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주(綾州) 비봉산(飛鳳山)과 비봉산성(飛鳳山城)성은
능주면과 도곡면의 경계인 비봉산(195.5m)에 있다.
조광조 유배지가 있는 남정리 북문에서 곧장 산성으로 가는 길이 있다.
경사가 꽤 심하여 초등학교 때 힘들게 올라갔던 기억이 난다.
비봉산은 정상이 고작 195미터에 불과한데 그렇게 높았고 무서웠던 곳이다.
비봉산 8부 능선쯤에 이르면 넓고 반반한 터가 나오는데
전에는 대절이란 사찰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민간인도 살았으니
그 사람이 능주초교 54회 이병렬의 가족이다.
남정리 북문에 그의 집이 있었으나 비봉산 정상부근에 집을 짓고 살았으며
20년 전에 작고하면서 허물어지고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
"사찰주위로 대나무가 하도 많아 "대절"이라 불렀고
민가 주위로는 수령이 꽤 오래된 소나무가 우거져 있었는데
벌목으로 사라지고 말았지요" 향토사학자 오정섭(능주면 석고리)씨가
당시를 회고하면서 한 말이다.
산죽나무 사잇길을 따라 가면 비봉산성.
빼곡히 쌓여진 돌들이 튼튼한 성벽을 이루고 있다.
어림잡아 높이도 3m는 족히 될성싶은 산성이 150m 넘게 쌓여 있고
비봉산 서쪽으로 성벽이 가장 뚜렷하게 남아 있다.
서벽을 타고 오르면 남벽과 만나는 곳에 봉우리가 있는데
주변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어 망루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비봉산성 정상에 서면(망루에 오르면
능주와 영벽정, 한천 금전저수지, 도곡과 남평 드들강, 그리고 화순읍과 무등산까지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이어서
이 곳이 천혜의 요새였음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남벽도 300여미터나 된데다 성곽도 뚜렷이 남아 있으며
비봉산 정상을 주위로 925 미터의 산성이 대부분 그대로 남아 있다.
비봉산성은 '능주읍지' 기록에는 고려 태조 원년(918년)에 쌓았다고 기록돼 있으나
그 이전의 토기들이 발견되어 삼한시대와 청동기 시대의 유물도 발견되고 있다.
1256년 몽고가 배를 타고 나주지역으로 해서 침입을 대비해 보수 축성하였으며
1593년 임진왜란 때에도 보수를 한 것으로 보이고(능주 관아와 향교가 불타버렸는데
그때 일본군과 싸운 곳이 용암산성과 비봉산성이었다고 추정되고
동학란 때 동학군의 거점으로 사용되었다고도 전한다.
비봉산성(전남도 기념물 제194호)은 산 정상을 중심으로 성벽을 두른 형태는 마름모꼴로 쌓았다.
총 길이는 925m(미터)로 현재 500여 미터가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어
귀중한 능주의 자산이기에 전라남도와 정부의 지원을 받아
정상에 전망대를 3층 이상으로 특이하게 설계를 하여 짓고
또한 조계종의 지원을 받아 대절을 복원하며
대절 주위로 대나무 숲을 조성하여 담양의 죽녹원처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1시간 거리의 산책로를 만들어
고인돌공원과 도암 운주사를 묶어 관광코스로 개발하여야 하며
능주의 일등 공신은 누구라고 보는가?
저는 능성 구씨 가문의 시조 구본유가 있게 만들었던 사람으로
중국 주자의 증손 주잠이라 본다.
한림학자 주잠은 송나라가 원(몽고)나라 징기스칸에게 멸망하자
7학사와 2남 1녀를 거느리고 고려로 망명하게 되었고
금성(나주)을 거쳐 능성(綾城)현 남정리(南亭里)에 살게 되었는데
주잠은 자연스럽게 주자의 유교사상을 가르치게 되었다.
이곳에서 구존유가 주잠의 영향을 받아
고려 상장군(대장)에 오르게 되었으며
주잠의 딸과 결혼하게 되었고
구존유는 능성을 본관으로 한 능성 구씨의 시조가 되어
구존유 후손들이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권력의 핵심에는
구씨 가문이 자리를 잡았고 조선 선조왕의 인헌왕후를 탄생시켜
능주가 목사고을이 되었다.
그러므로 일등 공신은 구본유 보다 주잠(주자의 증손)이다.
