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숲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 로버트 프로스트 ‘가지 않은 길’에서 -
미국의 시인 프로스트(Robert Lee Frost)는 두 갈래 길에서 어디로 갈 것인가를 고민하였지만 우리 부부는 갈 수 있을지 없을지를 고민하였다. 두 사람 모두 중증 장애인(?) 수준의 지병이 있지만, 하늘의 은덕으로 걸어 다니는 데는 크게 지장이 없는 편이다. 오지 트레킹의 강도와 기간이 체력과 정신력의 한계를 얼마나 벗어나는 상황인지를 가늠할 수 없었기에 고민의 깊이가 더해졌지만, 코로나 엔데믹의 기회가 온 터라 아내와 합의하였다. 가자, 이번 아니면 기회가 없다. 내일도 내년도 없다. 지금 바로 이 순간뿐이다.
3년 만에 다시 온 인천공항에서 카자흐스탄의 수도 알마티행 비행기에 올랐다. 키르기스스탄(Kyrgizstan)은 중앙아시아에서도 빈국이라 직항이 없다. 면적은 한반도와 비슷한 20만㎢이지만 인구가 670만, 바다도 없는 해발 2,000m 이상의 고산지대라서 목축업과 관광으로 겨우 살아가는 별다른 수단이 없는 나라이다. 1인당 명목 GDP가 1,200USD이니 우리나라의 3% 수준이다. 6시간의 비행 끝에 알마티 공항에 도착하여 키르기스스탄의 수도 비슈케크로 환승하여 들어간 키르(이 나라 사람들은 이렇게 줄여 부름)는 70년대 우리나라 분위기가 난다. 안내자의 말에 의하면 코로나 초기에 거의 전 국민이 감염되어 3주간의 자가격리를 거쳤고 이후 전 국민이 면역력이 생겨 2년 전부터는 모두 마스크를 벗고 생활한다고 한다. 둘러보니 우리 외엔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이 없다. 야호!! 우리 일행도 전부 마스크를 벗기로 하였다. 그 해방감을 저 멀리 중앙아시아 키르에서 맛볼 줄 누가 알았으랴.
파미르에 가기 위해선 텐샨산맥을 넘어가야 한다. 컨디션 조절을 위해 노천온천에서 온천을 즐기고, 다음날 해발 3,500m 산맥을 넘기 위해 출발하였다. 야생화 벌판이 보이면 차를 세워 모두 카메라를 든 채 들판을 누빈다. 그간 코로나 감옥에 갇혀 지내 억눌렸던 스트레스를 어린아이처럼 소리지르며 해소하고 여행의 기쁨을 누린다. 가는 길에 만난 소와 말, 양들이 우리의 길을 더디게 만들지만 다들 들뜬 분위기에 그것을 즐기고 있다. 구불구불 두어 시간을 돌아 3,400m의 ‘수아스’패스를 통과하며 ‘수삼무르’ 평원을 지난다. 톈산산맥 자락 200㎞ 이상 되는 끝도 없는 파미르 고원 야생화밭에서 생각지도 못한 피크닉 도시락을 먹는 호사를 누리기도 하였다. 그런데 여느 오지체험이 똑같은 상황이겠지만 생리현상에 대한 문제가 대두된다. 그래서 중간 휴식시간이 되면 주변 둔덕 뒤에 숨어 아무런 구애없이 용무를 해결한다. 여행이 시작되고 처음에는 멈칫멈칫하더니 이젠 자연과 한 몸이 되어 너무나 자연스럽다.
고구려 유민으로 당나라 장수가 된 고선지 장군이 751년 아랍군대와 대치전을 벌였다는 전설이 깃든 ‘탈라스’ 협곡의 ‘배쉬타쉬’ 국립공원을 둘러보고 숙소로 돌아온다. 공동으로 쓰는 화장실, 창문도 없는 쪽방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치치칸’으로 넘어가는 험준한 3,184m ‘알라벨’패스를 지나 3,000m 고산에 있는 ‘톡토굴’호수 옆의 게스트하우스에 여장을 풀었다. 지천으로 널려있는 체리와 살구를 따먹기도 하고 환상적인 일몰을 마주하며 자연의 경이로움에 한참을 느껴보지 못했던 감탄사를 날려본다. 아, 이런 아름다움이 얼마나 그리웠던가.
