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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서지 국조인물고 권46
양산보(梁山甫) 묘갈명(墓碣銘) - 박세채(朴世采)
정암(靜庵) 조 문정공[趙文正公, 조광조(趙光祖)]이 혹독하게 북문(北門)의 화1)(禍)를 당하면서부터 그의 문인(門人)과 제자들이 멀리 자취를 감추고 덕(德)을 숨겼다가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크게 드러난 분으로는 처사(處士) 양공(梁公) 및 하서(河西) 김 문정공(金文靖公, 김인후(金麟厚))인데, 두 분이 상서롭지 못한 시대를 만나 임천(林泉)으로 물러났으며 그 동지들의 백중(伯仲)으로 일컬을 수 있다고 하는 분도 역시 양공이다.
양공의 휘(諱)는 산보(山甫)이고, 자(字)는 언진(彦鎭)이며, 본관은 제주이다. 단군(檀君) 때에 세 명의 신인(神人)이 한라산(漢拏山)에 내려왔는데, 그중장자(長者)가 처음으로 성(姓)을 양씨(良氏)로 하였다가 양(梁)으로 고쳤으며 이 분이 실제로 공의 선조(先祖)라고 한다.
뒤에 휘 순(洵)ㆍ준(峻)이란 분이 있었으니, 모두 바다를 건너와 신라의 말기와 고려 때에 벼슬하여 한 시대의 명망이 있는 사람이 되었다. 휘 사위(思渭)에 이르러서는 조선조에 들어와 추천으로 교도(敎導)가 되었다. 증조부 휘 발(潑)은 벼슬하지 않았고, 조부 휘 윤신(允信)은 부사직(副司直)이며, 아버지 휘 사원(泗源)은 호(號)가 창암(蒼巖)인데 숨겨진 덕이 있어 조정에서 추천으로 주부(主簿)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아니하고 처음으로 창평현(昌平縣)에 살았다. 어머니는 신평 송씨(新平宋氏)이다.
공이 어려서 천성이 총명하고 기우(器宇)가 단정하고 정중하였으며 스스로 책을 읽을 줄 알아 대의(大義)를 깨달았으므로, 창암공이 기특하게 여기며 사랑하였다. 이미 장성해서는 서울에 들어가 조 문정공이 올바른 학문으로 후진(後進)을 가르친다는 소문을 듣고 창암공에게 청원하여 마침내 (조 문정공에게) 자신을 맡기자 조 문정공이 곧바로 ≪소학(小學)≫의 글을 가르치면서 말하기를, “진실로 학문에 뜻을 둔다면 이것을 따라 시작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는데, 공이 잘 지키며 잊지 않고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아니하니 조 문정공이 매우 칭찬하였다. 그러다가 성균관(成均館)에 유학하게 되자 주선(周旋)하기를 적합하게 하였으므로 제생(諸生)이 번번이 감탄하며 특이하다고 하였다.
정덕(正德) 기묘년(己卯年, 1519, 중종 14)에 중종이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으로 친히 유사(儒士)들을 시험하였는데, 공이 나이 17세로 합격하였으나 마침 대관(臺官)이 지나친 은혜라고 하여 삭제하도록 주청하였으므로, 임금이 애석하게 여기고 불러다가 위로하며 물품을 하사하였다.
얼마 안되어 기묘 사화가 일어나 조 문정공이 주모자가 되었으므로 공이 통분(痛憤)해 하며 그날로 남쪽으로 돌아왔다. 살고 있는 곳이 우아하게 수석(水石)의 경치가 좋았으므로, 그 가운데다 집을 짓고 이름을 ‘소쇄원(瀟洒園)’이라 하고 자호(自號)를 ‘소쇄옹(瀟洒翁)’이라 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은둔 생활을 하며 의(義)를 행하면서 일생을 마치려 하였다.
그의 학문은 물 뿌리고 청소하는 것으로 몸을 수양하는 근본으로 삼았고, 사물에 이르러 지식을 지극히 하는 것으로 마음을 수습하는 자료로 삼았으며, 본심을 보존하고 기르며 글의 깊은 뜻을 완미하고 사색하며 번갈아 그 공을 이루게 하였으니, 그것은 대체로 조 문정공에게서 얻은 바가 그러한 것이었다.
그리고 평생에 힘을 기울인 것은 오로지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에 두어 마음을 가라앉혀 외우고 익혀서 오래 됨에 좋은 훈계를 더하였고, 여러 경서에 이르러서는 더욱 주역에 깊은 연구를 하여 한결같이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전의(傳義)로써 하며 서로 참고하여 절충하였으며, 좌우(左右)의 도서(圖書)에 초연하게 독자적인 조예가 있었다.
