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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행과 포교하는 사부대중 >
주목받는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설법
글 | 전현자 (취재기자)
기자: 스님! 미주현대불교 독자분들을 대신해 인터뷰 허락해 주심에 존경의 마음으로 감사드립니다. 스님께서는 어떤 수행을 하고 계시는지요?
법상스님: 꼭 그걸 말로 표현해야 한다면, 중도 수행입니다. 조금 구체적으로 말하면, 보통 우리가 조사선이라고 알고 있는 초기 선불교 쪽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초기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불교 용어로 표현한다면, 중도, 불이법(不二法), 불이중도(不二中道), 대승불교에서는 반야바라밀,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자: 사람들은 생각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 생각에 의해서 즐겁다고도 하고, 괴롭다고도 하지요. 도대체 생각이란 것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법상스님: 불교에서는 생각을 인연 따라 생겨나고, 인연 따라 사라지는 '인연생, 인연멸' 하는 생멸법(生滅法)이라고 합니다. 인연가합으로 무상하게 생겼다가 사라지니, 실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쓰는 생각이라는 것을 교리적으로 말하면, 분별심이라고 해서 이것과 저것을 둘로 나눠서 그것을 파악하고 아는 그런 마음입니다. 바로 그 생각, 분별 때문에 사람들은 괴로움에 빠지죠. 분별심이야말로 괴로움의 원인입니다. 이 분별심을 불교교리에서는 식(識)이라고 부릅니다.
기자: 요즈음 현존이라는 말이 명상쪽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현존을 하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현존을 잘할 수 있을까요?
법상스님: 이미 현존하고 있습니다. 현존은 억지로 만들어서 해야 하는 게 아니라 존재 본연의 자연스러운 상태, 지금 있는 그대로가 현존이지, 현존은 억지로 만들어서 조작해내는 것이 아닙니다.
기자: 지금 이대로가 현존이라면 왜 “현존하라”고 강하게 말할까요?
법상스님: 자비방편의 말씀입니다. 앞에 말씀드린 것처럼 사람들은 생각과 분별을 가지고 생각을 주인 삼아서 스스로 분별하여 만들어 낸 세상 속에 사로잡혀 살다보니, 그 분별 이전에 이미 본래 현존임에도 불구하고, 본래 드러나 있는 현존을 보려하지 않고, 자기 생각을 보고, 자기 분별만을 믿는 것입니다.
불교의 핵심은 현존을 만들어내거나, 깨달음을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열반, 해탈을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고, 존재의 가장 자연스러운 본연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돌아간다는 말도 방편이지만 딱 맞지는 않습니다. 그저 본래의 있는 이대로인 자기를 그저 확인하는 것일 뿐입니다. 지금 이대로 이미 본래 부처 입니다. 아직 확인 못 한 부처! 그런데 이렇게 말을 해도 잘 못 믿는 이유가, 사람들은 자기 생각과 분별, 그 허망한 것을 가지고 진실이라고 착각하면서 살아오기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분별만 믿고 살면서, 스스로 만들어 내고 인식한 분별의 세계 속에서 갇혀 사는 겁니다. 자기가 만들어놓은 가상 현실, 분별의 메타버스, 무승자박(無繩自縛)의 감옥에 스스로 갇혀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자: 지구가 매우 아프다고 합니다. 우리 불교도들이 어떻게 해야 지구가 덜 아프게 할 수 있을까요?
