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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으로 충만 합시다
11:23-30
11:23-30
2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 사50:2, 사59:1, 겔12:25
24. 모세가 나가서 여호와의 말씀을 백성에게 고하고 백성의 장로 칠십인을 모아 장막에 둘러 세우매 민11:16
25.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그에게 임한 신을 칠십 장로에게도 임하게 하시니 신이 임하신 때에 그들이 예언을 하다가 다시는 아니하였더라
26. 그 녹명된 자 중 엘닷이라 하는 자와 메닷이라 하는 자 두 사람이 진에 머물고 회막에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나 그들에게도 신이 임하였으므로 진에서 예언한지라 삼상20:26, 렘36:5
27. 한 소년이 달려와서 모세에게 고하여 가로되 엘닷과 메닷이 진중에서 예언하더이다 하매
28. 택한 자 중 한 사람 곧 모세를 섬기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말하여 가로되 내 주 모세여 금하소서
29.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고전14:5, 민11:25
30. 모세와 이스라엘 장로들이 진중으로 돌아왔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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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으며 확신하며 : 성령으로 충만합시다(민11:23-30)
“광야 생활에서 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오되 어찌하여 주께서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내게 주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내가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이 모든 백성을 내가 배었나이까 내가 그들을 낳았나이까 어찌 주께서 내게 양육하는 아버지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 하시나이까 이 모든 백성에게 줄 고기를 내가 어디서 얻으리이까 그들이 나를 향하여 울며 이르되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라 하온즉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 당함을 내가 보지 않게 하옵소서[민 11:11-15] 하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노인 중에 네가 알기로 백성의 장로와 지도자가 될 만한 자 칠십 명을 모아 내게 데리고 와 회막에 이르러 거기서 너와 함께 서게 하라 내가 강림하여 거기서 너와 말하고 네게 임한 영을 그들에게도 임하게 하리니 그들이 너와 함께 백성의 짐을 담당하고 너 혼자 담당하지 아니하리라” [민 11:16-17]하신대로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그에게 임한 영을 칠십 장로에게도 임하게 하시니 영이 임하신 때에 그들이 예언을 하다가 다시는 하지 아니하였더라”(민 11:25) 합니다
‘영’에 해당하는‘루아흐’에 정관사‘하’가 붙은 경우, 이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시는‘특별한 은사를 뜻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특별한 재능이나 기술 혹은 힘보다 더욱 인격적인 성령님을 가리킵니다.
이같이 선택된 70인들에게 모세와 동일한 성령님을 임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은 그들에게 특별한 재능을 주심과 함께 특별한 관계를 세우셨습니다. 또한 동일한 성령님이 임하게 하심으로 하나의 통일적인 다스림의 기본을 세우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영이 임하셨을 때 그들은 즉각적으로 예언을 하기 시작했다고 증거합니다.
‘예언을 하다’(이트나베우)의 문자적 의미는‘계속해서 말하다, 많은 말로 탄원하다’이며, 성령님의 감동에 의해 신적인 황홀경에 몰입되어 말을 하는 상태를 일컫는 말입니다.
이로 인해 백성들이‘70인 장로’에게 복종하게 하기 위한 성령님의 특별하신 감동으로 볼 수 있으며(삼상 10:6), 동시에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신적 권위와 위엄을 제공받았다는 외적인 증거이기도 합니다. 이들이 말한 예언은 미래사에 대한 예언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영의 감동과 영감 아래서 신비롭고 황홀한 심적 상태를 말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착하고 신실한 종들에게 성령을 받게 하십니다.
모세에게 임한 영이 백성의 장로 70인에게도 임하였습니다.
70인 장로들은 1년 전에 시내산 언약을 체결 한 후 모세와 아론과 함께 산 중턱에서 친교를 나누었던 사람들입니다
[출 24:9-11]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이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니 그의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더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
그들은 모세와 하나님 사이에 이루어진 시내산 언약의 현장에 있었고 언약의 축제에서 하나님을 보고 먹고 함께 마셨던 증인들입니다. 이 장로들을 모세의 동역자로 여호와의 권능과 지혜가 온유하며 신실한 종에게 전하여지게 합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성령이 한량없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받을 자를 구별하여 세우십니다.
"백성의 장로 70인을 모아 장막에 둘러 세우매"(민 11:24)
이들은 부름을 받아 따로 구별되었으며 이름이 기록되었습니다(민 11:26).
오순절날 구별된 백이십 명은 성령을 충만히 받았습니다.
여호와의 부르심을 받들어 우리 자신을 구별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우리는 성령의 권능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형편에 따라 성령을 부어 주십니다.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그에게 임한 영을 칠십 장로에게도 임하게 하시니 영이 임하신 때에 그들이 예언을 하다가 다시는 하지 아니하였더라”(민 11:25)
우리가 성령 충만을 받는 정도는 우리의 믿음과 여호와를 위하여 얼마나 봉사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습니다. 여호와를 위하여 많은 일을 시도하십시오. 그리고 또한 여호와께로부터 많은 것을 받을 것을 기대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받은 자를 감추지 않습니다.
