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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번 째로 쓴 수필을 올립니다.
어떤 말씀이든 들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따끔한 충고와 쓴소리 부탁드립니다.
판때기의 추억
"선태야, 일어나봐! 너 좋아하는 보이 조지 나와."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잠을 자던 나는 엄마가 깨우는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안방의 문갑 위에 놓인 카세트 라디오 앞에 가서 앉았다. 라디오에서는 엄마 말대로 보이 조지(Boy George)가 부르는 컬쳐 클럽(Culture Club)의 카마 카멜레온(Karma Chameleon)이 흘러나왔다. 시간이 밤 열한시가 넘었으니 한창 첫잠을 자다가 깼지만 졸린 줄도 모르고 라디오 앞에서 넋을 잃고 앉아서 듣는다. 에이, 벌써 1절이 거의 끝나간다.
이번에도 역시 놓쳤다. 녹음 버튼을 누르는 걸 말이다. 카마 카멜레온이 나오는 걸 미리 알았다면 녹음 버튼을 누를 준비를 했겠지만 라디오 팝송 프로그램이 나오는 내내 대기하고 있기도 쉽지 않고, 언제 같은 곡이 또 나올지도 알 수 없다.
'엄마가 좀 눌러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엄마라고 라디오 앞에만 앉아 있는 게 아니니 쉽지 않을 것이다. 다음에 인기 팝송 차트 코너를 노리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비록 녹음 타이밍을 놓치긴 했지만 스피커에서 흘러 나오는 노래는 너무 좋다. 중성적인 보이 조지의 목소리, 귀에 쏙 박히는 후렴구, 전주와 간주의 하모니카 소리.
내가 가장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외국 가수는 컬쳐 클럽, 그리고 컬쳐 클럽의 보컬이었던 보이 조지였다. 우연히 듣게 된 컬쳐 클럽의 데뷔곡 카마 카멜레온이란 곡을 듣자마자 뭔가에 홀린 듯 빠지게 되었는데 당시 '유머 일번지'라는 코미디 프로그램 말미에서 DJ 김광한이 소개해 준 이 곡의 뮤직 비디오는 충격이었다. 보컬인 보이 조지가 여장 남자였기 때문이었다. 트랜스 젠더처럼 완전히 여자에 가까운 건 아니었고, 어찌 보면 약간은 중성적인 모습으로, 두꺼운 화장과 발목까지 오는 풍성한 원피스, 그리고 교태 섞인 몸짓으로 부르는 노래는 어린 나의 혼을 쏙 빼앗아 버렸다. 당시에 공책에다 샤프로 필기를 할 때면 뒷장으로 글씨가 눌리지 않고 잘 써지도록 플라스틱 책받침을 받쳐 쓰곤 했다. 간혹 플라스틱 책받침 대신 연예인 사진을 코팅해서 쓰는 아이들도 있었는데 당시에 나의 책받침은 단연 피비 케이츠였으나 컬쳐 클럽을 좋아하게 된 이후로 피비 케이츠는 책상 서랍 속에서 빛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컬쳐 클럽을 시작으로 팝송을 좋아하게 되었지만 지금처럼 음원을 쉽게 구할 수 있는 때도 아니었고, 물질적으로 풍족한 때는 더욱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팝송들의 음원을 구했던 방법은 바로 녹음이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곡을 공 테이프에다 녹음하는 방법.
라디오를 듣다가 평소 좋아하던 곡을 DJ가 소개하면 얼른 녹음 버튼을 누른다. 그렇게 한 곡, 한 곡씩 60분짜리 공 테이프의 앞, 뒷면에 빼곡히 녹음해서 듣곤 했다. 간혹 곡이 시작되어 녹음 버튼을 눌렀는데도 DJ가 계속 말을 하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같은 곡을 다시 녹음하기 전까지는 앞부분에 DJ 목소리가 들어간 버전을 계속 들을 수밖에 없었다.
