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동면의 감자골 막국수집
세자매에게 도움을 주셨던 쥔할머님, 인자한 모습 반갑습니다.
2003년 1월 중순 어느날 오후4시경...
한겨울이라 날씨탓에 거리엔 사람이 거의 보이질 않는다.
명동에 손님을 내려 드리고 육림극장 앞을 지나고 있을 때
멀리서 한 할머니가 손을 들었다.
할머니는 옷을 두껍게 입으셨고 시장을 보셨는지
큰비닐 봉지와 바구니에 하나가득 물건이 담겨있었다.
차를 손님가까이에 세워 할머니를 태웠다.
"어서오세요, 할머니!
어디로 모실까요?"
"아이구 수고 많아요.
동면갑시다."
"예, 할머니! 동면으로 모실께요.
날씨가 많이 춥죠?"
"예, 날씨가 춥내요."
우리는 날씨로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할머니! 시장보시고 가시는 거예요?"
"예, 동면에서 식당을 하거든요.
시장을 보러 왔더니만 날씨가 춥네요."
"할머니! 따뜻하게 해드릴께요.
조금있으면 따뜻해 질거예요."
할머니를 위해 히터를 2단으로 올려주었다.
"아이구 이뻐라.
이 아이들은 딸들이예요?"
할머니는 앞좌석에 꽃아둔 세자매의 사진을 보시고 물으셨다.
"예, 우리 딸이나 마찬가지예요.
부모님들이 십년전 뺑소니 교통사고로 두분이 다 돌아가셔서
뉴스에 나오길래 도와주고 있어요.
대학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할때까지 학비를 도와주려고 해요."
"아이구 좋은일 하시네...
그럼 자식들은요?"
"아~예, 우리 얘들도 있어요.
1남 1녀예요."
"아, 그래요?
아빠가 이렇게 좋은일 하시면 나중에 자식들이 복받는대요."
할머니는 덕담까지 해주셨다.
차 실내는 더울정도로 어느새 따뜻해졌다.
할머니는 호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것 같았다.
"아저씨! 좋은일 하시는데 많지 않지만 이거 돼지저금통에 넣어 주세요."
할머니는 만원짜리로 5만원을 나에게 건내 주셨다.
"할머니! 할머니도 어려우실탠데 괜찮아요."
"아이, 내가 손주 생각이 나서 그래."
"할머니! 이 돈 손주님 갔다 드리세요."
"괜찮아요, 내 마음이예요."
할머니는 몇번의 만류에도 뜻을 굽히지 않으셨다.
"할머니! 그럼 만원만 넣으세요."
"아니예요. 아저씨도 고생하시면서 좋은일 하시는데 그냥 받아주세요."
"그럼, 할머니! 고맙게 받겠습니다."
차를 잠시 길가에 세우고 할머니가 주신 5만원을 돼지저금통에 넣었다.
"부모도 없이 얼마나 고생이 많겠어?
얘들은 지금 누가 키운데요?"
"예, 이 세자매는 고모님이 대려다 키우시고 있어요.
막내가 생후 3개월때 부터요."
"아이구, 고마우셔라."
"그러니까 부모나 마찬가지지요.
그래서 얘들이 고모님을 어머니라 불러요."
"그럼 그래야지.
그것들 이쁘다. 표정이 밝네."
"예, 얘들이 다 착해요.
공부도 잘하구요."
"우리 손주들도 부모가 다 도망가 내가 대리구 살고 있다오."
"내?"
난 할머니의 말씀에 깜짝 놀랐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됐어요?"
무언가 할머니의 인생이 순탄치 않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할머니는 잠시 시름에 잠기시더니 말문을 열기 시작하였다.
"저는 19살때 동면으로 출가를 했어요.
그래서 지금 예순일곱이 됐어요."
"그럼 결혼후 계속 동면에 사셨네요?"
"그렇치요, 큰아들이 일찍 결혼해서 서울가 따로 살았어요.
지 아버지가 86년도에 돌아가셨는데도 하나도 안도와 주더라고요.
그래서 나머지 자식들 공부 가르치느라 농사도 지으면서
시내 식당에 일을 다녔어요."
"아~ 예. 고생이 많으셨겠네요."
"그랬더니 아버지 친구분들이 '위치도 좋은댈 나두고
왜 남의 일을 다니느냐 여기서 차려서 뭐라도 하며는 도와 주겠다'고
하는데 내가 경험도 없이 그거 한다는게 너무 힘들 잖아요.
그래서 큰 아들보고 그랬어요.
'남의 밑에서 일하는것 보단 낳겠지. 내려와서 같이 막국수 장사나 하자.