법상스님: 제가 대학원에 다닐 때, 환경 관련한 것들을 좀 공부했었습니다. 환경학의 역사를 보니까, 과거에는 '인간과 자연이 둘이다.'라는 전제 하에서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던 삶에서, 차차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법, 상의상관성, 불이법적인 연결성으로 가까이 가는 그런 환경학의 발전 양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인간과 자연이 둘이 아니라 서로가 유기적으로 연결된 존재이기 때문에 자연이 오염되는 것이 곧 내가 오염되는 것이고, 인간과 자연이 둘이 아니구나. 그래서 불이법적인, 연기법적인 불교의 지혜와 실제 환경학의 연구도 그렇게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아파하는 지구 환경을 위해 우리는 어떤 실천을 해야 할까요? 물론 다양하고 구체적인 실천의 방향들을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그 모든 친환경의 실천들을 저절로 이끌어낼 수 있을 만한, 단 하나의 근원적인 해결 방법을 설명드리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즉 사람들에게 하기 싫은데 억지로 환경과 내가 둘이 아니니 환경을 보호하라고 하며 수많은 실천방법들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근원적인 불이법의 지혜를 깨닫게 함으로써 인간과 자연이 본래 둘이 아니었음을 스스로 깨닫게 해 줄 수 있다면, 저절로 삶 자체가 환경을 살리는 실천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선불교에서는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고 하여, 곧바로 자기의 본래마음, 즉 내가 누구인지를 곧바로 확인하게 합니다. 깨닫기 전에는 이 몸과 마음을 나라고 여기며 살아왔지만, 문득 진정한 자기를 확인하고 나면, 이 몸과 마음이 나인 것이 아니라, 나를 구성하고 있는 연기적으로 연결된 이 온 우주 삼라만상 전체가 그대로 나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불이법, 연기법, 동체대비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 몸만 내가 아니라, 이 우주 전체가, 지구 전체가 바로 나의 몸이라면 어떤 삶을 살겠습니까? 내 몸을 애지중지하며 살아왔듯, 이 지구환경을 내 몸처럼 가꾸며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이 될것입니다.
기자: 유크레인 전쟁이 나서 생각을 더 해보게 되는 것 중 하나인데요.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지는 못할 망정, 생존에 꼭 필요한 식량까지 전쟁의 도구로 쓰고 있고, 이렇게 싸움을 하는 인간의 무지와 탐욕은 어떻게 하면 더 나아질 수 있을까요?
법상스님: 이건 어찌 보면, 꼭 우크라이나 전쟁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 역사 자체가 계속해서 이런 끊임없는 전쟁이 있어왔고, 끊임없이 인간의 탐진치 삼독에서 비롯된 다양한 분란과 전쟁과 가난과 기아 등 많은 문제들이 인류 역사에서 계속 있어왔습니다. 이런 전쟁 같은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시스템을 바꾸거나 사상철학을 바꾸거나 또는 비폭력운동을 전개하거나, 전쟁이 없는 운동을 벌이거나, 그런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실천은 해야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을 가지고 근원적인 문제의 해결이 된다고 저는 보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하면, 인간이란 존재는 본래가 '나다'라는 아상(我相), 에고, 자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게 집단적으로 '나', '내 것', '내 나라' 이런 허망한 관념 속에 사로잡혀 있는 한, 이 아상이라는 근원적인 어리석음 때문에 전쟁 등은 끊임없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전쟁 뿐 아니라, 탐진치 삼독으로부터 비롯된 수많은 인류의 문제들이 끊임없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이 됩니다.
근원적인 문제의 해결이라면, 아까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계속 같은 얘기가 나오겠지만.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깨어나야 될 것입니다. 아상이라는 허상을 깨고 나와야 합니다. 진정한 지혜에 눈을 떠야만 합니다. 아상과 탐진치 삼독에 사로잡힌 중생들이 사는 세계는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 불교의 마음공부라는 것이 바로, 자신의 괴로움을 소멸시켜주는 가르침인 동시에, 인류의 전쟁과 기아, 불평등 등 무수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근원적인 답이 아닐까 싶습니다.
기자: 미국이 인플레이션으로 주식 폭락 등 경제적 어려움을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경제적 상황은 중요한 것입니다. 이런 어려운 경제적 상황을 어떻게 잘 극복해나갈 수 있을지 스님의 고견을 부탁드립니다.