친구한테 테이프를 빌려서 듣는 방법도 있었다. 음악을 빌린다는 것을 요즘 아이들은 이해할 수 있을까? 그때는 집에 더블 데크가 있으면 테이프를 빌리기도 하고, 바꿔서 듣기도 했다. 친구한테 빌려온 테이프를 오른쪽 데크에 넣고, 공 테이프는 왼쪽 데크에 넣어서 녹음을 하면 테이프 하나가 새로 생기는 셈이었지만 요즘에 앨범 하나 ctrl+c, ctrl+v로 옮기는데 1분이 걸린다면, 이때는 테이프 시간만큼을 기다려야 하는 정성이 필요했다.
좋아하는 곡을 계속 듣다가 그 노래를 부르고 싶으면 가사를 받아 적기도 했다. 지금처럼 인터넷도 없고, 정보가 부족하던 시대라 LP(레코드판)를 사기 전까지는 가사를 구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니 카세트의 플레이 버튼과 스톱 버튼을 바쁘게 눌러가며 한 소절, 한 소절 받아 적는 수밖에. 그리하여 마이클 잭슨의 'Beat it'은 '삐레'로 적히기도.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받게 된 용돈을 모아 처음으로 샀던 카세트 테이프가 컬쳐 클럽의 데뷔 앨범이었다. 성음에서 나왔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 우리나라의 3대 라이센스 음반 회사는 성음, 지구, 그리고 오아시스 레코드였는데 테이프의 색깔이 성음은 빨간색, 지구는 파란색, 오아시스는 은색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레코드 가게에서 파는 라이센스 테이프가 아닌 시장이나 길거리에서 파는 짝퉁 해적판 테이프도 있었다. 유행하는 히트 곡을 담고 테이프와 케이스에 곡명을 인쇄해서 팔았는데 레코드 가게에서 파는 테이프보다 가격도 저렴하고, 여러 가수들의 히트 곡들을 테이프 하나로 들을 수 있는 장점도 있었으나 거기에도 급이 있어서 너무 저렴한 것을 사서 듣다가 테이프가 씹혀서 화를 내며 카세트에서 어렵게 꺼내던 기억도 난다.
중학교 1학년 때 명동에서 DJ 김광한의 팝 바자회가 열린다고 해서 용돈을 모아 혼자서 갔다. 명동 시내 한 건물의 맨 윗 층에서 열리고 있었다. 카세트 테이프, LP, 브로마이드, 티셔츠 등을 팔고 있었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구경을 하다가 내 시선을 한눈에 잡아끄는 LP 쟈켓을 보게 되었다. 벽에 붙어 있는 그 LP 쟈켓은 기하학적이며 화려한 색깔의 일러스트로 되어 있었고, 위쪽에 'Judas Priest'라고 적혀 있었다. 다른 건 별로 살 게 없었고, 그렇다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기는 아쉬워 순전히 쟈켓에 생긴 호기심으로 그 LP 한 장을 사서 집으로 왔다.
거실에 전축이 있었고, 부모님이 가끔 들으시던 클래식이나 폴 모리아 악단, 혹은 영화 음악 LP들이 2, 30장정도 있었다. 테이프가 아닌 나의 첫 번째 LP였던 주다스 프리스트의 'Turbo' 앨범 LP를 턴테이블에다 올리고 바늘을 걸었다. 처음부터 괴기스러운 사운드가 나왔다. 지금 들으면 첫 곡 'Turbo Lover' 인트로의 딜레이 기타 사운드는 굉장히 멋지고, 보컬인 랍 헬포드는 살아있는 전설로 추앙받지만, 처음 들었던 목소리는 음산하기 그지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에 내가 듣던 팝은 ABBA나 WHAM 등의 부드러운 곡들이 주를 이루었기에 LP 해설지 속의 가죽옷에 장발을 한 주다스 프리스트 멤버 다섯 명의 사진은 좀 무섭기까지 했다. 괴기스럽고, 시끄러운 사운드가 듣기 괴로웠지만 돈이 아까워 중간에 끄지 못하고 B면의 마지막 곡까지 다 듣고는 반년이 지다도록 다시 듣지 않았다.
