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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8;22-26. 아나 블레포, 디아 블레포, 엔 블레포. 2024. 2. 25.
이집트의 카이로에 왕들과 귀족의 무덤으로 알려진 93개의 피라밋이 있습니다. 큰 것은 높이가143m, 넓이는 230m, 평면 면적은 15,800평 정도인데 24년간 쌓아 올렸다고 합니다. 무덤으로는 너무나 방대하고 크지요. 그런데 왕이 살아있는 동안의 기록은 짧습니다. 그러나 사후의 세계는 길고 영원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피라밋과 같은 대형 무덤을 만들었고 시체를 미이라로 만들었습니다. 장례식은 온갖 보화와 넣은 다음 70일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요셉도 아버지, 야곱을 애굽에서 이런 장례를 했습니다. 여러분, 왜 미이라를 만들고 왜 피라밋을 만들었을까요? 영원한 세계를 바로 보는 눈이 어두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생에게 영원을 보는 눈을 주셨습니다. 이 영원을 보는 눈이 영적인 혜안입니다. 영적인 혜안이 깊은 사람은 넘어지지 않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의 눈을 볼 수 있게 해 주셨는데 이는 현실과 삶의 내일과 영원을 보는 혜안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은 마가복음은 6장, 7장, 8장에 다 연결이 되는 말씀의 내용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먼저 6장에서는 뱃세다 광야에 모인 사람들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하고 이 내용을 실제로 체험하고 보게 합니다, 연이어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오시는 광경을 제자들이 볼 수 있게 합니다. 마을과 도시와 촌마다 예수님의 옷이라도 만지면 치료와 회복이 되는 치유의 역사를 볼 수 있게 합니다. 문제를 가지고 오는 사람들을 이전과 이후의 모습을 봅니다. 그런데 7장에서 이런 경이로움을 종교 지도자들이 보는데 보는 것을 가지고 장로들의 유전을 말합니다. 그 유전의 내용은 외식입니다. 심도 있게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여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다는 말씀으로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기 때문에, 그렇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나를 헛되이 경배한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님을 그냥 보거나 큰 관심이 없이 보는 그런 상황을 말씀합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 이방 땅, 두로를 지나 시돈 지방으로 가시는데 거기서 헬라인, 수로보니게 여인을 만납니다. 그런데 수로보니게 여인을 통하여 진실한 믿음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또 귀먹고 어눌한 사람을 고쳐 주시는데 주님께서는 이전에 하지 않으셨던 방법으로 에바다를 외치며 고쳐줍니다. 이 에바다는 하늘이 열린다는 뜻입니다. 하늘이 열리는 광경을 제자들이 보고 모인 군중에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8장에서 보리떡 7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4000명을 먹이신 기적을 보여주시고,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해야 하는 영적인 것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보지 못하는 사람을 보게 합니다, 사람은 육체나 영적으로나 무엇으로든지 보아야 하는데 전혀 보지를 못하는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장소는 벳세다 입니다. 사람들이 앞을 못 보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보지 못하는 사람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눈에 침을 뱉으시며 무엇이 보이냐? 고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보이고 나무 같은 것이 걸어가는 것이 보인다고 합니다. 침을 사용하셨는데 보기는 보아도 어렴풋이 보입니다. 정확하지 않습니다. 다시 예수님께서 나무 같은 것이 보이는 이 사람에게 안수를 하시고 난 이후에 이 사람이 주목하여 보게 됩니다. 사물을 밝히 봅니다. 이 것이 본문의 내용이고 이 내용은 앞의 사건들의 내용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무슨 의미가 연결될까요? 보는 것입니다. 블레포입니다. 그런데 블레포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보는 의미가 각각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눈에 바르고 뱉고 안수하고 이런 독특한 방법을 통해서 힐링케 하십니다. 그러면 지체 중에서 눈이 무엇일까요?