법상스님: 사실 저는 사회문제, 경제문제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전문가적인 식견은 좀 부족해서 원하시는 답변을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근본적으로 봤을 때, 어차피 세상은 대공황도 왔다가고, 호황도 왔다가고, 불황기도 왔다가고, 전쟁도 왔다 가고, 인플레이션도 디플레이션도 스테그플레이션도 인연 따라 왔다가 가며 무상하게 계속 변화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황이든 호황이든, 인플레든 뭐든 그것이 왜 오는지 그 어떤 세상의 전문가라 할지라도 정확하게 딱 집어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무수히 많은 인연들이, 즉 중중무진(重重無盡)연기라고 하듯, 무수히 많은 원인과 조건들이 화합하여 일어나는 것이기에, 딱 짚어 한 두 가지나 수 십 가지를 원인이라고 딱 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결국에는 ‘모를 뿐’ 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안다’고 할 때, 그것을 정말로 아는 것이 아니라, 내 방식대로 아는 것일 뿐입니다. 여기에서는 옳은 것이 저쪽에서는 틀린 것이 될 수도 있고, 이 곳에서는 정의로운 것이 다른 곳에서는 그렇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안다’는 것은 이것과 저것을 둘로 나누어서 비교했을 때만 상대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일 뿐입니다. 나보다 키작은 사람들 속에서 나는 큰 사람이고, 큰 사람들 속에서는 작은 사람인 것처럼, 나의 크고 작음은 정해진 알 수 있는 무엇이 아니라, 상대적으로만 그렇게 인식될 뿐인 것이기에, ‘모를 뿐’인 것입니다. 그것은 크다거나 작다는 상(相), 즉 허상일 뿐이지, 정말로 나는 작은 것도 큰 것도 아니며, 상대적으로만 크거나 작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크다거나 작다는, 잘났다거나 못났다는, 능력이 있거나 없다는 그 모든 분별, 상이 전부 진실이 아니기에 허망하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분별심의 허망함입니다. 이 아는 마음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허망분별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경제 문제의 원인을 파악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경제학자들의 몫일 뿐이고, 그 또한 알고 모르고 앞에 겸손해야 하지, 절대적으로 내 학설이나 내 설명만이 옳다고 할 수는 없음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하나 하나의 분별 속에 들어가서 하나 하나의 해결하는 방법들을 제시하기보다는, 그 모든 것들이 통으로 '상(相)'이구나. 우리가 만들어놓은 허상이구나.
금강경에서 말하는 '모양 상(相)'자, 이미지, 모양, 일체가 이 상이구나를 깨달아야 합니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고 했듯이, 상이 있는 모든 것은 허망한 것이어서, 일체의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바로 볼 때 여래를 볼 것입니다.
그 모든 문제들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 상의 근원이 무엇인지, 그 허망성을 자각함으로써 ‘이 문제가 문제가 아니었구나’라는 진실을 통찰해보는 것입니다. 결국 모든 문제는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라고 해석한 것일 뿐입니다. 사실 세상은 그저 있는 그대로일 뿐입니다. 그것을 분별의 눈으로 보면 문제도 될 수 있고 문제가 아닐 수도 있을 뿐입니다.
사실 우리가 이 세상의 모든 문제들을 문제 삼으면서 그것을 해결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무수히 많은 문제들과 싸우고 그 원인을 밝히고 해결하여 애쓰더라도 그 문제와의 전쟁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나에게는 분명 문제인 것이 상대방에게는 전혀 문제가 아닐 수도 있고, 나에게는 이렇게 풀어야 하지만, 상대는 반대의 방식대로 풀어야 한다고 언성을 높일 수도 있는 겁니다.
세상의 모든 문제는, 전부 결국에는 한 문제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세상이 무엇인지, 생각은 무엇인지, 그 모든 문제들의 근원적인 본질이 무엇인지를 문득 깨닫게 되면 문득 일체 모든 문제가 문득 쉬어지게 됩니다. 이 모든 질문들은 사실 한 질문입니다. 선불교에서 말하는 ‘이뭣고?’라는 화두가 타파되어질 때, 이 모든 문제는 한 순간에 문득 몰록 놓여지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일체 모든 사람들의 문제, 인류의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근원적인 방법 아닌 방법일 것입니다.
