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5일 아주 늦은 밤,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건만 사람들은 홍대앞의 한 라이브 클럽으로 몰려들었다. 김창완 밴드의 파티가 열렸기 때문이다. 술과 대화가 오가는 가운데 김창완 밴드가 무대에 올랐다. 새벽이 깊어지도록 그들은 공연을 멈추지 않았다. 김창완 밴드만 무대에 선 건 아니었다. 이 파티를 축하하러 온 뮤지션들도 예정에 없던 공연을 했다. 한동준, 전재덕, 최우준, 강산에, 크라잉 넛, 갤럭시 익스프레스, 장기하와 얼굴들, 그리고 요조까지...
이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은 한 마디씩 내뱉었다. "록 페스티벌이 따로 없구나!" "역사의 현장이야" 정말 그랬다. 수만의 인파가 몰려 만들어지는 페스티벌의 열기가 압축되어 한 밤의 라이브 클럽을 휘발시켰다. 아무런 경제적, 정치적 명분없이 김창완이란 이름 앞에 그토록 다양한 세대의, 다양한 장르의 뮤지션들이 한 자리에 모인 것도 분명히 나름의 역사적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4시쯤 되었을까. 모두 취해 있었다. 술에 취하고 음악에 취해 분위기는 흥청망청 그 자체였다. 다시 김창완 밴드가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신곡인 [Forklift]를 연주했다.
연주가 끝난 후, 김창완은 마이크를 잡았다. 지난 1월 18일, 캐나다에서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막내 동생이자 산울림의 드럼이었던 김창익을 회고했다. 그리고 눈물을 쏟았다. 그 모습을 지켜본 크라잉 넛의 한경록은 말한다. "형님이 그러시니까 나도 눈물이 흘렀다." 한경록 뿐만 아니었다. 몇 몇 사람들도 함께 울었다. 그리고 김창완 밴드는 [회상]을 연주했다.
장기하는 말한다. "결국 그 때 나도 눈물이 날 뻔했다" 함께 웃고 함께 우는 밤이었다. 산울림의 30여년, 김창완의 30여년은 늘 그런 세월이었다. 그 많은 뮤지션들이 장르와 세대를 초월하여 함께 어울릴 수 있었던 것도 그 세월이 남긴 음악 덕이다.
산울림은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천공의 성 같은 존재다. 신중현으로 대표되는 미8군 출신의 록 뮤지션 계보에도, 캠퍼스 그룹사운드의 계보에서도 벗어나 있다. 김창완, 김창훈, 김창익 삼형제로 구성됐던 그들은 그야말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밴드였다. 모든 인기라는게 세월의 이끼를 이겨내지 못하고 허망하게 사라진다. 아무리 위대한 음악일지라도, 그래서 추앙 받을지라도 동시대성을 유지하기란 힘든 일이다. 그래서 추억의 대상이 되고 학술적 존경의 대상이 될 뿐이다.
하지만 산울림의 음악은 세월의 이끼를 입지 않는, 한국 대중음악에서의 지극히 예외적 유산이다. 그들이 데뷔했던 1977년 이후에 태어난 뮤지션들에게 조차 체화된 존중을 이끌어내는 음악이다. 그래서였다. 지난 11월 29일 서울 광장동 멜론악스에서 열렸던 EBS 스페이스 공감 [헬로 루키 오브 더 이어] 공연에서는 선배들에 대한 오마주 공연이 열렸다.
델리 스파이스의 [차우차우]를 시작으로 송창식의 [고래사냥], 신중현의 [미인]같은 노래들을 파릇파릇한 인디 뮤지션들이 연주했다. 이 공연의 마지막은 산울림의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였다.
장기하가 1절의 노래를 마쳤을 때 무대 뒤가 열리면서 김창완이 등장했다. 김창완의 그들과 어울려 이 노래의 2절을 마저 불렀다. 수십 명의 후배들과 어울려 노래하는 1954년생의 중년 남자. 그 모습은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공연의 MC를 맡았던 문샤이너스의 차승우는 그에게 물었다. "김창완 밴드는 펑크를 하시던데..." 김창완은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펑크죠." 순간, 차승우는 경직됐다. "구구절절한 설명 없이 한 마디로 '펑크죠'라 하는데 어떤 에너지가 느꼈다. 산울림 후기부터 펑크를 한다고 하실 때는 잘 몰랐는데 그 순간 이 분이 진짜 로큰롤이라는 걸 느꼈다. 말이 필요 없었다."