2. 눈의 역할과 기능입니다. 여러분, 눈이 어떤 역할을 할까요? 기능이 무엇일까요? 눈이라는 단어가 오프달모스 입니다. 눈은 객관적인 세상을 인식하고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가장 중요한 인식기관입니다. 눈은 마음의 창이며, 세상을 해석하는 인식장치입니다. 인체의 감각기관이 얻는 총 정보량의 약 80%이상을 수집하는 눈의 기능은 다양하고 경이롭습니다. 눈의 기능의 첫 번째는 시력인데 물체의 존재와 형태를 인식하는 능력으로 해상력과 빛에 대한 감도와 읽고 판단할 수 있는 종합적인 감각기관입니다. 그리고 눈은 굴절로서 상을 만들기 위한 능력이 있는데 굴절상태에 따라 정시와 근시, 원시와 난시가 됩니다. 빛 그 자체를 감지하는 가장 기본적인 능력이 있으며, 색을 판별하는 능력으로 정상, 색맹, 색약, 적록색약이 있습니다. 그리고 눈이 가지고 있는 시야가 있는데, 눈을 움직이지 않고 외계의 범위를 보는 능력으로 상하로 120도, 좌우로 165도 정도로 볼 수사 있습니다. 눈은 스스로 조절도 하는데, 수정체로 초점의 위치를 조정하고, 수정체의 굴절을 강하게 하고, 좌우 망막에 맺힌 영상을 1개로 합치시키기도 합니다. 그리고 눈은 안구운동을 하는데, 안근의 작용으로 안구를 원활하게 움직이도록 하여 눈을 코쪽으로 쏠리게 하는 기능과 동공에 의해서 눈에 들어오는 빛의 양을 가감하고, 망막의 밝기를 control 합니다. 기능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래서 안보이면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오늘 본문의 앞을 못 보는 사람은 눈의 기능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보지 못하고 해석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성경 여러 곳에서 눈에 대하여 말씀을 합니다.
마 13: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되는데 눈을 감았습니다.
눅 24: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영혼의 눈이 가리면 주님을 주님으로 못하고, 육체의 눈이 가리면 실물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정신의 눈이 가리면 의도하는 깊은 것을 파악하지 못합니다.
행26:16-18.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여러분, 눈을 떠야 어두움에서 빛으로, 눈을 떠야 사탄의 권세에서 주님에게로, 눈을 떠야 주를 믿어 기업을 얻습니다. 여러분, 진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눈이 떠진 사람에게 보입니다. 길도 그렇고 시온의 대로도 그렇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났지만, 그들 앞에 있는 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라는 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구약에서 자신을 기록한 말씀을 강론하시니까 그들의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오늘 막 6장,7장, 8장에 이르는 전 과정이 눈과 보는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앞을 못 보는 사람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막 8:23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여러분, 눈과 관계된, 그리고 침과 관계된 이런 사건이 다른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9;6-7.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예수님께서 침을 진흙에 뱉어서 그 진흙을 눈 위에 바르셨습니다. 그랬더니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눈을 뜨게 되여 빛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동료를 보았습니다. 그 사람들의 깊은 것 까지 해석하게 되었습니다.
막7:31-35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 침을 뱉어 혀에 대십니다. 여러분, 이런 상황을 생각해 보세요? 엽기적이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침을 뱉는 행동은 자기 안에 있는 더러운 것을 다른 사람에게 배설하여 상대방을 멸시하고 무시하는 행동입니다. 침의 상징적인 의미가 이와 동일합니다. 그래서 막7;15에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의 더러움과 부패와 냄새를 그대로 드러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맹인의 눈을 뜨게 하는 침입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은 부패와 더러움이지만, 예수님에게 나오는 것은 생명과 깨끗함입니다. 오늘 앞을 못 보는 사람이 생명을 얻고, 진리의 내용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무엇이 보이냐고 물으시는데 여기에 이 사람은 눈이 보여 지는 것을 3단계로 묘사합니다. 쳐다보다 주목하다 밝히 보다. 쳐다보는 아나 블레포, 주목하여 보는 디아 블레포, 밝히 보는 엔 블레포입니다. 그러면 이 표현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멧세지가 무엇일까요?