기자: 코로나로 인해 미국 내에서 동양인들에 대한 심각한 인종차별이 일어나서 폭행과 심지어 사망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 면에서 한 가르침 주실 수 있으신지요?
법상스님: 먼저 매우 안타깝습니다. 가슴이 아프기도 합니다. 미주현대불교 독자분께는 단 한 분도 이런 차별을 받지않길 바라고, 나아가 모든 한국 교포분들 그리고 모든 동양인들 그리고 그 어떤 인종에 속해있는 분들도 차별적 대우를 받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제가 하는 답변이 전부 다 같은 답변이라서 송구합니다만.
코로나로 인한 인종 차별의 문제, 그 문제에만 해당하는 정해진 답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게 다양한 분별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분별은 '나눌 별'자, '구별할 별'자. 대상을 나누어서 비교.분별한다. 이겁니다.
황인종, 백인종, 흑인종을 비교하고 분별해서 어떤 사람은 우월하고 어떤 사람은 못하다든지, 또 부처와 중생을 비교한다든지, 부자와 가난을 비교하든지, 잘나고 못난 사람을 비교분별한다든지, 이 나라와 저 나라를 비교분별한다든지, 이런 식의 모든 분별로 인해서 일어난 문제, 그게 바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괴로움의 원인입니다. 괴로움의 원인은 대상을 둘로 나누어서 파악하고(분별심) 이것과 저것이 다르다보니까, 어떤 건 좋아하고 어떤 건 싫어하고, 좋아하는 건 더 취하려 하고, 싫어하는 건 밀쳐내려고 하는 '취사간택심(取捨揀澤心)'을 일으킵니다. 좋은 건 취하고 싶어 집착하고, 싫은 건 내 인생에서 없애고 싶어 기를 쓰는 이런 유위조작의 애씀이 생기고, 내가 뜻하는 대로 취사 간택이 안되었을 때, 더 갖고 싶은데 못 가져서 괴롭고, 없애고 싶은데 못 없애서 괴로운 문제가 생겨납니다.
분별이야말로 모든 인종 차별의 문제 뿐만 아니라, 인류의 모든 문제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창세기 같은 데도 보면 선악을 알려주는 나무가 있고 생명의 나무가 있다 그러지 않습니까. 선악과를 따 먹으면서 원죄가 생겼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선악과라는 그 최초의 분별, 이게 불교에서 말하는 '근본 무명'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근본 무명이 어디에서 일어났느냐. 바로 분별심에서 일어났다는 겁니다.
