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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제 만나러 갑니다 Daum 팬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상하이맨
처음 하나원을 나와서 몇일동안은 정신이 없었어.
여기 저기 길을 물어가며 마트에도 들려보고 라면도 사서 먹어보고 영화관과 시내의 여러곳도 돌아보았지.
63빌딩도 가보았는데 전부 강화유리로 만든 엘레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데 우와 정말 고소공포증을 그때 처음 느꼈다.
전망대에서 내려다 보는 서울은 참 멋있었어.
한강의 기적을 내눈으로 몸소 체험하는 순간이였지.
남산타워에도 가보았고 거기서 바라보는 서울의 야경은 너무도 아름다웠어.
불야성을 이룬 시내와 밤이지새도록 잠들지 않는 서울은 참으로 별세상이였지.
대리점에서 내 명의로 된 휴대폰도 개통했고 은행통장도 새로 개설했지.
그냥 플라스틱 카드 하나로 돈을 뽑기도 하고 넣을수도 있다는건 참으로 신기한 경험이었어.
은행을 믿을수 없어서 돈을 저축하는 사람들은 모두 개인 장농의 깊숙한 곳이나 남들이 알수없는
외딴곳에 감추어놓는 북한이랑은 너무도 상반됬지.
어쨋거나 즐거움도 잠시이고 우리는 바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었어.
처음 받은 정착금 통장은 만져보지도 못하고 브로커의 손에 쥐어보냈고 당장 우리는 일을 해야
먹고 살수있는 상태였었거든.
벼룩시장신문을 가져다가 여기저기 전화를 해보았지.
사실 그때 처음으로 좌절감을 느꼈어.
대한민국의 취직이 그토록 어려운때이지만 그토록 거절을 많이 당해보았던건 내인생 처음이었던 경험이였지.
3일동안 30곳이 넘는곳에 전화를 해보았지만 대부분 조선족이냐고 물어보고 정중히 혹은 단호하게 거절하더라고.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이해가 되고도 남지만 그땐 참으로 심각하게 상처받는 경험이었지.
어눌한 발음에 자꾸 이것저것 되물어보는 말투와 타임머신을 타고 50년전에서 온것같은 생각이 얼굴을 보지않아도
전화기로 전달이 되나 보더라고.
대부분 전화로 거절당했고 면접을 보았어도 거절당하기가 일쑤였지.
참 초심의 결심이 몇일만에 무너질 무렵 난 어렵사리 야간 편의점 알바를 구인한다는 시내의 어떤 편의점에 취직을 하게돼.
사장님께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더니 그분은 열심히 살아보라고 취직시켜 주시더라고.
지금 생각해봐도 참 고마웠던 분이였어.
아싸! 내가 취직을 한거야.
그토록 거절만 당했던 나에게 직업이 생겼던거지.
그러나 편의점일은 의욕만 가지고 할수있는 일은 아니였고 정말로 난 많은것을 배워야 했어.
가장 힘들었던 것은 대부분의 상품은 모두 영어로 되있었고 그것을 모두 외우는데 많은 시간이 들었던 것이였지.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너희들은 이해하기 힘들수도있겠지만 북한은 영어를 거의 쓰지않아.
배워주긴 하지만 써먹을 곳이 없으니 무용지물인거야.
그리고 대한민국의 언어는 절반이 영어인것처럼 들리더라고.
시내의 상점들도 대부분 영어간판을 달았더라.
"하x마트" "훼밀x마트" "스타벅x" 등등 모든것이 영어이고 그뜻을 알아가는게 많이 힘들었지.
야간근무를 하는동안 참 많이 힘들었어.
손님들이 불쑥 들어와서는 " 저기 다크 쵸콜릿이 어디있죠?" 이런식으로 물어보는데
참 난감한 순간들이 많았어.
몇번을 되물어서 그게 뭐냐고 물어보면 그손님들은 나를 신기함 또는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곤 했지.
" 저기 제가 베지테리안 이라서 그러는데 햄이 안들어있는 샌드위치 있나요?" 이런식으로 물어보는 아가씨도 있었고
이럴땐 머리를 겁나게 굴려대도 뭔소린지 모르겠는거야.
속으로 ( 저아가씨는 한문장에 주어와 동사 명사를 모두 영어로 쓰는구나)라는 어이없는 생각만 했었지.
예를 들어 북한에서는 애플 쥬스를 그냥 사과단물 이라고 불러.
아이스크림은 뭐 아이스크림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얼음과자 또는 얼음보숭이 뭐 이런식으로 부르지.
어떤날은 내또래로 보이는 녀석들이 우루루 몰려와서는 라면을 먹고있는데 동생과 통화하던 내 말투를 듣고는
대번에 북한에서 왔냐고 물어보는거야.
어우~ 깜짝 놀랐지.
알고보니 그녀석은 하나원 의경으로 군복무를 했던 녀석이더라고.
이것 외에도 참 힘든게 많았어.