2-1. 먼저는 블레포입니다. 보는 것의 전체를 헬라어로 블레포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표현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무덤에 첫 번째로, 맨 먼저 찾아간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을 본 것은 가리켜서 블레포로 표현을 했습니다. 마리아는 빈 무덤을 불레포로 보았습니다. 몸을 숙여서 안으로 들어다 보았습니다. 간절히 사모했던 예수님의 안타까운 죽음의 시신이 당연히 있어야 될 것으로 생각을 했는데 예수님의 시신이 없으므로 의아해서 봤습니다. 자신의 육체의 마음과 정신을 다 드려서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블레포는 예수님이 뽕나무에 올라간 삭개오를 본 표현과 동일합니다. 안타까움과 연민으로 삭개오를 보았는데 이 것이 블레포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흐느끼며, 눈물을 흘리며, 주님을 찾았고 보았다는 간절함의 불레포입니다. 여러분, 막달라 마리아가 누구 입니까? 7귀신이 들려서 귀신에 사로잡힌 삶을 살았던 마리아가 주님으로부터 치료와 회복을 받고 자유 함을 얻었습니다. 매였던 삶에서 마감을 하고 자유의 몸으로 주님을 따라 다녔던 인생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늘 언제든지 치료받은 이후부터는 예수님의 곁을 조금도 떠나지 않았습니다. 종려주일이 지난 후 주님의 휴식자리로서 찾은 베다니 마을에서 부터, 십자가를 지실 때에도, 장사지낸 첫날부터 무덤 곁에 있었고, 안식일을 지킨 다음 새벽 미명에 주님의 무덤으로 제일 먼저 찾아왔습니다. 그만큼 주님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온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주님을 섬기고 그리고 무덤에 이르기 까지 주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당연히 있어야 될 예수님의 시신은 없고 천사만 앉아 있었습니다. 마리아에게는 예수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나타나서 몇 마디 중요한 말씀을 합니다만 천사들이 나타난 것으로는 마리아의 굶주린 영혼을, 사모하는 심정을, 사랑하는 마음을 채울 수가,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내주를, THE LORD를, 다른 사람이 무엇이라 해도 마리아만은 절대적인 주님을, 절대적인 용어를 사용해서 내주를 보려고 합니다. 받은 은혜에 대한 최고의 사랑과 헌신의 눈으로 아픔과 연민의 의미인 블레포로 보았습니다. 충성스러운 헌신과 절대적인 사랑과 신뢰의 의미인 블레포로 주님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냥 보았습니다. 부활 할 것으로, 영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바로 옆에 계신데도 부활하신 주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와 같습니다. 은혜를 받고 도움을 받고 위대한 일을 경험을 하면 있는 것과 없는 것을 포함해서 다 주려고 하잖아요. 이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이것은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 되고, 2프로 부족한 그래서 우리의 사고와 시각과 감정을 뛰어 넘지 못하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 우리 삶의 모든 것은 영적으로 연결되지 아니하면 껍데기만 보는 것이 되고, 형식만 보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부활하신 예수님도, 예수님의 약속도, 예수님의 능력도, 예수님의 말씀도 나에게 의미가 없고 그 능력과 약속,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지 못하게 됩니다. 마리아는 블레포로 보았습니다. 뜨거운 감사와 측은한 마음의 블레포로 보았습니다. 오늘 벳세다의 앞을 못 보는 이 사람이 처음에는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보여 지는 것이 어떻게 열려지고 확장이 될까요?
