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가 부르는 편서풍
강인한
굴레와 채찍을 벗어날 수 없다.
눈을 감아도 나는 안다.
저 길이 내 몸속에 들어와 요동치다가
망각처럼 몽롱해지는 것을.
장밋빛 암벽의 페트라 협곡을 지날 때
방울소리와 이천 년 전의 물소리가 반죽이 되어
때로는 영혼의 기도가 된다.
그러나 그뿐 희미한 이명으로 스러진다.
게으른 몸을 태우기 위해 내 허리는 잘록하고
베두인의 채찍을 견딜 만큼 옆구리는 아직 튼튼하다.
알 카즈네 신전을 출발하여 꼭대기의 수도원까지는
무릎이 꺾이는 층계, 층계, 돌층계들
굴욕과 소금의 길.
둘러봐도 연대해야 할 동지들이 없다.
저들을 이겨낼 수는 없다고 눈을 내리뜬다.
모르는 척 수그려 귀를 닫는다.
나바테아인들의 수도원, 절벽을 늘어뜨린 산 정상에서
이방인들이 느릿느릿 등에서 내린다.
향나무를 쓰러트릴 듯 바람은 편서풍이다.
삶과 함께 이 고통을 끝내자. 바로 지금이다,
자갈을 차며 앞으로 내달린다.
밑바닥이 바람처럼 번개처럼 다가온다.
—당나귀! 당나귀가 떨어졌다!
구불거리는 협곡,
검푸른 심연에 흰 별들이 소용돌이친다.
몸을 벗고
바람 속에서 나는 웃는다.
-《시와 경계》2015년 겨울호
-프로필-
1944년 전북 정읍 출생
전북대 국문과 졸업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
같은 해 5월 공보부 신인예술상 시조 당선
시집 『이상기후』『불꽃』『전라도 시인』
『우리나라 날씨』『칼레의 시민들』
『황홀한 물살』『푸른 심연』『입술』
시선집 『어린 신에게』 시비평집 『시를 찾는 그대에게』
전남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현재) 다음 카페 강인한의 ‘푸른 시의 방’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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