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혜빈(惠嬪)이 밀계(密啓)하기를,
“이용(李瑢)이 사직(社稷)을 위태롭게 하기를 꾀하여 여러 무뢰배를 모으고, 이현로(李賢老)의 말을 듣고서 무계 정사(武溪精舍)를 방룡 소흥(旁龍所興)의 땅에 지었으니, 마땅히 미리 막아야 합니다.”
하였다. 성녕 대군(誠寧大君)의 종 김보명(金寶明)이 풍수의 설(說)을 거짓으로 꾸며서 용(瑢)을 유혹하여 이르기를,
“보현봉(普賢峯) 아래에 집을 지으면, 이것은 비기(秘記)에 이른바, ‘명당(明堂)이 장손(長孫)에 이롭고 만대(萬代)에 왕이 일어난다.’는 땅입니다.”
하였으므로, 용(瑢)이 무계 정사(武溪精舍)를 짓고서 핑계하여 말하기를,
“나는 산수를 좋아하고 홍진(紅塵)을 좋아하지 아니한다.”
하였다. 뒤에 김보명(金寶明)이 죽자, 용(瑢)의 계집종 약비(若非)가 자성 왕비(慈聖王妃)에게 아뢰기를,
“잘 죽었다. 살았으면 매우 큰 죄를 지었을 것이다.”
하였다. 백악산(白岳山)이 뒤에 왕이 일어날 땅이라 하고 장손(長孫)에 이롭다고 일컬었는데, 여러 사람들의 듣는 것을 속이었지만 실은 의춘군(宜春君)을 가리킨 것이었다. 용(瑢)이 널리 조사(朝士)와 결탁하려고 ‘시가(詩家)’라고 칭탁하니, 이현로(李賢老)·이승윤(李承胤)·이개(李塏)·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 등이 교결(交結)하여 마음으로 굳게 맹세하고 ‘문하(門下)’라고 칭하고, 모두 도서(圖書)의 헌호(軒號)를 지어서 서로 한때의 문사임을 자랑하였으나, 모두 농락(籠絡)당한 것이었다. 이현로 등이 용(瑢)을 칭하여 ‘사백(詞伯)’이라 하고, 또 ‘동평(東平)’이라고도 칭하였다. 김종서(金宗瑞)가 매양 용(瑢)에게 글을 보낼 때 ‘맹말(盟末)’·‘맹로(盟老)’라고 자칭하고 동료로써 대하니, 용(瑢)의 거짓된 명예가 이미 넘쳐서 임금의 자리[神器]를 엿보게 되었다. 이에 권세 있고 부유한 것을 가지고 사람을 멸시함이 아주 많았고, 참람(僭濫)한 물건을 많이 만들어 착용하였으며, 계(契)의 모임에서 시문을 지어서 등급을 매기고, 큰 인장(印章)을 만들어 찍었다. 일이 많이 이와 같았고, 또 마음대로 역마(驛馬)를 사용하기에 이르러, 한때 용(瑢)에게 아첨하는 자들이 용(瑢)에게 글을 보내는 데 한결같이 계서(啓書)와 같이 하여, ‘용비(龍飛)’·‘봉상(鳳翔)’·‘번린(攀鱗)’·‘부익(附翼)’·‘계운(啓運)’·‘개치(開治)’ 등과 같은 용어를 쓰고도 의혹하지 않았으며, 혹은 신이라 칭하는 자도 있었다. 정난(靖難)한 뒤에 많이 얼굴을 바꾸고 꼬리를 흔들었으나, 세조는 모두 묻지 않았다.
단종 7권, 1년(1453 계유 / 명 경태(景泰) 4년) 9월 27일(경진) 의정부에서 임중경의 일을 의금부에 내려 삼성 잡치하기를 청하다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임중경(林仲卿)의 일은 의금부에 내려서 삼성 잡신(三省雜訊)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번(李蕃)의 아비 이효경(李孝敬)은 풍질(風疾)이 있는 자인데, 그 아내 설(薛)이 그 종과 사통(私通)하고, 또 제부(弟夫) 순평군(順平君) 이군생(李群生)과 이웃 사람인 김한(金澣)과도 사통하였다. 사통하는 자가 오면 이효경을 꾸짖어 다른 곳으로 가게 하고 간통(奸通)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추잡한 소문이 나라 안에 들렸다.
김문기(金文起)가 호방하고 삼가지 아니하여 그 아들이 권담(權聃)의 딸에게 장가 들었는데, 바로 권담이 전처(前妻) 박씨와 몰래 통하여 나은 것이다. 또 김문기의 딸은 이번에게 시집갔는데 그 시어미가 추한 행실이 있어도 징계되는 바가 없음을 본 까닭으로 본을 받았다. 이번이 음위(陰痿)였는데, 이웃 사람 임중경(林仲卿)이 음경(陰莖)이 크다는 말을 듣고 먼저 여종으로 하여금 간통하게 하고는 드디어 사통하고, 같은 마을의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 황보공(皇甫恭)·전 녹사(祿事) 황인헌(黃仁軒)의 딸과 더불어 패거리를 짓고 음행을 저질렀는데, 사람의 음경이 크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사통하였으니, 두 계집은 모두 처녀이었다. 매양 황혼(黃昏)에 사통하는 자와 더불어 몰래 백악산(白岳山) 기슭 궁벽한 곳에 모여서 희롱하고 술을 마셨다. 하루는 이웃 사람 우계손(禹繼孫)의 아이가 나무에 올라가서 과일을 따다가 김씨의 후원을 굽어 보니, 어떤 남자가 아름다운 여자를 안고 숲 사이에 있었다. 아이가 가만히 살펴보니, 바로 이번의 아내였다. 이번이 대강 알고는 어미의 집에 돌아간다고 청탁해 말하고 밤이 되어 돌아오니, 김문기의 딸이 임중경과 같이 누워 있었다. 이번이 바로 들어가 잡았는데, 여러 여종들이 몰려 와서 이번을 끌어 내어 이번이 도리어 매를 맞게 되었으나 관(官)에 고하지 아니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서부(西部)에서 헌사(憲司)에 보고하였다. 대사헌(大司憲) 박중림(朴仲林)이 김문기와 친척이 되므로 옥사를 늦추고 다스리지 않기 때문에 사간원에서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기를 청하여 옥사(獄事)가 거의 갖추어졌는데, 계유 정난(癸酉靖難) 후에 이르러 대사(大赦)로써 석방되었다. 김문기가 사람들에게 자랑하기를,
“요즘 철퇴(鐵槌)가 왔다 갔다 하더니, 우리 딸의 죄가 얼음같이 풀렸다.”
