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종의 ‘망갈라숫따(행복경)’ 이야기 ⑨ “참 기술은 연마를 통해 체득되는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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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16 (금) 09:27 | 이 학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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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좋은 기술을 연마하라
경주 율동 마애여래삼존입상(사진=염정우)
이제껏 경제적으로는 그리 넉넉한 삶을 살지 못했던 터라, 생계(生計) 문제를 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려니 그저 쑥스럽기만 합니다. 지천명을 넘어 이순이 되었어도 경제적 문제에 관한한 영 서툴기만 합니다. 사회 전반의 수준에 비해 제반 여건이 열악한 불교집안에 종사한 것이 주된 원인이겠지만, 인과(因果)의 입장에서 보면 풍족하지 못한 삶은 보시 공덕을 쌓지 못했기 때문이니, 남 탓 할 일은 아닙니다.
몇 해 전 귀촌해 안빈낙도하는 삶이 만족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어디선가 경조사 소식이 들려오는 등 예기치 않게 돈 쓸 일이 생기면 조금은 부담이 느껴지게 됩니다. 비루할 정도는 아니지만 여유롭지 않은 삶은 조금은 불편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합니다. 그래서 늘 가족에게는 미안한 마음입니다. 아무튼 안빈(安貧)의 삶이란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을 알겠습니다.
그렇다고 물질적으로 부유한 삶이 곧 생계 문제를 다 해결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풍족하더라도 그 방편이 그르다면 바른 생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올바르지 못한 수단으로 부를 취하면서 행복한 삶을 추구한다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에 지나지 않습니다. 팔정도의 정명(正命), 즉 ‘바른 생계’에서 ‘생계’ 앞에 ‘바른’이라는 한정적 수식어를 붙여놓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정명은 바르고 건전하게, 그리하여 정정당당하게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런데 바르고 건전하게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지나치게 가난하거나, 특히 부양가족에게 고단한 삶을 살게 하는 것은 아무래도 행복해지는 것과 거리가 있습니다.
아마도 부처님께서 행복해지는 삶의 조건으로 ‘좋은 기술을 연마할 것’을 제시한 것은 이런 현실적 문제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완벽하게 기술을 익혀(Artfulness) 최고 수준의 완벽한 솜씨(perfect handicraft)를 갖추게 되면 건전한 삶과 함께 생계 문제의 해결도 가능해 가난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계에 문제가 있으면, 세속적 행복은 물론 출세간적 행복도 누리기가 어렵습니다. 생계문제는 수행을 하는 데에도 필연적으로 장애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분야의 기술이 좋은 것’과 ‘바른 생계’는 인과의 관계에 있으며, 나아가 더 나은 삶, 즉 수행을 통해 궁극적 경지에 가까이 갈 수 있게 하는 매우 중요한 전제라고 할 것입니다.
어떤 기술을 배우고 연마하려면 우선 그 분야가 자신의 적성에 맞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내키지 않는 분야에 투신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 활용하는 것은 어떤 계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특히 그 분야가 관심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야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관심이나 호기심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감으로 두려움을 이겨야 하고, 즐거움을 느끼며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입니다. 마치 자전거를 타는 것처럼 호기심과 즐거움으로 다가서되, 쉼 없이 페달을 밟아야 하고,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즐길 줄 알아야 하며, 조금씩 멀리 나아가고 실력이 향상되면서 새로운 묘미를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몇 해 밭을 경작하면서 농사에도 기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재배하는 작물과 농부 사이에 일종의 교감이 필요합니다. 식물체의 모습을 살펴, 지금의 단계에서 무엇이 필요한 것인지,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를 정확하고 신속하게 판단할 수 있어야 낭패를 면할 수 있습니다. 이런저런 경작이론도 있고 갖가지 농사기술도 난무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농부만의 감각과 신속하고 정확한 판단입니다. 기후나 토질 등 제반 여건이 지역마다, 또 농지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기술은 바르고 신속하게 근본적인 것을 실행할 수 있는 지식과 능력이다. 그런데 기술은 단순히 지식과 실행력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기술 있는 사람은 타이밍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있으며 기술을 신속히 실행하는 능력도 가지고 있다.”
미국의 저명한 농구선수이자 감독으로 전설의 반열에 오른 존 우든(John Wooden)이 그의 책 <인생코칭>에서 밝힌 기술에 대한 설명입니다. 존 우든은 지식과 실행력에 덧붙여 타이밍에 대한 감각, 신속한 판단 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능력은 단순히 지식을 습득하는데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는 노력, 즉 ‘연마(練磨)’에 의해 체득되는 것이지요. 마치 사마타 수행을 통해 집중력이 증장되고,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 반야의 지혜가 발현되는 것처럼, 꾸준한 연마를 통해 감각과 정확하고 신속한 판단력이 얻어지는 것입니다.
