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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서(隸書)의 기원과 발생
고문자(古文字)들과는 다른 차원의 획기적으로 새로운 한자의 자형(字形)이 성립된
예서(隸書)는 진(秦)나라의 군현제(郡縣制) 실시라는 정치적인 배경이 이끌어낸 결과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행정적 실용성이 중시되어 보다 빠르고 쉽게 문자를 쓰기 위해 고안되었던 것입니다.
상형(象形)의 회화적 요소를 벗어버리고 문자의 기호적 요소가 완성되어
현대 한자의 출발점으로도 볼 수 있는 예서(隸書)의 전형을 살펴봅니다.
주가 멸망하고 천하는 혼란의 도가니에 빠져 춘추전국시대에 접어들었는데,
이를 통일한 자가 바로 진의 시황제였다. 그는 비록 폭정으로 유명하였으나,
문자통일의 업적을 지나칠 수는 없다. 바로 전서를 가리키나 이는 실용적이지 못해,
실제로는 간소하게 한 약체가 사용되어 왔다. 이것이 예서의 발생이라 할 수 있겠다
秦(진)의 始皇帝(시황제)때에 程邈(정막)이라는 사람이 죄를 짓고 옥중에 있기를 십 년,
그 동안에 小篆의 번잡한 곡선의 문자를 직선문자로 고치고 書寫(서사)에 편리한
새로운 書體三千字를 창조하여 제왕에 헌상하였던 바, 제왕은 이것을 상하여 사면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문자를 古隸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전설이어서 그 진실성에는 의문이 있다.
古隸에 있어서도 어느 한 시기를 區劃해서 완성한 것이 아니고, 자연 발생적인 것을 程邈(정막)이
정리 마무리한 정도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또, 예서의 명칭에 대해서도 여러 설이 있으나, 小篆에 예속해서 생긴 것으로
新書體의 文字라는 의미에서 이 명칭이 생긴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古隸가 생겨 얼마 안되어서, 王次仲(왕차중)이 八分書를 만들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예서의 두드러진 특징은 파책이다. 파책이라고 하는 것은 한 획에 큰 변화를 주어
波狀曲線으로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예서로 유명한 서적은 예기비, 서협송, 장천비, 조전비가 있다.
● 隸書의 정의
예서의 명칭에 대한 이해는 예서가 형성된 배경과 연결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학설로는 법가(法家)를 바탕으로 철권통치를 행했던 진(秦)나라였기에
강한 형벌(刑罰)의 행사로 노역(勞役)의 죄수들이 많아 이 죄수들을 관리하는 형리(刑吏)들이
간편하고 쉬운 행정 문서를 다루기 위해 고안했다고 해서 '노예 예[隸]'자를 쓴 예서(隸書)라 명명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의 문자의 흐름은 진(秦)나라의 분서갱유(焚書坑儒)에 이어 한(漢)나라 초기까지는
예서의 체제가 완성되지 않았는데, 한(漢) 무제대(武帝代)에 예서가 국가의 공식 문자로 정착되고
유학(儒學)이 국교(國敎)가 된 이후 경전(經傳)의 해석을 둘러싼 왕성한 학문적 발전과 함께
서체 역시 큰 진전을 가져오게 됩니다.
한 무제의 앞 경제(景帝) 때 산동(山東) 지방 곡부(曲阜)의 공자(孔子)의 고택(古宅)을 개축하다가
벽 속에서 대량으로 발견된 경전(經傳)에 대한 해석으로 훈고학(訓 學)이 발전하는데,
이 벽 속에서 발견된 경전에 기록된 문자는 한대(漢代)의 예서보다 훨씬 이전의 서체였기에
이를 고문경서(古文經書)라 하고 당시 사용되던 경서를 금문경서(今文經書)라 합니다.
서체뿐만 아니라 경전 해석 연구에도 큰 의의를 둘 수 있는데,
기원후 100년경에 완성된 허신(許愼)의《설문해자(說文解字)》에도 이 고문경서의 서체를
고문(古文)이라 제시하면서 기본 소전(小篆) 자형과 함께 인용하고 있습니다.