엄마 혼잔 못하겠고 같이하자' 그랬더니
'그까짓 막국수 몇 그릇 팔아서 뭐이 남아유.난 안내려가유. 난 춘천안가유.
몇번을 그래도
'난 춘천안가유.그러드라구요."
"아~ 예 그래서요?"
"막내가 그러자 군대갔다 제대를 했어요.
그래서 내가
'그럼 막내하고 할태니깐 나중에 아무소리 하지말거라'
그랬죠.
그 당시 지 아버지가 2천만원을 빛 지고 돌아가셨어요.
그러니까 뭐 사는게 말이 아니죠.
대학교 다니는거 있지 5남맨데 둘밖에 출가를 못시키고 돌아가셨으니
사는게 오죽 했겠어요?"
" 그렇지요. 자식들 공부도 시키고 장가도 보내야 하는데..."
"있던 재산 땅은 좀 있어도.....
막내가 군대 갔다와 대학가려니깐 힘들잖아요.
학원 1년 다녀서 시험을 보니 안돼지요.
그러니깐 대굴대굴 구르면서 난 뭐해먹고 사느냐고....."
할머니는 옛일을 생각하시며 한숨을 지신다.
"그러던차에 내가 '엄마하구 막국수 장사할까?'그랬더니 헉 하더라구요.
'엄마,진짜요?'
'그래,진짜다. 언제 엄마가 헛소리 하는거 들어봤냐?'그랬더니
'알았어요.'하더라구요.
"정말 다행이네요. 요즘 젊은이들이 그런 생각을 하겠어요?"
"저도 저 나름대로 서울가서 알아 봤대요.
포장마차라도 할떼 없나하구...
그런데 포장마차도 깡다구 샌놈이나하지 아무나 하는게 아니더래요."
"그렇지요. 요즘 포장마차도 아무나 못해요.기업식으로 한대요."
"그때 방이라곤 전부 창고죠.
'엄마 저런건 어떻게 해요.'
'그래, 저건 우사로 실어 날라라.
나중에 두부라도 하면서 땔감으로 쓰더라도.'
그랬더니 트럭으로 하나 넘는걸 그 다음날 시내 갔다 와보니
리어카로 다 실어내어 깔끔하게 정리를 다해 놓은거예요.
그리고 지손으로 허가서를 만들어서 그린밸트로 허가가 안나오는걸
3월달부터 해가지고 8월1일 허가가 떨어졌어요."
"다행이네요. 그린벨트는 허가가 잘 안나는데..."
"그래서 2천만원 빚을내어 아무것도 모르고 식당을 시작했는데
개업식 날부터 손님이 바글바글 했어요.
1년도 안돼서 그 빚 2천만원을 다 갚았지 뭐예요."
나도 모르게 할머니의 말씀에 박수가 나왔다.
"짝짝짝. 할머니! 대단하세요."
"그렇게 장사가 잘 돼니깐 큰아들이 밀고 들어오는 거예요.
그런걸 내가 안받아 줬지요.
그랬더니 수시로와서 행패를 부리는 거예요."
"아~ 예,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그때 막내를 결혼 시키게 돼서 정 들어오려면 애 결혼 시키고
내보낼테니 들어오라고 이 소리 한 마디했더니 내보내지도 않았는데
그말 듣고 밀고 들어온 거에요.
지 살던 데 정리도 안하고......"
"그래서요?"
"지가 힘들게 밀고 들어왔으면 잘 해야 돼잖아요.
그런데 살림전권을 달라는 거에요.
내가 안주지요.
살림은 그렇게 못되게 했는데 내가 왜 줘요?
큰일 날라고?
힘들게 살다가 겨우 기반을 잡았는데..."
"그렇지요.어려울때 도와주지 않더니만 잘 되니까...."
"그랬더니 전권을 안 주는 거 때문에 지네 둘이 맨날 싸우는 거에요.
그런데 화는 나한테 돌아오는 거에요.
그 후로 투탁하면 집을 나가요.
딸내미 고3때 나가서 20일 만에 들어오더니 이번는 아들 고3때
또 나갔어요.
지금 나간지 1년이 넘었어요."
"그럼 며느리도 나가고 아들도 나갔네요. 손주들만 남기고..."
"그럼요. 마누라 나가니까 아들도 나가더라구요."
"아이고 이를 어째....손주가 몇이에요?"
"둘이에요. 남매"
어느덧 할머니의 인생살이를 듣다보니 동면 감자골가든 앞에 다 왔다.
"요금 얼마 나왔어요?"
"4천원이요."
할머니는 5천원 짜리 지페를 내놓으셨다.
"할머니 잔돈 천원 여기 있어요."