“그 기명된 자 중 엘닷이라 하는 자와 메닷이라 하는 자 두 사람이 진영에 머물고 장막에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나 그들에게도 영이 임하였으므로 진영에서 예언한지라 한 소년이 달려와서 모세에게 전하여 이르되 엘닷과 메닷이 진중에서 예언하나이다 하매”[민 11:26-27]
성령의 권능은 하늘로부터 내려옵니다. 그것은 결코 감추어지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감추어질 수 없으십니다. 성령에 의하여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실 때 그분을 감출 방법이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날 때, 그것은 분명코 사람들의 놀라움과 흥분을 자아낼 것입니다. 성령은 영적인 무관심과 태만을 일깨워 주십니다. 우리가 성령을 부여받았을 때 우리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받은 자는 다른 이들이 성령 받음을 방해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택한 자 중 한 사람 곧 모세를 섬기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말하여 이르되 내 주 모세여 그들을 말리소서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두고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민 11:28-29]
성령 충만을 받은 자는 그 어느 누구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왕국을 위하여 다른 이들이 권능을 부여받음을 기뻐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령의 권능을 부여받아야 합니다.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 합니다.
성령 받은 자는 사명을 감당 합니다
“바람은 만물에 생명을 주고 그것이 커져 태풍이 되면 큰 나무도 넘어뜨린다. 보이지 않지만 거센 힘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능력입이다”(전춘부).
“우리는 물고기와 같다. 물고기는 언제나 물속에 있어야만 살 수 있다. 성령은 물이다. 우리는 그 안에서 생명을 얻는다”(터툴리안).
“모든 존재하는 것은 성령하나님 안에 있고, 그분 없이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또 이해되지 않는다(B. 스피노자).
“성령님은 우리 안에 임재해 계시고 우리를 소생시키시며 우리에게 구원에 이르는 산 소망을 주시는 분이다(필립스부룩스).
하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임할 때 우리는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일꾼의 제일 조건은 바로 성령 충만함을 입는 것임을 알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임한 신을 그들에게도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신적인 위임을 의미합니다. 이제 70인 장로들은 모세와 동일하게 소명을 받아 백성들의 짐을 나누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들에게 임하자 그들은 예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예언을 했다는 것은 그들에게 모세와 함께 그 백성들을 다스릴 수 있는 권위가 하나님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주어졌음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사역을 하는데 있어서 신적 위임이 매우 중요한데,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모습이 바로 성령 충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성령 충만을 사모해야 하며 성령으로 충만할 때에 우리는 비로소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을 힘입어 일하는 사람들은 똑같은 하나님의 일꾼임을 말씀하십니다.
모세에게 임한 하나님의 신이 장로들에게도 임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로써 이스라엘의 70인 장로들은 모세와 같이 하나님의 일꾼으로 인정되어 백성들을 위하여 일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모세의 지도력에 혹시라도 손상이 갈까봐 여호수아는 모세에게 장로들의 예언을 말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는“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29절)고 여호수아를 질책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임한 모든 자들을 차별 없이 지도자로 인정하였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받은 영을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이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러기에 여호수아가 모세를 생각하는 마음에 그들의 예언을 말리라고 하였을 때, 여호수아를 질책하였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어 지도자로 섬기게 된 모든 장로들은 모세와 함께 일해야 하는 동등한 하나님의 일꾼들이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일하는 성도들에게는 계급이나 지위가 따로 있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각각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과 직분을 다하는 하나님의 동등한 일꾼들입니다. 그러므로 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일꾼된 성도들은 서로를 인정하며 피차 복종함으로 서로를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한 분 하나님을 믿고 한 성령을 받은 성도들이 온전히 성령의 지배를 받는 다면 다툼이나 파벌이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고전 1: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받은 자에게는 분명한 증거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자 70인의 장로들은 예언을 하기 시작했다고 증거합니다. 이로써 그들은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우심을 받은 자임을 인정받게 됩니다.
이 사건에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을 받은 이들에게는 증거가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예언을 하거나 방언을 하거나 혹은 지혜롭게 말씀을 전하는 등의 은사는 결국 성령의 임재의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이 땅에 남겨진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한 오순절 사건(행 2장)은 이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 있던 제자들에게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자 그들은 각기 다른 나라 말로 방언을 하기 시작하였고, 배움이 많지 않던 갈릴리 어부 출신의 베드로가 지혜롭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합니다.
3천명이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성령 충만을 받은 자들에게는 하늘의 증거가 나타나게 됩니다.
분명한 사실은 성령을 받은 자들은 반드시 성령을 받은 증거를 갖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 성령을 받았다는 증거는 무엇인가요?
그것이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신비한 은사는 아니라 할지라도, 성령의 열매로 나타나야 합니다.
“사랑과 희락과 자비와 화평과 오래 참음과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같은 인격적인 성숙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만일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우리는 성령을 받은 자인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성령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충만함을 받지 않으면 온전한 승리의 삶을 살 수 가 없습니다.
오직 성령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붙잡고 강하게 하시고 도와주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능력 있는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오순절은 유월절 주간의 안식일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에 지키는 유대인의 3대 절기(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의 하나이며(레 23:15-16),‘칠칠절’(출34:22; 신16:10), ‘맥추절’(출 23:16) 혹은 ‘초실절’(출 34:22)이라고도 합니다.
유월절이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예표하는 것이라면 오순절은 신약시대 교회의 시작이라는 영적 의미를 지닙니다.
행2:2-4절에는 성령님의 강림하심이 징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바람’,‘불’(마3:11-12),‘방언’등입니다. 이제까지 유대 전통에서 이러한 징표들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나타내는 표시였습니다(출 3:2-5, 13:21, 24:17, 40:38). 특별히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로 성령님의 임재가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바람’(프노에)의 어원을 살펴보았을 때 ‘영’(프뉴마)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사실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으며, 신약(요3:8)과 구약(왕상19:11; 시104:4)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3절)란 말은 약속된 주의 성령님이 ‘각 사람’ 위에 임했다는 사실로, 요엘 선지자의 예언(욜2:28-32)과 예수님의 약속이 구체적으로 성취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구약에서 특수한 목적을 위해서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한정되었던 성령님의 임재(민 11:26-29; 삼상 10:6-
12)가 이제는 예수님을 믿는 모든 무리 가운데 성령님이 임하셨습니다.