길이 2,000km나 되는 텐샨산맥에서 제일 높은 7,134m의 레닌봉을 향해가다 파미르 분지를 가로질러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레닌봉 자락의 유르트(몽고의 게르와 같은 유목민 텐트) 숙소에 도착하였다. 인천을 떠나온 지 8일 만에 머나먼 파미르 안자락에 안긴 일행들은 쏟아지는 우박 환영 세리모니를 받다가 갑자기 바뀐 눈보라 속으로 몸을 맡긴다. 하루에도 몇 번씩 계절이 바뀐다는 키르의 6월이라지만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자연의 변화에 비교적 빠르게 패딩을 챙겨입고 추위를 대비한다. 유르트 주인장 가족들은 불쏘시개와 소똥으로 불 피우기에 분주하다. 침대에 앉았다가 바깥으로 나가려고 일어서는데 빙그르르 몸이 돌아간다. 안내인이 미리 일러준 주의사항을 금방 잊어버리고 고산증에 대비한 몸놀림은 천천히 해야함에도 반대편 간이침대에서 급하게 일어나던 일행이 뒤로 벌렁 넘어지고 만다. 해발 3,500m, 고산증 증세가 심하지 않은 지역이라지만 두통과 구토로 약을 먹는 일행이 생긴다. 다행히 우리 부부는 다른 증상이 안 보여 괜찮았으나 움직임을 조심하지 않으면 예기치 않은 문제를 만들 수가 있어 긴장해야 한다. 동행지기에게 절대로 폐를 끼쳐서는 안된다는 압박감이 밀려온다.
파미르 오지의 저녁 식사는 생각보다 근사하여 준비된 보드카를 마시며 그간 거쳐온 여행지의 즐거움과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전기가 없어 핸드폰 불빛으로 잠잘 준비를 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구름이 껴있어 쏟아지는 별빛을 기대하고 온 일행은 실망이 컸지만, 새벽엔 하늘이 걷히기를 기대하고 알람을 켜두었다. 새벽 3시에 일어나 유르트를 나와보니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으며 은하수가 눈앞에 내려와 있었다. 손에 닿을 듯 아름다운 북두칠성, 카시오페이아, 큰곰자리 등을 눈 속에 실컷 담고 눈꽃 빙수 같은 파미르의 밤을 보냈다. 밤새 두어 시간 간격으로 유르트를 들락거리며 난로를 돌보는 주인장 가족 덕분으로 추위에 떨지 않고 잠을 잤지만 나이 든 주인 할머니의 수고가 맘에 걸렸다.
유르트 캠프를 떠나 키르 제2 도시인 오쉬에 도착하여 5성급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제대로 씻지 못했던 일행들은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새하얀 린넨의 감촉을 행복해하며 문명의 편리함을 체험했다. 그동안 우리는 행복한 영혼의 순례자로서 웅장한 설산과 있는 그대로 피어나고 흐르는 자연을 통해 어디에서도 경험하지 못한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말똥과 소똥 밭에서 피어나는 형용할 수 없는 색깔의 야생화, 눈 덮인 언덕 아래 군락을 이루며 피어있는 에델바이스, 주인의 속박 없이 마음껏 들판을 뛰어다니는 야크와 말 등 가축들의 자유로움을 보며 다시 문명세계로 돌아가야 할 우리는 행복 바이러스를 잔뜩 배양하여 삶의 촉진제가 되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오쉬의 이곳저곳을 돌아보았으나 구 소련의 위성국가로서 발전의 속도는 지리적 환경으로 한계가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키르의 도시를 포함한 시골 곳곳에서도 레닌의 동상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 구 소련이 붕괴된 후 공산주의 사상의 근본을 이루는 마르크스·레닌이 땅속에 묻힌 지 한참이 되었는데도 레닌의 동상이 남아있는 이유는 유목민의 집단이었던 키르에 교육의 터전을 만든이가 레닌이라는 것이다. 교육개혁 없이는 키르가 발전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학교를 세워 유목하는 아이들을 강제로 입학시켜 공부시켰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의 키르가 문맹을 면하고 나라의 기틀이 생겼다고 하니 레닌에게 경의를 표하고 동상이 존속되게 된 이유라고는 하나, 중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이곳에만 레닌 동상이 남아있다는 건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국내선으로 수도 비슈케크로 돌아와서 전통시장, 이슬람사원 등을 관광하고 다시 귀국길에 올랐다. 여행 동호회원으로 모인 이번 키르 여행은 이런저런 에피소드에 참 많이 웃었으며, 또한 가족 같은 분위기로 여행에서 일어날 수도 있는 갈등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우리 부부는 자연이 주는 기쁨과 함께 큰 행복감을 느꼈다.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으니 행복해지더라는 말이 생각난다. 생각이 여린 피아니시모에서 숨 가쁜 포르테로 넘어가는 우리 나이에 다소 힘겨운 여정이었지만 만족도 100% 여행으로 기억하고 싶다.
