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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사무엘상 7:5-6
제목 : 미스바 회개
일시: 2019. 11 17
장소: 라이프찌히 한인교회
I. 사사기에 보면 시의 운율처럼 반복해서 나오는 표현이 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매”라는 것이다. 총 7회에 걸쳐서 나오는데 세 번째서부터는 “또” 혹은 “다시” 라는 단어가 첨가된다. 이스라엘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할 때마다 하나님은 회초리를 드셨고 곧 이어 그 상처를 싸매어 주시기도 한다.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매”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삿3:8)을 회초리도 드셨고 곧이어 사사 옷니엘로 치료하셨다. 어떤 때는 여호와께서 모압왕 에글론을 강성하게 하사 회초리로 쓰시고(삿3:12) 사사 에훗을 통해 다시 회복시켜 주셨다. 여호와께서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이스라엘을 파신 다음에(삿4:2) 사사 드보라를 주셨다. 여호와께서 칠 년동안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 넘겨 주신 다음에(삿6:1) 기드온을 등장시키셨다. 여호와께서 사십년 동안 이스라엘백성들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주셨고(삿13:1) 그 후 사사 삼손을 주셨다.
II.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병” 주고 “약”주고 하셨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병은 메소보다미아, 모압, 가나안, 미디안, 불레셋 등과 같은 나라들이었다. 그러한 병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사사들을 준비하셔서 치료약으로 투약하곤 했다. 병 주고 약 주시는 하나님! 사실 병을 안주시면 약도 필요 없는 것 아닌가! 그러나 하나님은 얄궂게도 계속 역사를 되풀이 하셔서 병도 주시고 약도 주신다.
왜 그랬는가? 진짜 문제는 무엇인가? “병”이 문제가 아니라 병이 걸리게 된 이스라엘이 문제였다. 불레셋이 문제인가? No! 불레셋은 언제가 그냥 거기에 있었을 뿐이다. 모압이 문제이고 미디안이 문제였는가? No! 그들 역시 그냥 거기 있었을 뿐이다. 문제는 그냥 여기 저기 떠돌아 다니고 퍼져있는 외부의 바이러스들이 아니요 면역이 떨어진 내 자신이 문제인 것이다.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문제가 있다.
유명한 미국의 유명한 설교학교수 캘빈밀러의 강의를 한 학기 들은 적이 있다. 필리핀, 가나, 인도, 한국, 대만 등 다양한 나라 사람들이 세미나에 참석하여 수업을 들었다. 여러 외국인들이 모여서 수업을 하니 영어가 공용어이고 다들 특색 있는 영어를 하였다. 내가 볼 때 그 중 가나에서 온 Luis Vampa라고 하는 아프리카학생의 발음이 가장 형편없어 보였다. 저자를 “아따”라고 하고 문화를 “깔쳐”라고 하고... 저런 발음 누가 알아 듣나 그리고 참 촌 발음 나는 영어네 싶었다. 학기를 마치고 다 함께 종강파티를 하는 자리에서 밀러교수는 루이스에게 “Luis where did you learn English?라고 한다. 그리고 You speak Oxford English! 옥스퍼드 영어라고 극찬을 한다. 미국인들은 영국 영어를 클레식하고 멋지 영어로 생각하는 분위기다. 그때 영어 발음과 표현의 문제는 옥스퍼드 영어를 쓰는 루이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내게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문제는 그가 아니고 내 자신이다. 독일어가 어렵고 잘 안 들리는가? 독일어가 문제가 아니라, 독일어가 익숙하지 못한 내가 문제이다. 독일어가 고생하는 것이 아니라 독일어를 못하는 내가 고생하는 것이지. 내가 수학문제를 못 푸는 것은 수학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인 것이다.