산울림의 막내인 김창익이 지난 1월 불의의 사고로 형들 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엄청난 사고였지. 여러 가지 의욕을 뺏어가기 충분했어. 그런데 그런 좌절에 굴복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떠올랐어. 게으름과 회피를 반성하게 만들었어. 그래서 더 적극적인 삶을 사는 게 남는 자의 도리이자 책무라는 생각이 들었지. 나의 가장 큰 부분은 음악인데 거기에 게을렀던 것도 반성하게 되더라. 우선 내가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본연인 음악부터 해야겠다 생각한 거야"
1996년 산울림의 13집이자 마지막 앨범을 발표한 후 11년 만에, 그는 김창완 밴드라는 이름으로 새 앨범을 발매했다. "산울림은 우리 삼형제에요. 그 중 한 명이라도 빠지면 산울림은 없는 거예요."
산울림의 공연 때 기타 세션을 맡았던 하세가와 요요헤이, 산울림이 아닌 김창완의 이름으로 열렸던 공연에서 세션을 맡았던 뮤지션들이 김창완 밴드의 멤버가 됐다. "음악이 만들어 준 가족"인 그들과 김창완은 6곡의 신곡을 공개했다. 보통, 아무리 한 시대를 풍미했을 지라도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창작력은 고갈되기 마련이다. 팬들이 새 앨범을 사는 이유는 한 세대를 함께 했던 뮤지션에 바치는 예우이기도 하지만, 그로 인해 시작될 투어나 공연에 대한 기대 탓이다. 요컨대 "새로운 음악"에 대한 기대 따위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신인"이라 말하는 김창완 밴드의 데뷔 EP [The Happiest]는 그의 말 대로, 신인의 패기로 가득 찬 앨범이다. 멤버들의 순간적 호흡을 살리기 위해 라이브로 녹음된 이 앨범에는 펑크의 에너지를 기반으로 모던 록의 감성을 담아낸다.
[아니 벌써]의 패기와 [청춘]의 감성이 30년 넘도록 음악을 했으며 중간 중간 꽤 긴 공백을 가졌던 이 관록의 뮤지션의 피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김창완에게는 노장이나 거장, 또는 중견이나 원로라는 말이 쉽게 어울리지 않는다. 영원한 청춘이라는 수식어가 그 보다는 훨씬 자연스럽다.
7080콘서트의 무대에 서는 것 보다는 인디 록 밴드들과 함께 하는 것이 무척이나 당연해 보인다. 나이와 상관없이 그를 선생님 보다는 형님이라 부르고 싶은 건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김창완 밴드의 EP와 함께 공개된 것은 산울림의 전작 앨범이 담긴 박스 세트다. 13장의 정규 앨범과 동요집 4장이 LP의 형태를 살린 LP미니어처 형식으로 공개됐다. 200여페이지의 부클릿도 함께 첨부됐다. 모든 음원은 디지털 리마스터를 거쳐 보다 현대적인 음질로 되살아났으며 1996년 강원도 문막에서 가졌던 산울림의 전설적 공연 실황을 포함, 각종 데모와 미공개 음원들도 함께 공개됐다.
몇 년 전 그와 인터뷰를 가졌을 때 산울림 재발매 계획이 없냐 물었던 적이 없다. 그는 그때 이렇게 말했다. "흘러간 건 흘러간 대로 내버려 두는 게 아름답지 않겠어요? 요새는 마음만 먹으면 디지털로 다 들을 수도 있는데"
90년대 후반 산울림 전집이 역시 발매된 적 있었지만 이 작업은 그의 동의 없이 이뤄졌던 거다. 그 후 김창완은 산울림의 모든 판권을 다 구입, 자신이 관리했다. 영원히 묻어둘 생각이었다. 역시 김창완이 보관하고 있던, 오리지널 녹음이 담긴 릴 테이프들도 버려질 뻔 한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그랬던 그의 생각이 바뀐 것도 역시 막내의 죽음이었다. "막내가 갑자기 떠나는 바람에 산울림을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될 시점에 다다랐어요. 더 늦기 전에 막내를 기리는 작업을 하고 싶었죠"
고인만 기릴 일이 아니다. 보다 좋은 음질로 다시 태어난 산울림의 모든 앨범은 지금 들어도 어떤 짜릿한 충격을 던진다. 1977년 40만장이라는 기록적 판매고를 올렸던 산울림의 1집 [산울림 새 노래 모음]의 첫 곡 [아니 벌써]의 그 지글지글한 기타와 오르간 연주의 기묘한 조화. 이어지는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거야]의 파격적 조바꿈. 아니, 모든 곡이 파격이었다.