하였다.
단종 1년 계유(1453, 경태 4) 10월 10일(계사) 세조가 이용과 결탁하여 반역하고자 했던 김종서·황보인·이양·조극관 등을 효수하다
세조가 새벽에 권남(權擥)·한명회(韓明澮)·홍달손(洪達孫)을 불러 말하기를,
“오늘은 요망한 도적을 소탕하여 종사를 편안히 하겠으니, 그대들은 마땅히 약속과 같이 하라. 내가 깊이 생각하여 보니 간당(姦黨) 중에서 가장 간사하고 교활한 자로는 김종서(金宗瑞) 같은 자가 없다. 저 자가 만일 먼저 알면 일은 성사되지 못할 것이다. 내가 한두 역사를 거느리고 곧장 그 집에 가서 선 자리에서 베고 달려 아뢰면, 나머지 도적은 평정할 것도 없다.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모두 말하기를,
“좋습니다.”
하였다. 세조가 말하기를,
“내가 오늘 여러 무사(武士)를 불러 후원에서 과녁을 쏘고 조용히 이르겠으니, 그대들은 느지막에 다시 오라.”
하고, 드디어 무사를 불러 후원에서 과녁을 쏘고 술자리를 베풀었다. 한낮쯤 되어 권남이 다시 왔다. 세조가 나와 보고 말하기를,
“강곤(康袞)·홍윤성(洪允成)·임자번(林自蕃)·최윤(崔閏)·안경손(安慶孫)·홍순로(洪純老)·홍귀동(洪貴童)·민발(閔發) 등 수십 인이 와서 더불어 과녁을 쏘는데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다. 곽연성(郭連城)은 이미 왔으나 어미의 상중(喪中)으로 사양하기에, 여러 번 되풀이하여 타이르니, 비록 허락은 하였으나 어렵게 여기는 빛이 있다. 그대가 다시 말하라.”
하고, 세조는 도로 후원으로 들어갔다. 권남이 곽연성을 보고 말하기를,
“수양 대군(首陽大君)께서 지금 종사의 큰 계책으로 간사한 도적을 베고자 하는데, 함께 일할 만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자네를 부른 것이니, 자네는 장차 어찌하려는가?”
하니, 곽연성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들었습니다. 장부가 어찌 장한 마음이 없을까마는 최복(衰服)이 몸에 있으니 명령을 따르기가 어렵습니다.”
하였다. 권남이 말하기를,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하여 죽는 것이다. 지금 수양 대군(首陽大君)께서 만 번 죽을 계책을 내어 국가를 위하여 의(義)를 일으키는 것인데, 자네가 어찌 구구하게 작은 절의(節義)를 지키겠는가? 또 충과 효에는 두 가지 이치가 없으니, 자네는 구차히 사양하지 말고 큰 효를 이루라.”
하였다. 곽연성이 말하기를,
“수양 대군께서 이미 명령이 있으니 마땅히 힘써 따르겠으나, 이것이 작은 일이 아니니, 그대는 자세히 방략(方略)을 말하여 보라.”
하였다. 권남이 하나하나 말하니, 곽연성이 말하기를,
“나머지는 의논할 것이 없고, 다만 수양 대군께서 김종서의 집을 왕래하는 데 이르고 늦는 것을 알 수 없으니, 성문이 만일 닫히면 어찌할 것인가?”
하니, 권남이 말하기를,
“이것은 미처 생각지 못하였다. 마땅히 선처하겠다.”
하였다. 해가 저무니 홍달손(洪達孫)이 감순(監巡)으로 먼저 나갔다. 세조가 활 쏘는 것을 핑계하고 멀찌감치 무사 등을 이끌고 후원 송정(松亭)에 이르러 말하기를,
“지금 간신 김종서(金宗瑞) 등이 권세를 희롱하고 정사를 오로지하여 군사와 백성을 돌보지 않아서 원망이 하늘에 닿았으며, 군상(君上)을 무시하고 간사함이 날로 자라서 비밀히 이용(李瑢)에게 붙어서 장차 불궤(不軌)한 짓을 도모하려 한다. 당원(黨援)이 이미 성하고 화기(禍機)가 정히 임박하였으니, 이때야말로 충신 열사가 대의를 분발하여 죽기를 다할 날이다. 내가 이것들을 베어 없애서 종사를 편안히 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하니, 모두 말하기를,
“참으로 말씀한 바와 같습니다.”
하고, 송석손(宋碩孫)·유형(柳亨)·민발(閔發) 등은 말하기를,
“마땅히 먼저 아뢰어야 합니다.”
하니, 의논이 분운(紛紜)하여 혹은 북문을 따라 도망하여 나가는 자도 있었다. 세조가 한명회에게 이르기를,
“불가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으니, 계교가 장차 어디에서 나오겠는가?”
하니, 한명회가 말하기를,
“길옆에 집을 지으면 3년이 되어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작은 일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큰 일이겠습니까? 일에는 역(逆)과 순(順)이 있는데, 순으로 움직이면 어디를 간들 이루지 못하겠습니까? 모의(謀議)가 이미 먼저 정하여졌으니, 지금 의논이 비록 통일되지 않더라도 그만둘 수 있습니까? 청컨대 공(公)이 먼저 일어나면 따르지 않을 자가 없을 것입니다.”
