 돌담이 넘어가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빈틈도 넘어지지 않고 꿋꿋하게 서있기 위한 하느님의 배려는 아닐까요?
아기 예수님을 잉태한 성모님께서 세례자 요한을 잉태한 엘리사벳을 찾아가십니다.
이 둘에게는 커다란 걱정과 불안이 있었을 것입니다.
성모님은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잉태했다는 사실이고,
엘리사벳은 산모로 너무 나이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세상 안에서 힘들 수밖에 없는 조건 안에 계신 두 분이 만나신 것입니다.
이 만남은 두 분은 커다란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요?
‘나만 힘든 것이 아니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 뜻을 비천한 당신 종을 통해 이루시는구나.’라면서
다시금 큰 힘을 얻을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벳 성녀는 성모님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우리 모두 빈틈이 많습니다.
이 빈틈 때문에 모두가 힘든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이 빈틈 때문에 못 살겠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이 빈틈 때문에 살 수 있음을 주님 안에서 깨달을 수 있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과 비교할 것이 아니라,
서로 위로하면서 힘을 얻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말씀전례는 ‘오시는 분’에 대한 고대와 기다림과 간절함으로 마음 설레어 있고,
‘오신 분’에 대한 기쁨과 반가움으로 벅차올라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아가는 노래합니다.
“보셔요. 그이가 오잖아요.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오잖아요.”(아가 2,8)
또 복음 환호송에서는 “어서 오소서. 주 하느님”하고 환호합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루카 1,44) 하고,
‘이미 오신 그분’을 맞이하여 뱃속에서 즐거워 뛰는 아기와 함께 기쁨을 노래합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은 큰 소리로 마리아의 '행복'을 선언합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이는 '말씀' 안에 행복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 안에 행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곧 '말씀'이 ‘이룰 수 있는 능력’임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말씀을 믿는 것’ 안에 행복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말씀”이 ‘행복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됩니다.
그런데 ‘말씀이 왜 행복이 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말씀이 구원을 이루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곧 말씀이 구원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곧 행복을 가져다주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복된 일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은 복됨을 노래합니다.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루카 1,42)
왜냐하면 아기가 ‘구원’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마리아가 복된 것은 그녀의 태중의 아기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 아기가 구세주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이 모두를 믿으셨으니 ‘행복’합니다.
그래서 그 믿음 안에서 이미 ‘행복’이 충만했습니다.
이를 두고 성 암브오시오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엘리사벳은 잉태한 후에 성령으로 충만했고, 마리아는 잉태하기 전에 충만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도 말씀을 믿고 품으면, 진정 ‘복’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어머니'(루카 1,43)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곧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실 것입니다.
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요!
얼마나 벅찬 일인지요!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먼저 찾아오신 ‘말씀의 방문’으로부터 말미암은 일입니다.
마리아 태중의 ‘아기의 방문’으로부터 발생한 일입니다.
‘먼저 건너오신 하느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은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이 잉태되면 뱃속에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오히려 품고 있는 우리를 양육할 것입니다.
우리를 성장시키고 변화시킬 것입니다.
산골을 찾아가는 ‘노고’가 되고, ‘섬김’이 되고, ‘사랑’이 되어 피어오를 것입니다.
우리의 노래가 되고, 기도가 되고, 삶이 되어 탄생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행복하십니다, ~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루카 1,45)
행복하십니다, 어머니!
경청만 하신 것이 아니라, 믿고 영접하셨으니 행복하십니다.
믿고 영접한 것만이 아니라, 순명하셨으니 행복하십니다.
순명한 것만이 아니라, 이루어지기를 희망하셨으니 행복하십니다.
오늘 제가 당신의 희망을 품고, 행복의 찬미 노래를 부르게 하소서. 아멘.
행복하십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합니다.
추구하는 방법과 구체적으로 느끼는 형태가 다양하지만,
행복한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만은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소유하는 것에서, 어떤 이는 지배하는 것에서,
어떤 사람은 베푸는 사랑에서 만족합니다.