결국《설문해자》는 당시 규격화되어 가는 서체[예서]로 인해 정확한 한자의 연원을 밝히려는
의도와 경전의 바른 해석을 도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 隸書의 특징
진나라의 소전(小篆)은 이전의 갑골문(甲骨文)이나 금문(金文)에 비해 획기적인 발전을 이룬
한자의 개념을 제시한 서체였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문자 자체로 보면 획이 둥글고
자형의 성분들을 그대로 살린 다소 불편하고 복잡한 형태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실용적 방향으로 의미전달에 큰 지장이 없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쉽고 빨리 쓸 수 있는
형태로 간략하게 된 것입니다.
곡선의 둥근 자형으로 인해 아직 회화적 요소가 남아 있던 소전의 자형에서 완전히 벗어나
직선의 기호적 성격을 지닌 서체를 만들어 전체적인 자형이 사각형 모양으로 되는 전형을 이루게 됩니다.
현대의 한자에서 둥근 원형 모양의 획이 없는 것이 바로 이 예서에서 형성된 것입니다.
이와 함께 또 다른 획기적인 변화는 한자들마다 각기 복잡한 모양의 서체를 유사한 모양이면
공통의 모양으로 간략화 시켜 실용성을 더한 것인데, 이 부분은 후대에 한자의 자형만으로
의미를 이해하는데 다소 부적절하거나 난해한 원인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결국 소전(小篆)과 같은 고문자(古文字)의 자형이 한자의 자원을 이해하는 중요 수단이 되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서를 배우는데 우선 중요한 점은,
예서라는 서체가 다른 서체, 즉 예서보다 오래된 전서나,
예서보다 새로운 해서, 행서, 초서와 서체상 어디가 어떻게 다른가를 명확히 파악하는 일이다.
이점을 분명히 밝히지 않고 붓을 들면, 소위 隸意(예의)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예서 다워지지가 않는다. 여기서 먼저 주의해 둘 일은, 지금부터 말하는 예서라는 낱말의 뜻은,
古隸(고예)라는 예서의 고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八分(팔분)이라는 예서의 비교적 새로운 형식,
곧 조전비를 포함한 후한 시대의 하고 많은 예서 전체를 하나의 개념으로 파악하고,
그것을 설명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점이다. 우선은 예서의 특징을 하나하나 밝혀보고 싶은데,
그러기 위해서는 예서체와 다른 서체를 비교 검토해 보는 것이 가장 빠른 지름길이 될 것이다.
●隸書의 가치
상형적 회화요소의 고대문자 틀을 벗고 왕성한 새로운 문자의 규격을 이루게 된 예서의 출현은
이후 한자 자형의 전형을 제시하게 됩니다. 문자의 틀이 완성되어 급속도의 서체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예서의 가치는 이후 서예(書藝)라는 개념까지 도출하게 됩니다.
실제 이후에 등장한 서체의 규범이라고 하는 해서(楷書)의 자형도 예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을 보면 이미 지금으로부터 대략 2000년 전에 한자 자형의 전형은 예서에서 모두 갖추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은은한 고풍(古風)의 예술미(藝術美)를 느낄 수 있는 서체로
현대까지 많은 사람들이 애용하는 서체로 전해오고 있는 것입니다.
● 예서의 기본구조
예서의 기본 구조를 보면 한 획에 '波勢(파세)'라는 리듬이 흐르고 있는데,
파세는 예서의 가장 기본적인 특색이다. 파세란 한 획에 큰 변화를 주어
波狀曲線(파상곡선)으로 나타내는 것을 말하거나 또는 물결이 한번 치솟았다가 미끄러져
내리는 듯한 필체를 말한다. 전서는 몽땅 몰아서 전서라고는 하지만 전서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굉장히 종류가 많아서 좀 지나치게 막연한 표현이기는 하나,
이 경우의 전서라는 호칭의 초점을 전서의 가장 새로운 형태인 小篆(소전)에 맞추기로 한다.
그 소전과 예서를 우선 형태상으로 비교해보면 소전은 그 자형이 아주 길다. 그와 대조적으로
예서는 일반적으로 아주 납작한 모양을 하고 있다. 전서는 생김새가 길므로 세로로 내리쓴 획이
강조되고 과장되기 쉽다. 그래서 세로로 내리그은 선이 눈에 잘 띈다. 그에 비해 예서는 납작하므로
가로로 건너 그은 획이 눈에 띄기 쉽다. 즉 옆으로 길게 선이 뻗어 나가 있는 것이다. 선과 선 사이
즉 分間(분간)의 경우도 전서일 때는 세로획과 세로획의 내려 그은 간격이 필연적으로 긴밀한 반면,
예서일 때는 가로로 건너 그은 획이 이에 해당하므로 가로획간이 아주 긴밀하다. 획의 조합을 보면
전서의 경우 키가 커서 세로로 길 뿐 아니라, 세로로 내리그은 선이 대개 수직이고 가로획은 수평으로 되어있다.