불교에서 분별심을 분별지(分別智)라고 하고, 무분별심을 반야 지혜라고 부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지혜가 바로 무분별지(無分別智)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생을 분별지만 쓰면 살아왔습니다. 사람들을 파악하고, 분별하고, 나누고, 구별하고, 차별하고, 이런 일들을 하는 겁니다.이 분별지를 이제 무분별지로 전환시킨다고 할까. 사람들은 분별된 지식 중에 가장 올바른 지식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것보다 더 나은 걸 찾아서 그것을 취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걸 찾기 위해 불교로 와서 불교가 가장 위대한 지혜인 것 같으니 불교를 잡아서 불교를 취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 또한 취하는 것입니다. 그 또한 분별이며 취사간택일 뿐이라는 겁니다. 금강경에 보면 '불법은 불법이 아니라 이름이 불법일 뿐이다.'라고 합니다. 불법이라는 그 자체에 대해서도 고집해서 집착할 수 없다는 겁니다.집착해선 안 된다고 얘기하는 이유가 불교는 수없이 많은 세상의 지식들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지식인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세상의 분별의 지식들, 그것을 몰록 내려놓는 데에서 그 이전, 그 바탕의 무분별지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지식, 사상, 종교를 세간법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불교는 출세간법이라고 부릅니다. 아예 범주가 다르다고 할까요? 세간법은 분별법이어서 세상에서 가장 올바른 분별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찾고 선언하지만, 불교라는 출세간법은 무분별법이어서 옳고 그른, 취하고 버릴 그 무엇도 찾아내지 않고, 거기에 머무를 교리를 만들지 않습니다. 불교의 모든 교리는 거기에 머물러 신봉하라는 교리가 아니라, 그것조차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불교경전에서는 부처님께서는 평생을 설법하셨지만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다고 하셨고, 무주법이라고 하여 진리 그 자체에도 머물러서는 안 되다고 하셨으며, 이 법은 강을 건너는 뗏목과 같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은 방편일 뿐이라고 설하셨습니다. 불교는 설하여 내세울 특별한 주의주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를 선불교에서는 ‘아난아! 문 앞의 찰간을 꺾어버려라’라고 설하곤 했습니다. 불교에서는 내세우는 교리와 주장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내세우는 모든 주의주장과 분별을 깨뜨릴 뿐입니다. 그걸 파사현정(破邪顯正)이라고 부릅니다. 삿된 분별심을 깨뜨리기만 하면 바른 것은 본래 드러나 있다. 본래 구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분별심 때문에 그 본래 부처를 보지 못하고 자기 생각과 분별에만 갇혀서 스스로 만든 생각과 분별이라는 감옥 속에 자승자박으로 빠져서 그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모든 분별을 불교에서는 깨뜨려주는 것 뿐이지, 따로 내세우는 주의주장도 없고, 진리도 없고, 열반해탈도 없습니다. 아픈 사람에게는 건강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아픈 사람은 '나는 건강해지고 싶어.' 하면서 건강이라는 뭔가를 찾고 싶어하는데, 본래부터 건강했던 사람은 '나는 건강하고 싶어.'라는 얘기를 안 합니다. 그냥 건강하게 살 뿐이지. 건강이란 말조차 없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그런 것처럼 해탈한 사람에게는 '나는 해탈했어.' 이런 생각이 없습니다. 그냥 괴로움이 사라졌을 뿐이지. 불교의 핵심은 사성제라고 하듯이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 즉 괴로움이 소멸되면 그 뿐이지, 열반해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까 '색즉시공 공즉시색' 말씀하셨는데, 이 세상 모든 가르침들이 전부 다 '지금 나는 부족하니까 더 나은 존재, 더 나은 이상 세계로 가야 되.'라고 설명한다면, 불교는 전혀 그렇게 얘기하지 않습니다. 바로 지금이다. 색이 있는 지금 여기가, 오온이 있는 여기가 바로 진실의 자리다. 따로 가야할 곳이 있는 게 아니다. 네가 찾아야 할 부처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이렇게 선언하는 가르침입니다. 공(진리)을 깨닫고 나야만 바로 지금 이 현실로 돌아와 자연스럽게 눈앞을 사는데도 더 이상 문제가 문제가 아닌, 현실을 진실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 ‘이것’ 혹은 ‘저것’이라는 분별의 답을 주는 것이 아님에도, 자연스럽게 그저 눈앞을 살 뿐인데도, 무분별지의 지혜로운 행위가 삶으로써 모든 문제를 해결할 답을 절로 보여주게 되는 것입니다. 삶이 곧 답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분별지의 근원적인 해결책이지, 분별의 해결책으로 인류의 그 모든 문제를 푸는 것은 요원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이 근본적인 무분별지에 눈뜨는 것이 인종 차별 문제, 빈부간의 격차 문제, 동서양의 갈등, 종교간의 갈등은 물론 분별에서 파생되어 나오는 인류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근원적인 치유의 약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기자: 스님의 유튜브를 보고 출가하신 분들이 여러 분 있다고 들었습니다. 유튜브에서는 어떤 법문을 하시는지요?