하고, 홍윤성(洪允成)이 말하기를,
“군사를 쓰는 데에 있어 해(害)가 되는 것은 이럴까 저럴까 결단 못하는 것이 가장 큽니다. 지금 사기(事機)가 심히 급박하니, 만일 여러 사람의 의논을 따른다면 일은 다 틀릴 것입니다.”
하였다. 송석손 등이 옷을 끌어당기면서 두세 번 만류하니, 세조가 노하여 말하기를,
“너희들은 다 가서 먼저 고하라. 나는 너희들을 의지하지 않겠다.”
하고, 드디어 활을 끌고 일어서서, 말리는 자를 발로 차고 하늘을 가리켜 맹세하기를,
“지금 내 한 몸에 종사의 이해가 매었으니, 운명을 하늘에 맡긴다. 장부가 죽으면 사직(社稷)에 죽을 뿐이다. 따를 자는 따르고, 갈 자는 가라. 나는 너희들에게 강요하지 않겠다. 만일 고집하여 사기(事機)를 그르치는 자가 있으면 먼저 베고 나가겠다. 빠른 우뢰에는 미처 귀도 가리지 못하는 것이다. 군사는 신속한 것이 귀하다. 내가 곧 간흉(姦凶)을 베어 없앨 것이니, 누가 감히 어기겠는가?”
하고, 중문에 나오니 자성 왕비(慈聖王妃)가 갑옷을 끌어 입히었다. 드디어 갑옷을 입고 가동(家僮) 임어을운(林於乙云)을 데리고 단기(單騎)로 김종서(金宗瑞)의 집으로 갔다. 세조가 떠나기 전에 권남과 한명회가 의논하기를,
“지금 대군이 몸을 일으켜 홀로 가니 후원(後援)이 없을 수 없다.”
하고 권언(權躽)·권경(權擎)·한서구(韓瑞龜)·한명진(韓明溍) 등으로 하여금 돈의문(敦義門) 안 내성(內城) 위에 잠복하게 하고, 또 양정(楊汀)·홍순손(洪順孫)·유서(柳溆)에게 경계하여 미복(微服) 차림으로 따라가게 하였다. 세조가 처음에 권남에게 명하여 김종서를 그 집에 가서 엿보게 하였다. 권남이 투자(投刺)하니, 김종서가 〈불러들여〉 별실에서 한참 동안 같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권남이 돌아와 보고하니, 세조가 이미 말에 올라탔다. 세조가 김종서의 집 동구(洞口)에 이르니, 김승규(金承珪)의 집 앞에 무사 세 사람이 병기를 가지고 귀엣말을 하고 있고 무기(武騎) 30여 인이 길 좌우를 끼고 있어 서로 자랑하기를,
“이 말을 타고 적을 쏘면 어찌 한 화살에 죽이지 못하겠는가?”
하였다. 세조가 이미 방비가 있는 것을 알고 웃으며 말하기를,
“누구냐?”
하니, 그 사람들이 흩어졌다. 양정(楊汀)은 칼을 차고 유서(柳溆)는 궁전(弓箭)을 차고 왔다. 세조가 양정으로 하여금 칼을 품에 감추게 하고 유서를 정지시키면서 김종서의 집에 이르니, 김승규가 문 앞에 앉아 신사면(辛思勉)·윤광은(尹匡殷)과 얘기하고 있었다. 김승규가 세조를 보고 맞이하였다. 세조가 그 아비를 보기를 청하니, 김승규가 들어가서 고하였다. 김종서가 한참 만에 나와 세조가 멀찍이 서서 앞으로 나오지 않는 것을 보고 들어오기를 청하니, 세조가 말하기를,
“해가 저물었으니 문에는 들어가지 못하겠고, 다만 한 가지 일을 청하려고 왔습니다.”
하였다. 김종서가 두세 번 들어오기를 청하였으나 세조가 굳이 거절하니, 김종서가 부득이하여 앞으로 나왔다. 김종서가 나오기 전에 세조는 사모(紗帽) 뿔이 떨어져 잃어버린 것을 깨달았다. 세조가 웃으며 말하기를,
“정승(政丞)의 사모 뿔을 빌립시다.”
하니, 김종서가 창황(蒼黃)히 사모 뿔을 빼어 주었다. 세조가 말하기를,
“종부시(宗簿寺)에서 영응 대군(永膺大君)의 부인의 일을 탄핵하고자 하는데, 정승이 지휘하십니까? 정승은 누대(累代) 조정의 훈로(勳老)이시니, 정승이 편을 들지 않으면 어느 곳에 부탁하겠습니까?”
하였다. 이때에 임어을운이 나오니, 세조가 꾸짖어 물리쳤다. 김종서가 하늘을 우러러보며 한참 말이 없었다. 윤광은·신사면이 굳게 앉아 물러가지 않으니, 세조가 말하기를,
“비밀한 청이 있으니, 너희들은 물러가라.”
하였으나, 오히려 멀리 피하지 않았다. 세조가 김종서에게 이르기를,
“또 청을 드리는 편지가 있습니다.”
하고, 종자(從者)를 불러 가져오게 하였다. 양정이 미처 나오기 전에 세조가 임어을운을 꾸짖어 말하기를,
“그 편지 한 통이 어디 갔느냐?”