이점은 예서도 같아서 세로는 수직, 가로는 수평이다. 즉 형태상의 특징으로서 길고 납작한 차이는 나지만
자획상의 균형법은 두 서체가 같은 것이다. 이러한 자형법은 左右相稱이라 하여 옛 서체에서는
字劃構成上(자획구성상)의 기본이 되어 있었다. 이상이 형태상으로 본 예서와 전서의 다른 점과 같은 점이다.
다음으로 예서와 해서를 비교해 보자. 해서의 경우 자형은 거의 네모가 반듯한 정방형에 가깝고
특히 길거나 납작하지 않다. 그러나 소홀히 보아 넘길 수 없는 중요한 점은, 해서의 가로 긋는 획이
오른쪽으로 치켜 올라가 있다는 사실이다. 세로획이 수직인 점은 예서와 별로 다를 바가 없지만,
오른쪽 어깨가 치켜진 가로획은 해서의 특징이며 그것이 예서와 전혀 다른 점일 뿐만 아니라,
그것 때문에 예서와 전서에 공통되는 좌우상칭의 조립법이 해서에는 통하지 않고,
나아가서는 그 필법까지도 전혀 다르게 진전하게 된 것이다.
전서와 예서는 수직 수명이라는 기본 원칙하에 다같이 좌우상칭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필법도 그리 다르지가 않다. 즉, 전서가 붓을 곧추 세우고 힘의 중심이 線劃(선획)의 중심을
통과하게 쓰는 서법, 즉 중복으로 쓰여 졌는데 이것은 거의 그대로 예서에서도 통용된다.
단지 특수한 예로서 전서에는 없는, 예서의 '波(파)'라고 불리는 부분등에 가끔
그 중봉이 흐트러져서 측필(側筆)이 되어가는 기미가 엿보이는데, 그것이 해서의 파임의 경우가 되면
측필의 특징이 한결 더 뚜렷이 두드러진다. 이렇게 보면 예서가 전서와 해서의
중간서체라는 사실이 더 명확히 드러나는 셈이다.
해서는 가로획을 우상방으로 치켜 긋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관계로,
다른 획의 용필법도 측필이 되기 마련이며 波(파)에 해당하는 부분에서는
예서와 아주 비슷하면서도 힘을 주는 법이 달라, 이런데서 예서와 해서의 용필법이
서로 다른 특징을 볼 수가 있다. 더구나 꺾이는 부분에 이르면 이 특징이 더욱 명확해져서,
예서는 중봉, 해서는 측필이 원칙이라는 사실이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 예서의 종류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秦隸(진예)인 古隸(고예)와
漢隸(한예)인 八分(팔분)이 바로 그것이며,
그 차이는 波法(파법)에 있다.
◆가. 고예 : 篆(전)이 隸(예)로 변화하는 과도기적 특징을 나타내는데,
小篆(소전)보다 곡선이 적고 획이 간결하지만,
소전처럼 좌우대칭이며 팔분처럼 편평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소전처럼 장방형도 아니다.
◆나. 팔분 : 고예를 미화하기 위하여 횡획의 종부를 누르고 힘차게 삐치는 것이 波(파)인데,
이것이 있는 것을 팔분이라고 한다. 八字分背라고도 하는데 팔자처럼 좌우로 삐치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팔분은 전한 무렵부터 사용되었으며,
그 말엽부터 후한에 걸쳐 성행하여 숱한 석각이 건립되어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 漢隸(한예)의 종류
예서를 배울 때 첫째 한예에서 그 자료를 얻어야 한다.
한예의 원탁을 입수 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겠지만,
근래에 와서는 사진판 또는 체본용 법첩으로 만들어진 것이 많이 나와있기 때문에
그다지 불편하지 아니할 것이다. 이러한 한예는 보통 3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다.