우리가 진정한 행복을 어디에서 찾고 있는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 말씀을 실천하는 데서 행복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참된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 줍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말하였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1,45).
참으로 행복한 사람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고 믿고 그대로 하는 사람입니다.
루카 복음11장 27-2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결국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고 믿고
그대로 행동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차지해서 행복합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세상에서 행복을 찾지만, 하느님 곁에 있는 것이 행복이요,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실행하는 순간이 행복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알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행하며,
이 모든 것을 모르나,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세상 것은 모두 사라지지만 하느님의 뜻을 행한 공로는 영원히 남습니다.
사업에 성공하고 재물도, 명예도 얻었고 좋은 집에 좋은 차를 가지고 있으며
귀한 자녀를 얻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것이 행복을 보장해 주지는 못합니다.
학생이 좋은 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곧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공부를 해도
거기에서 행복이 완성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대통령이 되어도, 대통령의 역할을 충실히 한다고 할지라도 때가 되면, 내려놓아야 합니다.
더더욱 중간에 밀려나는 것은 불행합니다.
혼자만 불행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물질로는 갚을 수 없는 무형의 재산에 손해를 입히게 됩니다.
명예를 얻었을 때는 행복했지만 그 행복을 이어가는 것은,
각자에게 달려있고, 한 생으로 끝이 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차지 하면 끝까지 행복합니다.
인생 여정에 있어서 예기치 않는 많은 일들을 접하게 되고
그 안에서 이유도 모르는 가운데 포기하고 버려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래서 또 실망하고 좌절하기도 합니다. 그
러나 주님을 믿는 사람은 성공과 실패 안에서도
그분이 역사하시고 섭리해 주심을 알기에 행복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알맞은 종류의 행복을 주십니다.
시련과 고난을 겪기 전이나 겪는 중이나 혹은 겪고 난 뒤에 반드시 주십니다”(성 알로이시오 슈월츠).
믿는 이들에게 있어서 실패는 늦추어진 성공일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천상의 것을 추구하고, 주님의 말씀을 행하는 가운데 행복한 날 되시길 바랍니다.
잠시 스쳐 지나갈 세상 것에, 매이지 않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드릴 수 있길 소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2017년, 교구청에서 성소 국장으로 있을 때입니다.
신학생들의 연수 프로그램을 준비하면서 과테말라에 있는 사제를 방문했습니다.
저는 신부님이 신학생일 때, 30일 피정을 함께 했습니다.
30일 동안 피정을 잘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사제가 된 후, 신부님은 과테말라의 원주민을 위한 사목을 신청했고, 10년 가까이 있었습니다.
저는 신학생들이 어학을 배우고, 선교 체험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했습니다.
신부님은 과테말라 교구에 협조를 구하였고,
신학생들이 머물 수 있는 숙소도 마련해 주었습니다.
신학생들은 매년 선교 체험을 하였고,
사제가 된 후에는 선교 사제를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만남이 인연이 되어 과테말라 교구의 사무처장 신부님이
서울의 신학교를 방문해서 신학생들을 위해 강의를 해 주었습니다.
신부님은 과테말라에서 사목을 잘 마치고,
지금은 콜롬비아에서 사목 센터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신부님은 해외 선교를 지원하는 사제들이 언어를 배우고,
현지에서 적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작년에 저는 뉴욕에 있었습니다. 달라스에 있는 신부님들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뉴욕에 오면 방문하는 곳들이 있습니다.
자유의 여신상, 타임스퀘어, 센트럴 파크,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브루클린 브리지,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브로드웨이 뮤지컬 관람 등이 있습니다.
손님이 오면 주로 가는 곳들이라, 신부님들을 위해서도 그런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신부님들이 방문하고 싶은 곳은 제 생각과는 달랐습니다.
제가 주일미사를 도와주고 있는 브루클린 한인 성당엘 가고 싶어 했습니다.
뉴저지에 있는 뉴튼 수도원엘 가고 싶어 했습니다.