오늘 말씀에서 이스라엘백성들이 마주친 문제는 불레셋이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불레셋이 문제가 아니라 문제는 이스라엘 자신이요 오히려 불레셋은 이스라엘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는 “디지털 문제측정기계”와 같았다. 이스라엘이 자신들이 문제라는 것을 어떻게 감각할 수 있는가? 불레셋을 통해서이다. 여호와의 목전에서 또 악을 행했는데 불레셋이 눈앞에 밀려 올라오기 전에는 자신들이 악을 행하고 있었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혈압이 높고 낮은 것을 혈압기로 알고 온도가 높은지 낮은지를 온도계로 알며, 핏속에 당이 다 소비되지 않고 남아 있다는 것을 당뇨측정기로 알며 지금 시간이 어떻게 되는지 시계가 보여주듯이 말이다. 이스라엘은 문제측정기와 같은 블레셋을 통해 자신들을 상태를 알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반응을 보라. 대적 불레셋이 나쁘고 그들이 우리를 괴롭힌다고 말하기보다 “우리가 범죄하였나이다”라고 한다. 이스라엘백성들은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잘 파악했다.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안 것이다. 문제에 부딪히게 되면 문제를 볼 것이 아니라 나를 봐야 한다. 문제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인 것이다. 문제를 초래한 내가 문제이고 문제를 풀 수 없는 무능력한 내가 문제이고 문제를 의식하지 못하고 방치한 나의 무지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III. 이러한 자기 반성과 회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주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7:3)라고 답답해하시면서 책망하신다. 자신을 가장 잘 아는 것이 자기 자신인 것 같지만 사실 가장 잘 알기 어려운 것이 자신이다. 객관적이 되기 어렵다. 팔이 안으로 굽어 자신에게 대해서 눈을 감고 있고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는 독수리의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자신에게는 한껏 관용하고 남에게 대해서는 얼마나 엄격한가? 스스로 볼 때 내 자신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보통 회개를 잘 하지 못한다. 남의 잘못은 들추어 내어도 내 자신의 잘못은 얼마나 숨기려고 하는가! 자기 자신에 대해 솔직하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는 것은 인간의 본성인 것 같다. 아담처럼 발견될 때까지 동산 나무에 숨고 무화과나무잎으로 치마를 두르고 부끄러움을 감추려 한다. 버팅긴다!
검찰과 경찰이 범인을 잡으려고 노력한다. 순진한 질문이지만 왜 노력해야 하는가? 각 범인은 내가 그랬다고 하면 되는 것 아닌가? 수사라는 것이 꼭 필요한가? 증거물이 꼭 필요한가? 자신의 문을 활짝 열고 구석구석 다 보여주면 서로 힘들지 않을텐데 말이다. 문고리를 잡고 서로 열라고 하고 안 열리게 잡아당기는 것이 인간의 모습이다. 수사를 하여 증거물들이 하나씩 나오면 그때서야 겨우 어쩔 수 없이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하였네요. 결국 찾아내셨군요”라는 식으로 인정한다. 혹은 끝까지 버티다가 “기억이 안 난다 술김에 그랬다” 등으로 변명한다.
뉘우치지 않고 면죄부를 자꾸 들이대려고 한다. 면죄부는 쉬운 말로 핑계거리이다. 하지만 그 핑계의 기둥은 튼튼하지 못하여 끝내 우리를 지탱해 줄 수 없다. 그것으로 세워지는 것 같지만 궁색하기 그지 없다. 아담의 핑계를 보라. 참 처절하다. 아담이 면죄부 발급을 받기 원했다. 하와와 대질심문을 하고 점점 수사망이 좁혀 들어오자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2)이라고 한다. 하나님 핑계, 하와 핑계를 대면서 면죄부를 찾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면죄부를 발굴해내지 말고 죄를 발굴해 내어 회개해야 한다.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어가면서 울컥하고, 이상한 말을 하기도 하고, 화를 내고 짜증을 내기도 한다. 그때 면죄부가 하나 있다. “갱년기”이다. 갱년기이니까 그래! 물론 그럴 수도 있다. 그러면서 종종 혹시 너무 많은 면죄부를 그 시기에 주고 있지 않는가라는 생각이 든다. 겨울이 되어 춥고 날이 어두워지니 여러 가지 기분이 저상될 수 있고 다운된다. 그때 나의 게으름은 반성하지 않으면서 애궂은 날씨탓으로 늘 돌리지 않는가?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회개하지 않고 핑계라는 희생물을 들이대는 것이 자기를 보호하고 자신을 지키는 것이라 생각하기도 한다.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순간 나는 사라지고 그 엄청난 댓가를 지불해야 하기에 회개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스스로 세우려고 하는 “자존의 죄”를 짓는 것이다. 자신의 잘못은 처리하지 못하고 자존심만 살아 있을 뿐이다. 자존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하나님 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알려주신 이름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 “스스로 있는 자”에 기대어 있는 의존적인 자들이다. 우리는 이만하면 쓸만하고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하나님이 보실 때 우리는 실수투성이이고 문제덩어리들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할 수 있는 최선의 고백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그것이 내 자신을 비우는 “회개”이다. 스스로 설 수 있다는 “자존심”을 없애는 것이다.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회개할 것이 없다고 생각할 때이다. 그때 교만이 고개를 서서히 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는 있는 죄도 감추려고 하는 면죄부 발굴을 할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죄도 적나라하게 드러내려고 하는 죄 발굴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마르틴루터는 아우그스티누스 수도원에 있을 때 그의 고해신부 요하네스 슈타우비츠에게 어떤 고해를 했는가? 무정함의 죄를 고백한다고 한다. 신부님께서 저를 그렇게 잘 살펴주시는데 저는 신부님의 안위를 잘 살피지 못해 무정함의 죄를 고백한다고 한다. 또한 교만의 죄에 빠졌다고 한다. 무슨 교만인가? 그리스어 시험을 잘 보았는데, 그게 기분이 좋았다는 것이다. 그것 또한 교만이라는 것이다.
