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주에게
올해처럼
변덕스러운 봄 날씨 중 유난히도 맑았던 그날, 너를 만나러 갔었지. 벌써 하동에는 매화향이 코 끝을 간질이고, 겨우내 숨죽였던 섬진강이
활짝 기지개를 켜고 있더구나. 소설 『토지』에 나오는 최참판 댁 서희가 눈물 가득 내려다 볼 것만 같은 평사리 탁 트인 들판을 보며,
너에 대해 생각을 했어. 세계 어디보다 높은 교육열을 자랑하고, 학벌을 중시하는 우리나라에서 학벌이라곤 오직 초등학교만을
내세우며, 자연이란 학교로 돌아간 너를 사람들은 신기하게도 바라보았지. 온갖 매스컴을 통해 너무 많이 알려져 버린 태주.
나도 물론 그 매스컴 덕에 너를 알았다고 해야겠지만, ‘너를 너무 괴롭히는 건 아닌가’ 내심 걱정이 되기도 했단다.
사실 난, 너를 만나기 전
온갖 상상을 했어. 산골짜기 한 구석의 허름한 집 한 채에 가족들이 모여(사실 초가집이 아닐까도 생각했지^^), 채식만 하고 TV나 컴퓨터
같은 문명(?)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그런 시간들을 보내고 있는 건 아닐까? 산에 사니까 혹시 옛날 드라마에 나오는 산적처럼 생긴 건
아닐까? 매스컴을 통해 내가 알게된 태주는 그렇게 신비하고, 도인 같은 느낌을 갖게 했거든. 마을 사이로 난 좁은 골목길을 지나
너희 집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가 나오셨지. 그런데, 어머니와 인사도 나누지 못할 정도로 나는 놀랐어(첫 번째 놀람).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2층 양옥집. 물론 1층 아저씨가 내어주신 덕분에 그런 집이 생겼겠지만, 나는 솔직히 좀 많이 놀랬다. 그 마음
겨우 진정시키고, 어머니 김경애씨와 인사를 나누었지.
“식사는 하고 오셨어요?”라며 먼저, 인사를 건네는 어머니는 한 눈에 맑은 사람임을 알 수 있었어.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에 동그란 안경. 단정하게 빗어 묶은 머리 한 갈래, 편안한 일상복으로 마중 나오신 어머니. 사실 “네”라고
대답하는 입가엔 나도 모르는 흐뭇함이 머물고 있었지. 어머니의 안내로 도착한 방은 널찍한 창문을 통해 악양이 훤히 내다보이는 곳이었어.
너를 인터뷰하러 갔는데, 우린 그것들에 취해 정신이 없었어. 오랜만에 내리쬐는 환한 햇살이 따스했고, 악양의 평화로운 들판이
가슴을 설레게 했거든. 덕분에 너와의 인터뷰다운 인터뷰(?)는 성사되지 못했지만.
이제는 4집까지 음반을 발표한 아버지 한치영씨가 잠시 취미생활을 즐기고 왔다며
드디어 우리 앞에 앉으셨지. 덥수룩한 머리와 수염이 눈에 먼저 들었어. 네모로 틀 지어진 회사 사각 책상 앞에 앉은 그런 모습은 너무도
꼴불견이었는데, 아버지의 그런 모습은 너무도 멋있어 보였어. 뭐랄까? 쓸쓸하고도 인생에 대한 관조가 담긴 아버지의 목소리와 잘맞아
떨어지는 인상이었다고 해야할까. 기타와 함께 어우러져 쏟아내는 아버지의 노래가, 세상에 대한 사랑이, 텅빈 겨울 가슴을 가득 채워주셨어.
아버지의 노래를 듣고 있는 동안,
갑자기 네가 보이지 않더구나. “집구경 좀 해도 되나요?”라는 말로 어머니께 ‘너 찾기’를 허락 받은 나는 이곳저곳을 둘러보았지.
그리고 들어선 방. 너는 컴퓨터 앞에 앉아서 열심히 메일을 쓰고 있었어. 두 번째 놀람이었어. 세상에 산 속에서 사는 줄 알았던
아이가 인터넷을 하고 있다니. 하긴, 자연을 비롯한 모든 것이 너의 학교이고 터전인데,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데, 너의 손가락이
유유하게 마우스를 누르고 키보드를 치는 모습이 그렇게 생소해 보였던 건…. 나를 포함한 세상은 너무 많은 편견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너는 그 편견에서 자유로운 것만 같았구.
그리고 네가 내게 전해준 세 번째 놀라움.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연주하는 거 한번 꼭!