1975년 12월 터진, 이른바 대마초 파동이후 불모지가 된 한국 대중음악에서 산울림의 등장은 록의 귀환이나 다름없었다. 흑석동 집에서 삼형제가 기타와 베이스, 드럼을 연주하며 노래를 만들었고 맏이였던 김창완이 졸업하기 전 기념 음반 차원으로 녹음했던 이 앨범은 산울림 박스 세트와 마찬가지로, 산울림의 데뷔도 정리의 의미였다.
"77년 제 1회 MBC대학가요제 때 둘째(김창훈)가 샌드 페블즈의 매니저를 맡고 있었어요. 그 때(김창완이 만든) [나 어떡해]를 연습시켜서 출전시켰고 우리 삼형제도 무이라는 이름으로 출전했죠. 그 때 출전곡은 [문좀 열어줘]라는 곡이었는데 예선 성적은 무이가 더 좋았어요. 그런데 제가 졸업생이기 때문에 자격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자진탈락하고 [나 어떡해]가 그랑프리를 거머쥐게 됐는데 예선 결과를 보니 우리가 그랑프리를 다 휩쓴 거나 마찬가지죠. 대학가요제에서 저희 곡 2곡이 대중들에게 환호를 받은 거니까 앨범을 낼 수 있는 기회가 마련이 됐죠. 나름대로 7년 동안 집에서 형제들이랑 만들었던 곡을 이번 기회로 정리를 하자, 그게 [아니 벌써]를 발표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산울림 1집 뒷면에는 음반사 사장의 추천사 비슷한 게 담겨 있다. "어느 날의 일이다. 가벼운 녹크 소리와 함께 한 젊은이가 들어섰다. "社長님이시죠?" "예!" "이것 좀 들어봐 주세요" 젊은이가 바로 김창완군... 그러니까 "산울림"의 리더 싱어였던 것이다. 나는 흔히 하듯 녹음기에 카셋트를 꽂고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는 놀랐다.(후략)' 그래서 삼형제는 부랴부랴 이름을 산울림이라 정했다. 녹음 스케줄이 잡혔다. 그런데 녹음날짜가 김창완의 은행 면접일과 겹쳤다. 김창완은 면접 대신 녹음을 택했다. "취직 시험이야 그 다음이라도 찬스가 있는데, 레코딩은 평생 한 번 있을 일 같아서"라는 이유였다. 기회는 누구도 예상 못한 결과로 돌아왔다. [아니 벌써]가 라디오를 통해 울려 퍼졌을 때 청년들은 열광했다.
70년대 후반, 산울림과 함께 록계를 양분했던 사랑과 평화의 원년멤버 송홍섭은 말한다. "산울림은 아주 용감한 밴드였다. 우리는 음악의 기술에 몰두해서 연주자로서 갖춰야할 것을 탐구했는데, 산울림은 그런 거 상관없이 생각이 확실했다. 산울림을 제외하고 보통은 아는 지식을 음악에 과도하게 집어넣으려는 욕심, 강박관념 때문에 비틀린 경우가 많다. 산울림은 능력 이상으로 하려 하지 않고 뭔가 전달하는 것에만 충실했다"
김창완은 말한다. "우리는 어디서 영향받았다기 보다는 그저 반작용이었어요. 가요계 중심축이 성인에게 가있었어요. 여학생들은 클래식, 남학생들은 팝송에 경도되어있었는데 우리는 기성가요가 갖고 있는 정형시적 가사와 과대 포장된 감정이 부담스러워졌죠. 그런 음악 말고 보다 피부에 밀착할 수 있는 건 없을까? 고민을 했던 거예요. 산울림의 음악은 기존의 음악에 대한 반발이었던 거죠."