그리고 뜻이 합쳐지는 곳을 만나게 되면 가끔 목청을 높여 읊는 소리가 마치 쇠와 돌 사이에서 나오는 듯하였으며, 김 문정공(金文靖公)과 서로 종유하고 강마(講劘)하면서 자못 밥 먹고 잠자는 것도 잊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저술(著述)을 일삼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군자(君子)의 학문은 저절로 근본과 여줄가리가 있는데, 근본이 이미 뜻을 이룰 수 없는데 어느 겨를에 다른 것을 하겠는가?” 하였다.
또 어버이 섬기기를 독실히 하여 부드럽고 온화한 기색으로 아침저녁의 문안 인사와 이부자리를 펴드리며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면서 몸소 솔선하면서 어김이 없었다. 그러다가 창암공의 상(喪)을 당함에 이르러서는 산소 곁에 여막을 짓고 슬퍼하며 사모하기를 예절에 지나치게 하여 지팡이를 짚은 뒤에야 일어났다.
일찍이 나무꾼의 실화로 불길이 선산(先山)에 미치자 공이 하늘에 부르짖으며 달려가 불을 끄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비가 내렸으므로, 사람들이 ‘효성에 감동하였다’고 말하였다. 어려서 과부가 된 고모에게서 양육을 받았는데 그 고모가 몰(歿)하자 1년의 복(服)을 입었으며 또 심상(心喪)을 입어 보답하였다.
일찍이 효부(孝賦)를 지어 사람으로서 당연히 지켜야 할 인륜과 친애(親愛)하는 도리를 갖추어 진술하였는데, 읽는 자가 감동하였다. 내종형(內從兄)인 송순(宋純)공이 그 글을 보고서 말하기를, “이 이치를 깊이 알고 몸소 행하는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다.” 하였다.
평소 사물을 접함에 일찍이 남에게 특이함을 보이지는 않았으나, 그 스스로의 마음가짐을 구차스럽지 아니하고 안정되어 조용하고 까다롭지 아니하며 고상하고 깨끗하며 엄격하고 정돈이 되었으며 의복과 음식, 말과 행동은 비교적으로 절도에 맞았고 채우고 기르기를 이미 오래 하여 바라보면 의젓하게 덕이 있는 군자임을 알 수 있었다.
그 행동과 일에 나타나고 여러 자제를 가르치면서 반드시 의로운 방향으로 하며 형제 사이에 우애를 독실하게 하고 종족(宗族)을 대우하는 데 이르러서 더욱 도타운 화목을 더하며 향당(鄕黨)에서 친구와 교유함에 신의와 화열(和悅)로써 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다른 사람이 가난하여 혼인이나 장례를 제대로 치르지 못하는 자를 보면 번번이 재산을 기울여 구휼(救恤)하였으므로, 이 때문에 원근(遠近)에서 공경하고 탄복하여 소문을 듣고 흥기(興起)하는 자가 역시 많았다.
중종(中宗) 말엽에 중앙과 지방에 전교를 내려 유일(遺逸)을 모두 추천하라고 하였는데 현령(縣令)인 이수(李洙)공이 평소 공을 공경하는 터라 마침내 명령에 응하려고 하자, 공이 곧바로 극력 사양하여 정말로 추천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명종(明宗) 임자년(壬子年, 1552년 명종 7년)에 다시 추천자 명단에 올랐으나 공이 끝내 나아갈 뜻이 없었다.
가정(嘉靖) 정사년(丁巳年, 1557, 명종 12) 3월 20일에 병으로 정침(正寢)에서 세상을 마치니, 나이가 55세였다. 임종시에 그의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떳떳한 이치이다. 유독 늙으신 어머니를 끝까지 봉양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
너희는 나의 뜻을 잘 체득하도록 하라.” 하고, 인하여 눈물을 흘리며 울먹였다. 부음이 알려지자 사림(士林)이 마음 아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현(梨峴) 선영의 아무 향의 자리에 장사지냈다.
처음에 공이 조 문정공의 문하에 있을 적에 간혹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 형제와 마침 같이 배웠는데 공을 한번 보고서 그전에 교유하던 사람같이 여기며 말하기를, “공은 참으로 두려운 친구이다.” 하였으며, 김 문정공이 항상 형(兄)의 예(禮)로 섬기면서 매번 공의 정밀하게 사색하고 현묘하게 합쳐지는 학문을 칭송하며 읊고 감탄하며 찬미(贊美)한 것이 매우 많았다.