알겠지만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이고 개인이 소유한 공장이나 상점은 없어.
모든 식량과 물건은 주민들에게 배급되는것이였고 주민들은 정해진 상점과 배급소에서 공급받지.
물론 공급이 되던 시절을 이야기 하는거야.
사정이 이러하니 "손님은 왕이다!"라는 서비스업의 기본정신을 난 알리가 없었고 친절하게 손님을 맞이하고
진상을 부려도 고분고분해 져야 하는건 참으로 익숙되지않는 어려운것였어.
괜한 자존심에 짜증나고 같이 싸우고 싶고 말이야.
거기에다 주인처럼 일을 해야한다는 기본적인 직원의 자세는 정말 생소한것이였지.
북한은 모든것의 주인은 인민이고 공장과 농장도 모두 그곳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이 주인이라고 선전하지.
결국 아무도 주인이 아니라는 이야기 인것이고 결국 자기일처럼 국가일을 하는 사람들은 없어.
눈가림식으로 대충해버리고 욕먹지 않을 정도로 얼렁뚱땅 넘어가지.
이런 나라에서 성장한 내가 처음부터 주인의 마음에 들게 일한다는것은 내 마인드가 바뀌지 않는 한 참 불가능한 이야기였지.
그리고 퇴근전 정산을 하면 왜 그리 돈이 항상 모자라는 지.
지금 생각해봐도 아이러니 하다.
보름이 넘게 그렇게 열심히 일도하고 욕도 얻어먹고 하면서 난 많은걸 느끼고 배워.
일은 열심히 그리고 깔끔하고 또 깨끗하게.
손님은 왕이고 그들이 어떤 요구를 하더라도 웃으며 받아줘라.
영어를 모르고 내 사투리를 고치지않는다면 이곳에서 살아가기가 참으로 힘들다.등등 많은것을 느끼게 돼.
초저녁 시내의 모 영어학원 기초반에 등록해 공부도 하기시작했고 엄마 친구분이 선물로 주신 MP3를 보고
엄청 기뻐한적도 있어.
손가락 두개를 합친것만한 작은 물건에 그렇게 많은 노래를 넣을수도 있고 들을수도 있다니..
신기한 경험이고 행복이였어.
중고 컴퓨터를 사다가 인터넷도 해보았고 잠도안자고 게임도 해보았지.
야 정말 인터넷 게임은 내인생 가장 신기한 경험이었어.
얼굴도 모르고 사는곳도 모르는 사람들이 온라인이라는 가상의 공간에서 서로 만나서 채팅도 하고 게임도 할수있다니.
실사판같은 고화질로 총도 쏘아대고 수류탄을 던져서 상대방을 죽일수도 있다니...
하루하루가 꿈같이 지나가더라.
처음으로 컴퓨터에 야동을 다운받았는데 그날은 내가 새롭게 태어난 또다른 날이였다.
성적으로 억압된 세상에서 살아온 내가 처음본 야동은 정말 기절초풍할만큼 놀라운 경험이였어.
그렇게 새로운것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면서 살아갈 무렵 휴대폰으로 나는 한통의 메세지를 받게돼.
(오빠. 외로워 죽겠엉. 심심하니깐 놀아줘. 기다리고 있을께) 발신자명 없음.
발신자 번호:060-000-XXXX 이런식이였는데 당시 나한테는 문자를 보낼 여자라고는 엄마와 내동생 뿐이었고 거기다 저런
이상한 번호는 본적도 없거든.
전화를 걸어 누구냐고 물어봤지.
처음엔 꽤 당황한 말투이더니 이내 곧 애교떠는 목소리로 변하더라고.
그녀와 나는 이것저것 서로를 이야기했고 그녀는 곧 내가 북한 사람이라는걸 알게돼.
매일 일끝나고 나는 고달팠던 하루를 그녀와 이야기 했고 이세상은 참 따뜻하다고 생각했지.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이야기를 이렇게 친절히 들어주고 때로는 조언도 해준다는것이 고마운거 아니겠노.
뭐 물론 나중에 휴대폰 사용료가 나왔을때 뒤집어지긴 했지. ㅋ
80만원 가까이 나왔었고 그 사용료 대부분이 그녀와의 통화에서 발생한 요금이라는걸 알고 절망감이 들더라.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해준 충고중에는 누구도 믿지말라는 말도 있었어.
누구도 믿으면 안된다는 그 진실을 난 참 값싸게 주고 깨달았다고 볼수도 있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나는 휴대폰을 개통하고 1개월만에 어마어마한 요금폭탄을 얻어맞았고 두달이나 휴대폰료를 연체하게 되지.
매일 전화가 오더라.
신용불량자가 될수도 있다느니 곧 발신정지가 될거라느니..
아무리 상황을 설명하고 기다려달라고 사정해도 달라지는건 없더라.
생활비로 보태고 남은 월급은 모두 연체료로 나가고 나는 3개월후에야 겨우 연체료를 다물고 자유로워지지.