하였다. 지부(知部)의 것을 바치니 김종서가 편지를 받아 물러서서 달에 비춰 보는데, 세조가 재촉하니 임어을운이 철퇴로 김종서를 쳐서 땅에 쓰러뜨렸다. 김승규가 놀라서 그 위에 엎드리니, 양정이 칼을 뽑아 쳤다. 세조가 천천히 양정 등으로 하여금 말고삐를 흔들게 하여 돌아와서 돈의문에 들어가, 권언 등을 시켜 지키게 하였다. 이날 김종서가 역사(力士)를 모아 음식을 먹이고 병기를 정돈하다가 세조가 이르니, 사람을 시켜 담 위에서 엿보게 하며 말하기를,
“사람이 적으면 나아가 접하고, 많으면 쏘라.”
하였다. 엿보는 자가 말하기를,
“적습니다.”
하니, 김종서가 오히려 두어 자루 칼을 뽑아 벽 사이에 걸어 놓고 나왔다. 처음에 세조가 김종서의 집에 갈 때에 무사들을 저사(邸舍)에 가두게 하고 나왔다. 여러 사람이 오히려 떠들어대며 다투어 튀어나오려고 하자, 권남(權擥)이 문에 서서 막으니, 혹은 말하기를,
“먼저 아뢰지 않고 임의로 대신을 베는 것이 가합니까? 장차 우리들을 어느 땅에 두려고 합니까?”
하였다. 권남이 말하기를,
“우리들은 용렬하지마는 대군(大君)은 고명하니, 익히 계획하였을 것이다. 그대들은 의심하지 말라. 일을 만일 이루지 못하면 내가 어떻게 혼자 살겠는가? 장부는 다만 마땅히 순(順)을 취하고 역(逆)을 버리고, 종사를 위하여 공을 세워 공명을 취할 것이다.”
하니, 모두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혹자는 말하기를,
“어째서 우리들에게 미리 일러 활과 칼을 준비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다만 빈 주먹이니 어찌합니까?”
하니, 권남이 말하기를,
“만일 격투할 일이 있으면 비록 그대들 수십 인이 병기를 갖추었더라도 어찌 족히 쓰겠는가? 그대들은 근심하지 말라.”
하였다. 한명회(韓明澮)가 세조를 따라 성문(城門)에 이르렀다가 돌아와서, 또 세조의 명령을 반복하여 고해 이르고, 세조가 돌아오는 것을 머물러 기다리게 하였다. 권남이 달려 순청(巡廳)에 이르러 홍달손(洪達孫)을 보고 세조가 이미 김종서의 집에 간 것을 비밀히 알리고, 순졸(巡卒)을 발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약속하고는, 또 두 사람을 나누어 보내어 숭례문(崇禮門)·서소문(西小門) 두 문을 닫게 하였다. 권남은 스스로 갑사 두 사람, 총통위(銃筒衛) 열 사람을 거느리고 돈의문(敦義門)에 이르러 지키게 하고 명령하기를,
“수양 대군(首陽大君)께서 일로 인하여 문 밖에 갔으니, 비록 종(鍾)소리가 다하더라도 문을 닫지 말고 기다리라.”
하고, 권언(權躽)을 시켜 문을 감독하게 하였다. 장차 대군(大君)의 저사(邸舍)로 돌아가려 하여 미처 돌다리를 건너기 전에 성 안으로부터 달려오는 사람이 있었다. 돌아보니 세조가 이르렀다. 웃으며 권남에게 이르기를,
“김종서(金宗瑞)·김승규(金承珪)를 이미 죽였다.”
하였다. 권남이 말하기를,
“여러 무사가 아직도 공의 저사에 있으니, 수종(隨從)하게 할까요?”
하였다. 세조가 조금 멈추었다가 부르니 한명회가 거느리고 달려왔다. 세조가 순청(巡廳)에 이르러 홍달손을 시켜 순졸(巡卒)을 거느려 뒤에 따르게 하고, 시좌소(時坐所)로 달려가서 권남을 시켜 입직(入直) 승지(承旨) 최항(崔恒)을 불러내었다. 세조가 손을 잡고 최항에게 이르기를,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이양(李穰)·민신(閔伸)·조극관(趙克寬)·윤처공(尹處恭)·이명민(李命敏)·원구(元矩)·조번(趙蕃) 등이 안평 대군(安平大君)에게 당부(黨附)하고, 함길도 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 이징옥(李澄玉)·경성 부사(鏡城府使) 이경유(李耕㽥)·평안도 도관찰사(平安道都觀察使) 조수량(趙遂良)·충청도 도관찰사(忠淸都都觀察使) 안완경(安完慶) 등과 연결하여 불궤(不軌)한 짓을 공모하여 거사할 날짜까지 정하여 형세가 심히 위급하여 조금도 시간 여유가 없다. 김연(金衍)·한숭(韓崧)이 또 주상의 곁에 있으므로 와서 아뢸 겨를이 없어서 이미 적괴(賊魁) 김종서(金宗瑞) 부자를 베어 없애고 그 나머지 지당(至黨)을 지금 아뢰어 토벌하고자 한다.”
하고, 연하여 환관 전균(田畇)을 불러 말하기를,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이 안평 대군(安平大君)의 중한 뇌물을 받고 전하께서 어린 것을 경멸히 여기어 널리 당원(黨援)을 심어 놓고, 번진(藩鎭)과 교통하여 종사를 위태롭게 하기를 꾀하여 화가 조석에 있어 형세가 궁하고 일이 급박한데 또 적당(賊黨)이 곁에 있으므로, 지금 부득이하여 예전 사람의 선발후문(先發後聞)의 일을 법받아 이미 김종서 부자를 잡아 죽였으나, 황보인 등이 아직도 있으므로 지금 처단하기를 청하는 것이다. 너는 속히 들어가 아뢰어라.”
하고, 또 말하기를,
“너는 마땅히 기운을 돌리고 소리를 부드럽게 하여 천천히 아뢰고 경동할 것이 아니다.”