우리도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 비해 열등하지 않다. 그는 성부 성자와 동일하시며 함께 영원하시다”(어거스틴).
“성령은 참되시고 변함이 없으시며 성부 하나님 및 성자 하나님과 더불어 한 하나님이시다”(루터).
“성령은 우리의 변호자이시다. 그 분은 우리를 돕고 가르치고 중재하기 위해 보내지셨다”(스위팅).
“성령은 당신의 친구다. 성령은 당신을 위해 함께 거하며 가르치며 훈계하고 축복한다”(바우웬).
“세상에서 365일 동안 있는 것보다 성령 안에서 24시간 있는 것이 더 낫다”(R.A. 토레이).
“나에게 하나님의 영이 떠나가면 나는 고기 한 덩어리에 불과하다” (빌리 그레이엄).
“당신의 생애에 능력이 없는 것은 도우시는 성령께 전적으로 맡기지 않았기 때문이다”(D.L. 무디).
“짐 때문에 쓰러지는 것이 아니라 도우시는 성령님 없이 혼자 지기 때문이다”(레바딘).
“성령님의 섭리에 의해 우리들에게 배당된 재능이 무엇이든지 간에 바로 그것이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임무와 명예가 된다”(T. 에드워즈).
“성령님은 성도의 일상 생활 전반을 지도하신다”(에번즈).
“세상은 성부, 성자, 성령께서 완성하신 경이로운 작품이다”(세일즈).
이러한 말들은 우리가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아야 하고 충만히 받아야 합니다.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북 아프리카의 엘 알라맹(El Alamein)이라는 곳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엘 알라맹을 지키고 있던 영국군의 병력과 독일군의 병력은 서로가 최선을 다하는 막강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양 진영이 모두 다 사막에서의 전투를 수행하는 중에 식수가 고갈되어 괴로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영국군은 전통적인 자신들의 방식대로 물을 발견하고서는 전지까지 파이프를 연결하고 그곳에 바닷물을 채워 넣었습니다. 파이프의 이상여부를 조사하기 위해 아까운 식수를 허비하기 보다는 이렇게 하여 바닷물로 시험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정찰을 나섰던 독일 병사들에 의해 이 파이프 라인이 발견되어졌고, 이 사실은 즉시 독일 진영에 알려져 전 병력이 달콤한 물을 기대하며 곡괭이로 파이프 중간을 끊어 내었습니다.
펑펑 쏟아지는 물을 본 순간 앞뒤 가릴 것 없이 장. 사병 모두 물을 들이켰다. 얼마나 급하고 정신이 없었던지 이들은 얼마 안 있어서 통증이 오기까지는 그것이 소금물인 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처음의 갈증보다 더 심한 고통에 못이겨 마침내 항복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엘 알라맹에 있던 영국 군대는 적의 중대 병력 전원이 고통스런 숨을 내쉬며 손을 머리 위로 똑바로 들고서 어정어정 걸어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투항한 독일군이 제일 먼저 한 행동은 영국군이 가진 물을 얻어 활활 타오르는 목구멍 속으로 들이키는 일이었다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육적으로, 영적으로 갈증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아무 물이나 들이키다간 영육으로 멸망하고 맙니다. 오직 주님이 주시는 성령의 생수만이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생명수가 됩니다.
[요 7:37-39]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아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70인 장로들에게 하나님의 영을 허락하시어 그들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려면 성령을 받아야 하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임하신 성령님, 오늘 우리들에게도 충만하게 임하사 우리를 주장하여 주옵소서’ 기도하며, 충만한 은총 속에 영광 돌리며 사명 감당 합시다.
출 처| 강성찬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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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며 묵상하며 : 하나님의 방식(민11장15-30)
하나님께서는 메추라기를 이스라엘 진중으로 동원하여 백성들로 배불리 먹이는 동시에, 모세의 통치를 보좌하고 통치력을 강화하기 위해 70인의 장로를 세우도록 하십니다.
악을 선으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시되 코에서 넘쳐서 싫어하기까지 일 개월간을 먹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18-20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능히 그들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고기를 조금이라도 먹을 수 있었던 애굽에서의 생활을 그리워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예 상태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고, 오히려 원망만 일삼는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지금까지 그들을 인도하고 보호하던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거두시거나 그들의 양식이 되었던 만나를 거두시는 대신 그들의 소원에 응답하시는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70인의 장로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의 짐을 감당할 70인의 장로들을 세우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신을 임하게 하셨습니다(16, 25절). 이로써 모세는 자기 혼자서는 질 수 없다고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짐(14절)을 장로 70인과 함께 나누어 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들이 처한 문제를 외면치 않으시고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책을 세워 주십니다. 그래서 그 종들로 하여금 능히 그 모든 문제를 뛰어넘어 그들에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해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고 담대히 선포하고 있습니다.
묵상하는 사람들, 2008.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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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 다툼은 문제해결의 고동소리
미국의 작가 찰리 쉬드가 결혼하는 자녀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사랑하는 필! 내가 살던 마을엔 두개의 강이 합친단다. 너와 아내 될 마릴린을 강 언덕 위로 데려가 두 강이 만나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거기서 보면 두 강이 합치기 전에는 점잖게 흐르다가 합쳐질 때는 격노하게 합친단다. 큰 소용돌이가 생기며 마치 상대를 없애겠다고 결심한 것처럼 서로 맹렬히 공격하는 것 같다. 잠시 후 두 물결은 합치면서 이런 인사를 하는 것 같단다. '자! 이제부턴 함께 가요. 우리 앞엔 무언가 더 좋은 게 있을 거예요.'"