연마는 작고 딱딱한 입자를 동시에 많이 작용시켜 거친 대상물의 표면을 조금씩 깎아내 표면의 요철을 작게 하여 경면(鏡面) 상태로 가공하는 작업입니다. 보석과 대리석을 연마하면 윤기와 광택이 생겨나고 외관의 아름다움이 향상됩니다. 도검이나 금속 식기 등은 연마할수록 윤기와 광택이 더해져 미관상 아름다워짐은 물론 선명도를 향상시키고 오염 방지효과를 높여줍니다. 세척이 용이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녹과 변색을 방지해 수명 연장의 효과도 기할 수 있습니다. 금형(金型)에서도 연마의 중요성은 절대적입니다. 외관이나 미관의 향상은 기본이고 유동저항의 저하, 이형성 향상, 치수 및 경상 정밀도를 향상시켜 제품의 정밀도와 강도를 높이고 강화할 수 있습니다. 기계부품이나 기계, 공구 등에서도 연마로 인한 정밀도 향상과 수명, 부품호환성 향상 효과는 널리 입증되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점차 그 중요성이 증대되는 광학 및 전자부품 분야에서도 광학적 전기 전자 소자 특성을 향상시키는 데에도 연마는 필수적인 과정입니다. 고정밀화, 초미세화, 고집적화의 촉진, 오염부착 파티클 방지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밖에도 치과 등 생체용 대안에도 연마는 매우 중요하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건전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수단으로 일차적으로 기술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고, 나아가 그 기술을 최고 수준으로 연마하는 정진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바른 생계도 가능해질 수 있습니다.
기술에 대해 언급하다 보니 문득 <장자(莊子)> 내편(內篇) 양생주(養生主)에 나오는 포정(庖丁)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어느 날 포정이 문혜군(임금)을 위해 소를 잡은 일이 있었습니다. 포정이 칼로 소를 해체하는 모습은 가히 신기(神技)에 가까웠는데, 양생주의 표현을 빌면 “(소를 해부하는) 그 소리는 모두 음률에 맞고, 은나라 탕왕 때의 명곡인 상림(桑林)의 무악(舞樂)에도 조화되며, 또 요 임금 때의 명곡인 경수(經首)의 음절에도 맞았을” 정도였습니다. 이에 문혜군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채 말하기를 “아, 훌륭하구나! 기술도 어찌하면 이런 경지에까지 이를 수가 있느냐?”라고 감탄했는데, 이 말을 들은 포정이 칼을 내려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것은 도입니다. 그 도가 기술(손끝의 재주)로 펼쳐진 것일 뿐입니다.[臣之所好者道也 進乎技矣]”
지난해 돌연 타계한 우리시대 최고의 역경사(譯經師) 중 한 분이었던 고 박상준 선생의 이 문장에 대한 풀이입니다. ‘도가 기술로 펼쳐진 것’이라는 번역문장은 들여다볼수록 경탄을 불러일으킵니다. 선생의 번역에 따르면 “임금(문혜군)은 포정의 솜씨가 무슨 기술을 연마해서 소를 잡는 줄 알고 소 잡는 기술을 칭찬했지만, 포정은 기술 이전의 심오하고 웅숭한 도(道)와 혼(魂)의 세계를 한 눈에 알아보지 못하는 (왕에게 멋지게 한 방을 날렸다)”는 것이지요. 비록 칼을 다루는 직업에 종사했지만, 포정은 진정한 기술은 재주나 솜씨가 아니라 지극히 자연스러운 도의 경지에서 비롯된다는 자부심에 차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경주 율동 마애여래삼존입상(사진=염정우)
앞서도 언급했거니와, 바른 생계는 생명의 영위를 올바른 방법으로 꾸려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른 생계는 아무래도 출가자보다는 상대적으로 재가자에게 더 큰 비중으로 인식되는 지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재물은 반드시 합법적으로 취득해야 하며, 어떠한 경우에도 남에게 해악이나 고통을 끼치지 않는 정당한 방법으로만 획득해야 합니다. 합법적이고 정당할 때 비로소 바른 생계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출가자도 정명을 준수해야 합니다. 한국불교에서는 많이 달라졌지만, 부처님 당시 비구들은 무소유와 걸식으로 삶을 영위하였습니다. 부처님은 특히 비구(니)들이 점복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했습니다. 따라서 출가자들이 사주나 관상 그리고 점 등으로 생계를 유지해서는 안 됩니다. 재가자도 가능한 정당한 직업을 통해서 생계를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여기서 정당함이란 이치에 맞아 올바르고 마땅한 것을 말합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응당하며, 올바르고, 적절하며, 이성적이고, 적법한[(be) just, right, proper, reasonable, lawful] 직업을 말하는 것이지요.
부처님은 재가자들이 해서는 안 되는 다섯 가지 생계수단을 특정해 언급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금한 다섯 가지 생계수단은 무기를 거래하는 직업이거나, 생명체를 거래하는 것, 육류를 생산하고 또한 도살하는 직업, 독약을 거래하는 일, 술이나 마약 등을 거래하는 직업 등을 말합니다. 여러 불가피한 사정으로 이와 같은 직업에 종사하는 분들에게는 혹여 이 말씀이 언짢게 다가올 수도 있겠지만, 인과의 법칙이 그런 것이니 탓을 하거나 원망할 일은 아닙니다. 콩 심은 곳에 콩이 나고, 팥 심은 곳에 팥이 나는 인과의 엄격함은 누구도 어쩔 수 없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부처님께서 이 문제를 드러내 거론한 것은 중생에 대한 한없는 연민(憐愍)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