미국 작가 제임스 오펜하임(James Oppenheim)의 말이 생각난다.
“어리석은 사람은 행복을 먼 데서 찾고,
현명한 사람은 행복을 자신의 발밑에서 키운다.”
내 발밑에 펼쳐져 있는 행복을 이번 여행을 통해 얼마나 키웠을까 자문해보며, 12일간의 여행을 통해 알게 된 23명의 동행지기들이 많이 많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첫댓글 생각만해도 가슴이 설레는 텐샨산맥과 파미르 고원에서의 눈부신 별과 보낸 시간은 아마도 미리 천국을 다녀온 기분이 드는 듯 합니다! 더구나 기막힌 야상화와 설국의 풍광 또한 얼마나 값진 수확인가요? 마치 현장을 보는 듯한 표현 덕분에 좋은 구경하며 호사를 누리고 갑니다!
좋습니다!
행복은 쌓을 수 없지만 즐거운 추억은 얼마든지 쌓을 수 있지요. 지금 이 순간순간 행복하게 여행하고, 늙어서는 이렇게 쌓은 추억을 소환하는 행복을 누려야죠~
나는 공짜로 간접경험을 했네요.
문명과 거리가 먼 오지일수록 대자연
의 심오함을 만끽할겁니다.
해외여행은 우리들의 고정관념을
깨는데 더없는 기회가 될겁니다.
나 또한 기회가 되면 중앙아시아?
또는 티벳을 다녀올까 합니다.
좋은 기행문 감사드립니다.
우암을 글을 읽으며 불쑥불쑥 파미르를 향해 가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오지를 동경하는 마음을 본래 가졌나 봅니다. 기회를 만들어서 꼭 가고 싶네요. 우암의 너무나도 생생한 표현이 사람을 아주 설레게 만들었습니다. 오지 여행 축하드리고, 좋은 정보 고맙습니다.
우암 부부가 의미있는 오지여행을 하셨군요. 그 용기에 경의를 표하며 부러움을 갖습니다. 2년 전 코이카 자문단으로 네팔 안나푸르나에서 1년 간 지내면서도 즐기지 못한 것이 아쉽네요.
월말 회사 주요 업무로 하계연수회에 참여치 못하는 대신 키르키스탄 여정을 농축하여 써줬군요. 새롭고 경이롭고 눈부시고 그리고 찬란한 여행이었군요. 오래 전 네팔 눈덮힌 포카라 언덕에서 황금빛 새벽 일출을 보는 듯한 감동이 밀려오는군요. 바쁜 가운데에서도 종종 새로운 발견과 흥미진진한 문체의 글을 올려주기를 부탁합니다. 오랜만에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키르키즈스탄이라는 나라가 우리에게는 먼나라인데 아주 특별하고 좋은 여행을 했군요. 글을 읽으니 마치 내가 그곳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언젠가 꼭 한번 가보고 싶군요.
자연보다 더 중요한 여행은 없습니다. 우암의 기행문을 읽다보니 파미르 공원처럼 높은 곳이 아닌 서부사하라에서 전기도 없고 핸드폰도 없이 오로지 밤엔 별만 보고 낮엔 따가운 태양열을 벗삼아 3박4일을 보냈던 추억이 떠오릅니다. 종국에 우리가 가는 곳이 바로 그런 곳이 아니겠냐는 생각을 했지요. 대자연 앞에서는 숨 쉬는 것조차 사치스럽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겸손에 겸손을 배우고 나를 낮추고 낮추는 것을 배웠지요. 보람있는 대자연 여행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