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정신을 망각한 역사교과서 국정화
동호지필(董狐之筆)이란 고사성어가 있다. 중국의 춘추시대에 진(晉)나라 영공(靈公)은 포악한 군주였다. 정경(正卿) 조순(趙盾)은 이를 경계하여 영공에게 바른 정사를 펴도록 간언 하였다. 이는 오히려 영공의 미움을 사는 계기가 되었고, 마침내 영공은 조순을 제거하려 하지만, 다른 신하들의 마음도 영공에게서 떠난 터라 몇 번을 실패하고, 조순은 덕이 있어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국경 근처까지 피할 수 있었다. 국경을 막 넘으려는 순간 도성에서 조천(趙穿)에 의해 영공이 시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조순은 도성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당시 진나라 사관인 동호(董狐)는 공식 기록에 ‘조순이 군주를 죽게 했다’라고 적는다.
조순은 동호에게 무고함을 주장했고, 다른 대신들도 조순의 입장을 변호했다. 그러자 동호는 조순에게 ‘물론 상공께선 영공을 직접 시해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건이 벌어질 당시 상공은 국내에 있었고, 도성에 돌아와서도 범인을 처벌하려 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국가 대임을 맡으신 대신으로써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으니, 어찌 상공이 영공을 죽인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지요?’라고 되물었다. 이에 조순은 자신의 잘못을 시인한다. 훗날 공자는 이를 두고 ‘법도대로 사실을 올바르게 기록한 동호는 훌륭한 사관이다. 또한 법도의 중요성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오명을 감수한 조순 역시 훌륭한 대신이었다. 애석한 것은 국경을 넘었더라면 죄를 면했을 텐데!’라고 평했다. 이는 공자가 ‘춘추(春秋)’를 ‘춘추필법(春秋筆法)’으로 편찬하게 되는 정신이 그대로 담겨져 있는 평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역사가는 역사적 사실들을 역사책에 객관성을 가지고 서술해야 한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에 대의명분과 올바름이 정의되지 않는다면, 역사책으로써 시대정신을 잃게 된다. 이는 역사가들의 몫이며 그간의 역사가들이 가장 고민한 주제일 뿐 아니라, 공자 또한 춘추시대 노(魯)나라의 역사 12대 242년의 편년체(編年體)를 쓰기에 앞서 또 다른 직분의 역사가로써 고민했던 주제였다. 때문에 공자는 이에 대한 해답을 ‘춘추필법’이라는 직서(直書), 삭제(削除), 약론(略論), 은유(隱喩), 존칭(尊稱) 5가지의 독특한 서술법을 고안하여 미언대의(微言大義)로써 춘추를 지었다. 하여 춘추 좌씨전(左氏傳)을 읽다보면 무미건조한 서술방식 때문에 인내가 필요하기도 하지만, 행간을 들여다보면 공자의 역사에 대한 인식과 비평이 그대로 나타나 보인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공자세가편(孔子世家篇)을 보면 공자의 이런 고민이 잘 나타나 보인다. “군자는 죽은 후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을 것을 걱정한다. 나의 도가 행해지지 않았으니 그럼 나는 무엇으로 후세에 이름을 남기겠는가. 이에 공자는 역사의 기록에 근거해서 《춘추(春秋)》를 지었다. … 공자는 지난날 소송안건을 심리하였을 때에도 글의 표현[文辭]을, 다른 사람과 의논해야 할 때에는 결코 자기 혼자서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춘추》를 지을 때에는 결단코 기록할 것은 기록하고 삭제할 것은 삭제하였기 때문에 자하(子夏)와 같은 제자들도 한마디 거들 수가 없었다. 제자들이 《춘추》의 뜻을 전수받은 뒤, 공자는 말하였다. 후세에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춘추》 때문일 것이며, 나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역시 《춘추》 때문일 것이다.” 공자도 역사 앞에서 두려워했던 것은 아닐까?
조선시대 왕조실록을 이루는 자료는 사초(史草)다. 사초의 자료를 작성하는 것은 사관의 몫이다. 왕의 옳고 그른 정사는 사관에 의해 사초로써 낱낱이 기록된다. 두 부(簿)로 기록되는 사초의 한 부는 지금의 역사편찬기관과 같은 춘추관(春秋館)에 왕이 죽은 후에 제출되고, 한 부는 개별적으로 보관한다. 사초는 국왕을 포함한 누구도 열람할 수 없었으며, 새 왕이 즉위하여 선대왕의 실록 편찬이 완성된 후에는 실록 초고본과 사초들이 실린 종이는 물에 풀어 먹물을 뺀 후 재생 종이로 쓰이게 된다. 이를 세초(洗草)라 이르는 것으로 세초 후에 사관들은 향연을 갖는다.
후세에 자신이나 선대왕들이 어떻게 기록될 것인지? 조선시대의 국왕들이라고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일부 국왕들이 붓과 벼루로 사관들에게 환심을 사는 일은 있었어도, 사초를 들여다 본 국왕은 연산군 하나뿐이다. 그것도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쓴 사초중의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에 관한 부분 이었다. 어떻든 임금이 일부 적은 부분의 사초를 들여다 본 이 사건은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이어지고, 때문에 무오사화는 무오사화(戊午史禍)로도 쓰여 진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쓰여 진 무오사화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김종직이 1457년(세조 3)에 밀성에서 경산으로 가는 길에 답계역에서 자다가 꿈에 의제(초나라 懷王)를 만났는데 여기에서 깨달은 바가 있어 조문을 지었다고 한다. 단종을 죽인 세조를 의제를 죽인 항우에 비유해 세조를 은근히 비난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 글은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사관으로 있을 때 사초에 기록해 “김종직이 「조의제문」을 지어 충분을 은연중 나타냈다.”고 하였다. 또 사관 권경유·권오복은 김종직의 전을 지어 사초에 싣고 “김종직이 「조의제문」을 지어 충의(忠義)를 분발하니 보는 사람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라고 하였다.