2-2. 아나 블레포입니다, 자기의 의지를 가지고 쳐다보는 것을 헬라어로 표현하면 아나 블레포 입니다. 아나(ana) 블레포는 그냥 쳐다보는 것입니다, 보긴 보는데 제대로 못 보는 것입니다. 24절에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보이기는 하는데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무엇, 무엇 같은 것이 보이나이다. 사람 같은 것이, 나무 같은 것이, 진리 같은 것이 희미하게 보이나이다. 그러니까? 쳐다보는 아나블레포는 예수님을 알기 전에 예수님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우러러 보고 위인으로 보지만 신앙고백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것은 예수님을 꿰뚫어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나블레포는 보기는 보는데 힐끔 쳐다보는 정도입니다. 처음의 소경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도 은혜이지요!!! 조금이라도 희미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은혜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만족하고 여기서 머물면 문제와 속임 앞에 넘어지게 되고 후회하게 됩니다.
2-3. 두 번째로 디아 블레포입니다, 주목하여 보는 것을 헬라어로 디아블레포라고 합니다. 디아(dia)에서 dialogue , diagnosis. 가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다이아로그는 대화라는 뜻인데 합성어입니다. dia -더 깊이 , logue –로그입니다, 로그는 로고스에서 나온 말입니다. 집사님 저랑 얘기 좀 해요 이럴 때 쓰는 말입니다. diagnosis –다이아그노시스 , 병원에서 쓰는 말로 진단입니다. diagnosis는 그노시스파(Gnosticism)에서 나온 말인데 그노시스파는 헬레니즘 시대에 유행했던 영지주의를 말합니다. gnosis는 의사가 배 아플 때 겉으로만 알아보는 것이 아닌 배 안과 속을 진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dia, 꿰뚫어 알아보는 것입니다. 25절에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이렇게 주목하여 꿰뚫고 볼 때 디아블레포 라고 합니다. 다시 안수했더니 그는 어떻게 봤다고요? 주목하여 보았습니다. 디아블레포는 속 깊이 꿰뚫어서 관찰해 보았습니다. 여러분, 부활의 아침에 두 번째로 베드로가 무덤을 찾아 왔지요? 베드로는 보았다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헬라어 테오레오 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테오레오는 블레포 이상으로 보되 세심하게 비판적인 시각의 의미로 보았다는 뜻입니다. 테오레오라는 단어에서 theory, 이론이란 단어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무슨 말입니까? 디아로 깊이 있게 보지 않으면 theory 가 나오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시신을 감싸고 있던 세마포가 개어져 있고 머리의 수건은 다른 곳에 개어져 있는 것을 보았고 모든 향 품이 그대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마리아나 요한이 보지 아니한 수건을 보았고, 세마포를 보았고, 아리마데 요셉과 니고데모가 넣어 두었던 향 품이 그대로 있는 것을 확인하면서 의심스럽게 사실일까?, 의심스럽게 정말일까? 하면서 보았습니다. 테오레오 한 것입니다. 디아 블레포 한 것입니다. 이론이 뒷받침이 되고, 논리가 따라야 합니다. 그러면 왜 베드로는 테오레오 하면서 보았을까요? 왜 디아 블레포 했을까요? 왜 비판적인 시각과 세밀하게 보았을까요?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고문을 받고, 십자가 지시는 팻션, 고통 가운데 있을 때에 부인하고 저주하고 도망을 갔습니다. 그 때 부인하고 저주하는 베드로의 장면을 물끄러미 뒤돌아보시는 주님의 눈동자와 마주 쳤습니다. 그래서 통곡을 하고 회개를 하고 뒤돌아섰지만 돌아와 보니 제자들 자리에 베드로의 자리가 없었습니다. 아니 부인하고 저주한 것 때문에 잘못한 것 때문에, 실수한 것 때문에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번민과 회한 때문에 상처받은 가슴으로 있을 때에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음부의 권세아래 3일 동안 무덤에 계실 때에, 주님이 잡히시면서 주님의 눈동자와 마주친 이후부터 지금까지 베드로의 존재는 성경 어디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떠난 베드로는 어디에도 있을 공간이 없어서 어정쩡한 모습으로 힘들어하고 괴로워할 때 요한에 의하여 사랑을 공급받고 다시 일어납니다. 하지만 무덤을 보는 이 시간에 정말로 주님의 말씀대로 부활 하셨는가?