그리고 급문(及門)의 선비로 존재(存齋) 기대승(奇大升) 같은 이는 말하기를, “소쇄옹(瀟洒翁)은 겉으로는 온화하지만 안으로는 엄격하여 바라보면 무릎이 꿇어짐을 깨닫지 못한다.” 하였으며, 초토사(招討使) 고경명(高敬命)은 말하기를, “공의 사람 됨됨이는 위대하고 성품 또한 효성스럽고 우애하여, 보는 사람이 모두 바른 선비라고 칭송한다.” 하였고, 인성(寅城, 인성 부원군) 정철(鄭澈)은 말하기를, “소쇄옹과 서로 마주 대하면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속을 후련하게 하여 무엇을 잃어버린 듯하게 한다.” 하였으니, 그 후배(後輩)들의 사모하고 우러름이 또한 이와 같았다.
광산 김씨(光山金氏)인 정랑(正郞) 김후(金珝)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부녀자가 지켜야 할 덕이 있었으나 공보다 먼저 졸(卒)하였다. 3남 1녀를 두었는데, 큰아들은 양자홍(梁子洪)으로 일찍 죽었으며, 다음은 양자징(梁子澂)으로 역시 학문과 행검으로 추천되어 벼슬이 현감(縣監)이었다. 다음 양자정(梁子渟)은 훈도(訓導)이다. 딸은 노수란(盧秀蘭)에게 출가하였다. 안팎의 손자는 많아 다 기록할 수 없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하늘이 우리 유교를 도와 우리 동방을 깨우치게 하였도다. 누가 그 마루인가? 조 정암 선생이다. 더구나 그의 진출과 은퇴는 군자(君子)가 바라는 바이다. 우뚝한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가 그 은미함을 잘 드러내었도다. 공이 그 융성한 무렵에 더러는 높이기도 하고 더러는 취(取)하기도 하였는데, 비록 바탕이 아름답기는 하여도 이런 분들 아니었으면 어디서 본을 받았겠는가? 이미 처음 시작할 때에 시기적으로 막힘을 만났으며 끝내 잘 간직하기로 저 동원(東園)에서 하였도다.
본심은 보존하고 지식이 지극하기를 바로 집안의 계책으로 삼았으며, 온 집안에 그림과 글씨를 써 붙여 굽어보나 올려다보나 오묘한 이치와 합하게 하였도다. 효도와 우애를 행하여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따랐으며 몸소 행할 뿐만 아니라 또한 펴서 진술함이 있었도다.
세상이 되풀이하여 변하였으나 초연하게 누됨이 없었으니, 향당과 여리에서는 덕을 흠모하였고 선비들은 생각을 더하게 되었도다. 산과 못에다 비유하면 빛나는 구슬과 온화한 옥같이 광채를 덮을 수 없으며 상서로움을 숨길 수 없도다. 울창한 이현(梨峴)에는 소나무도 있고 가래나무도 있도다. 이에 시(詩)를 드러내어 영원토록 후세에 보이도다.
각주
1) 북문(北門)의 화(禍):
조선조 중종(中宗) 때 일어난 기묘 사화(己卯士禍)를 달리 이르는 말로서, 중종 14년(1519) 11월에 남곤(南袞)과 홍경주(洪景舟)가
승지(承旨)와 사관(史官)을 피하여 밤중에 경복궁(景福宮)의 북문(北門)인 신무문(神武門)을 통하여 들어가 중종에게 비밀리에 아뢰고
옥사(獄事)를 일으켰으므로 붙여진 말임.