어느 날, 평소처럼 마이클 잭슨, 듀란듀란 등의 팝을 듣다가 다시 호기심이 생겨 반 년 전 주다스 프리스트의 LP를 다시 꺼내 들었다. 그런데 반 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인 것이었다. 6학년 때부터 어쿠스틱 기타를 배우다가 그 무렵 몇 달을 졸라서 일렉 기타를 사서 연습하다 보니 주다스 프리스트의 사운드가 바로 일렉 기타에서 나오는 사운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날카로운 일렉 기타, 심장을 울리는 베이스, 호쾌하며 강력한 드럼, 거기에 폭발적인 고음의 보컬까지. 난 어느새 그들의 포로가 되었고, 그때부터 록 음악에 빠졌으니 그때가 중학교 1학년 가을이었다.
당시 한 달 용돈이 만원이었다. 용돈을 받으면 곧바로 동네 레코드 가게로 달려가서 LP 레코드판을 샀다. 중학교 때 LP 한 장의 가격은 3,200원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듣고 싶던 LP를 사와서 비닐 커버를 칼로 벗겨내고 그 안에서 깨끗한 새 것의 LP를 꺼낼 때의 행복은 이루 말 할 수가 없었다. 행여나 지문이라도 묻을까 LP의 맨 끝과 가운데 종이 부분을 조심히 잡고 꺼내면 LP 특유의 플라스틱 냄새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 냄새는 새 LP에서만 나고 계속 꺼내 듣다보면 없어졌다.
깨끗한 새 LP를 턴테이블에 올려놓고 바늘을 조심히 들어 올렸다. 아무리 조심히 올려도 바늘이 LP에 닿을 때 툭 하는 잡음이 났는데 그게 참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이윽고 바늘이 미끄러져 LP의 첫 번째 홈에 걸리면 한, 두 바퀴 돌고 나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음악을 들으면서 LP 쟈켓도 보고, 뒷면의 사진이나 크레딧도 읽어 보곤 했다. 그리고 안에 들어있는 해설지를 들을 때마다 읽곤 했는데, 당시 록 앨범 해설지의 필자는 전영혁 씨가 쓴 게 많았다.
용돈을 받자마자, 혹은 설날에 세배 돈이라도 받으면 몇 장씩 LP를 사들고 들어오는 나를 볼 때마다 할머니가 말했다.
"그놈의 쓰잘데기 없는 판때기는 뭐 하러 자꾸 사와?"
주다스 프리스트, 스콜피온스, AC/DC, 딥 퍼플, 레드 제플린, 본 조비, 오지 오스본, 머틀리 크루 등 매 달 한 두 장씩 '판때기'를 사 모으다 보니 그 양도 점점 늘어났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웬 커다란 상자가 배달되어 왔는데 호기심에 열어보니 아이와에서 나온 오디오였다. 앰프, 턴테이블, 카세트 데크, 이퀄라이저 등이 분리 되지 않고 하나로 통합된 오디오가 당시엔 뮤직센터라고 불렸다. 거실에 전축이 한 대 있으니 이건 내가 쓰면 되겠다고 기쁜 마음에 겁도 없이 내 방으로 가져가 설치하고 스피커를 연결했다. '드디어 나도 오디오가 생겼구나!'라는 기쁨에 갖고 있던 LP를 다 들어보았는데 거실의 전축과 달리 단단한 음질이 너무 좋아 밤늦게까지 듣다가 잠이 들었는데 아버지가 화가 나서 날 깨우셨다. 당시 은행원이던 아버지에게 누군가가 로비, 혹은 뇌물 명목으로 보낸 거라 다시 돌려보내야 하는데 내가 박스도 다 뜯고 연결을 해 버린 것이었다.
왜 허락도 없이 맘대로 뜯었냐고 혼났지만 그렇다고 다시 가지고 나오라고는 하지 않으셨다. 아마도 할 수 없다고 체념을 하신 듯 했다. 혼나고 방에 들어와서는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아까 까지는 조금 불안했지만 이젠 진짜로 내 것이 된 것이었다. 꿈에 그리던 뮤직센터가.
중학교 3학년 때 학교에서 축제를 했다. 밴드를 결성해서 나가려는데 드럼 칠 사람이 없었다. 축제를 담당하셨던 선생님의 소개로 우리 중학교를 졸업한 고등학교 1학년 형이 드럼을 쳐주게 되었다. 어느 날 그 형네 집에 놀러갔는데 좋은 음악을 들려주겠다며 무언가를 꺼냈다. 카세트 테이프나 LP가 아닌 손바닥만 한 케이스에서 동그란 얇은 판을 꺼내는데 그게 CD라고 했다. 그때 CD를 처음 본 것이었다.