뉴욕 맨해튼 관광보다는 제가 사는 모습을 보고 싶어 했고,
한국의 베네딕토 수사님들이 운영하는 수도원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저는 브루클린 성당을 도와주게 된 사연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뉴튼 수도원과 한국의 인연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런 이야기가 인연이 되었는지, 저는 뉴욕 생활을 마치고
지난 2월 달라스 한인 성당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을 보았습니다.
두 여인의 만남은 구약과 신약, 옛 언약과 새 언약의 만남을 상징합니다.
마리아의 즉각적인 응답은 신앙의 본보기를 보여줍니다.
그녀의 행동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신앙인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요한 세례자와 예수님의 첫 만남이자, 구세주의 도래를 세상에 알리는 순간입니다.
마리아의 여정은 하느님 뜻에 대한 완전한 신뢰와 순종을 상징하며,
신앙인이 하느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모습을 제시합니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마리아를 축복합니다.
이는 성령께서 하느님 구원 계획을 드러내심을 의미합니다.
엘리사벳의 모태에 있던, 요한 세례자의 기쁨은
예수님의 메시아적 신분을 첫 번째로 증언하는 행위입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은 믿음 안에서 연대와 나눔의 본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는 오늘날 신앙 공동체가 서로를 지지하고 함께 기뻐할 것을 요청합니다.
사제 생활을 하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제가 결정하기에는 어려운 일들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몇몇 친구에게 전화하거나 만나서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친구들은 언제나 따뜻하게 저를 대해주고,
제가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줍니다.
그런 친구가 있기에 저는 힘을 내서 사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가까운 이웃들에게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고, 사랑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가지고 이웃을 대하면
우리는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고민과 갈등을 들어 줄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나의 모습을 따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면,
지금 우리의 스승들이 제자들에게 나의 길을 따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면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는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곧 성탄이 다가옵니다. 저는 이렇게 기도드리고 싶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사랑으로 오시니 감사합니다.
그 사랑은 세상의 어둠을 밝게 비추었습니다.
그 사랑은 가난한 이, 외로운 이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 사랑은 절망하고 있는 사람,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 행복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주님, 오늘 나의 삶 속에서 주님의 사랑을 전하도록 용기와 힘을 주소서.
주님의 그 사랑을 저 또한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소서.”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다.
조욱현 토마 신부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의 전갈을 받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긴 다음
걸음을 서둘러 친척 엘리사벳의 집으로 달려가 인사를 나누고 있다.
마리아는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으로 갔다(39절).
그것은 자기가 받은 약속의 기쁨으로 넘쳐,
그 기쁨에 이끌려 경건한 마음으로 봉사하기 위해서였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넘친 마리아가 발길을 서두른 것은 이런 이유이다.
성령의 은총은 지체함과 게으름을 허락지 않는다.
항상 즉시 기쁘게 주님의 뜻을 행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다.
마리아의 겸손은 그녀를 이끌어 유다 산악 지방으로 가
엘리사벳의 기적적인 잉태를 축하하고,
자기보다 나이 많은 친척 엘리사벳의 해산을 보살피게 한다.
마리아는 말씀을 잉태하셨을 뿐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44절)
요한은 태어나지 않았지만 기쁘게 뛰노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알아본다.
요한은 영으로 세상의 주님을 알아본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42절)
주님께서 죽은 태 안에 당신 전령을 준비하신 것은,
그분이 죽은 아담 뒤에 오심을 말한다.
그분은 먼저 엘리사벳의 태에 생기를 불어넣으셨고,
그다음 당신의 몸으로 아담의 토양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다.
엘리사벳은 아들 덕분에 성령으로 충만했다.
어머니가 먼저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라,
태 안에 있던 요한이 먼저 성령을 받았다.
이렇게 아들이 성화 된 다음, 어머니가 성령으로 충만해졌다.