流麗形(유려형): 예기비, 을영비, 사신비, 조전비
方整形(방정형): 북해상경군비, 장천비
奇古形(기고형): 서협송, 하승비
※작성시대별로 나열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1) 乙瑛碑 (永興元年,153)
2) 禮器碑 (永壽二年,155)
3) 鄭固碑 (延熹元年,158)
4) 封龍山頌 (延熹7年,164)
5) 孔宙碑 (延熹8年,165)
6) 史晨碑 (建寧2年,[전비]는 169년에 썼으며, [후비]는 168년)
※ 이중 예서로 유명한 書跡(서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예기비(禮器碑)
전체의 이름은 [노상한칙조공묘예기비(魯相韓勅造孔廟禮器碑)]로 漢나라 영수2년(156년)에 세워졌으며,
서기156년에 출토되었는데 曲阜(곡부)의 공자무덤 내부에 있다. 보존 상태가 아주 좋다.
서법이 가늘면서도 강하고 웅건하며 단정하고, 아름다우면서도 표일한 맛이 있고,
용필은 방필과 원필을 겸하였기 때문에 섬세하고 아름다운 맛이 있으면서도 두텁다.
자체는 납작한 것, 장방형, 아래위가 긴 것 등이 어우러져 있고, 필획이 수경하며 파책이 잘 발달되어 있다.
특히 비음(碑陰)과 비측(碑側)에 씌어진 글씨는 더욱 방자하면서도 기이하여 역대 한예의 모범이 되었다.
예기비가 건립된 후한시대는 중국 서예사상 가장 建碑가 성행한 시대였다.
淸代의 금석학자인 翁方綱(옹방강)은 '한의 예서는 예기비로서 제일로 친다'고 단언하였다.
예기비는 . 자체는 옆으로 길고, 필획이 瘦勁(수경)하여 힘있고 波(파)이한데,
한비이나 여러 가지 體勢(체세)가 나타나므로 여러사람이 나누어 썼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비중 가장 근엄하고 가장 품위있는 글씨로서, 精妙(정묘). 有神(유신)하고 評正(평정)하며,
獲(획)이 생동하는 것 같다. 예기비 문자의 비범함에 대해서 明代의 郭宗昌(곽종창)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 자획의 훌륭함은 붓으로 쓴 것도 아니고 손으로 쓴 것도 아니다. 우아하기로는 그 이상의 것은 없다.
이것은 바로 신조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서 보통인간이 쓴 것이 아니다." 라고.
예기비는 비의 측면에 글자가 있고, 모든 기술적이 면을 종합하여 완성된 최고의 걸작으로,
무궁한 획의 변화는 가없는 맛을 주며 강조된 파책에 예기비의 특징이 있고 ,
종획에서 중후함과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 또한 방정, 준엄한 느낌을 준다.
새김도 훌륭하고 글자의 수도 많아 습자본으로 알맞다.
◆사신비(史晨碑)
사신비는 하나이나 양면에 글을 새겼기 때문에 이를 또한 [사신전후비(史晨前後碑)]라고도 한다.
[전비]는 169년에 썼으며, [후비]는 168년에 썼으나 모두가 한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史晨碑는 魯國의 相인 史晨이 孔廟의 제사를 성대히 행하였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刻한 것이다.
前碑라는 것은 중앙정부의 尙書에게 올린 상소문을 刻한 것으로 거기에 공자를 찬양한 銘文을 썼다.
이 前碑의 碑陰에 後碑가 刻되어 있어 묘제를 성대히 행하였다는 것을 밝혔다.
그러므로 史晨碑를 "魯相史晨饗孔廟碑"로 표현하기도 한다.
前碑는 17행, 1행 36자, 後碑는 14행, 1행 36자로 刻되어있다.
이 碑의 서법은 八分隷 가운데 있어 비교적 담백하며 순탄한 것이다.
따라서 특히 힘 준데도 없고 平淡한 것이나 그러면서도 波法이 지극히 충실하여
조금도 위태스러운 데가 없는 결구법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어딘가 조용한 氣味를 풍겨 호흡이 긴 자태를 보여주는 것 같다.
말하자면 지극히 평범한 사람 같은 느낌을 준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奇도 폼도 없다는 것이 현대인에게 영합하지 않을지도 모르나
漢隷의 여러 것을 배워가는 中, 史晨의 평담한 맛에 자연히 마음이 끌릴 것이다.
공자묘에 있으며, 자체는 납작하며 파책은 수렴되어 있다.
결체는 아름답고 긴밀하면서도 법도가 삼엄하다. 예법이 가장 정중하게 내재된
비로소 범본이며, 청나라 전예의 중흥조인 등석여가 이 사신에 뿌리를 내리고 있음은 유명한 사실이다.