쉬드는 계속 썼습니다.
"그때 하류를 내려다보았지. 언제 다툼이 있었느냐는 의심이 들 정도로 강은 넓고 평온해져 있었단다. 결혼도 두 강줄기가 만나 소용돌이친 후 화해하는 것과 같단다. 두 개성이 만나면 서로의 개성과 습관이 상좌를 차지하려고 다툴 것이다. 때로 물거품을 남기며 너희를 숨 막히게 할지도 모른다. 그때 '사랑은 과연 어디 갔느냐?'는 반문이 들 수 있지만 항상 먼저 화해를 청하는 것을 잊지 말라."
불행은 가장 행복한 때를 노리고 스며듭니다. 결혼은 두 인격의 연합을 통해 최대의 행복을 주지만 최대의 고뇌도 겪게 합니다. 결혼은 지상에서 천국과 지옥을 가장 가깝게 맛보게 합니다. 애정으로 친밀해진 순간은 천국과 같고, 다툼으로 얼룩진 순간은 지옥과 같습니다. 결국 결혼생활의 성패는 다툼을 다루는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어떤 분은 부부싸움이 생기면 "우리 사이에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기나?"고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그런 일은 있습니다. 주종관계가 아니라면 서로는 서로에게 반대할 수 있는 특권을 주어야 합니다. 사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이해하면 화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다 부족합니다. 뒤돌아보고 되돌아보면 전혀 큰소리 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나 자신입니다.
다툼은 충격 받을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 해결을 위한 고동소리입니다. 추위가 닥쳐야 소나무의 절개를 아는 것처럼 부부간의 다툼은 서로에 대한 연모의 정을 확인하는 기회가 되고, 인생의 안목을 넓히는 기회도 됩니다. 항상 대낮처럼 밝은 곳에서만 살면 밤의 신비한 세계를 알지 못하는 미숙한 인생이 됩니다. 때로 다툼이 있어도 화해를 앞세우면 삶의 본줄기는 넓어지고 부부간의 친밀함은 더 깊어집니다.
진정한 화해에는 '다투었던 사람과의 화해'도 필요하지만 '다투었던 기억과의 결별'도 필요합니다. 다투었던 일에 대한 비상한 기억력은 영혼을 추락시킵니다. 과거의 상처를 다리 아래 물처럼 기억의 샘에서 떠내려 보내십시오. 과거의 불행에 무관심해야 미래의 행복은 내게 관심을 표합니다. 화해란 다툼의 가능성을 긍정하고, 그 다툼을 잘 극복하며, 다툼으로 생긴 마음의 상처까지 영원히 잊는 것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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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하며 적용하며
1. 백성의 짐을 모세와 나누어 지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세우십니까?(16절)
2.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셨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25-26절)
3. 하나님께서는 원망하는 백성들을 어떻게 대하셨습니까?(18-20절)
4. 칠십 인의 장로에게 신이 임하자 여호수아는 무엇이라 말합니까?(28절) 그에 대한 모세의 답변은 무엇입니까?(29절)
5. 나에게는 나의 짐을 함께 나누어 질 동역자가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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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신하며 간구하며
주님!
봄날의 추운 내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 주는 햇빛처럼,
어린 시절 아무리 뛰어가도
여전히 내 뒤를 따라오던 밤하늘의 조각달처럼,
하나님께서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늘 염려하며 걱정하며 새벽마다 주님께 기도하면서도
주님의 능력과 함께 하심을 잊어버리는
어리석은 나를 고백합니다.
때를 따라 인도하시고
늘 더 좋은 길로 더 좋은 것으로
더 풍성하게 채워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 땅에서 얼마나 주신 일들을 감당할지 모르나
때가 차면 이 땅에서 내게 맡겨진 모든 짐을 벗고
그리운 본향으로 달려갈 수 있도록
건강한 마음과 건강한 생각과 건강한 믿음으로
주신 일들에 최선을 다하게 하옵소서.
특별히 좋은 동역자들을 보내주시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며
주신 일들을 감당하게 하신 은혜와 축복을
사랑의 표현으로 감사하게 하옵소서.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다(눅 10:2)고
나를 찾고 계시는 주님께 헌신하기를 원합니다.
오늘도 나를 주님의 놀라운 역사를 펼쳐나가는
주님의 도구로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아멘.
기도: 홍기웅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
barnabak / 우리에게 임하신 주의 성령 (11: 24-30)
오늘은 오순절에 마가요한의 다락방에 임하셨던 성령 강림을 기념하여 지키는 성령강림주일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로 승천하시면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은 성령님이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을 믿고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기를 힘썼을 때 오순절 날 성령께서 120명의 제자들에게 임하셨습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은 제자들은 그 후 완전히 변화된 모습을 보였습니다.
먼저 그들은 듣지도 못하고 배우지도 못한 각 나라의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아직도 제사장들의 위협이 등등할 때지만 죽음을 각오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인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 하였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의 사건은 그들의 믿음과 생각과 삶을 완전히 180도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 강림의 사건은 오늘 우리들의 믿음과 생각과 삶도 완전히 바꾸어놓은 줄로 믿습니다.
성령 강림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주일이면 주님 앞에 나와 그 예수님을 찬송하고 예배하고 그 분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가치관을 버리고 그 분의 말씀과 신앙에 따라 살아가는 새로운 가치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큰 변화인지 모릅니다.