IV. 그 못난 이스라엘이 잘 했던 것이 있다면 바로 하나님 앞에서 행한 회개였다. 제단을 쌓고 그날 종일 금식하고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라고 고백했다. 다들 미스바에 모여서 땅을 치고 회개한 것이다. 문제가 생길 때는 미스바에 모여야 한다. 불레셋이라는 문제가 보일 때는 바로 내 자신의 회개부터 시작해야 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새벽기도를 할 때도 회개부터 해야 한다. 아침부터 무슨 회개할 것이 그렇게 많느냐고? 우리는 외상회개를 해야 한다.
불레셋이라는 병을 주시니 화들짝 놀라서 치료의 하나님을 소망한다. 그때 회개도 의미가 있지만 미리 회개하는 외상회개는 어떠하리! 치료의 하나님을 병이 든 다음에 경험하지 말고 건강할 때 건강주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라. 내가 좌절하고 절망의 큰 위기 속에서 능력의 하나님을 경험하지 말고 삶이 평안하고 아무 문제가 없을 때 나를 나 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슬픔을 크게 당해서 위로의 하나님을 경험하지 말고 늘 내 마음을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라. 채우시고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기 위해서 부족함을 굳이 느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센서가 강력하여 주변에서 강하게 나오지 않아도 스스로 아는 것이 복된 것이다. 외상회개는 손해가 아니라 이익이다. 미리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알아서 기는 것이다. 그것은 지혜로운 일이고 최선의 선택이다. 거기서부터 인생의 반전과 흑자경영이 시작된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고백을 보라. 아비의 유산을 미리 받아 먼나라에서 허랑방탕하게 다 허비하고 인생의 바닥에 떨어졌을 때 그가 했던 가장 지혜로운 선택이요 칭찬받을 일은 회개였다. 자존심이 있어서 죽어도 아비에게 가지 않겠다고 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고 그저 나를 품꾼의 하나로 써 달라고 하자 면서 아버지에게로 돌아간 것이다. 그가 회개하고 돌아가니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다. 아비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고 발에 신을 신겼다. 그리고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벌이자고 한 것이다. 회개하여 돌아온 한 순간에 모든 것이 다 채워진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 모였다 함을 듣고 불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왔다. 하지만 불레셋은 운명은 어떻게 되는가? 10절을 보라. “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에 불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가까이 오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레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한지라” 회개하면 뚤리고 소통이 되는 것이다. 회개를 하면 바닥을 치고 반전이 시작되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을 주변나라들이 곱게 보지 않는다. 어떻게 주변나라들과 함께 지낼 수 있겠는가? 관계의 회복은 뉘우침 즉 사과하는 일이다. 그것도 진정한 사과를 할 때이다. 1969-74년까지 서독 사회민주당 SPD의 수상을 지내고 노벨평화상을 탔던 빌리브란트 당시 서독 총리가 1970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를 방문했다. 당시 폴란드인들은 “2차세계 대전 나치 시절에 점령했던 곳을 되찾으려 오느냐”는 비아냥과 비난을 해댔다. 그런데 빌리브란트는 바르샤바를 방문하여 비오는 궂은 날씨에도 2차세계대전 전쟁희생자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면서 지난날의 나찌만행에 대해 사죄했다. 그 모든 장면들이 TV로 생중계되었고 폴란드국민들은 그의 진정한 사죄에 큰 감동을 받게 되었다. 그 정신은 지금까지 독일인들 속에 있어서 독일은 지금까지도 전범들을 재판에 회부하고 지금까지도 희생자들에게 피해 보상을 해주고 있다.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우리가 당신 나라와 국민들에게 범죄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할 때 치유되는 것이고 관계는 회복되는 것이며 새로운 출발이 되는 것이다.
V. 이번 주 수요일은 회개의 날 공휴일이다. 작센만 그러하기에 자긍심이 있다. 아드벤트 주일이 12월 1일이다. 그로부터 뒤로 11일째 되는 날 수요일이 언제나 회개의 날이다. 한해의 시작은 아드벤트 즉 예수 그리스도 메시야의 오심을 고대하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가장 먼저 가져야 하는 것이 회개이다. 메시야가 오시는 크리스마스를 기대하고 바라는 아드벤트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손님 맞을 집안청소부터 잘해야 할 것 아닌가! 이스라엘의 문제 블레셋은 이스라엘이 회개함으로 해결되었다. 그때부터 소통과 회복이 있는 것이다.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로 시작해야 한다. 감사를 발굴해 내듯이 내 실수와 잘못을 발굴해 내어라. 위조 면죄부를 발급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의 연약함을 그대로 드러내라. 그때 내 자존심이 상처를 입고 내가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그때 나는 치유되는 것이고 주님으로 인해 세워지는 것이다. 미스바집회 회개의 은혜와 축복이 모든 성도들의 삶에 풍성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