그러므로 주자학의 정치철학이 담긴 기념관을
그가 살았던 남정리에 지어 능주 향교(남정리)와 함께 관광지를 만들어
국내와 중국의 관광객을 유치할 수 있어야 하는데
주잠과 그의 할아버지 주자의 사당이 지금까지 무덤이 있던 곳
능주면 천덕리 영벽정 강변에 세워졌지만
중국 관관객을 유치하기에는 조금 모자라 보인다.
주씨 가문만 해도 15만명이 넘으며
능성 구씨 가문만 해도 우리나라에 약 14만명이나 살고 있다.
그들 또한 남다른 애향을 가질 것이다.
능주 향교는 조선 태조 원년인 1392년에 지어졌으나
주자의 증손 주잠이 능성 남정리(綾城 南亭里)에 에 살게 되면서(1224년)
향교는 이미 주잠과 함께 왔던 7학사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비봉산성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해 볼까 한다
구충곤 화순군수가 기록한 글을 하나 보았는데 참고하여 말하겠다.
비봉산성은 자연지형을 이용한 테뫼식 성으로,
성벽은 능선이나 절벽 등을 이용하여 축조되었는데,
주변의 자연석을 잘 가공하여 정연하게 축조된 모습이 확인되었다.
비봉산성의 성벽은 현재 서벽과 북벽이 잘 남아 있으며
동벽은 안산(능주향교 뒷산) 정상부로 가는 능선을 가로지르면서 능선의 경사면과
돌출된 구릉 평탄부를 이용하였다. 성벽은 가파른 능선의 허리를 가로질러 축조하였으며,
완만한 산기슭의 평탄한 곳에는 부분적으로 5∼6단의 돌을 쌓았다.
서벽은 나지막한 봉우리에서 비봉산 정상부로 연결되는 가파른 능선을 깎아낸 뒤
가공한 자연석을 양쪽에서 축조하였다.
또한 남벽은 안산 정상부에서 나지막한 봉우리로 연결되는 능선인데
경사면을 깎아낸 뒤 양쪽에 자연석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다.
북벽은 안산으로 올라가는 능선 상에 있는 계곡과 절벽을 이용하여 가파른 능선사면에
3∼4단의 돌을 쌓아 축조하였으며, 북벽의 안쪽에는 오래된 절터가 남아 있다.
비봉산성의 문(門)과 민가 건물터 두 곳이 있고,
우물은 폐사지 근처에 있는데 해발 180m 지점이다.
건물지 주변에서는 회청색 경질 기와편과 암갈색 토기편, 백자편 등이 출토되는 등
조선시대 말까지 산성의 기능을 했다는 증거다.
비봉산성의 정상에 오르면
도곡면과 능주면의 전체 지역이 눈 앞에 펼쳐지며 멀리 화순읍까지 전망된다.
화순천과 지석천이 합류되어 영산강 본류를 향해 흘러가는 샛강의 모습이 보여
비봉산성의 정상에 서면 능주 일원의 방어와
영산강 상류를 통제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현재는 비봉산에 위치하여 비봉산성이라 부르고 있지만
능주의 삼한시대와 삼국시대 지명이 여래비리국과 잉리아현이었고
죽수부리, 이릉부리였던 사실을 고려하면
여래비리성 혹은 잉리아성이나 죽수부리성, 이릉부리성이었을까.
통일신라시대의 능주의 지명을 따라 능성(陵城)으로 불렸을까.
능주의 요충지에 자리하여 유사시에 방어나 역습 등의 전술을 수행할 수 있는
전형적인 배후산성으로 짐작될 뿐이다.
지금은 옛 이름을 잃어버렸지만 산성의 실체와 성격을 규명하고
정비 혹은 복원하기 위해 학술발굴을 실시하여,
영산강 상류지역의 고대산성의 성격과 지역문화의 성격을 밝힐 필요가 있다.
비봉산성 복원은 많은 예산이 소요되기 때문에
화순군 예산 만으로 추진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전라남도에서 현재 추진 중인 영산강 유역 특정지역 개발사업과 연계하여
연차적 추진이 필요하다. 비봉산성을 정비 복원하여
영산강 상류의 관광거점으로 활용되어야 한다.
지석강변의 넓은 평야를 바라보는 비봉산성은 인근의 “대곡리 청동유물 출토지”,
비봉산 자락의 비지정 고인돌군 유적, 인근의 세계유산 화순고인돌군 유적과 연계하면
문화재 활용에 따른 개발 효과 역시 클 것이다(구충곤 화순군수).
또한 비봉산성과 지리적으로 인접한
대신리-효산리 고인돌공원을 연계하는 등산로를 조성해야 한다.