영롱한 은반 위에서 마치 프리즘처럼 빛이 반사되는 모습이 신비롭기까지 했다. CD를 플레이어에 넣고 플레이 버튼을 누르자 소리도 없이 CD가 돌아갔다. 턴테이블의 바늘 올리는 소리, 혹은 카세트 테이프 플레이 버튼을 누를 때 철컥 소리 같은 잡음 따위는 들을 수가 없었다. 음악이 나오는데 난 음악 소리보단 그 놀랍도록 깨끗한 음질에 충격을 받았다. 그건 마치 차가운 북극의 티 없이 깨끗한 얼음 같은 소리였다. 카세트 테이프나 LP처럼 A면, B면이 없으니 중간에 돌릴 필요도 없이 전곡이 다 재생되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 한동안은 같은 앨범이 카세트 테이프와 LP, 그리고 CD로 발매 되었다. 학교에서는 마이마이나 워크맨에다 카세트 테이프를 넣어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었고, 집에서는 LP로 음악을 들었다. CD를 사고 싶지만 가격이 비싸서 고등학생에게는 언감생심이었다.
처음으로 CD를 구입한 건 대학교 1학년 때였던 걸로 기억한다. 일요일이면 학교가 있는 청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고속버스 터미널로 갔는데 지하상가를 걷다가 레코드 가게 스피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반해 구입한 나의 첫 번째 CD가 4 Non Blondes의 데뷔 앨범이었다. 내 방에 있던 오디오와 LP들까지 하숙방에다 갖다 놨었기에 청주로 내려가는 내내 설렘과 기대에 차서 방에 들어가자마자 CD를 플레이했다.
어쿠스틱 기타로 코드를 바꿀 때 지판 위에서 손가락이 미끄러지는 소리까지 생생히 들렸다. 깨끗하고 영롱한 음질의 소리들이 방 안을 가득 채워 난 음악을 듣는 내내 행복했다.
그렇게 하나, 둘씩 모은 LP는 200장이 넘었고, CD는 500장이 넘었다. 중학교 시절부터 모았던 LP들이나 대학교 때부터 모았던 CD들은 나이를 먹고도 나의 보물 1호였다. 그러나 지금은 나한테 남아있지 않다. 모두 팔아버렸기 때문이다.
LP들은 대학교 4학년 때 임용고시를 공부하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팔았다. IMF로 집이 너무 어려워져서 대학 등록금도 못 낼 판에 임용고시 수험서와 학원 등록비를 달라고 손을 내밀기가 죄송했다. 음악을 하겠다고 구입했던 장비들은 낙원상가에 팔고, 아껴듣던 LP들은 모르는 사람에게 보내면서 나중에 교사가 되어 돈을 벌게 되면 CD로 다시 사겠다고 다짐을 했다.
1년 후에 교사가 되어 진짜로 돈을 벌게 되었지만 가지고 있던 CD들도 나중에 역시 전부 팔았다. 돈을 벌어도 내가 필요한 돈은 항상 모자랐다. 결혼을 해서 아이까지 키우는 유부남이 인디 밴드에서 드럼을 쳤지만, 스네어 드럼이나 페달, 심벌 같은 장비들을 봉급으로 살 만큼 가정에 무책임하진 않았다.
MP3 다운로드 시대가 오면서 음악을 듣는 방식에도 변화가 생겼다. 오디오와 스피커로 음악을 듣던 시대에서 스마트 폰으로 음악을 듣는 시대로 변했다. CD를 리핑해서 웨이브 파일로 변환 시키면 컴퓨터의 모니터 스피커로 똑같은 CD 음질을 들을 수도 있었고, 스마트 폰에 담아 들을 수도 있었다. 게다가 나는 음악을 한다고 퀄리티 좋은 오디오 인터페이스와 모니터 스피커를 갖추고 있기에 웬만한 오디오보다도 좋은 음질로 들을 수 있었고, 중고 CD 가격은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500여장의 CD들을 전부 웨이브 파일로 변환해서 하드 디스크에 저장하고는 미련 없이 중고로 팔아 드럼 장비들을 샀다. 그렇게 아끼던 LP들은 추억으로 남았고, CD들은 이제 무형의 파일로만 남았다.