"아저씨, 됐어요. 수고하셨는데...
내가 여기까지 들어오면 잔돈 안 받아요."
"그럼 잔돈 천원은 불우이웃돕기 할게요."
"고맙습니다. 난 성당에도 돕는 데가 있어요.
아저씨 마음 씀씀이가 고마워서 조금 도운 거에요."
할머니는 문을 닫으시려다 다시 열고 말을 건넸다.
"참! 시장하실텐데 뭐좀 드시고 가세요."
"아녜요. 이렇게 도와주신 것도 고마운데..."
"어서 차 저리 대고 들어와요."
몇번의 고사에도 할머니는 문을 닫지 않으시길래 할 수 없이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럼, 감자 부침이나 한개 먹고 갈게요."
"그래요. 들어와요."
차를 주차시키고 내렸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니 옛날 집을 식당으로 개조했지만
옛집 그대로였다.
할머니는 건넛방으로 나를 안내 했다.
손님이 없을 시간인데도 방문 밖에 신발들이 많은거로보아
장사가 잘돼나보다.
방에 들어가 잠시 있자 할머니가 물주전자와 물수건을 들고
들어 오셨다.
할머니는 내 맞은편에 앉아 환하게 웃으시면서 말을 건네셨다.
"배고플텐데 뭐좀 먹고 가요.
뭐 먹고 싶은거 있어요?"
어머니가 건네는 말처럼 다정했다.
" 아냐요,할머니. 간단하게 감자붙임이나 하나 주세요."
"에이~ 그래가지고 요기가 되나?
든든하게 먹어야 일을 하지.
쉬고 있어요.
내가 알아서 가져올께요."
"할머니, 조금만 가져 오세요."
할머니는 내말을 듣는둥 마는둥 문을 닫고 나가신다.
꼭 아들 밥 챙겨주시는것 같았다.
잠시후....
할머니는 여종업원과 함께 음식을 쟁반에 들고 들어 오셨다.
"오래 기다리셨지?
시장할텐데..."
"할머니! 뭐 이렇게 많이 가져 오셨어요."
"아냐, 배불리 먹고 좋은일 많이해요."
큰상위에는 금새 음식들로 가득 찼다.
그날 할머니가 차려주신 음식을 맛있게 먹고
음식값을 밥상위에 몰래 올려놓고 나오려다 할머니한테 들통이나
할 수 없이 그냥 나와야만 했다.
"나중에 세자매와 같이 한 번 들려요."
할머니는 세자매와 같이 놀러오라는 말씀을 빼놓지 안으셨다.
그 후 몇 개월이 지나 6월 8일,
이날은 뜻깊은 날이었다.
울카페 제1회 정기모임이 있는 역사적인 날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남춘천역에서 처음만나 낮선 사이였지만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반갑기만 했다.
한분 두분 모여 서로 인사하느라 분주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평양을 건너 날라온 비 해피님도 있었고,
야구시합을 시작만 시켜놓고 보지못한채 이곳으로 달려온 야구감독 베이스볼 123님,
멀리 인천에서 달려온 블랙로즈.그리고 서울의 갯마을님,경기도의 스카이님,
춘천 영천사님,천사의손님 환경지킴이님.세자매등 많은 회원이 참석해 주셨다.
이렇게 우리의 첫 만남은 시작이 되였다.
나는 먼저 점심 식사도하고 감자골가든 할머니께 세자매와 울 회원님들을
소개하고 싶어 소양댐 구경을 하기전 감자골가든 할머니댁부터 찾아 갔다.
할머니는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아 주셨다.
우리는 할머니가 정성스레 준비한 춘천의 명물 막국수와 동동주,파전등
음식을 맛있게 배불리 먹고 다음 행선지인 소양댐으로 향했다.
이것이 인연이되어 그 후에도 춘천에서 정모가 있거나
집에 손님이 찾아 오시면 이곳 감자골 할머니댁으로 모시고 온다.
'할머니! 할머니의 사랑 잊지 않을께요.
부디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다음 정모때도 세자매와 꼭 찾아 뵐께요.' -끝-
<그후 2년이 지난 어느날 건장한 한 청년이 내 택시를 타고
동면 감자골 막국수 집으로 가자고 했다.
어! 이런 인연이.....
바로 할머니와 같이 막국수집을 한다던 그 막내 손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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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할머니 건강하시고 사업 번창하시길 빌어요.....
좋은뜻을 마음속에 지니고살면 행복한 날이 옴니다..할머니 건강하시며 오래오래 사세요..
인간 만세..*^^*...
검색하다 이내용을 알게 되었어요.
마음이 짠하네요.
우리의 이야기 입니다.
또한 저의 어머님 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