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내편 6편 대종사편 제1장 네 번째 이야기는 참다운 사람의 모습. 진인은 喜怒의 감정이 四季節과 通하여 사물과 적절하게 어울려서 그 끝을 알지 못한다.
莊子6-4 若然者는 其心이 志하며 其容이 寂하며 其顙(상)이 頯(규)하니 凄然似秋하고 煖(훤)然似春하야 喜怒通四時하야 與物有宜하야 而莫知其極이니라
故로 聖人之用兵也는 亡國하야도 而不失人心하며 利澤施乎萬世하야도 不爲愛人하나니라
故로 樂通物이 非聖人也며 有親이 非仁也며 天時 非賢也며 利害不通이 非君子也며 行名失己 非士也며 亡身不眞이 非役人也若狐不偕와 務光과 伯夷와 叔齊와 箕子와 胥餘와 紀他와 申徒狄은 是役人之役하며 適人之適이라 而不自適其適者也니라
그 같은 사람은 마음이 한 곳에 머물러 있으며, 모습은 고요하며, 이마는 넓고 평평하니,
서늘함은 가을과 같고 따스함은 봄과 같아서, 喜怒의 감정이 四季節과 通하여 사물과 적절하게 어울려서 그 끝을 알지 못한다.
그 때문에 聖人이 군사를 움직일 때는 나라를 멸망시키더라도 인심을 잃지 아니하며, 이익과 혜택을 만세에 미칠 정도로 베풀어도 〈백성들은〉 은혜를 입었다고 느끼지 않는다.
그 때문에 사물과 통하는 것을 즐기면 성인이 아니며, 친애함이 있으면 仁人이 아니며, 天時에 〈일부러〉 맞추려고 하면 賢人이 아니며, 이로움과 해로움을 하나로 여기지 않으면 군자가 아니며, 명예를 추구하여 자기를 잃어버리면 선비가 아니며, 자기 몸을 죽여 참된 본성을 저버리면 남을 부리는 사람이 아니다.
狐不偕, 務光, 伯夷, 叔齊, 箕子, 胥餘, 紀他, 申徒狄과 같은 사람은 다른 사람이 할 일을 대신 처리하고 다른 사람의 즐거움을 자기의 즐거움으로 여겨 스스로 자기의 즐거움을 즐거워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若狐不偕(약호불해)、務光(무광)、伯夷(백이)、叔齊(숙제)、箕子胥餘(기자서여)、紀他(기타)、申徒狄(신도적),是役人之役(시역인지역),
호불해(狐不偕), 무광(務光), 백이(伯夷), 숙제(叔齊), 기자(箕子), 서여(胥餘), 기타(紀他), 신도적(申徒狄)과 같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부역(일)에 부림을 당하고,
* 狐不偕(호불해) : 인명. 司馬彪는 옛날의 현인(賢人:古賢人也)이라 했고, 成玄英은 “성(姓)은 호(狐)이고 자(字)가 불해(不偕)이며 옛날 현인이다. 또 요(堯)임금 때의 현인으로 요임금의 선양(禪讓)을 받지 않고 하수(河水)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 한다[姓狐 字不偕 古之賢人 又云 堯時賢人 不受堯讓 投河而死].”고 풀이했다. 《韓非子》 〈說疑〉편에는 ‘狐不稽’로 나온다.
* 務光(무광) : 인명. 陸德明은 皇甫謐의 말을 인용하여 “황제(黃帝) 때의 사람이며 귀의 길이가 칠촌(七寸)이었다[黃帝時人 耳長七寸].”고 풀이했고, 成玄英은 “황제 때의 사람이며 신장이 七尺이었다. 또 하(夏)나라 때 사람으로 약을 먹고 양생(養生)하였으며 고금(鼓琴)을 좋아했다. 탕(湯)이 천하를 선양했지만 받지 않고 스스로 돌을 짊어지고 여수(廬水)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黃帝時人 身長七尺 又云 夏時人 餌藥養性 好鼓琴 湯讓天下不受 自負石沈於廬水].”고 풀이했는데, 무광(務光)을 언급하고 있는 대부분의 문헌에 탕(湯)임금과 동시대의 인물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하(夏)나라 말기(末期)의 인물로 추정하는 것이 타당하다(方勇‧陸永品).
* 伯夷(백이) 叔齊(숙제) : 두 인명. 司馬彪는 “고죽국(孤竹國) 군주(君主)의 두 아들이다[孤竹君之二子].”로 풀이했고, 成玄英은 “백이와 숙제는 요서(遼西) 고죽군의 두 아들이며 신농씨(神農氏)의 후손으로 성은 강(姜)씨이다. 아버지가 죽자 형제가 서로 나라를 양보하여 임금 자리를 이으려 하지 않았다. 서백(西伯:文王)이 훌륭한 정치를 베푼다는 소문을 듣고 시험삼아 그에게로 가서 살폈는데, 문왕이 죽고 무왕(武王)이 주왕(紂王)을 정벌하는 상황을 만나 말을 두드리며 말렸지만 무왕이 듣지 않자 마침내 하동(河東)의 수양산(首陽山)에 은거하여 곡식을 먹지 않다가 결국 굶어 죽었다[伯夷叔齊 遼西孤竹君之二子 神農之裔 姓姜氏 父死 兄弟相讓 不肯嗣位 聞西伯有道 試往觀焉 逢文王崩 武王伐紂 夷齊扣馬而諫 武王不從 遂隱於河東首陽山 不食其粟 卒餓而死].”고 풀이했다.
* 箕子(기자) : 인명. 成玄英은 “은(殷)나라 주왕(紂王)의 현신(賢臣)으로 주왕의 무도함을 말렸지만 주왕이 따르지 않아 마침내 노예로 부려지는 욕(辱)을 당했다[殷紂賢臣 諫紂不從 遂遭奴戮].”고 풀이했다. 〈外物〉편에도 나온다.
* 胥餘(서여) : 인명. 司馬彪, 崔譔 등은 모두 기자(箕子)의 이름이라고 했고, 陸德明은 “어떤 사람은 비간(比干)의 이름이라고 했다.”고 했으며, 成玄英은 箕子의 이름이라는 견해와 함께 초(楚)나라 대부(大夫) 오사(伍奢)의 아들 오자서(伍子胥)를 말한 것이라는 이설(異說)을 소개하고 있지만 자세하지 않다.
* 紀他(기타) : 인명. 成玄英은 “성(姓)은 기(紀)이고 이름이 타(他)이며 탕(湯)임금 때의 일인(逸人)이다. 탕(湯)이 무광(務光)에게 선양(禪讓)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에게 미칠까 두려워하다가 마침내 제자들을 이끌고 관수(窾水)에 빠져 죽었다[姓紀名他 湯時逸人也 聞湯讓務光 恐及乎己 遂將弟子陷於窾水而死].”고 풀이했는데 이 이야기는 〈外物〉편에 나온다.
* 申徒狄(신도적) : 인명. 崔譔본에는 사도적(司徒狄)으로 되어 있는데(陸德明), 이 경우 사도(司徒)는 관직명(官職名)이고 적(狄)이 이름이다. 成玄英은 “신도적도 기타의 소식을 듣고 하수(河水)에 빠져 죽었다[申徒狄聞之 因以踣河].”고 풀이했는데, 이 이야기 또한 〈外物〉편에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