하였다. 도진무(都鎭撫)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김효성(金孝誠)이 입직(入直)하였는데, 세조가 그 아들 김처의(金處義)를 시켜 부르고, 또 입직한 병조 참판(兵曹參判) 이계전(李季甸) 등을 불러 들이어 세조가 최항·김효성·이계전 등과 더불어 의논하여 아뢰고, 황보인·이양·조곡관·좌찬성(左贊成) 한확(韓確)·좌참찬(左參贊) 허후(許詡)·우참찬(右參贊) 이사철(李思哲)·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정인지(鄭麟趾)·도승지(都承旨) 박중손(朴仲孫) 등을 불렀다. 세조는 처음에 궐문에 이르러 입직하는 내금위(內禁衛) 봉석주(奉石柱) 등으로 하여금 갑주(甲胄)를 갖추고 궁시(弓矢)를 띠고 남문 내정(內庭)에 늘어서서 간적(姦賊)을 방비하여 엿보게 하고, 또 입직하는 여러 곳의 별시위 갑사(別侍衛甲士)·총통위(銃筒衛) 등으로 하여금 둘러서서 홍달손(洪達孫)의 부서를 시위하게 하고, 여러 순군(巡軍)은 시좌소(時坐所)의 앞뒤 골목을 파수하여 차단하게 하고, 친히 순졸(巡卒) 수백 인을 거느려 남문 밖의 가회방(嘉會坊) 동구(洞口) 돌다리[石橋] 가에 주둔하고, 서쪽으로는 영응 대군(永膺大君) 집서쪽 동구에 이르고 동쪽으로 서운관(書雲觀) 고개에 이르기까지 좌우익(左右翼)을 나누어 사람의 출입을 절제하고, 또 돌다리로부터 남문까지 마병(馬兵)·보병(步兵)으로 문을 네 겹으로 만들고, 역사(力士) 함귀(咸貴)·박막동(朴莫同)·수산(壽山)·막동(莫同) 등으로 제3문을 지키게 하고, 영을 내리기를,
“이 안이 심히 좁으니, 여러 재상으로서 들어오는 사람은 겸종(傔從)을 제거하고 혼자 들어오도록 하라.”
하였다. 조극관(鳥克寬)·황보인(皇甫仁)·이양(李穰)이 제3문에 들어오니, 함귀 등이 철퇴로 때려 죽이고, 사람을 보내어 윤처공(尹處恭)·이명민(李命敏)·조번(趙藩)·원구(元矩) 등을 죽이고, 삼군 진무(三軍鎭撫) 최사기(崔賜起)를 보내어 김연(金衍)을 그 집에서 죽이고, 삼군 진무 서조(徐遭)를 보내어 민신(閔伸)을 비석소(碑石所)에서 베고【이때에 민신은 현릉(顯陵)의 비석을 감독하고 있었다.】또 최사기(崔賜起)와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 신선경(愼先庚)을 보내어 군사 1백을 거느리고 용(瑢)을 성녕 대군(誠寧大君)의 집에서 잡아서 압송(押送)하여 강화(江華)에 두고, 세조가 손수 편지를 써서 그 뜻을 이르고, 또 시켜서 말하기를,
“네 죄가 커서 참으로 주살(誅殺)을 용서할 수 없으나, 다만 세종(世宗)·문종(文宗)께서 너를 사랑하시던 마음으로 너를 용서하고 다스리지 않는다.”
하였다. 용(瑢)이 사자(使者)를 대하여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나도 또한 스스로 죄가 있는 것을 안다. 이렇게 된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삼군 진무 나치정(羅致貞)이 군사를 거느리고 용(瑢)의 아들인 이우직(李友直)을 잡아 압령하여 강화에 두었다. 용(瑢)이 양화도(楊花渡)에 이르러 급히 그 종 영기(永奇)를 불러 옷을 벗어 입히고 비밀히 부탁하기를,
“네가 급히 가서 김정승에게 때가 늦어진 실수를 말하여 주라.”
하였으니, 대개 김종서가 이미 주살된 것을 알지 못하고 다시 이루기를 바란 것이다. 또 말하기를,
“일이 만일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석(河石)이 반드시 먼저 베임을 당할 것이니, 네가 꼭 뼈를 거두어 오라. 내가 다시 보고야 말겠다.”
하였다. 이우직(李友直)이 강화에 이르러 용에게 말하기를,
“제가 여쭙지 않았습니까?”
하니, 용(瑢)이 말하기를,
“부끄럽다. 할 말이 없다.”
하였다. 용(瑢)의 당(黨)에 대정(大丁)이란 자가 있어 성녕 대군(誠寧大君)의 집에 숨어 있었는데, 성씨(成氏)가 여복을 입히어 침병(寢屛) 뒤에 엎드려 있게 하였다. 잡기를 급박하게 하니, 성씨가 부득이하여 내보냈는데, 곧 베었다. 운성위(雲城尉) 박종우(朴從愚)가 문에 이르러 들어가지 못하고 말하기를,
“비록 부르시는 명령은 없으나 변고가 있음을 듣고 여기 와서 명을 기다립니다.”
하니, 세조가 불러 들였다. 우승지(右承旨) 권준(權蹲)·동부승지(同副承旨) 함우치(咸禹治)가 또한 오니, 세조가 권준만 불러 들이었다. 정인지(鄭麟趾)가 권남을 시켜 붓을 잡고 이계전·최항과 더불어 함께 교서(敎書)를 짓는데, 밤이 심히 추웠다. 노산군(魯山君)이 환관 엄자치(嚴自治)에게 명하여 내온(內醞)·내수(內羞)로 세조 이하 여러 재상을 먹이었다. 세조가 군사에게 술을 먹이도록 아뢰어 청하고, 또 아뢰어 용(瑢)의 당(黨)인 환관 한숭(韓崧)·사알(司謁) 황귀존(黃貴存)을 궐내에서 잡아 의금부(義禁府)에 넘기었다. 김종서(金宗瑞)가 다시 깨어나서 원구(元矩)를 시켜 돈의문(敦義門)을 지키는 자에게 달려가 고하기를,
“내가 밤에 어떤 사람에게 상처를 입어 죽게 되었으니, 빨리 의정부(議政府)에 고하여 의원으로 하여금 약을 싸 가지고 와서 구제하게 하고, 또 속히 안평 대군(安平大君)에게 고하고, 아뢰어 내금위(內禁衛)를 보내라. 내가 나를 상하게 한 자를 잡으려 한다.”
