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규 金大圭(1878 ~ 1907)】 "경상도, 강원도에서 항일의병투쟁을 전개한 의병장
1878년 11월 9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예안면(禮安面) 도촌리(道村里)에서 출생하여, 영양군(英陽郡) 입암면(立巖面) 교리(橋里)로 이사하여 살았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호는 학남(鶴南)이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현규(李鉉圭)를 중심으로 신형일(申衡一)·권이달(權以達)·조완이(趙完伊) 등 수십 명의 동지를 규합하여 청송 주왕산(周王山) 대전사(大典寺)와 울진 불영사(佛影寺)에서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기로 결의하였다. 동지들과 함께 강원도와 경상도 각처에 격문을 살포하고 의병 500여 명을 모집하여 주왕산에서 훈련하였다. 1906년 2월에는 영양군 입암면 교리의 자택에서 의병부대(義陣)를 새로 편성하고, 자신은 도포장(都砲將)이 되었다.
1906년 2월 19일 불영사에서 안동·청송(靑松)·진보(眞寶)·영양(英陽) 4군의 의병부대를 재편성하였다. 대장 이현규, 중군장 신형일·류시연(柳時淵), 도포수 권대성(權大聲), 집사 조완이 등으로 진용을 편성하고, 자신은 군량도감(軍糧都監)을 맡았다. 그리고 주왕산에서 의병 500여 명을 훈련시켜 실전에 대비하였다. 그 뒤 진보·울진 일대에서 일본군과 여러 차례의 접전을 벌여 큰 전과를 올렸다.
이현규의진의 창의지인 대전사(경북 청송) [판형2] |
같은 해 4월에는 진보의 장수령(長水領)에서 일본군 헌병 다케후지(武藤) 부대와 여러 차례 교전하였다. 이어서 진보 오누지 전투에서 다케후지를 비롯한 일본군 1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전투에서 집사 조완이가 전사하고 대장 이현규는 총상을 입었다. 5월에는 울진 죽변(竹邊)의 왜관을 공격하여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같은 해 8월 잔류 병력을 정비·보강하고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10월에는 병왕동(屛王洞)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전개하여 그들에게 포위되는 위기를 맞았으나 야음(夜陰)을 틈타 물속을 헤엄쳐 탈출하였다.
1907년 11월 안동·영양 등 일월산(日月山)을 중심으로 태백산맥의 산악지대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안동군 임동면(臨東面) 대곡리(大谷里)의 태백산맥 준령인 장갈령(長葛嶺) 전투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다가, 일본군의 방화작전(放火作戰)으로 불길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11월 21일 전사하였다.
영양군 입암면 입암리에 ‘순국학남김대규의사기념비(殉國鶴南金大圭義士紀念碑)’가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