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제 나는 어떻게 하나? 부활 하셨다면 나의 자리는 어디인가? 라는 마음으로 이리 저리 조사하면서 보았습니다. 더 깊이 봄으로 자신에 대한 이론이 뒷받침 되어야 했습니다. 여러분, 십자가 앞에서 많은 제자들이 도망을 갔지만 베드로는 저주까지 하면서 부인하고 멀리 떠났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3년 동안 줄 곳 따라 다녔던 베드로가 왜 이렇게 쉽게 떠났습니까? 그 만큼 짊어져야만 하는 고통은 무겁고, 무섭습니다. 쉽지 않습니다. 고통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만 보고 예수님을 믿을 사람이 없고 처절하고 잔인한 십자가 앞에서 나도 십자가 지겠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 그 십자가는 능력과 영광의 십자가가 됩니다. 그 때에 십자가의 능력을 깨닫고 영광의 의미를 알게 됩니다. 우리는 베드로처럼 늘 넘어지고 쓰러집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칠전팔기의 신앙으로 일어납니다. 베드로처럼 부인하고, 행동을 하고, 테오레오의 신앙으로 정말 그러한가 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의 이름을 불러주면서 3000명,5000명, 허다한 무리를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능력의 사람이 됩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의 내용은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입니다. 그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고 모든 사망 권세와 사탄의 궤궤를 물리치시고 승리하셔서 저와 여러분을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디아 블레포, 데오레오 하지만 그럼에도 소망을 잃지 않고 끝까지 부활하신 주님으로 삶에서 위대한 승리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4. 세 번째는 엔 블레포 입니다. 밝히 보는 것을 엔 블레포라고 합니다. en 엔. 여러분, 클린 인데~여기다 엔클린, 인클린하지요? 클로저 인데~ 여기다 엔클로져, 인클로져 라고 하지요? 25절에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 이 것이 엔 블레포 입니다. 밝히 보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였다고요? 엔 블레포로 밝히 보여 졌습니다. 여러분, 블레포가 아닌 언제 완전함으로 예수님을 보게 됩니까? 부활의 주님을 만난 그 순간부터입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부활의 주님을 영적으로 봅니다. 그래서 바로 그 순간부터 위대한 사도바울이 되고 그 길에서 한 번도 뒤돌아서지 않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도 이때에 옆에 계신 주님을 부활의 주님으로 봅니다. 그리고 순간 믿음이 달라지고, 인생의 삶이 달라집니다.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보는 것들의 차원 변화가 있고 차원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 표현은 부활의 현장에 세 번째로 요한이 본 것이었습니다. 요한은 에이도라는 단어의 의미로 주님을 찾았고 보았습니다. 에이도는 눈으로 보지만 뜻은 그 본 것을 이해하고 파악을 했다는 의미입니다. 밝히 보았습니다. 엔 블레포 했습니다. 아 그렇구나! 사실이었구나! 요한은 무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 상황을 보았고 이해를 했고 그래서 믿었고 절대적으로 확신을 했습니다. 요한은 베드로가 보았던 수건도 보지 못했지만 세마포가 납작하게 개어져 있는 것을 본 순간 첫 눈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알았습니다. 무덤 안에 아무도 손을 댄 자욱이 없고 세마포만 보았어도 주님이 계시지 않은 것으로 예수님께서 살아 계실 때에 말씀을 하셨던 그대로 부활 하셨다고 지성과 이성으로 이해를 했고 보았고, 그것을 순수하게 영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믿었고, 보는 것 자체를 영으로 해석을 했습니다. 여러분, 왜 요한이 요한복음을 기록하고 요한 1,2,3서와 밧모섬의 유배생활 가운데 요한 계시록을 쓰게 됩니까? 왜 이런 큰 은혜와 은총을 받게 됩니까? 예수님의 제자 요한이 왜 영적인 능력의 사람이 됩니까? 그는 예수님과 동행을 하면서도 불의와 타협을 하지 않았습니다. 주의 복음을 위해서 사마리아를 변화시켜야한다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골고다와 십자가에서 당하시고 그 마지막까지 모든 일을 직접 보았습니다. 그는 그 때 본 것을 그 대로 믿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엔 블레포로 보고 믿었습니다. 