보고 가야지’굳은 신념으로 너에게 부탁한 키보드 연주. 세상에 ‘아드리느를 위한 발라드’가 네 고운 손가락에서 미끄러질
줄이야. “다른 악기 소리들도 키보드엔 많지만, 오래동안 싫증나지 않고, 소리가 깊은건 그래도 피아노인거 같아요. 물론 이것보다
그랜드 피아노가 더 깊지만요” ‘소리’에 대한 나름의 느낌을 표현해내는 태주 넌, 이미 열 일곱살 아마추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
이미 음반도 낸 어엿한 가수인데, 내가 나이라고 하는 숫자 몇 개에 너를 판단하고 있었던 거지.
계속되는 너의 감동에 푹 빠져 있는 그 순간, “제가 마술 하나
보여드릴까요?”라며 넌 소맷자락을 끌었어. 어, 이건 또 뭐지? 네가 보여준 건 카드마술과 나무젓가락 마술이었지. 앞뒤로 벌레 한
마리씩이 그려져 있는 나무젓가락을 내게 보여준 넌, 갑자기 나무젓가락을 흔들다 내 옷의 소매 자락에 그걸 쓰윽 문질렀다. 그러자,
세상에!!! 한 열 마리쯤 되는 벌레가 나무젓가락에 나타나는 게 아닌가. 얼른 소맷자락을 봤지. 아무 것도 없는데, 어떻게 한 거지?
“마술이죠?”라며 씽긋이 웃는 너. 벌써 컴퓨터 앞에 앉은 너를 두고, 꼭 몸 속 어딘가 숨어 있는 벌레가 나온 것만 같은 기분에 난
온몸 구석구석을 살펴보다, 나무젓가락의 비밀을 알게 되었지(^^). 흙피리 구멍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너의 여린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나비처럼 미끄러지던 너의 손가락이, 나무젓가락을 뒤집는 솜씨 앞에서 벌컥 웃음이 나왔던 건 왜일까? 넓다란 창문 덕에 평사리
가득한 들판을 품고 있는 그 방. 네가 품은 마음 속 세상도 그런 모습일까?
흙과 물로 만들고, 불로
구워만든 흙피리(일명 오카리나)를 부는 너. 작은 부메랑처럼 생긴 것도 같은 너의 흙피리는 ‘하늘연못’에서 떠온 물 인듯 맑고 청아하기만
했어. 부모님의 바램대로, 울분이나 한(恨)이 서린 소리가 아닌 맑은 자연의 소리를 내는 네가 부럽기도 했구. 산을 오르고
섬진강에 발을 담근 채 숨을 쉬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 많은 사람들이 꿈꾸는 삶이고 언젠가는 모두 그렇게 살아가야 하겠지. 이제는
사람들에게 너무 멀어져 버린 자연 속에서 너는 지금 어떤 소리를 듣고 있니? 부디 니가 듣는 그 소리가 사람들 마음에 닿았으면 좋겠다.
얼굴 가득 웃음을 보내며, 어머니가 건네주셨던 국화차. 그 향긋한 내음이 여전히 입 속에서 떠나지 않으니…. 아무래도 인터넷에서
배워 무대에서도 보여준다는 너의 마술을 또 보러, 어머니가 끓여주시는 고운 국화차 한번 더 얻어 마시러, 아버지가 들려주시는
가슴의 노래 또 들으러, 벚꽃 가득 피는 올 봄엔 한번 더 들러야겠다. 열 일곱 너의 고운 꿈 담을 일기장 한권 사들고.
2003년 3월 17일 마산에서
--한태주는 지난해 흙피리 연주음반 『하늘연못』을 낸
음악가이다. 그의 음악에 대해 김지하 시인은 ‘외로운 한 신의 소리’라 표현했으며, 정신세계원 원장 송순현씨는 ‘천상의 맑은
기운을 담은, 이땅을 살려내는 하늘의 음악이다’고 감탄했다. 그의 아버지 한치영은 일명 생태가수로 불리며 91년 『할미꽃』, 96년
『이것 참 잘 돼야 할 텐데』, 99년 『여보게! 어디에 행복이 있던가』, 2000년 『광개토대왕』 등의 음반을 발표해왔다. 제3회
MBC 강변가요제에서 ‘결사대’트리오로 금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그는, 도시의 집착과 욕망 대신 기타 하나 메고 가족과 함께 유랑생활을
떠나, 현재는 하동 악양에서 머물고 있다.
가지면 가질수록 초라한 삶의 모습
나누면 나눌수록 커지는 삶의 향기 여보게 어디까지 갔나 여보게 무얼 보았나 어디에 행복이 있던가
어디에 사랑이 있던가
- 한치영 작사·곡·노래 ‘여보게’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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