하였으나, 문 지키는 자가 듣지 않았다. 김종서가 상처를 싸매고 여복(女服)을 입고서, 가마를 타고 돈의문(敦義門)·서소문(西小門)·숭례문(崇禮門) 세 문을 거쳐 이르렀으나 모두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와 그 아들 김승벽(金承壁)의 처가(妻家)에 숨었다. 이튿날 아침에 이명민(李命敏)도 또한 다시 깨어나서 들것에 실려 도망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홍달손(洪達孫)에게 고하니 호군(護軍) 박제함(朴悌緘)을 보내어 베었다. 세조가 인하여 여러 적이 다시 깨어날 것을 염려하여, 양정(楊汀)과 의금부 진무(義禁府鎭撫) 이흥상(李興商)을 보내어 가서 보게 하고, 김종서를 찾아 김승벽의 처가에 이르러 군사가 들어가 잡으니, 김종서가 갇히는 것이라 생각하여 말하기를,
“내가 어떻게 걸어 가겠느냐? 초헌(軺軒)을 가져오라.”
하니, 끌어내다가 베었다. 김종서의 부자·황보인·이양·조극관·민신·윤처공·조번·이명민·원구 등을 모두 저자에 효수(梟首)하니, 길 가는 사람들이 통쾌하게 여기지 않음이 없어 그 죄를 헤아려서 기왓돌로 때리는 자까지 있었고, 여러 사(司)의 비복(婢僕)들이 또한 김종서의 머리를 향해 욕하고, 환시(宦寺)들은 김연(金衍)을 발로 차고 그 머리를 짓이겼다. 뒤에 저자 아이들이 난신(亂臣)의 머리를 만들어서 나희(儺戱)를 하며 부르기를,
“김종서 세력에 조극관 몰관(沒官)하네.”
하였다. 이날 밤에 달이 떨어지고, 하늘이 컴컴하여지자 유시(流矢)가 떨어졌다. 위사(衛士)가 놀라 고하니, 이계전(李季甸)이 두려워하여 나팔을 불기를 청하였다. 세조가 웃으며 말하기를,
“무엇을 괴이하게 여길 것이 있는가? 조용히 하여 진압하라.”
하였다.
단종 1년 계유(1453, 경태 4) 10월 10일(계사) 세조에게 군국의 중요한 일을 위임하여 총치하게 하고 군사 1백 40인을 따르게 하다
노산군(魯山君)이 군국(軍國)의 중한 일을 모두 세조에게 위임하여 총치(摠治)하게 하고, 삼군 진무(三軍鎭撫) 한 사람에게 명하여 군사 1백 40인을 거느리고 따르게 하였다.
단종 1년 계유(1453, 경태 4) 10월 10일(계사) 이용의 처족인 도진무 정효전이 반역을 꾀한 일은 이미 틀렸다고 말하다
도진무(都鎭撫) 정효전(鄭孝全)은 이용(李瑢)의 처족(妻族)인데, 본래 용에게 붙었었다. 그 집이 시좌소(時坐所)에 가까운데, 이날 문을 닫고 나오지 않고 울며 말하기를,
“우리들의 일은 이미 틀렸다.”
하였다.
단종 1년 계유(1453, 경태 4) 10월 10일(계사) 조수량이 형 조극관에게 이미 반역의 음모에 참여하였으니 중도에 변할 수 없다 말하다
조극관(趙克寬)이 일찍이 그 아우 조수량(趙遂良)에게 말하기를,
“안평 대군(安平大君)이 거칠고 음란하며 탐하고 더러운 것은 나라 사람이 함께 아는 것이고, 수양 대군(首陽大君)은 공명 정대하여 세종께서 무릇 군국의 중한 일을 많이 자문하였고, 실로 명망이 있다.”
하니, 조수량이 말하기를,
“참으로 말씀한 것과 같으나, 안평 대군이 대신과 굳게 맺어 대신이 모두 비밀히 붙고, 혜빈(惠嬪)이 또 내응하는데, 우리들이 이미 음모에 참여하였으니, 중도에 변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단종 1년 계유(1453, 경태 4) 10월 10일(계사) 김종서의 가족이 그의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다
김종서(金宗瑞)가 죽으니, 손녀가 있어 악한 말을 하기를,
“적(賊)이 항상 이와 같은 일을 꾀하리라고 매양 저물면 무거운 갑옷을 입고 동산을 오르내리시더니……”
하고, 김승규(金承珪)의 처가 또한 악한 말을 하기를,
“매양 담을 넘는 것을 시험하더니, 이제 이와 같이 되었구나!”
하고, 김종서의 늙은 첩이 또한 말하기를,
“부자가 홀로 더불어 꾀하고 의논하기를 7, 8일을 하더니, 죽음을 당하였구나!”
하였다. 황보인(皇甫仁)이 부름을 당하여 올 때에 종묘(宗廟) 창덕궁(昌德宮) 동구에 이르니, 모두가 초헌을 내리지 않고 말하기를,
“지금에 이르러 초헌에서 내려서 무엇하겠습니까? 지체하고자 하다가 부득이하여 왔습니다.”
하고, 지인(知印)이 김종서의 죽음을 고하니, 황보인이 사인 이예장(李禮長)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나의 후사(後事)를 보호하여 주게.”