MP3 다운로드 시대에서 음원 스트리밍 시대로 또 변했다. 그나마 MP3라도 구입을 하던 사람들은 이제 한 달에 5천원만 내면 굳이 음원을 구입할 필요 없이 수많은 음악을 자유롭게 들을 수 있다.
나 역시 이젠 CD를 사지도, 음원을 다운받지도 않는다. 내 솔로 앨범을 메인 페이지에 걸어준 벅스에서 매달 5천 원 정도를 내고 듣고 싶은 음악들을 그때마다 스트리밍으로 듣는다. 좋은 음질로 듣고 싶은 사람은 이제 오디오에 돈을 쓰는 것이 아니라 이어폰에다 돈을 쓴다.
내 것이라는 소장의 개념이었던 음악은 이제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는 공공재의 개념을 갖게 되었다. 들국화의 1집 테이프는 내 것이었으나, '걱정 말아요 그대' 음원은 내 것도, 네 것도 아니다. 예전에 우리가 친구한테 좋아하는 음악을 들어보라며 테이프를 빌려주었다면 이제는 유투브 링크 한번 걸어주면 된다.
뮤지션이 아무리 좋은 악기나 마이크로 녹음을 하고, 전문 스튜디오에서 한 곡을 가지고 며칠씩 믹싱, 마스터링을 해도 결국엔 이어폰에서 나오는 저급한 MP3 파일로 변환된다. 음악을 하는 뮤지션이나 엔지니어들은 그토록 노력하고, 정성을 쏟은 자신의 음악이 고작 10MB 짜리 파일로 변환되어 스피커가 아닌 이어폰으로 나간다는 사실에 자괴감을 느낀다.
우리가 음원 사이트에서 듣는 MP3 파일의 음질이 스튜디오에서 완성된 웨이브 파일의 음질의 십분의 일이나 될까? 용량이 적고 간편하다는 이유로 우리는 이제 과거의 따뜻한 LP나 차갑지만 깨끗한 CD 음질은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기술은 발전했지만 음질은 퇴보했다. 탄노이 스피커, 마란쯔 앰프는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고, 집채만 한 스피커를 만들던 JBL에서도 이제는 손바닥만 한 블루투스 스피커가 나오지만 들고 다니긴 편해졌어도 음질은 떨어졌다.
얼마 전 나도 블루투스 스피커를 하나 살까, 하고 매장에 가서 구경만 하다가 그냥 나온 건 아직은 옛날 방식을 더 좋아하는 고집일까, 아니면 그리움일까.
처음으로 사귀던 여자 친구한테 차이고 비 맞으며 걸어오던 길에 레코드 가게 앞에 서서 듣다가 사들고 온 부활의 1집 LP, 좋아하던 밴드의 새 앨범이 나오면 용돈 들고 달려갔던 레코드 가게, 비닐을 뜯고 꺼낼 때 나던 새 LP의 플라스틱 냄새, 먼지 껴서 잡음 나오던 LP를 닦은 후 깨끗하게 나올 때의 기쁨, 우리나라에서 라이센스로 발매가 안 된 앨범을 종로에서 빽판(해적판)으로 발견했을 때의 반가움, 케이스에서 꺼낼 때마다 영롱하게 반짝이던 CD들.
할머니가 말했던 쓰잘데기 없는 판때기들은 나에겐 학창시절의 소중한 추억으로 남았다. 이젠 시대가 변해 다시 돌아오지 못할 추억들.
음악을 소장한다는 것의, 혹은 음악을 구입한다는 것의 설렘을 요즘 아이들은 모를 텐데. 시대가 변하고 편리해 졌지만 어떻게 보면 그러한 추억을 만들지 못하는 요즘 아이들이 한편으론 안쓰럽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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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추억이 많네요.
기회가 많지 않았던 나로서는 한편 부럽기도 하고요~
저의 수필은 거의 다 추억에 의한 글들입니다.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삭제된 댓글 입니다.
저도 그 시절이 그리워서 이 글을 썼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