1498년(연산군 4) 『성종실록』이 편찬될 때 당상관 이극돈(李克墩)이 김일손이 기초한 사초에 삽입된 김종직의 「조의제문」이라는 글이 세조의 찬위를 헐뜯은 것이라고 하여 총재관(總裁官) 어세겸(魚世謙)에게 고하였다. 그러나 어세겸이 별다른 반응이 없자 이를 유자광(柳子光)에게 고하였다. 유자광은 김종직과 사감이 있었고, 이극돈은 김일손과 사이가 좋지 못하였다. 유자광은 이 사실을 세조의 총신(寵臣)이었던 노사신(盧思愼)에게 고해 그와 함께 왕에게 아뢰어 “김종직이 세조를 헐뜯은 것은 대역무도(大逆無道)”라고 주장하였다. 연산군이 유자광에게 김일손 등을 추국하게 하여 많은 유신들이 죽임을 당하고 김종직은 부관참시되는 것이 무호사화이다.
항우의 초나라 회왕에 대한 쿠데타나, 세조의 단종에 대한 쿠데타가 후세에 어떻게 전해져 미래를 위한 역사 인식이 될 것인지는 당시의 ‘시대정신’에 의한 것이다. 역시 오늘을 사는 우리는 가까운 과거의 근현대사를 어떻게 서술할 것인가에 대한 것은, 오늘의 시대정신에 투철한 역사학자들에게 맡겨져야 한다. 또한 다양한 견해가 집적된 객관적 사료들을 멀리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기록되는 것이 두려워 오늘의 시대정신을 부정하고 과거에 집착 한다면, 사관은 진보하지 못하고 거센 반발을 불러 올 뿐 아니라 역사는 퇴보하는 것이다. 때문에 기록되어지는 정사를 정권에게 보이지 않는 이유이며, 정권이 이를 두려워해야 바른 정치를 펼 수 있는 것이다.
공자는 이미 오래전 이러한 부분을 간파하고 있었다. 때문에 자신의 사관이기도 한 ‘춘추필법(春秋筆法)’으로 춘추를 편찬했다.《춘추(春秋)》는 1800여 조(條)의 내용이 1만 6500여 자(字)로 이루어져 있어 간결한 서술을 특징으로 한다. 공자는 사실을 간략히 기록했을 뿐 비평이나 설명은 철저히 삼갔는데, 직분(職分)을 바로잡는 정명(正名)과 엄격히 선악(善惡)을 판별하는 포폄(褒貶)의 원칙에 따라 용어를 철저히 구별하여 서술하였다. 예를 들어 사람이 죽었을 때도 대상이나 명분에 따라 ‘시(弑)’와 ‘살(殺)’을 구분하였으며, 다른 나라를 쳐들어갔을 때도 ‘침(侵)’, ‘벌(伐)’, ‘입(入)’, ‘취(取)’ 등의 표현을 구분해 사용했다. 이처럼 공자는 《춘추(春秋)》에서 단순히 역사적 사실만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대의명분을 밝혀 그것으로써 천하의 질서를 바로 세우려 하였다. 이로부터 명분에 따라 준엄하게 기록하는 것을 ‘춘추필법’이라고 한다.
역사 서술에 있어 용어의 취사선택은 춘추정신(春秋情神)에 의해야 한다. 그것은 오늘날도 별반 다름없다. 이라크 전쟁에서 텔레반 반군이라고 하지 반군이라고 하지 않는다. 나라의 역적은 반역反逆)이지만, 정권을 탈취하려 한다면 반역(叛逆)이 된다. 역시 쿠데타는 반역(叛逆)이지만, 일제 강점기의 친일 행적은 반역(反逆)이 아닐까? 별반 차이 없는 일이지만 역사 서술에 있어 이러한 용어의 취사선택은 엄격한 것이며, 오늘날 언론의 보도 또한 사료가 되는 것이기에 춘추필법을 본받아야 함이다.
때문에 최근 박근혜대통령이 사실 주도하고 있는 국정교과서 문제는 정권의 불온한 의도이며, 오늘날의 시대정신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사실 2012대선 당시 어떤 이는 ‘박근혜 후보의 정치는 아버지에 대한 제사(祭祀)다’라고 하였을 뿐 아니라 박근혜 후보의 측근마저도 ‘박근혜 후보의 대선도전은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한 것이다’라고 평한바 있다. 본인 또한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이 된다면 연산군에게 피 묻은 옷자락을 같다 바치듯, 어느 누가 박정희의 한을 박근혜 후보에게 보여줄지 모를 일이다.’라고 2012대선 당시 평한바 있다. 따라서 환관정치를 여러 사람들이 걱정 했는지 모를 일이다. 계속 일어나고는 있었지만 우려하던 바가 바로 ‘국정교과서’로 절정을 이루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