하였다. 민신(閔伸)이 일찍이 이명민(李命敏)에게 말하기를,
“안평 대군(安平大君)의 무계 정사(武溪精舍)를 나라 사람들이 모두 용이 일어날[興龍] 땅이라 하는데, 모의(謀議)가 누설된 것이 아닌가?”
하니, 이명민이 말하기를,
“이현로(李賢老)가 이르기를, ‘큰용[旁龍]이 일어날 땅이라.’ 하였다. 이미 황보인·김종서와 더불어 의논하여 정하고 하는 일이니, 염려할 것이 없다.”
하였다. 민신이 매양 이용(李瑢)과 더불어 술을 마시고 취하여 돌아오면 문득 스스로 탄식하기를,
“국가에서 나의 죄를 알지 못하고 살려 둔다.”
하였다. 민신이 비석소(碑石所)에 있어 감독하는데, 하루는 술이 취하여 크게 울었다. 이날 저물녘에 서조(徐遭)가 가서 불러내니, 민신이 나오지 않고 말하기를,
“무슨 일로 나를 부르는가?”
하였다. 서조가 나오기를 독촉하니, 그제서야 나와서 형(刑)에 임하여 말하기를,
“내 죄를 안다.”
하였다. 이보다 앞서 민신이 역소(役所)에 있어 꿈을 꾸었는데, 쇠 부처[鐵佛]가 목구멍에서 나와서 어깨 위에 앉았다가 공중으로 날라 사라졌다. 깊이 괴이하게 여기어 서울에 들어와 어머니를 뵙고 하직하고 돌아갔는데, 수일이 못 되어 죽음을 당하였다.
단종 1년 계유(1453, 경태 4) 10월 10일(계사) 이현로의 간사한 성품과 반역죄로 효수당하기 전까지의 행적
이현로(李賢老)가 이용(李瑢)에게 당부(黨附)하여 밤낮으로 세조를 얽어 모략하여 못하는 것이 없었다. 일찍이 병조 정랑(兵曹正郞)으로 있을 때에 남의 뇌물을 받고 속여서 관직을 주었다가 일이 발각되어 폄축(貶逐)되었으나 용서를 받아 서울로 돌아왔다. 용(瑢)이 이현로(李賢老)가 풍수의 술(術)을 안다 하여 의정부(議政府)에 부탁하여 천거하여, 문종의 산릉 도감(山陵都監) 낭청(郞廳)으로 삼아 드디어 선공 부정(繕工副正)이 되었다. 이현로가 임의로 정부(丁夫)를 감하여 면포(綿布)를 거두고 연해(沿海) 여러 고을에 정부(丁夫)를 보내어 널리 해착(海錯)을 토색하고, 새로 집기(什器)를 만들어 매양 산릉 제조(山陵提調)가 예빈시(禮賓寺)에 와서 모일 때 공찬(公饌)이 겨우 베풀어지면 이현로가 친히 사사로이 갖춘 것을 가져다가 바꾸어 놓고 팔뚝을 뽐내며 스스로 자랑하였다. 세조가 용(瑢)·황보인·김종서와 더불어 함께 제조(提調)로서 능소(陵所)에 왕래하는데 이현로가 밤에는 가만히 용(瑢)과 정부(政府)의 하처(下處)에 나아가서 성대하게 주찬(酒饌)을 베풀고, 항상 용(瑢)을 불러 ‘우리 대군(大君)’이라 하였다. 세조가 이현로를 매질한 뒤로부터는 용(瑢)에게 붙은 정부의 사람과 용의 문객이 더욱 의구심(疑懼心)을 품어 밤낮으로 모여 모의하였다. 또한 노산군(魯山君)이 어리어 권세가 정부(政府)로 돌아갔는데, 정부와 요지(要地)가 모두 용(瑢)의 우익(羽翼)인 것을 보고 서로서로 이끌어 주었다. 이현로가 벼슬이 떨어져서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 안완경(安完慶)·체찰사(體察使) 정분(鄭笨)을 따라 충주(忠州)에 이르렀는데, 미처 말에서 내리기 전에 잡는 자가 끌어내리어 묶어서 담 그늘에 두었다. 종자(從者)가 술을 찾아 먹이니, 이현로가 말하기를,
“뜻밖에도 내가 묶이어 담 밑에서 술을 마시는구나!”
하였다. 이현로가 성품이 간사하여 꾀가 많고, 아첨하여 이(利)를 좋아하여 항상 기절(奇節)을 세우고자 하며, 또 음양(陰陽)의 비술(祕術)과 활 쏘고 말타는 병략(兵略)을 좋아하고 그 재주를 자랑하여 걸핏하면 예전의 유명한 사람을 끌어서 스스로 비교하며, 사람과 말할 때는 반드시 어깨를 치키고 팔을 벌려 성기(聲氣)를 거짓으로 지어 방약무인(傍若無人)이었다. 무릇 자그마한 일도 반드시 괴이(詭異)한 이름을 숭상하여 그 종에 갓을 만드는 자를 초공(草工)이라 하고, 신을 만드는 자를 혁공(革工)이라 하고, 풀무질을 하는 자를 금공(金工)이라 하여, 사람을 대해서도 그렇게 불러서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여러 불령(不逞)한 사람들을 꾀어 들여 노복으로 부렸는데, 저들 역시 풍지(風旨)를 이어받아 분주하게 사역에 복종하여 혹시라도 뒤질까 두려워하였다. 일찍이 사천(泗川)으로 귀양갈 때에 의상(衣裳)과 기물이 무려 수십 바리가 되어 모두 건장한 종에게 맡겼는데, 실상은 가동(家僮)이 아니었다. 이때에 이르러서도 수행하는 자가 또한 많았는데, 주형(誅刑)을 당하자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사람됨이 여우처럼 아첨하고 원숭이처럼 사특하여 음흉하고 걸힐(桀黠)한 것이 더불어 비교할 사람이 없었다. 그 동료 강희안(姜希顔)이 자제를 경계하여 말하기를,
“이 녀석을 가까이 하지 말라. 마침내 제 집안에서 죽을 자가 못된다. 내가 일찍이 이 녀석의 골통을 보니, 피에 얼룩진 형상인데, 어떻게 생긴 노파가 이 녀석을 길러냈을까?”