외지의 탐방객들이 풍광이 수려한 비봉산에 올라 유적 답사의 정수를 만끽하고,
1시간 거리의 가벼운 등산을 할 수 있도록
산성의 정비와 복원에 앞서 탐방로를 조성해야 할 것이다.
능주 일원의 고대 역사와 문화를 상징하는 유적은 비봉산성 외에
삼한 및 삼국시대의 고분을 들 수 있다.
능주지역의 고분은 기념물 192호로 지정된 능주 천덕리고분(3기)과
문화재 자료 235호로 지정된 능주 관영리 고분이 잘 알려져 있다.
최근 내평리고분, 백암리고분, 연양리고분 등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능주 일원과 주변지역에 산재되어 있는 여러 문화 유적을 종합적으로 학술 조사하여
성격을 파악하고, 일괄적으로 문화재로 지정하여 복원과 정비에 반전을 기했으면 한다.
여러 고분과 유적을 연결하는 고분 탐방로를 개설하고,
도로변에 능주지방의 특산품인 배와 복숭아 및 자두나무 등을 식재하여
지역특산품과 역사유적이 함께 하는 특색 있는 탐방로를 조성했으면 한다.
옛날의 비봉산은 새들의 낙원이었다. 영벽강, 충신강, 지석강이 가깝고
기름진 능주평야가 있어 새들이 살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각양각색의 새들이 울창한 송림 속에서 모여 살았다고 하는데
학, 두루미, 외가리, 따오기, 갈가마귀, 까치, 맵새, 굴뚝새, 물총새,
백로, 황새, 까마귀, 참새, 부엉이, 독수리, 참매, 해동청새매, 보라매, 꿩, 비둘기, 봉황새 등등......
수십종의 새들이 모여 살던 새들의 천국이었고
이 새들이 서식할 때까지 능주(능성)은 재력과 권력으로 부향(富鄕)이라는 이름을 가졌으며
능성(능주)이 금성(나주)을 거처 내륙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으며
그때는 귀인들이 많이 배출되었던 곳이다.
비봉산이 되었다는 전설에는 민가와 가까워 온갖 새들의 배설물로 악취가 심하고
밤이면 시끄러운 소리에 잠을 못 이룬 완악한 한 농부가 비봉산에 불을 질렀고
이때 숫봉황새가 불에 타 죽었는데 암컷 한 마리가 이레 동안 먹지도 않고 구슬프게 울며
숫봉황새 주위를 빙빙 돌다 피를 토하며 죽었다.
마을 사람들은 순절한 봉황의 넋을 가엾이 여겨 함께 묻어 주고
이 산을 비봉산(飛鳳山)이라 불렀다고 하는데
산성을 쌓게 되면서 병사들의 훈련장이 되었고
새들이 살 수 없는 곳이 되었기에 새들이 모두 떠났던 것이다.
비봉산 정상을 둘러 925m의 산성을 쌓아
조선시대 능주목을 지휘하는 병사들의 훈련장이었고
조선시대 말까지 이용되었다는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그러나 100 여년 동안 방치되어 지금은 칡넝쿨로 뒤덮혀 있다.
몇가지 제안을 드린다면
비봉산을 개발하여 비봉산성 내부를 옛 모습으로 완전 복원하며
비봉산성을 오를 수 있는 등산로와 전망대를 특이하게 조성하기를 바라고
능주 남정리를 관광특구로 지정하여 비봉산과 함께
조광조 유적지와 향교 그리고 새로운 주잠의 기념관을 지어
조광조의 성리학과 주자의 도학을 묶어 삼강오륜의 일번지로 만들어
사회 윤리와 도덕의 전당으로 자리매김하게 하여
유치원생들과 학생들의 수학여행지가 되고 대학생들의 MT 장소가 되며
세계인들의 마음의 쉼터로 개발되어야 한다.
능주대교 주변과 영벽정 그리고 충신강(오리정)을 정비하여
주민들의 휴식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수변공원을 조성하여 경주와 같은 특별 관광지로 개발되어야 한다.
또한 능주가 죽수부리였던 만큼
모산리 죽수서원 입구를 새로 개발해야 한다.
능주 중심가의 새 도로명이 죽수길이다.
죽수절제어문이 있는 곳부터 죽수길을 따라 대나무들을 식수하여
죽수서원까지 대단지의 대나무 숲이 조성되면
최고의 관광지가 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잃어버린 100년을 되돌려 놓아야 한다.
1914년까지만 해도 능주군은 6만명의 인구를 가진 화려한 도시였다.
앞으로 100년은 이와 같은 관광지로 개발하여
가장 화려한 능주가 되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바이다.
- 작성자 : 블리스 유명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