마리아도 구세주를 잉태하시면서 성령으로 충만해지셨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함께하시면서 성령으로 충만해지신 것이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43절)
엘리사벳은 자기를 찾아온 마리아를 보자마자
그분이 주님의 어머니임을 알아본다.
겸손한 모습을 볼 수 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45절)
그러나 귀로 듣고 믿는 우리도 복된 사람들이다.
믿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잉태했고,
말씀을 실천하며 그 말씀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말씀을 살아, 말씀을 낳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성자를 모시기 전에 성령을 모시는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기별이 없는 만남이나
기약이 없는 헤어짐은
우리가 인간적으로는 그리 탐탁지 않은 것입니다.
특히 기별이 없이 들이닥치면 매우 당황하게 되기에 탐탁지 않습니다.
오늘 엘리사벳의 경우 마리아가 기별 없이 들이닥쳐 놀랐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천사로부터 엘리사벳의 임신 사실을 들어 알고 축하하러 갔지만
엘리사벳은 지금처럼 전화할 수 없던 그때
기별 없이 갑자기 들이닥친 마리아로 인해 놀랐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엘리사벳은 탐탁지 않은 것이 아니라 기뻐 뜁니다.
놀라는 것이 아니라 기뻐하는 것입니다.
혹 놀랐을지라도 기쁜 놀라움일 겁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었던 것이었을까요?
그것은 성령 때문일 겁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성령으로 가득한 상태이고,
성령으로 알아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여인은 이제 성령으로 가득 찬 여인들이고,
성령에 이끌리는 여인들로서 만난 것입니다.
먼저 성령의 여인 마리아를 보겠습니다.
마리아는 누구보다 성령의 여인이고 성령의 정배입니다.
그것은 마리아가 성령으로 주님을 잉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마리아는 주님께는 어머니요 성령께는 정배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도 주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는 비결입니다.
성령의 정배가 되면 우리도 주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성탄절을 코앞에 둔 지금 우리의 대림절 성탄 준비는
엘리사벳처럼 성령으로 가득 차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성자를 모시기 전에, 성령을 모시는 것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
“주님과 우정의 여정, 그리고 형제들과 우정의 여정”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오 샛별이여 찬란한 광채이시요,
정의의 태양이시요.
오시어 죽음의 땅과 어둠속에 앉아있는
우리를 비추어 주소서.”
오늘 동지날인 12월21일의 '오후렴'도 참 아름답고 황홀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자 연인이시고 도반이자
주님인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 시기입니다.
혼자서는 살 수 없고 혼자서는 구원도 없습니다.
반드시 더불어의 삶이요 구원입니다.
더불어와 홀로이지 더불어 없는 홀로는 불가능합니다.
10년 전 2014년 삶의 여정의 압축과도 같았던
산티아고 순례 여정을 통해 절감했던 진리입니다.
삶의 여정은 목적지, 이정표, 도반, 기도라는 네 요소로 압축되었고,
함께 하는 도반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참 깊이 깨달았습니다.
삶의 중심이신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과 우정의 여정과 더불어
보이는 형제 도반들과 우정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우선적인 것이 공동체 삶의 중심이신 주님과 우정의 여정입니다.
이와 더불어 떠오르는 그동안 참 많이도 나눴던
“하늘과 산”이라는 대표적 자작시입니다.
“하늘 있어 산이 좋고,
산 있어 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
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
하늘이 주님이라면 우리 각자는 산이고,
네가 하늘이라면 나는 산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과의 관계는 물론 서로 간에도 상호보완 관계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모두가 삶의 중심이신 영원한 연인이자 도반인
주님과의 우정과 더불어 형제들 서로 간의 우정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그 좋은 본보기가 오늘 복음의 주인공은 마리아와 엘리사벳입니다.
이 두 분의 우정에 앞서 각자 주님과의 우정은 얼마나 깊었던지요!
오늘 동지날, 두 분의 만남이 참 감동적이고 아름답습니다.