법상스님: '법상스님의 목탁소리'라는 유튜브 채널에서는 주로는 선불교를 기반으로 하여 대승불교와 초기불교를 아우르는 다양한 가르침들을 설하고 있습니다. 선불교의 깨달음을 '견성'이라고 합니다. 목탁소리 싸이트에서는 주로 '법문을 듣고 깨닫는다'고 하는 언하대오의 선불교 정신에 따라, 다른 수행을 특별히 할 필요가 없으며, 진지한 발심과 열정만 가지고 법문을 듣다 보면 문득 자신의 본래면목을 확인하게 된다는 내용으로 법을 설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초기 선불교인 조사선의 가르침입니다. 지금은 모름지기 깨달음의 시대라고 할 만큼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방편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답을 찾고 있고, 자신의 괴로움을 해결하며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전 세계적으로 명상, 힐링, 영성 등이 널리 알려지고 주목을 받았지만, 결국 그런 명상수행법들이 자기 문제를 해결하고 괴로움을 해결함으로써 스스로를 깨어나게 하지 않는다면 그 효용가치는 한계에 부딪칠 것입니다. 어쩌면 이 초기 선불교는 아직 세상에 선보이지 않은 미지의 가르침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불교는 초기 선불교인 조사선이 후대에 오면서 중국 송나라 때 수행법으로 정착된 간화선 불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간화선도 물론 훌륭한 수행법이지만, 조사선이야말로 방법 아닌 방법으로 중도를 곧바로 드러내 보여주는 직지인심 견성성불의 첩경이라고 생각합니다. 생생하고 활발발하게 살아있는 선법이지요. 신기하게도 지금은 많은 현대인들이 의식 수준이 높아지고 있어, 방편을 뺀 직접적인 초기 선불교의 가르침이 '놀랍게도' 먹히는 시대라고 보여집니다. 비로소 불교의 오랜 가르침이 본격적으로 뿌리를 내릴 수 있는 환경이 갖추어 졌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불교 뿐 아니라 타종교인들까지 많은 분들이 유튜브 설법을 듣고 진정한 자기의 본래면목이 무엇이었는지를 확인하고, 스스로 만든 괴로움에서 빠져나오는 놀라운 체험들을 하고 있습니다. 모름지기 깨달음의 시대인 것입니다. 단, 불교 스스로도 오랜 불교의 역사 속에서 생겨난 방편, 기복, 유위조작의 수행법들, 전통 등에 사로잡히던 틀을 깨고 나와야 할 것입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너머 '달' 그 자체를 확인하려는 간절함과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파사현정의 정신처럼, 삿된 것을 깨뜨리고 나와야만 본래 드러나 있던 참된 진실에 눈 뜰 수 있습니다.
유튜브에 올리는 내용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불교의 기본적인 교리와 경전강의, 선어록 강의 등을 시리즈로 올려드리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올려드린 경전 및 선어록 강의는 반야심경, 금강경, 천수경, 육조단경, 마조어록, 돈오입도요문론, 수심결, 대승찬, 보현행원품, 신심명, 법성게 등의 강의가 전편 올라가 있습니다. 또한 불교교리, 명상의 기초, 기도수행의 참된 의미, 고민하는 청년들에게, 지구별 여행기, 주제별 짧은 강의 모음, 초청법회 법문, 마음공부 에세이, 각종 인터뷰 내용 등 다양한 형식의 글과 강연 등이 업데이트 되어 있습니다. 현재도 매주 3편 정도의 강연 영상을 업데이트 하고 있습니다.
기자: 스님은 누구십니까?
법상스님: 제가 누구인지 말을 한다면, 믿으실까요? 아니면 그걸 받아들이실 수 있을까요?
... 이미 답을 했는데... 알겠습니까?
날짜: 8월 2일
장소: 서울시 마포구 불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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