오늘 성령강림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는 다시 한 번 성령님이 얼마나 절대적인 분인가를 기억하고 성령님을 의지하여 더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변화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가 끊임없이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할 수 없다고 불평했을 때 모세를 도와 함께 백성들을 이끌어갈 70명의 장로들을 선택하는 내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세는 먼저 백성들을 모아서 여호와의 말씀을 알리고 택함을 받은 70명의 장로들을 성막에 모아 세웠습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셔서 모세에게 임한 영을 칠십 장로들에게 임하게 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은 70장로는 그 자리에서 예언을 하므로 성령님이 임하심을 경험 하였습니다.
그런데 70명의 장로로 택함을 받은 엘닷과 메닷이라는 사람이 장막에 오지 않고 자기 진영에 머물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만 어째든 최고 지도자인 모세에게로 그리고 성막에 오지 않았다는 것은 그렇게 좋은 모습은 아닌 듯싶습니다.
그런데 오지 않고 진영에 머물렀던 그들에게도 성령이 임하였고 다른 장로와 마찬가지로 예언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이 모세에게 알려지자 모세의 수종이었던 여호수아가 모세에게 그들을 말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자 모세는 오히려 “네가 나를 두고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대답합니다.
‘그의 영을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는 이 말은 신약에서 오순절에 모든 믿는 자들에게 임하실 성령을 예언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본문은 신약의 오순절을 상징하는 구약의 대표적인 성령 강림절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성령강림에 대하여 몇 가지 중요한 내용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먼저, 성령님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뜻대로 주시는 주권적인 역사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여호수아도 그랬고 우리도 조금은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 엘닷과 메닷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장막에 오지도 않았고 자기 진영에 머물렀는데 그들에게도 성령이 임하셨다고 하는 것은 잘 이해가 안가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보통 마가요한의 다락방에 임하신 성령님을 생각하면서 성령님은 성도들이 모여서 사모하고 합심하여 간절히 기도할 때 임하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령님은 그럴 때 임하시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런 때만 성령님이 임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를 축소하고 제한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성령님은 기도할 때도 임하시지만 기도하지 않은 다른 때에도 얼마든지 임재 하십니다.
고넬료의 집에서는 베드로의 말씀을 들을 때 오순절 다락방에서와 같이 임하셨습니다.
1907년 평양 대 부흥이 일어날 때는 특별히 길선주 장로가 자신의 죄를 회개했을 때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셨습니다.
요한 웨슬리에게는 수요예배에 참석하여 설교를 들을 때 임재 하셨고 마르틴 루터에게는 신앙서적을 읽을 때 임하셨습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이 성령을 받은 것은 그리스도인들을 잡아오려고 길을 가던 때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성령님은 모세에게로 나온 68명의 장로들에게도 임하셨지만 진영에 머물러 있던 2명의 장로들에게도 임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성령의 역사가 얼마나 다양하게 나타나는지 그것을 다 알 수 없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생각과 방법을 초월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우리의 생각으로 제한하거나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님은 자신의 뜻대로 언제든지 우리에게 임하시고 어디서든지 성령의 충만을 허락해주십니다.
성령강림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성령의 충만을 위하여 아무런 노력도 할 필요가 없다는 그런 뜻이 아니고 오히려 다양한 방법을 통하여 임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맛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님을 사모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교회에 나와 예배하고 봉사하고 성령의 은사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집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숲속에서 다양한 통로를 통하여 주시는 성령의 역사를 경험해야 합니다.
모세에게 온 장로들에게 주셨지만 오지 않은 두 명의 장로들에게도 주셨습니다.
장막에 모여 있던 장로들에게도 주셨지만 진영에 머무른 장로들에게도 주신 성령님의 다양한 역사를 경험하면서 성령 충만으로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두 번째로, 성령님을 주시는 목적은 주의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이 바로 모세가 혼자서 일을 할 때 너무 힘들어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70장로를 세우시고 그들에게 성령을 주셔서 모세를 도와 일을 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성령을 받자 예언을 했다는 말씀이 나오고요, 모세는 성령을 받은 자들이 다 선지자가 되는 것을 원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님을 주신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주님께서 맡겨준 일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 성령이 임하셨을 때 그들은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인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영이십니다.
그러기에 성령님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를 증거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증거 하지 않는 것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성령님을 충만하게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우리의 구세주가 되심을 증거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도의 개척 선교사였던 스코트 목사는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미개척 선교지를 향하여 가다가 적의를 품은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긴 창으로 그의 심장을 겨누었습니다.
이젠 꼼짝 없이 죽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약속 위에 굳게 서서 늘 가지고 다니던 바이올린을 켜면서 원주민들의 언어로 찬송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주 예수 이름 높이어 다 찬양하여라. 그 앞에 무릎 끓고서 면류관 드리세. 금 면류관을 드려서 만유의 주 찬양"
스코트 목사는 잠시 후면 다가 올 죽음을 기다리며 눈을 감고 찬양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3절이 다 끝나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눈을 떠보니 그를 겨누고 있던 사람들의 손에서 창이 떨어져 있었으며,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찬양을 받으실 그 높으신 이름이 누구인지 말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들과 함께 집으로 가서 여러 해 동안 그들 가운데서 거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해 성령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일을 잘 감당하도록 우리가 성령님을 받을 때에는 분명 어떤 은사가 주어집니다.
오늘 본문에서 모세가 받은 성령을 장로들이 받았을 때 70명의 장로들은 예언을 하였습니다.