◆을영비(乙瑛碑)
乙瑛碑는 영흥원년(서기 153년)에 세워진 것으로 곡부의공자묘에 있으며 18행 매행 40자로 되어있다.
내용은 공자묘에 百石卒史를 둔 유래와 당시의 상소문의 형식을 나타내어 문헌상으로도 중요하고
乙瑛은 雄古를 나타낸다. 전체의 이름은 [노상을영치공묘백석졸사비(魯相乙瑛置功廟百錫卒史碑)로,
서법이 단정하고 근엄한 가운데 질탕하고 붓을 꺾어서 누른 필치가 드러나며,
용필은 방필과 원필을 결합시켜 굵고 가는 획을 서로 섞었으며, 파책의 꼬리 부분은
항상 크게 삐쳐서 응축되면서도 표일하고 웅건하면서도 소박한 맛을 나게 하였다.
乙瑛碑는 八分隷法의 정통으로 꼽혀 가장 특색 있다고 한다. 그 이유를 살펴보건대
우선 結構가 튼튼하여 규모가 크게 보인다. 一見平凡한 姿態이지만 실제로 붓을 잡고
임서하여 보면 그 波法에 있어서도 힘이 들어있고 소박함을 풍기면서도 내실한 맛이 있어
孔宙碑와 같이 화려하지 않다. 또 一字와 같은 橫書의 서법에 있어서도 충분히 붓을 沈潛시켜
輕浮하다는 느낌을 주지 않고 충실한 力感이 넘친다. 또 大字에 있어서는
좌우의 비낌에서 좌측 비낌은 말단까지 힘이 있고 그 힘을 그대로 우측 비낌까지
移行시켜 좌우의 균형미를 남김없이 발휘하고 있다. 대체로 보아 이 碑의 점획은 豊하나
鈍重하게 보이지 않는다. 결구도 橫長한 形으로는 돼있지만 그것이 曺全碑같이 심하지 않으므로
流媚하게 흐르지 않는다. 말하자면 건강한 느낌을 풍긴다. 字形크기도 이 碑만큼 적당한 것이 없다.
◆조전비(曹全碑) 발
예서의 用筆結體의 특징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 것 중 첫째가는 것이 조전비이다.
전체의 이름은 [합양령조전비(哈陽嶺曹全碑)]로, 서기 185년에 세워졌으나 명나라 때,
처음으로 출토되어 현재는 서안의 비림에 있다. 글씨는 수려하면서도 골력이 있고,
용필은 화창하여 마치 행운유수와 같으며, 풍신(風神)이 뛰어난 작품이다. 결체는 납작하며,
필획이 섬세하며 파책이 날아 춤추는 듯한데 그 염미(姸美)함은 어느 것도 따르지 못한다.
한예 중에서 원필의 아름다움을 갖운 전형적인 작품이다.
明代에 세워졌으며, 서기 185년에 陽에서 출토되었다. 결체는 역시 옆으로 납작하고,
필획이 섬세하여 파가 飛舞(비무)하며, 柔美(유미)하면서도 麗(려)한 풍격을 顯露(현로)하고 싶다.
全然(전연) 풍화작용을 받지 않았고, 刻法(각법)이 대단히 정밀했기 때문에 진책을 보는 것과 같이
필로를 잘 알 수 있으며, 木簡(목간)은 요컨대 일상의 용건을 충족하는 문서가 많다.
조전비의 서법은 삼백년을 지배하는 법칙을 그림을 그리듯이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眞蹟(진적)이 아니라는 흠은 면치 못한다. 그래서 木簡(나무판 글씨)을 되돌아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비에 새겨진 글씨는 字劃(자획)이 完好(완호)하고 형태가 매우 아름다울 뿐 아니라 筆力(필력)이 경건하다.
◆장천비(張遷碑)
장천비는 조전비와 더불어 後漢時代의 最後를 장식하는 일품이다.
전체의 이름은 [곡성장탕음령장군표송(谷城長蕩陰令張君標頌)]이며,
서기 186년에 무염에 세워졌으며 명말에 출토되었는데,
현재는 태안의 대묘(岱廟)에 있다. 서법이 순박하고 두터우면서도 강하고,
아름다우며 방정하면서도 변화가 많다. 비음은 특히 감미로워 한예의 웅건한 방필의 전형을 이루고 있다.
자체는 정방형에 가까우며 필획도 평정(平正)하다.