두 분의 만남과 동시에 태중의 아들들,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만남이기도 합니다.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예수님답게,
성모님을 통해 엘리사벳 태중의 세례자 요한을 찾아
겸손히 찾아 나선 태중의 예수님입니다.
아마도 곤경에 처한 마리아가 즉시 떠올렸던
참 좋은 도반이 엘리사벳 사촌 언니였을 것입니다.
두 자매간 역시 주님을 중심으로 서로 간의 우정도 참으로 깊었음을 봅니다.
엘리사벳의 고백이 이를 입증합니다.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었을 때 엘리사벳 태 안의 아기가 반갑고 기쁨에 뛰놀았고,
성령으로 가득 찬 엘리사벳은 기뻐 외칩니다.
루가복음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백에 속할 것입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단숨에 읽혀지는 엘리사벳의 성령 충만한 고백입니다.
주님 안에서 두 분의 우정은 더욱 깊어졌을 것이고
서로의 내적 상처도 완전히 치유되었을 것이며,
무엇보다 두 분의 태교에 결정적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태중에 모신 마리아가 흡사 살아있는 “주님의 감실” 같고,
그 앞에서 기뻐 뛰노는 엘리사벳 태중의 아기는
흡사 주님의 계약궤 앞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던 다윗을 연상케 합니다.
참으로 영원한 연인이자 도반인 주님을 중심에 둔 두 어머니들의 우정이요,
태중의 예수님과 요한의 우정임을 깨닫습니다.
형제자매들 상호 간의 우정에 앞서
공동체 삶의 중심이신 주님과의 우정이 절대적이요,
주님의 진리에 대한 사랑이 참된 우정의 기초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삶의 중심이신 주님과 신비적 사랑의 체험을
제1독서 아가서가 잘 보여줍니다.
교회의 신비가들이 참 사랑했던 아가서요,
아가서가 있음으로 성서는 더욱 풍요로워졌습니다.
“내 연인의 소리!
보셔요. 그이가 오잖아요...
내 연인은 나에게 속삭이며 말했지요.”
연인이신 주님을 기다리는 애인의 감미롭고 아름다운 고백들로 가득합니다.
흡사 엘리사벳은 물론 그 태중의 아기 요한의 고백 같기도 하고,
미사에 참석해 연인이신 주님을 기다리는 주님의 애인인 우리의 고백 같기도 합니다.
평생 “진리의 연인”이 되어 살았던 성 아우구스티노,
또 주님과 깊은 연정을 나눴던 신비가 십자가의 요한,
아빌라의 데레사. 이냐시오 로욜라도 생각납니다.
교회의 신비가들에게 삶의 중심인 주님은 모두의 연인이었고 도반이었고
그들과 주님과의 연정과 우정도 함께 갔음을 봅니다.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 주오.”
신비가들은 물론 우리 영혼들 역시 주님의 애인들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연인이 되고 우리는 주님의 애인들이 됩니다.
참으로 우리 공동체 삶의 중심인 주님과의 깊어 지는 연정,
우정과 더불어 깊어지는 형제자매들 상호 간의 연정과 우정임을 깨닫습니다. 우
리 모두의 공통적 연인이자 도반이신 주님께서
우리 형제들 상호 간의 연정도 우정도 보호해 주십니다.
아니 진리이신 주님 사랑 안에서 연정도 애정도 부단히 우정으로 승화됨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깊은 우정은 연정과 애정을 뛰어넘습니다.
그 좋은 본보기의 우정이 성서의 다윗과 요나단, 마리아와 엘리사벳이요,
우리 조상들 중에는 조선시대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
그리고 정약용과 정약전 형제를 꼽고 싶습니다.
삶의 중심이신 진리 안에서 영혼들이 깊은 일치를 이뤘던 분들입니다.
이분들의 공통점은 자기보다 상대방 도반의 영혼을 더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우정의 여정”과 함께 가는 “도반 형제들과의 우정”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 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과의 우정을 깊이 해 주고,
더불어 주님을 중심으로 형제들 상호 간의 우정도 깊이 해 줍니다. 아멘.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