신약성경에 의하면 예언은 성령의 은사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에서 예언을 성령의 제일 첫 번째 은사로 꼽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서는 ‘예언하기를 사모하고, 방언도 금하지 말아야 하지만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예언을 하였다는 것은 성령께서 임하실 때는 어떤 성령의 은사가 나타난다는 것이요 그 은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성령을 받은 자로서 주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내게 주신 성령의 은사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 은사를 활용하여 일할 때 우리는 효과적으로 능력 있게 주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성령을 받은 자는 성령의 역사나 은사에 대해서 시기하지 말고 존중해주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장막에 나아오지 아니한 엘닷과 메닷에 대하여 여호수아는 ‘그들을 말리소서.’했습니다.
이 말을 다른 번역으로 보면 ‘그들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들, 즉 모세의 명대로 성막에 나오지 않았던 그들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고 어떻게든지 책임을 묻고 그들을 징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여호수아가 그들을 시기하여 경계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갑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들을 시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임하신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였고 그들뿐 아니라 모든 사람도 성령을 받아 선지자가 되게 하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아 주의 일을 감당할 때 우리는 흔히 여호수아와 같은 잘못을 범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시기하고 못마땅하게 여기고 귀하게 쓰임 받는 사람을 시기하면서 성령님을 독점하려는 생각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령님은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고 우리 모두를 통하여 역사하시고 우리 모두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도록 하십니다.
각자에게 맞는 성령의 은사도 주시고 크게 들어 쓰시기도 하시고 작게 들어 쓰시기도 하시고 이런 저런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는 절대 다른 사람들의 역사에 시기하면 안 됩니다.
그들에게 임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여야 합니다.
모세는 정말 이런 면에서도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장로님이 외국의 어느 지역에 선교사를 도와서 큰 농장을 개발했습니다.
못사는 사람들에게 일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고 일을 하면 살 수 있는 길을 마련해준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선교지의 사람들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고 노동의 가치를 심어주었던 아주 훌륭한 사업이었고 선교사역의 대표적인 성공 프로젝트로 꼽힐 만 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성공 프로젝트가 다른 지역으로 활발하게 확장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이런 성공 사역이 널리 확장되어 더 많은 사람들이 가난에서 벗어나고 잘 살게 되면 더 좋을 텐데,
그리고 그 노하우를 다른 사람에게 알려서 효과적으로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그 장로님은 그 프로젝트가 확장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노하우를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일을 막으려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선교열매를 자신만이 따 먹고 누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의 일을 하는 것은 내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그것은 성령의 역사요 성령의 도우시는 은혜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정할 때 우리는 교만하지 않을 수 있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에서 성령님의 역사를 인정해야 하고 성령님의 역사하심에 또한 우리는 절대 시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미국의 D. L 무디 목사가 한참 성령의 능력으로 큰 역사를 일으키고 있었을 때 한 지역에서 무디 목사를 초청하여 전도 집회를 가지려는 준비모임이 열렸습니다.
이때 어떤 젊은 목회자가 벌떡 일어나 “왜 강사로 무디만 고집합니까? 무디 외에는 설교자가 없단 말입니까?
그가 성령을 독점하기라도 했단 말입니까?”라고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러자 존경받는 원로 목회자가 조용히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무디만이 성령을 독점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러나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이 시대에 무디를 독점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이 시대에도 분명히 성령께서 쓰시는 사명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인정해야 하고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고 그것을 시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세와 택함을 받은 장로들이 성막에서 성령의 강림을 경험한 후에 그들은 진중으로 돌아왔습니다.(30절)
성막에서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고 성령의 강림을 체험한 사람은 그 자리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진중으로 가정으로 일터로 직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령을 체험하고 모시고 사는 자들은 먼저 자신의 모습 속에서 그 결과가 나타나야 합니다.
성령을 모시고 살았던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였다고 했습니다.(12:3)
아울러 내가 살아가고 있는 가정에서 직장에서 일터에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복음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증거 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과 동행하며 성령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서른이 넘어서 군 생활을 하게 된 어떤 목사님이 군대에서 경험했던 간증입니다.
신병이 되어서 내무반에 신고식을 하게 될 때, 고참의 엄포와 함께 신고식에서 반드시 내무반장이 좋아하는 유행가를 불러야 한다는 요구에 괴로워하던 날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의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찬송가 384장을 하라는 조용하지만 너무나도 강력한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후에 벌어지는 어떤 불이익도 감수하겠노라는 각오로 성령의 음성을 따르기로 작정하고는 그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갈길 다 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고참들의 고함과 야유와 협박이 찬송을 중단시키려고 했지만, 어디선가 "조용히 해라, 찬송 좀 듣자." 하는 어떤 소리와 함께 그 목사님은 찬송을 끝까지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그 내무반에서 한 상관이 그에게 다가와 성경에 대해 묻고, 성경공부를 인도해 달라는 부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 그 상관은 제대 후에 어느 자그마한 교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큰 일꾼이 되었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미 성령을 받은 자로서 성령의 말씀하심에 조용히 귀 기울이며 성령님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성령님은 때로는 잔잔하고 고요하게, 때로는 급하고 강하게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 음성에 순종할 때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줄 믿습니다.
성령을 받은 자로서 성령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가정과 직장과 일터와 학교에서 성령님께 민감한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김홍도 목사 / 시기를 극복한 사람! (민 11:24-30)
시기(jealousy)는 남을 크게 해치고 자신에게 큰 손상을 입히는 심리상태입니다. 콜튼(Charles Colton)씨는 “남이 불행해질 때 진심으로 동정하는 사람이 한 사람쯤 있다면 남이 성공할 때 시기하는 사람은 천 명쯤 된다”라고 했습니다. 또 “남이 성공할 때 시기하지 않고 존경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라고 한 사람도 있습니다. 시기심을 극복하지 않으면 큰 축복을 받을 수 없고 하나님께 큰그릇으로 쓰임 받을 수도 없습니다.
