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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눅 17:11-19)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가장 절망적일 때, 가장 큰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이삭과 형 에서를 속인 야곱은 더 이상 집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장자권과 축복권을 모두 동생 야곱에게 빼앗긴 형 에서의 눈빛이 예사롭지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리 간이 부어 있다고 해도, 자기를 언제라도 죽일 수 있는 형 에서와 함께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도망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살기 위하여, 야반도주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급하게, 집을 떠나야만 하는 야곱의 마음은 편하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형 에서의 장자권과 축복권을 모두 빼앗았으니, 어디를 간다고 해도, 나는 부자다. 나는 모든 것을 다 가졌으니, 행복하다”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야곱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살아 계시는 집을 떠나는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습니다. 한 번도 걸어 보지 않은 낯선 땅을 걸어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폭염과 무더위를 경험하는 것처럼, 야곱이 걸어가고 있는 길은 뜨거운 햇빛이 내리쬐는 광야 길이었습니다. 그보다 더욱 무서운 것은 홀로 밤을 맞이하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살아 생전, 홀로 밤을 맞이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싸늘한 밤 기운을 막아줄 울타리도 없었습니다. 사방이 뚫려 있습니다. 어디로부터 사나운 짐승이 다가올지 모릅니다. 어느 누구도, 야곱을 보호해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바로 그때 그 순간, 하나님은 야곱을 찾아오셨습니다. 어쩌면, 가장 절망적일 때, 하나님은 야곱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날 밤, 하나님이 야곱에게 해 주신 말씀 가운데,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 28:15)라는 말씀이 야곱의 가슴에 새겨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가장 절망적일 때, 가장 큰 기쁨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은 금방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집으로, 다시 돌아올 때까지, 20년이 넘는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귀한 축복과 은혜의 말씀을 약속해 주십니다. 우리는 “빨리 빨리” 그 약속들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빨리 오지를 않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너무나도 더디게 찾아오는 것 같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조금은 느릴지라도, 조금은 더디질라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끝까지 기다릴 때,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질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복이 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의 길을 걸어감으로, 하나님이 주시고자 예비해놓으신 복을 모두 다 풍성하게 받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은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어느 날,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멀리 서서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그들은 나병환자였기 때문에, 율법적으로, 일반 사람들 곁에 가까이 다가올 수가 없었습니다.
레위기 13:45-46절을 보면, “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라고 했습니다.
나병에 걸리면, 마을을 나가, 사람들이 살지 않는 외진 곳에서, 혼자 살아야 했습니다. 혹시나, 사람을 만나게 되면, 멀리 서서, “부정하다 부정하다”라고 큰 소리로 외쳐야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여기 나병환자가 있으니, 가까이 오지 말라”는 뜻이었습니다. 나병환자는 일반 사람들과 가까이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열 명의 나병환자들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가까이 오지 못하고, 멀리 서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은 열 명의 나병환자를 보시고,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제사장을 찾아갔습니다. 제사장을 찾아가던 중, 자신들의 몸이 깨끗해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너무나도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다시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보시고,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열 명의 나병환자는 한 마음으로, 함께,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한 목소리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크게 외쳤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믿고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달랐습니다. 아홉 명은 각기 제 갈 길로 가 버렸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리운 고향 집으로 달려갔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던 마을을 찾아갔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가보고 싶은 곳을 향하여 달려 갔을 것입니다. 그 중의 한 사람만이 예수님께로 다시 되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우리는 어디에 있어야 할까요?
여러분! 나병환자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 당시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그들만 그러한 대접을 받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병환자들을 몰아냈습니다. 그들을 죄악시 했습니다.
전남 고흥군에 위치한 소록도를 아실 것입니다. 나병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한 시설이었지만, 사실상 나병환자들이 섬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격리시키고, 감금한 것이었습니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나병환자들은 철저하게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가족으로부터, 동네 사람들로부터 버림받고, 상처받았습니다. 나병은 단순한 병이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끔찍한 병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자로 낙인이 찍혀 버렸습니다. 그들은 마을 안에서 살 수가 없었습니다. 쫓겨났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죄인으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삶은 비참했습니다. 모든 삶이 파괴되어 버렸습니다. 죄인이라고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었고,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다 깨어지고, 아무도 만날 수 없는 고독한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아직 생명이 있기에 죽을 수도 없는 존재요, 거기에, 날마다 보고 싶지 않는 자신의 그 추함을 들여다 보아야만 하는 비참함이 더욱더 마음 아프게 했습니다.
자기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좌절과 절망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아무도 돌보아 줄 수 없는 버려진 존재였기에, 그 성처와 아픔은 더했을 것입니다. 그러한 암흑과 같은 삶을 살던 그들에게, 희망의 빛이 비추었습니다. 패배자요 낙오자로서, 삶에 지쳐 있는 그들에게, 예수님이라고 하는 한 줄기 빛이 비추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며, 귀신을 쫓아내시며,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했던 사람들, 세리와 창기들과 같이, 버림받은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셨던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 소문을 들을 때마다, 그들 마음에는 한 줄기 소망의 불씨가 타올랐습니다. 예수님 만나기를 간절히 소망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마을을 지나가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들 중,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사람들 가까이에 다가갈 수가 없기 때문에, 멀리 서서, 한 목소리로,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한 명이 아니라, 열 명이 함께 크게 외치는 소리, 얼마나 크게 울렸겠습니까? 그 큰 소리에, 예수님뿐만 아니라,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셨습니다. 그들의 소리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간절한 소망을 나몰라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치료해 줄테니 가까이 오라”라고, 그들을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아무 치료도 해 주지 않으시고, 그냥 제사장에게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그 당시 나병환자들은 자기의 몸이 다 나았을 때, 제사장들에게 가서, 확인받아야 했습니다. 제사장의 확인이 있어야, 다시 마을에 들어가, 가족들과 함께 살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몸이 낫지 않는 사람은 제사장 앞에 나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열 명의 나병환자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너희 몸이 다 나았으니, 제사장에게 가서 확인받으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그 열 명의 나병환자들을 이미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다만,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순종하여, 제사장에게 갔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가다 보니, 자기들의 몸이 깨끗하게 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놀랐을까요? 얼마나 기쁘고 행복했을까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얻은 듯, 행복했을 것입니다.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서로를 만져보고, 꿈인가 생신인가, 서로의 얼굴을 꼬집어 보기도 했을 것입니다. 꿈이 아니었습니다. 열 명 모두, 고침받았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을 덮고 있던 나병이 깨끗하게 사라졌습니다.