그 字體(자체)는 방형이고, 필획이 평정하여 파세를 극히 收斂(수렴)하였으며,
高長(고장)한 字(자)들이 많은 편이다. 장천비는 소박성을 잃지 않는, 점과 획, 다부진 方形(방형)의 구성,
거기에 너무 표정을 나타내지 않으려 하는듯한 원시적인 풍모에 일층 매력을 느끼게 한다.
장천비는 다른 漢碑에 비하여 어딘가 굳세고 투박함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장천비의 독특한 맛이다. 한편, 파세를 가지지 않게 한 가로획 등은
세태의 변화를 부여하지 않고 긋는다. 그것이 도리어 효과적으로 소박한 맛을 내고 있다.
요컨대 기교를 부리지 않고 運筆한 것이 현대적인 우리들에게는 매력적인 것이다.
말하자면 건강하고 남성적인 서법으로 일관해 있다고 보여 진다.
그리고 장천비는 전서이면서 다분히 예서적이다. 따라서 전서와 같은 圓味나 건강을
나타내지 않고 펑퍼짐하고 자연스럽게 문자를 배합하고 있다.
◆서협송
서기 71년 甘肅(감숙) 成縣(성현)의 摩崖(마애)上에 새겼다.
한비에서는 대체로 글쓴 이를 밝히지 않지만, 이것은 비의 끝에 '仇靖(구정)'이라는
글쓴이의 이름이 쓰여져 있는 것이 특색이다.
자체는 方整(방정)하고 問架(문가)가 평온하며 大字(대자)이나, 결체에서 긴밀을 잃지 않았는데
필세가 온후하여 순박하면서도 자연스럽다. 예기비의 정술된 결체나 팔분예법의 아름다움은 없지만,
소박하고 야성미가 많고 결체는 널찍하고 퍽 힘찬 書(서)이다. 漢隸(한예)중 刻(각)이 아주 잘 되고
용필도 명쾌하여 예서 입문서로 적당하다. 사물에 동하지 않고 유유한 모습에 이상한 매력이 있다
◆석문송
이것은 後漢(후한) 제일의 걸작이라 할 수 있으며, 소박한 서풍을 가지며
예기비, 조전비와는 반대로 예서의 법에 얽매이지 않는 자연스러움이 있다.
◆孔宙碑
예서의 옆으로 뻗는 필세는 자형까지를 퍼지게 하고 있다. 이 작품은 그 극단에 가까운 작품이며
그러한 세력에 쫓으면서 규격에 벗어나지 않고 옆으로 쭉쭉 뻗쳐 쓰고 있다. 이 비석은 머리 부분이
둥근 圓首비석의 대표적인 것으로 머리에 무지개 모양의 홈이 패었다.
이를 暈이라 하며 漢碑에만 보이는 특유의 것으로 3-4개가 대각선으로 달리고 있다.
비석머리에 題字를 篆額이라 하며 보통 전서로 쓰여 진다.
◆封龍山頌
漢代의 예서는 온화하게 흐르는 파세 때문에 때로 여성적인 미태 같은 것을 느끼게 하지만
이 비석은 한인의 호방한 일면을 보여주는 걸작이다. 큰 붓으로 여유 있게 쓰고 있다.
◆張壽殘碑
비석의 글자는 반드시 씌어진 대로 조각되지는 않는다. 때로는 개념적인 필세가 덧붙여
새겨지고 때로는 筆意를 무시해버리는 단순화가 행해지기도 한다.
이 비석에는 두 가지 다 나타나고 있다. 오른쪽이 왼쪽보다 조금 내려 쓴 글자가 있다.
이는 파세에 영향을 받은 한대의 예서, 그 결체의 특징으로 이와 반대로 되면
당인의 예서와 같이 해서 시대의 냄새가 풍긴다.
◆廣開土大王碑
고구려 장수왕 2년(414년)에 세워진,동양에서 가장 큰 비석이다.
높이가 6미터가 넘고 넓이가 1.5미터가 넘는 자연석이다.
전면에 44행,41자,한 자의 크기는 12 평방센티미터쯤으로 1800자에 이르는 많은 문자를 새겼다.
우리 민족의 서적중 最古의 것으로 중국 奉天省의 東岡碑石街元來庭에 있다.
중국식과 다른 비석의 형식도 그러하거니와 소박장엄한 古隷體의 書는
고구려인의 독립자존의 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