77년 12월 1집 앨범 이후, 그들은 1년여라는 짧은 시간동안 8장의 앨범을 냈다. 그리고 그 시기는 콘서트와 방송을 병행하는, 산울림으로서 활동했던 유일한 시기이기도 했다. "78년, 79년 중반에 동생들이 군 입대를 했어요. 그러니까 77년 겨울에 데뷔해서 동생들 군 입대 전 1년 반, 그리고 제대해서 1년 활동한 게 산울림 활동의 전부에요"
그 후의 산울림은 때로는 김창완의 일인 프로젝트로, 대부분은 스튜디오 뮤지션으로서의 기간이었다. 그나마도 삼형제 중 전업 뮤지션의 길을 걸은 건 김창완이 유일했다. 혹시 80년대 TV에서 산울림을 본적 있는 사람이라면 늘 김창완 혼자 나왔던 걸 기억할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때는 산울림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그 때의 산울림은 [내게 사랑은 너무 써] [너의 의미] [그대 떠나는 날 비가 오는가?] 같은 말랑말랑한 노래를 부르는 밴드라기 보다는 김창완의 다른 이름처럼 인식되어 있었다.
"지금도 록이 우리 가요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록은 언제나 주변의 음악이었죠. 우리를 보다 널리 알린 건 [회상] [어머니와 고등어]같은 발라드 음악이었죠. 그런 음악이 상도 안겨주고... 록커로서 설만한 무대도 많지 않았고 공연장도 열악했고 스튜디오 작업이외에는 할 만한 활동이 없었어요. 대중의 기호가 산울림 안에 있는 서정성에 공감하기 시작했지만 그렇게 가는 게 우리 내부에서는 불만이었죠. 그래서 9집을 발표하면서 다시 록으로 갔지만 굉장히 홀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10집에서 초심으로 돌아가기 위해 안배를 잘해서 성공을 거두고, 11집에서는 [그대 떠나는 날 비가 오는가]로 사랑받고... 기복이 있죠. 그건 저희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86년의 11집, 91년의 12집. 공백은 길었다. 김창완은 그 사이 임지훈, 동물원, 꾸러기들 같은 후배 뮤지션을 키우거나 발굴했다. [안녕] [꼬마야] 등 드라마 음악도 맡았고 연기 생활도 시작했다. 서태지와 아이들로 촉발된 대중음악의 90년대가 시작되면서 산울림도, 김창완도 잊히는 듯 했다.
그러나 그 때는 트렌드만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대중문화담론이라는 말이 튀어나왔고 대중음악평론의 시대도 시작됐다. 신중현이 조명 받았고 산울림의 가치도 재조명됐다.
산울림 20주년인 96년을 앞두고 재조명 운동이 일어났다. 아날로그 음원들이 CD로 전환되면서 젊은 세대들에게도 조명을 받게 됐는데 그 때 부터 팬클럽도 늘어났다. 2년 반밖에 활동 안한 산울림을 무대에 세운 젊은이들이 산울림을 한국 록의 정체성으로 이해하기 전 까지는 대단한 존재가 아니었다. 변방의 장르인 록 밴드였을 뿐이다.
트렌드와 시대에서는 멀어져있었지만 산울림의 노래를 듣고 자란 세대들이 대중음악사의 복원 운동이 일면서 그들을 소환했던 것이다. 자우림, 이현우, 델리 스파이스 등 당시 맹위를 떨치고 있던 밴드와 뮤지션들이 모여 산울림 트리뷰트 앨범을 냈다. 수많은 트리뷰트 중 이 앨범이 걸작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그들 기억 속에 남아있는 산울림의 선율과 가사 때문이었을 거다.
시이자 수필 같은 우리 말 가사, 세월이 지나도 촌스럽지 않은 그 감각은 시간이 갈수록 대단한 존재가 되어갔다. 용기를 얻은 삼형제는 다시 모였다. 데뷔 20주년을 맞이했던 1997년, 김창완의 미국에 이민 가있던 김창훈과 대기업 직원이었던 김창익을 불러 들였다. 동생들은 기다렸다는 듯 형의 부름에 달려왔다.