여러분! 여기까지는 그 열 명의 나병환자에게 일어난 일은 똑같았습니다.
그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오늘 하루 종일, 함께 행동했습니다. 함께 고침을 받았습니다. 함께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가 달랐습니다. 오직 한 사람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에게로 되돌아왔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를 드렸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분이십니다. 참 좋으신 분이십니다. 어느 누구도 차별하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나,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죄사함을 받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 일입니까? 얼마나 행복합니까? 말로 다할 수 없는 감사한 일입니다. 두고두고, 그 은혜에 보답하며 살아야 함이 마땅한 일입니다.
지난 한 주간, 어떻게 사셨습니까? 감사와 찬양이 있는 삶이었습니까? 아니면,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한 삶이었습니까?
앞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지난 한 주간 동안, “가장 절망적일 때, 가장 큰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지난 한 주간도, 폭염과 무더위가 떠나지 않았습니다. 거리를 걷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잠깐 잠깐 길을 걷는 것도 “아, 무지 덥다”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 정도였습니다. 밖에 나가 있다가, 차 안에 들어와, 시동을 켜고, 에어컨 바람을 쐬는 순간, “아, 살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에어컨 바람만으로도 “살 것 같다”라는 생각을 하는데, 이 고달픈 세상,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 어찌 홀로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나 혼자 힘으로, 이 세상을 헤치고, 꿋꿋하게 살아온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껏 살아온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저는 전라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고, 청년 때, 서울에 올라와 살면서, 경기도 서쪽인 안산시에서 일하기도 하고, 결혼하고, 목회 사역을 경기도 동두천, 서울 태능, 강원도 태백, 충청도 충주, 그리고, 청주에서 하게 되었는데, 그렇다 보니, 차를 타고 가다 보면, 익숙한 곳들을 많이 지나가게 됩니다.
“옛날에 여기서 살았는데, 옛날에 여기 걸어 다니곤 했는데”
그렇게, 불현듯, 옛날 생각이 날 때도 있습니다. “그때, 어떻게 살았지.”
어떻게 살아왔건간에,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의 나의 모습은 지나간 과거의 완성체이지만, 지금 우리는 완벽하게 완성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길을 가다 보면, 빈 공터였던 곳에 건물이 들어서는 것을 보게 됩니다. 현수막에, “무슨 아파트”라는 글귀를 보면, 지금의 모습이 아니라, 조금씩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앞으로 지어질 아파트를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지금은 볼품없는 공사 현장이지만, 언젠가는 잘 지어진 아파트 촌이 서 있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도, 완성된 모습이 아니라, 조금씩 지어져가는 모습입니다.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아직 최고의 작품은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최고의 작품을 완성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실 것입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을 살아가는 것이기에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열 명의 나병환자 가운데, 자신의 병이 나았음을 알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다시 되돌아와, 예수님의 발 아래에 엎드려 감사를 드린 사람은 다름 아닌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특별히, 그 한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임을 밝히고 있는 것은 그 나머지 아홉 명이 이스라엘 사람이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어린 시절부터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나병이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말을 뒤집어 보면, 그 심판을 내리신 하나님께서 그의 죄를 용서해 주시면, 깨끗해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몸에서 나병이 사라졌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한 마디로, 나병을 치료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잘 알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나를 치료해 주셨구나. 하나님이 나의 죄를 용서하셨구나. 하나님이 나에 대한 심판을 거두어 가셨구나”라고 생각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를 올려야 함이 마땅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나병을 깨끗하게 치료해 주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 감사를 돌리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이스라엘 땅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이방인의 피가 섞였다고, 개 취급 당하고, 무시 당하고 살아온 사마리아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여러분! 그 아홉 명의 나병환자들은 육신의 질병을 치료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육신의 질병을 치료받았을 뿐만 아니라, 영혼도 구원받았습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육신이 건강하다고, 마음도 건강하고, 영혼도 건강합니까?
육신은 건강하지만, 마음이 병들고, 영혼도 병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육신은 건강하지 않지만, 마음이 건강하고, 영혼도 건강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간절하게 원하고 바라는 것은 육신도 건강하고, 마음도 건강하고, 영혼도 건강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영육이 강건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그 아홉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묻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의 삶을 살아야 함이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그들을 보시며, 너무나도 안타까워서 하신 말씀입니다.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해서, 그들을 불쌍히 여겨 주었는데, 그들의 나병을 깨끗하게 치료해 주었는데, 그 깨끗한 몸으로, 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의 삶을 살지 않느냐”
“너의 죄를 모두 용서해 주었는데, 너를 구원해주었는데, 너를 사랑하는데, 너는 왜.....”
여러분!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입니까?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드리는 삶이어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감으로, 하나님의 칭찬받는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병든 몸과 마음을 고쳐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제부터는 원망과 불평의 삶이 아니라, 감사와 찬양이 가득한 삶을 살아가겠습니다.
염려와 걱정의 삶이 아니라,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