그래. 자본주의는 자본주의 대로의 안좋은 모습이있었어.
내가 배운 자본주의는 신용이 없으면 그어떤것도 할수없는 세상이라고 했지만 이세상엔 사기꾼도 많았고 심성이 착하지않은 이도 많았으며
차별또한 많았어.
세상을 알아갈수록 혈연,지연,학연으로 뭉쳐진 사회의 단면이 보였고 그럴수록 나는 냉정하게 이세상을 살아야 한다는 결심을 하지.
그동안 참으로 많은 일을 겪었지.
우리 엄마는 돈을많이준다는 말에 속아 다단계에 빠질뻔한 적도 있었고 나는 길거리에서 "도를 아십니까"에 잡혀서 이상한곳으로 끌려갈뻔한 적도 있었어.
이세상은 나에게 호의적이지 않았을지 몰라도 나는 충분히 견딜수있는 경험을 하고 있었고 모든것에 개의치않고 내길을 갈수있는 의지력도 길렀어.
그러나 가장 힘들었던것은 이제부터내인생을 설계하고 내가 갈길을 찿아야 한다는거였지.
북한에서 자라온 나에게 창의성은 말살되있었고 시키는 일을 하고 그들이 원하는 말을 하며 로봇처럼 살아온 나에게 처음으로 내인생을 설계할수있는 자유는
참 나를 힘들게 하지.
그때 강철환 기자의 말중에 모든것을 혼자서 해나가야 했다는게 가장힘들었다는 말이 정말로 와 닿더라고.
난 내자신이 무엇을 잘하는지도 모르고 무엇을 해야 행복한지도 모르겠어.
몇년이 흐른 지금도 나는 아직 내 앞날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거든.
창의성과 자유성을 말살당한곳에서 살아온 내가 도대체 잘할수있는것이 무엇일까?
이곳에서 태어나고 살아온 친구들도 힘들어하고 견디지 못하는 무한경쟁을 난 어떤것으로 이겨내야 할까?
참 힘든 질문이었고 아직도 찾지못한 해답이지.
어쨋거나
몇개월이 지난후 나는 야간 편돌이일을 그만두고 동네 마트의 오토바이 배달부로 취직을 하게돼.
돈을 더 많이 벌수있었거든.
아침부터 저녁까지 끊임없이 배달을 했지.
20KG짜리 쌀 4포대를 지고 수십층을 오르내렸고 때로는 잘못된 배달때문에 혹은 상품이 맘에 안든다는 이유로 욕을듣고 모욕을 당하기도 했었지.
그래도 견딜수 있었어.
죄송하다는 말을 습관처럼 내밷으면서도 밖으로 나와서는 새로 배운 욕설을 시원하게 날려대면서 담배한대로 스트레스를 풀기도 했지.
사실 북한을 떠나오면서 나는 하고싶은 말을 할는 자유와 내땀으로 일하여 번돈으로 먹고살수있는 자유가 있으면 그이상 바랄것도 없고 원할것도 없다고 생각했어.
그러나 인간은 이기적이고 욕심이 많아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나는 새로운 갈망을 하게되나봐.
더 좋은 직업과 더 좋은 조건의 삶을 원했고 결국 그것은 지금의 내 생활을 총체적으로 돌아보게 했고 새로운 뭔가를 찿아야 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지.
그 동안 한두명의 한국친구들도 생겼고 이들과 가끔 술잔도 기울이면서 가까워 졌지만 결국 그들과 나는 세월과 사상적 이념 그리고 문화적 차이가
만들어 놓은 넘지못할 보이지 않는 벽이 있더라.
난 솔직히 너희들과 공유할수있는 문화적인 유대감이 전혀없어.
너희들이 어릴적 즐겨보았다는 애니메이션이나 만화는 본적도 없고 흥미도 느껴지지않으며 너희 또한 내가 살아온 어린시절 이야기를 들으면 경악을 하지.
가끔 분위기를 주도하는 친구들이 던지는 개그는 어디서 웃어야할지도 모르겠고 내가 웃긴다고 농담을 하면 분위기는 재뿌린듯 싸 해지고.
아무리 애써도 가까워질수없는 이 애타는현실 과 밤새 함께 술을 마셔도 공유할수없는 문화적인 차이는 참 나를 힘들게 했어.
겉돌고 있는 느낌은 자꾸만 나를 약해지게 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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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편은 내가 본 한국정치의 모습과 실망감 그리고 이해할수 없는 이념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보았던
그때 심정을 쓰려고 해.
긴글 읽어준 게이들 고마워.
※ 이 글은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에 북괴출신이란 아이디를 가진 탈북청년이 쓴 수기인데
더 많은 수기를 읽어시려면 일간베스트저장소에서 북괴출신이란 아이디를 쳐서 읽어보시면 됩니다.
상당히 필력이 상당히 좋으면서 내용이 재미있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