밝히 본 것을 믿음으로 승화시켰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주님으로 부터 아카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공의와 함께 아카페의 사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얼마나 사랑이 많았으면 주님께서 요한에게 사랑하는 어머니를 맡기셨습니까? 요한에게 너의 어머니라고 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오늘 베드로가 예수님의 빈 무덤 앞에서 참관인으로 있을 수 있던 것도 낙담하고 실망가운데 있던 자기 동료의 잘못을 감싸 앉으면서 자기의 집으로 모셔가는 긍휼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요한 1,2,3서를 기록하면서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고, 사랑은 말과 혀로만이 아니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고, 하나님은 사랑이라,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 사랑하는 자는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게 된다고 역설을 합니다. 주님을 엔 블레포 확실하게, 분명하게, 밝히볼 때에 이렇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들이 얼마나 우리들에게 위대한 영감을 줍니까? 그는 영적으로 에이도의 눈으로 모든 것을 보았기 때문에 이렇게 열정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수 있었습니다. 요한은 유배생활을 하면서도 믿음이 변하지 않았는데 왜 그렇습니까? 부활의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말씀한 그대로 믿었고 본 그대로 받아들이고 신앙화 시켰습니다. 그래서 에이도로 본 빈 무덤은 그에게 표적의 완성이 됩니다. 부활의 표적입니다. 마침표를 찍습니다. 요한은 모든 것을 에이도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밝히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더욱 신뢰하고 노년에 유배생활 속에서도 요한계시록을 기록하는 은총을 덧입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엔 블레포, 에이도의 시각으로 보시려면 차원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이 가졌던 순수한 신앙과 사랑이 여러분에게도 이어져서 참된 헌신과 그리스도의 사랑의 실천과 부활 신앙의 능력이 어느 곳에서든지 나타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3. 마지막으로 오늘 이 사람과 주님과의 관계는, 주님과 침을 뱉는 사이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이 말은 저주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상에서 침을 뱉으면 서로 저주하는 사이가 됩니다. 사회법에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은 폭행죄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엄마는 아기의 흘린 침을 더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생명관계에서 침은 반드시 필요하고 소중합니다. 침은 자신의 몸에서 나온 생명입니다. 오늘 침을 뱉어서 안수 할 수 있다는 것은 한 몸이 아니면 할 수가 없습니다. 침을 뱉어 안수 할 수 있는 한 몸이 되면, 생명관계가 되면, 귀가 열리고 혀가 풀어지고, 보게 되고, 아나 불레포, 디아 블레포, 엔 블레포까지 차원의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여러분, 사람이 스트레스를 받으면 몸에서 경보나 불안의 반응이 나옵니다. 많은 에너지를 투자할 긴장 상황이 되면 입이 마르고 침의 분비가 차단됩니다. 침을 분비할 수 있다는 것은 불안하지 않다는 입증입니다. 이 때문에 침은 대개 단호한 태도와 용기를 의미합니다. 사50;4-6.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셨도다.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빰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노라. 침 뱉음을 당하여도 얼굴을 돌리지 않고 가리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은 무섭습니다. 하지만 얼굴을 돌리지 않고 가리지 않는 여러분과 저는 주님과 함께 침을 뱉는 사이입니다. 그래서 귀가 열리고 혀가 풀어지고 블레포하게 됩니다. 아나, 디아, 엔까지 가는 그래서 세상과 주님의 약속과 은혜와 축복을 밝히 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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