본문에 보면 모세는 시기를 극복한 위대한 지도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를 돕는 70인 장로들이 모세가 받은 성령을 다 받고 예언도 했는데 그 중에도 엘닷과 메닷이란 사람은 회중에 나오지도 않고 장막 안에 있다가 성신을 받고 예언을 했습니다. 이 때에 장차 모세의 후계자가 될 여호수아가 모세에게 이르기를 “…내 주 모세여 금하소서”(민11:28) 하고 못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후계자가 될 여호수아의 마음속에 다른 사람이 혹 그 자리를 넘보지 않을까 시기하는 마음이 생겼던 모양입니다. 이때 모세는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민11:29)고 대답했습니다. 모세는 시기심을 극복한 위대한 지도자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1. 남을 해치는 시기
① 시기심 때문에 최초로 살인한 사람은 가인입니다
자기의 불신 때문에 제사에 실패한 잘못은 깨닫지 못하고 제사가 열납된 동생 아벨을 시기하여 농기구로 쳐 죽였습니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살인 사건이 바로 시기 때문이었습니다.
② 다윗을 죽이려한 사울왕
사울왕이 교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되자 무적의 장수 골리앗이 나타났습니다. 아무도 나가 싸울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을 때 소년 다윗이 의분에 불타서 나가 골리앗을 물리쳤을 때 여인들이 춤을 추며 다윗을 칭송하기를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18:7) 하는 말을 듣고 사울은 심히 불쾌해 하며 시기심이 불타올라 “이러다간 다윗이 내 왕위까지 빼앗겠구나” 하면서 구국공신이며 자기 사위인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니다 결국 다윗을 찌르려던 그 창에 자기 가슴을 찔러 자살하였습니다. 사무엘상 19장 10절에 “그 이튿날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힘있게 내리매…”라고 한 말씀을 보면 시기심을 극복하지 못하면 마귀에 사로잡혀 불행하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③ 모세를 시기하다 문둥병에 걸린 미리암 모세의 삼남매 중 첫째가 미리암이고 둘째가 아론이고 막내가 모세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어 백성들의 존경을 받고 좌지우지하는 것을 보고 은근히 시기하고 미워하던 차에 모세가 어쩌다 구스 여자를 아내로 맞았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에디오피아 사람이라고 되어 있는데 어쨌든 아프리카 흑인 여자를 얻었을 때 이 때가 기회다 하고 아론과 합세하여 비방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민12:2)라고 했고 그 다음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민12:2)고 하셨고 8절에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 아니하느냐” 하시고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주모자 되는 미리암을 쳐 문둥병에 걸리게 하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간곡히 기도하여 일주일 후에 고쳐 주셨지만 자기 동생으로만 알고 영적 지도자인 모세를 비방하다가 문둥병에 걸렸던 것입니다. 시기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옵니다.
④ 예수를 죽인 바리새인들의 시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직접적인 원인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시기심 때문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18절에 “이는 저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러라”고 했습니다. 시기의 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시기는 살인하고 거짓말하는 마귀가 주는 마음입니다. 요사이 장경동 목사님이 인기가 올라가는 것을 보고 시기하여 비평하는 사람도 더러 있지만 어쨌든 기독교를 비방하던 도올 김용옥 씨를 치우고 일반 공영 방송에 나와 웃기면서도 전도를 하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 분은 하루 일곱 시간씩 기도하라고 가르친다고 합니다. “나보다 기도를 더 많이 해서 그런 축복을 받는구나”라고 생각하고, 부럽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명성교회가 장로교 최대의 교회가 된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김삼환 목사님이 얼마나 고생하고 연단 받았는지 말도 못합니다. 그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누구도 따라가지 못합니다. 시기하면 안 됩니다. 작은 교회 목회자들이 큰 교회를 헐뜯고 비평하는 일을 많이 하는데 이것은 복 받지 못할 일입니다.
남을 비판하고 비방할 때 “과연 내가 순수한 마음으로 하는 것이냐, 시기심에서 하는 것이냐”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시기를 극복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축복도 못 받고 귀한 그릇이 될 수도 없습니다.
2. 자기를 해치는 시기
시기는 남을 비방하고 부당하게 비판하여 큰 해를 끼칠 뿐 아니라 자신도 큰 손해를 입는 무서운 죄악입니다. 동생을 시기하여 농기구로 쳐 죽인 가인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유리방황하는 신세가 되었고 사울왕은 시기심을 극복하지 못하여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니다가 악신에 시달리며 미쳐 날뛰다가 결국 다윗을 죽이려던 창에 자기 가슴을 박고 자살했습니다. 미리암은 동생이라고 얕잡아보고 지도자 모세를 함부로 비방하다가 문둥병까지 걸렸고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의 행진이 일주일이나 지연되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싸우고 다투며 분란이 일어나는 것은 그 근원을 보면 시기심 때문인 경우가 많은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시기심이 교회를 파괴하는 마귀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 것은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가 늙어서 플로렌스(Florence)에 있는 큰 홀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 스케치를 부탁 받았는데, 젊은 화가 미켈란젤로(Michelangelo)도 역시 스케치를 부탁받았습니다.
