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가족..(家族)
(민33;54,마12:50)278.275
2016.5.15.9시 시온성군인교회
2016.5.18.13 태안보건의료원
(보내지는 9 곳)
태안장로교회 원로목사
자살방지한국협회충서본부 이사장
충청남도자살예방위원
글:-남제현목사
(마12:50)“-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하나님>의 가족은 ”누구든지“안에 가족의 개방성과 포괄성 및 무한대성을 나타내주는 표현에서 시작한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영적 가족은 빈부의 차이나 지역, 문화, 사상 및 계급 간의 차이가 없다. 그리고 영원한 세대에 이르기까지 그 대상이 된다. 그러나 '누구든지'는 무조건적 개방성을 띤 것만은 아니다.
철저한 제한성과 배타성이 내포되어 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 행함과 동참하는 자'라는 절대적 제한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 신령한 가족을 정의하는 말씀이다..주를 따르는 성도들은 모두 하나님의 권속이요..(엡2:19) “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믿음의 식구들(갈6:10)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찌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는 초자연적인 차원의 신비를 함축한 말로 '아버지의 뜻을 행하다'는 것은 어떤 의롭고도 선한 일을 몸소 행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안에서 계시된 그분의 구원 의지로서, <예수>를 신앙하고 그의 뜻을 따라 <하나님>나라의 완성을 위해 애쓰는 일을 의미한다(요 6: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
인간은 <하나님>을 믿도록 창조 되었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 고하셨다..의미심장하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유일한 일이다. 그것은 (1) 하나님을 신임하는 믿음이요, <하나님>의 보내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불신임하는 것이니 <하나님>을 모독하는 큰 죄이다. (2)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신을 완전히 계시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음이다..
<하나님>께서 그 독생자를 성육신하여 보내신 것은, 인간과 깊은 교제를 가지시기 위한 최고의 사랑을 보여준 것이다. 이것을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하신 정을 저버리는 것이다..(3)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는 <하나님>을 받아드린 것이다..전적으로 신앙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일어난다면 세상의 역사는 변화될 것이다.<스펄죤>(Spurgeon)은 "작은 믿음은 영혼을 하늘로 가져가고, 큰 믿음은 하늘을 영혼에게 가져온다"하였다.
<아브라함>은 남들의 권면을 받아들이지 않고 믿었고, <수로보니게>여자는 그대로 믿었고, <노아>는 경험한바 없이도 홍수에 의하여 세상이 망할 것을 믿었다(히11:7). <스가랴>12장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보호해 주시겠다는 말씀이다. 1절에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이”는 하늘과 땅을 지으신 창조자이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우리 영혼의 주인이시다. 창조자요 모든 것의 주인 되시며 보호자 되심을 말씀하고 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상징하기도 하며,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보호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교회에 대한 보호의 약속이다. 또한 계속해서 언급하는 ‘그 날’은 바로 디데이가 아니라 브이데이 승리의 날이다. 창조주가 되신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약속은 승리의 날까지 이른다는 말씀이다..<하나님>은 사람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을 보시고 좋아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힘으로 삼고 의지하는 자들을 위해 <하나님>의 능력의 손을 움직여 주셨다.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모든 적들이 취해서 비틀거리게 되는 것이다. 공격을 하고 보니 이득을 본 것이 아니라 손해 보았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공격한 적군이 자신들의 힘을 자랑하려고 오히려 자기 발등만 찍혀서 상처 입고 물러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똑똑하고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은 선택한자를 보호시고 또한 그중 약한 자를 우선적으로 하신다. 유다 장막을 구원하시겠다고 하셨고, 예루살렘은 물론이고 유다의 변두리지역까지도 보호하시겠다는 약속이다..유다의 변두리 지역을 보호하시고 다음은 예루살렘을 보호하시겠다고 하셨다. 우선순위를 바로 약한 자에게 먼저 두셨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고아나 과부, 나그네와 같은 약한 자들에게 관심을 보이셨다.
우리사회의 소외계층은 경제, 학습, 사회 등 전반에서 스스로 능력이 부진하여 뒤 처지고 있는 사람들이 소외계층이다..현대사회가 신체적ㆍ정신적 사유와 생활적 환경요인에 의해 타인과의 경쟁력에서 밀려 소외되고 도태되는 부류가 생긴다면 이것이 사회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물론 노약자를 포함한 사회적 약자를 통틀어 소외계층이라 한다..예전에 서민층이라 부르던 것이 어느 때 부턴가 부와 출세와 권력만을 탐하는 무리들이 이 나라 포진하면서 부르게 되었다.
이런 소외 자들은 사회전반에 갈등의 조성하고 공산집단에 동조하는 무리로 빠질 수 도 있다는 말이다..엄청난 부정과 비리와 범죄적 위정자들이 진실을 왜곡하며 국민과 사회를 속이면서도 당당하게 누릴 수 무리의 나라 안의 적들 보다는 이들이 훨씬 낫다..소외계층은 대체로 스스로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 할 수가 없는 계층이다. 병이 들어도 병원비가 없어서 갈수가 없고 아이들을 원해도 학원을 보낼 수가 없고, 그러다 보면 잘못된 선택을 할 수도 있는 계층이다.
그래서 내가 편하게 잘살려면 내 주위가 모두 편해야 된다는 차원에서 내게 여유 있는 것을 조금만 나누면 해결된다. 그것이 금전이든 시간이든 마음이든 말이다. <하나님>의 가족 안에는 소외 계층이 없어야 한다..소외계층은 거의 모든 면에서 차등과 핍박받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자녀들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은 받고 있는 것이다. (마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하나님>의 은총은 자녀의 들의 간구와 상한 심령을 사랑 하신다는 것이다.
성도들의 최고의 복이요, 성도들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은 애통하는 마음이다. 애통하는 마음만은 정결케 하는 길로 인도하며,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하는 마음이요,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는 것이다. <이스라엘>백성이 가슴을 치며 애통해야 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십자가에 못은 밖은 자가 누구인지를 깨달음이 때문이다. 그들이 찌른 <예수 그리스도>바라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향한 대적과 도전은 조롱하고 멸시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이것이 인간의 패역함의 절정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회개의 영을 얻은 자들은 자신이 찔러 못 박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애통하게 되는 은총을 주신 것이다..그러므로 <하나님>의 은총이 없이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이 없이는 참된 애통함과 회개를 할 수 없다.
이것은 자녀들에게 주신 축복이다..애통함은 자녀들 각자의 내면에서 따로 일어난다. 잘못에 대한 자각과 뉘우침에 대한 고백 그리고 상한 심령으로 애통하는 것이 회개의 길이다..집을 나가 아들 탕자가 이미 돌아 오줄 알고 기다리는 아버지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녀들을 보호하신다. 그리고 애통하는 자에게는 위로해 주시는 것이다.
(눅15: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죽었다가 살아난 것은 아들 편에서의 영적 죽음과 부활이며 '잃었다 다시 얻음'은 아버지 편에서 아들과의 분리와 재결합을 의미한다. (히5:5)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저더러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