處士瀟洒翁梁公墓碣銘 辛酉十一月 四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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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自靜菴趙文正公酷罹北門之禍, 其門人高弟遠跡潛德, 久而後大著者, 惟處士梁公及河西金文靖公。 遭時不祥, 引退林泉, 其同志竝明, 可以伯仲稱者, 亦惟梁公。 公諱山甫, 字彦鎭, 耽羅人也。 檀君時, 有三神人降于漢拏山, 其長始姓良氏, 改以梁, 實公之先云。 後有諱洵、峻者, 皆渡海來, 仕羅、麗之際, 爲一時名人。 至諱思渭, 入我朝, 薦爲敎導。 大王父諱潑, 不仕。 王父諱允信, 副司直。 父諱泗源, 號蒼巖, 有隱德, 朝廷以薦授主簿不就, 始居于昌平縣。 妣新平宋氏。
公幼性聰穎, 器宇端重, 自知讀書, 曉於大義, 蒼巖公奇愛之。 旣長, 入漢師, 聞文正公以正學訓後進, 請于蒼巖公, 遂委己焉。 文正公卽以《小學》書授之曰: “苟志於學, 宜從此始也。” 公服膺不少懈, 文正公亟稱之。 及遊太學, 周旋得宜, 諸生輒加嘆異。 正德己卯, 中廟以《夙興夜寐箴》親試儒士, 公年十有七歲, 乃中第。 會臺官以濫數請削, 上惜之, 召見慰愉, 賜以物。 未幾禍作, 文正公爲之首, 公痛憤, 卽日南歸。 所居雅有水石之勝, 築室其間, 名曰瀟灑園, 自號瀟灑翁。 遂隱居行義, 以終身焉。
其學以灑掃爲修身之本, 格致爲收心之資, 存養玩索, 交致其功, 蓋所得於文正公者然也。 平生用力, 專在於《大學》、《中庸》, 潛心誦習, 久而益好之。 訓及諸經, 尤邃於《易》, 一以程、朱傳義, 參互折衷, 左右圖書, 超然獨詣。 値有意會處, 往往高詠, 聲若出於金石間, 與文靖公相從講劘, 殆忘寢食焉。 惟不事著術曰: “君子之學, 自有本末, 本旣不能致志, 何暇他爲?” 篤於事親, 色愉氣和, 定省滫瀡, 率體無違。
迨居蒼巖公憂, 廬于墓側, 哀慕踰節, 杖而後起。 嘗有樵火延及先山, 公號天奔救, 天忽降雨, 人謂之孝感。 幼被育寡姑, 歿而服朞, 又爲心喪以報之。 嘗作《孝賦》, 備陳彝倫親愛之道, 讀者感動之。 內兄宋公純見之曰: “非深知此理而躬行者, 不能也。” 平居接物, 未嘗示異於人。 然其自持不苟, 恬靜簡約, 高潔嚴整, 服食言動, 動合節度, 充養旣久, 望之儼然, 可知爲有德君子也。 其見諸行事者, 敎諸子必以義方。 處昆弟之間, 友愛篤至。 待宗黨尤加敦睦, 以及朋遊鄕黨, 無不孚信和悅。 見人貧不能昏葬者, 輒傾財救恤。 以此遠近歆服, 聞風興起者亦多。 中廟末歲, 敎中外咸擧遺逸, 縣監李公洙素敬公, 欲遂以應命, 公乃力辭不果焉。 明宗壬子, 復登薦目, 然公終無起意。
嘉靖丁巳三月二十日, 疾終于正寢, 壽五十有五。 臨歿謂其子曰: “死生常理, 獨以不克終養老母爲恨, 爾其善體吾意也。” 因泣下嗚咽。 訃聞, 士林莫不傷之。 從葬梨峴先兆某向之原。
初, 公在文正公門, 成聽松守琛昆弟適同學, 一見如舊, 曰: “公眞畏友也。” 文靖公常以兄禮事之, 每稱公爲精思妙契之學, 發諸詠嘆贊美者甚多。 至其及門之士, 如奇存齋大升曰: “瀟灑翁外和而內嚴, 望之不覺屈膝。” 高招討敬命曰: “公爲人奇偉, 性且孝友, 見者咸稱以正士也。” 鄭寅城澈曰: “與瀟灑翁相對, 使人襟懷爽然, 若失矣。” 其爲後輩慕仰又如此。
公娶光山金氏, 正郞珝之女, 甚有婦德, 先公卒。 有子男三人女一人: 長曰子洪, 早夭; 次曰子澂, 亦以學行薦, 官至縣監; 次曰子渟, 訓導。 女適盧秀蘭。 內外諸孫多不能記。 銘曰:
天相吾道, 以牖大東。 孰爲其宗? 曰維靜翁。 矧爾出處, 君子所希。 卓卓河西! 克彰厥微。 公際其盛, 或尊或取。 縱云美質, 非斯焉有? 始旣發軔, 逢時之屯。 終焉允藏, 于彼東園。 存心致知, 寔爲家計。 一室圖書, 俯仰妙契。 惟孝友于, 秉彝是循。 非直躬行, 亦有敷陳。 世變反覆, 超然無累。 鄕閭歆德, 章甫增思。 譬諸山澤, 珠明玉蘊。 光不可掩, 瑞不可隱。 鬱鬱梨峴, 有松有檟。 肆顯詩之, 永示來者。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