하였다.
단종 1년 계유(1453, 경태 4) 10월 14일(정유) 세조가 종친과 문무 백관과 더불어 전을 올리어 정난을 하례하고 표리를 올리다
세조가 종친(宗親)과 문무 백관(文武百官)과 더불어 길복(吉服)으로 전(箋)을 올리어 정난(靖難)을 하례하고, 아울러 표리(表裏)를 올리었다. 전(箋)에 이르기를,
“예산(睿算)이 번개처럼 달리니 하늘과 사람이 화합하고 순응하였다. 흉한 음모(陰謀)가 와해되니 방가(邦家)가 편안하여졌다. 기쁜 윤음(綸音)이 한 번 반포되니 환호하는 소리가 사방에 들끓었다. 공경히 생각건대, 총명(聰明)이 때로 길러지고 성경(聖敬)이 날로 올랐다. 충만(充滿)한 자리를 보존하고 이룩한 공업을 지켜 크게 열성(列聖)의 통서(統緖)를 이었다. 조상의 뜻을 계승하고 그 사업을 준수하여 바야흐로 태평의 아름다움을 맞았다. 어찌 뜻하였으랴 지친(至親)이 가만히 역당(逆黨)과 결탁하여 흉악한 무리는 중외(中外)에 포열(布列)하고 화(禍)의 기미는 경각 사이에 절박하였다. 다행히 종석(宗祏)의 영(靈)이 있어 신통한 꾀를 능히 결단하니, 흉한 무리는 스스로 멸망에 이르고 온 조정은 이미 청명하여졌다. 무릇 보고 듣는 자는 모두 같이 뛰고 춤추었다. 엎드려 생각건대, 신 등은 모두 용렬한 자질로서 창성한 시기에 즈음하여 즐거이 백료(百僚)와 더불어 용지(龍墀)의 하례가 깊이 간절하여 공경히 만수(萬壽)를 빌며, 배나 숭악(嵩嶽)의 환호[呼]를 올립니다.”
하였다.
[주D-001]예산(睿算) : 슬기로운 계획.
단종 1년 계유(1453, 경태 4) 10월 14일(정유) 세조가 정인지·한확·이사철 등과 더불어 간당의 죄를 의논하여 아뢰다
세조가 좌의정(左議政) 정인지(鄭麟趾)·좌찬성(左贊成) 한확(韓確)·우참찬(右參贊) 이사철(李思哲)·도승지(都承旨) 최항(崔恒) 등과 더불어 빈청(賓廳)에 모여 간당(姦黨)의 죄를 의논하여 아뢰니, 곧 의금부(義禁府)에 전지하기를,
“지화(池和)를 베이고, 김정(金晶)·김말생(金末生)을 각각 장(杖) 1백을 때리고 영구히 변방 고을 관노(官奴)에 붙이며, 김산(金山)·정대평(鄭大平)·박효충(朴孝忠)·김효산(金孝山)·홍은봉(洪銀峯)·안막동(安莫同)·양옥(梁玉)·고계로(高季老)·심견(沈堅)·최로(崔老)·귀봉(貴鳳)·남해(南海)·강통(絳筒)·우명로(禹明魯)·중을(衆乙)·지명(之命)·구지(仇知)·불련(佛連)·망실(罔實)·말생(末生)·영기(永奇)·석동(石同)·박금(朴金)·몽동(蒙同)·군생(軍生)·거을(巨乙)·우미(亐未)·을봉(乙奉)·천로(天老)·춘길(春吉)·막동(莫同)·승통(承通)은 또한 아울러 영구히 변군의 관노에 붙이라.”
하고, 또 전지하기를,
“간당(姦黨) 및 족친(族親) 등을 오늘 4월 14일 이전에 구처(區處)한 외에 나머지는 모두 불문에 붙여 전전 반측(輾轉反側)하는 자를 안심하게 하라. 너 의금부(義禁府)는 중외에 효유(曉諭)하라.”
하였다. 지화(池和)는 점치는 소경이다. 젊어서부터 길흉(吉凶)을 잘 점치는 것으로 소문이 나서 태종(太宗) 때부터 궁중에 출입하여 꽤 위복(威福)을 떠벌이니 조사(朝士)들이 감히 똑바로 보지 못하여, 이로부터 이름이 무거워졌다. 매양 의심 나는 것의 물음을 당하면 대개는 자기 뜻으로 망령되게 화복을 말하여 사람의 마음을 두려워하게도 하고 기뻐하게도 하였다. 이보다 먼저 지화(池和)가 말하기를,
“이용(李瑢)이 임금이 될 운명이 있다.”
하여, 흠동(歆動)시키니, 용과 용의 문객이 난을 꾀하는 뜻이 더욱 굳어졌다. 그러므로, 아울러 베었다. 세조가 일찍이 정의 공주(貞懿公主)의 집에 가는데, 길에서 지화를 만났다.
“어느 곳에서 오는가?”
물으니,
“공주의 집에서 옵니다.”
하였다. 공주의 안부(安否)를 물으니, 지화가 대답하기를,
“오늘은 더욱 사람을 꺼립니다.”
하였다. 또 공주의 길흉을 물으니, 지화가 말하기를,
“금년 7월에 액이 있다고 내가 이미 말하였습니다.”
하였다. 세조가 달려가니, 공주의 병은 이미 덜하고 지화는 일찍이 오지도 않았었다. 세조가 사람을 시켜 뒷조사를 하여보니, 실상은 용(瑢)의 집에서 온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