그들이 재결성, 내지는 활동 재개 기자 회견을 가졌던 장소가 홍대앞 라이브 클럽이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같은 해 발매된 13집에 담겨 있는 [기타로 오토바이를 타자] 같은 곡들이 당시 창궐하고 있던 인디 록, 펑크의 성향이 강했던 것임을 생각하면 산울림은 그제야 함께 활동할 수 있는 [신(scene)]을 발견했던 건지도 모른다. 20년 전 형제들이 모여 [아니 벌써] [백자] 같은 실험적이고 직설적인 음악을 했을 때 아쉬워했을, 공유할 수 있는 시대정신을 찾은 건지도 모른다.
그 후로 지금까지 산울림, 또는 김창완 밴드의 공연에 게스트로 초빙되는 이들이 그들과 같은 세대가 아닌, 그들과 같은 록 음악을 하는 뮤지션들이라는 사실은 이런 추측에 대한 증거일 것이다.
[기타로 오토바이를 타자]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이미 불혹이 넘은 나이에 10대와 20대들에게까지 회자되는 록을 동시대에 히트시킨 건 김창완이 유일할 것이다. 산울림은 팬은 한층 늘어났고, 이 노래로 유입된 팬 층은 산울림의 옛 노래들을 발견했다. 선순환이었다.
그렇게 25주년, 30주년 기념 공연이 열렸다. 2006년 열린 30주년 공연은 록 밴드로서는 이례적으로 세종 문화회관에서 가졌다. 10대부터 50대까지의 관객들이 한 자리에 모여 그들의 옛 노래를 따라 부르는,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풍경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공연은 산울림의 마지막 무대가 됐다. 당시에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산울림은 작년, 그리고 올해까지 우리나라 가요계에서는 충분했어. 더 할 수는 있었지만 그게 전부였어"
김창완과 같은 차를 타고 압구정에서 서래마을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가 물었다. "그런데, 김작가는 이렇게 인터뷰를 통해 한 달에 몇 명쯤 만나?" "서너 명쯤 됩니다" "딱 좋네. 그렇게 인터뷰하는 거 안 힘들어?" "데뷔하기 전부터 친분이 있던 신인들은 쉽죠. 특히 인디 밴드들." "어이구. 그거 딱 우리네. 허허허."
그 전에 있던 파티에서도 김창완은 자신들을 인디 밴드라고 소개했다. 그의 과거에 함께 활동했던 가수들이 미사리에서, 밤무대에서, 혹은 7080 콘서트를 통해 과거를 살아가고 있을 때 김창완은 지금의 인디 신에서 살려고 한다. 꼰대의 한숨이 아닌 청춘의 호흡을 하려는 거다.
"아무리 오래 노래한 가수라도 그 사람이 불러서 노래가 된 게 아니야. 음악이 그 사람을 노래하게 하고, 그 사람을 춤추게 하는 거지. 음악의 힘을 믿고, 음악에 종사할 때 세대를 뛰어 넘는 음악이 나와. 꽃 키우는 사람과 베를 짜는 사람, 음악하는 사람은 따로 행복을 구할 필요가 없을 만큼 행복한 사람들이야. 그럼 행복을 돌려줘야 하지 않을까. 열심히 베를 지어도, 꽃만 키워도 많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이니까. 음악도 마찬가지야."
김창완은 음악을 할 때 가장 행복하다. 카메라 앞에서, 마이크 앞에서 더 이상 좋을 수 없을 만큼 좋은 웃음을 짓는 그다. 그러나 그가 기타 연주에 몰입할 때의 얼굴은 숭고 외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행복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목숨을 걸기 때문일 것이다.
"대중은 뮤지션에게 음악을 원하는게 아니야. 대중이 원하는 건 목숨이야. 음악하는 사람들의 목숨. 우리는 목숨을 걸어야 해."
김창완 밴드로 돌아온 김창완은, 이제 음악에 목숨을 걸었다. 산울림 박스 세트는 삼형제가 30년간 걸었던 목숨이다. [The Happiest]는 목숨을 건 음악이야말로 대중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는 김창완의 메시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