그 때에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어떤 사람이 두 사람의 스케치를 보다가 말하기를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이젠 늙었구만” 하고 말하는 것을 듣고 마음에 상처를 받고 자기 명예가 실추되었다고 느끼며 남은 생애를 우울증에 시달리며 보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심할 것은 남을 칭찬하는 말을 들을 때 시기심이 들거나 자신이 상처받지 않도록 조심해야 되며 또 남에게 시기심을 유발시키지 않도록 조심해야 됩니다. 시기심을 극복하지 못하면 남을 악평하거나 중상모략 하여 큰 해를 입히게 되고 자신도 마귀에게 사로잡히게 되고 큰 손해를 보게 됩니다. 결코 성령충만 하거나 은혜충만한 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잠언 14장 30절에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시기심을 극복하지 못하면 마음에 화평이 없고 불안하게 되고 뼈가 썩는 것 같은 큰 고통과 손해를 입습니다. 욥기 5장 2절에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시기를 극복 못하면 어리석은 자가 되고 큰 손상을 입습니다.
3. 시기의 동기
시기는 교만하기 때문에 생기는 심리입니다. 남에게 존경과 칭찬을 많이 듣는 사람이 자기 외에 다른 사람이 칭찬 듣고 존경받는 것을 보면 불안해 하고 시기하게 됩니다. 아예 자기는 부족하기 한량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를 낮추기 때문에 시기할 기회가 적습니다. 시기는 교만의 사촌입니다.
사울왕은 이스라엘의 초대왕으로서 인물이 출중하게 잘난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키가 어깨 위는 더 큰 사람이고 인물이 준수한 사람인데다 왕이 되고 나니까 교만해져서 누구의 말도 안 듣고 하나님의 말씀도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에 교만을 깨뜨리시려고 무적의 장수 골리앗이 나타났는데 속수무책이었을 때 소년 다윗이 나타나 골리앗을 쓰러Em렸습니다. 그 때에 여인들이 춤을 추며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18:7) 하는 말을 듣고 불안해지기 시작했고 왕위를 빼앗길까봐 두려움이 생겨서 자기 사위요, 구국공신인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녔고 악신에게 시달렸습니다. 교만해져서 시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비극의 종말을 맞이했습니다.
전에 리비아 사막에 한 성인이 은둔생활을 했습니다. 세상 것을 초월한 성자였습니다. 마귀가 예쁜 여자로 나타나 유혹을 해도 흔들리지 않았고 물질이나 명예로 시험해도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그 때에 한 마귀가 그런 시시한 방법 집어치우라고 하며 다른 방법으로 접근했습니다. 그 성인에게 가까이 가서 귀에다 대고 “혹시 이 소식 들었습니까? 당신의 동생이 알렉산드리아에서 감독이 되었다고 합니다” 하고 속삭였더니 그 평온하던 얼굴이 금방 잔뜩 찌푸려지더니 험악한 얼굴이 되더랍니다.
성공할 때 조심해야 합니다. 가난하다가 부자 될 때 조심해야 합니다. 직위와 직분이 높아질 때 교만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만 마귀, 시기의 마귀가 들어와 마음을 사로잡게 됩니다.
4. 시기를 극복하면 큰 인물이 되고 큰 복을 받습니다
사무엘하 3장 1절에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가니라” 하는 말씀을 읽을 때 사울왕에 대해서 측은한 생각이 들면서 비참함을 느끼게 됩니다.
마음이 겸손하고 너그러운 다윗은 점점 강성해지고 마음이 좁고 교만하여 시기심으로 꽉 차서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니던 사울왕은 점점 쇠약해지다가 결국 자기 창에 자기가 엎드려 자살하고 훌륭한 아들 요나단도 죽고 말았습니다. 교만과 시기를 극복하지 못하여 결국 비참한 운명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순간순간 기도하면서 시기를 극복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비참해지고 치사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유명한 주경가 F. B. 마이어 목사의 은혜로운 간증담이 있습니다. 가까운 친구인 G. 캠벨 목사가 미국에서 사역할 때는 매일 기도해 주는 일은 쉬운 일이었는데 캠벨 목사가 영국으로 돌아와 자기 교회 가까이서 목회한다고 하니까 불안과 시기심이 일어나기 시작하더랍니다. 그러나 마이어 목사는 그 마음을 눌러버리고 자기 교회에서 크게 환영식을 해드리고 그날 밤에는 캠벨 목사님 교회에 가서 그 분의 설교를 듣기로 하고 갔더니 유명한 C. H. 스펄젼(Spurgeon) 목사님도 오셨더랍니다. 결국 마이어 목사님도 훌륭한 목회자로 또 주경가로 성공적인 목회를 하였다고 합니다. 얼마나 훌륭합니까?
서양에 있는 한 유명한 대학에서 한 동양 사람이 늘 일등을 했고 브라운(Brown)이란 사람은 그 나라 사람인데 늘 2등만 해서 친구들이 아쉽게 여겼습니다. 그러다가 그 동양 학생이 맹장염에 걸려 수술하느라고 여러 날 결석을 하게 되자 브라운의 친구들은 은근히 좋아하며 이번 학기에는 일 등을 하리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학기말 시험을 보자 동양 학생이 또 일 등을 하더랍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으니까 그 동양 학생이 고백하기를 병원에 있을 때 브라운 학생이 라이벌이며 적수인 자신을 매일 찾아와서 강의 들은 것을 보여주고 설명해 주어서 여전히 일 등을 했다고 하면서 “나는 공부벌레가 되어서 성적으로 일 등은 했지만 인격적으로 브라운을 따라갈 수 없으며 훌륭한 인격자인 그를 존경한다”라고 하더랍니다. 시기심을 극복한 브라운 학생이 얼마나 훌륭합니까? 교만과 시기심이 들 때 속으로 간절히 기도하며 이를 극복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축복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