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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길기행] <4>문경 하늘재 가는길 | ||||||||||||||||||||||||||||
◆세상에 밟히며 내세를 바라보는 고개 경상북도 문경시 관음리와 충청북도 충주시 미륵리를 잇는 하늘재 양쪽 밑에는 오랜 세월 동안 쌓인 사연들이 촘촘히 박혀있다. 하늘재는 낙동강과 한강을 가르는 분수령이며, 현세와 내세를 가르는 정점이기도 하다. 보이는 것의 경계이면서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인 것이다. 하늘재 밑 문경 쪽은 관음리라는 지명처럼 현세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남향을 한 기슭에는 우리 선조들의 질박한 삶의 흔적이 많다. 그 중에서 많은 백자 도요지는 이곳의 물산(物産)이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잘 알 수 있게 해 준다. 도자기를 만드는데 필요한 점토, 유약, 땔감이 풍부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재료들은 질박한 우리 선조들의 삶과 너무도 닮았다. 8대째 청화백자의 맥을 이어오고 있는 조선요 김영식 명장이 하늘재 밑에 자리잡고 있다. 1700년대 중반 이곳에 가마터를 잡은 그의 8대조 김취정(金就廷) 옹과 그 뒤를 이어 이 가계는 대대로 도자기를 빚어왔다. 그의 가계는 경주 김씨 계림군파. 1대 도공 김취정 선생부터 김광표, 김영수, 김락집, 김운희, 김교수, 김천만(복만, 정옥) 씨로 이어지는 한국최고의 도예가문 종갓집인 셈이다. 하지만 사회가 새로운 시대를 쫓아 급변하기 시작했고, 도자기산업도 대량생산이라는 산업화의 시대를 맞았다. 수공업은 사라지고, 농업시대가 공업시대로 썰물처럼 쓸려나갔다. 이처럼 하늘재 밑 문경 쪽 관음리는 현세 사람들의 치열한 삶의 모습을 잘 찾아볼 수 있는 곳이다. 오랜 세월 동안 이곳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계를 꾸리기 위해 쉼 없이 자연과 세리(勢利)에 순응하기도 하고, 도전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실루엣처럼 펼쳐진 비바우를 둘러싼 역사 그런 현세 사람들의 모습이 하늘재를 둘러싸고 있는 포암산의 비바우에 삼베처럼 실루엣으로 펼쳐져 있다. 역사의 실루엣, 문화의 실루엣, 사람들의 실루엣이 빨랫줄에 널린 삼베처럼 걸려있다. 길은 사람들을 모았고, 사람들은 모여 문화를 만들었다. 비바우에는 그 모습들이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처럼 그려져 있다. 156년부터 2011년까지 희미한 역사의 수레바퀴 자국과 수많은 이야기가 겹쳐져 있다. 삼국통일의 꿈을 안고 하늘재를 지나간 김춘추, 망국의 한을 품고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난 마의태자, 하늘재 이남을 끝내 탈환하지 못한 온달장군의 모습들이 희미하게 늘려있다. 그리고 수많은 민중들의 지게행렬이 실루엣으로 걸어가고 걸어오고 있다. 바다에 막혀 더 나갈 수 없었던 영남인들이 대륙을 향해 끊임없이 넘었던 고갯길, 기호인들이 바다를 향해 끊임없이 남하했던 고갯길이다. 백두대간을 따라 산맥이 흩어지고, 흩어진 끝자락에 다시 물줄기를 모으는 한강과 낙동강. 한반도 남쪽은 크게 이 지형에 따라 형성되었고, 이 지형의 정점에 하늘재는 서있다. 하늘재 밑에 사는 문경사람, 영남사람들은 이 길을 통해 ‘비바우를 보면서 미륵대이(미륵사지)를 넘나들었다. 현세의 사람들에게 계립령, 또는 하늘재라는 말보다 문경사람들이 일컫는 말인 ‘가나믄, 지릅재, 비바우, 미륵대이’가 더 육감적으로 와 닿는다. 그 중에서 ‘비바우’는 하늘재를 압도하고 있으면서 하늘재의 옛 이름을 만들어 낸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지릅’은 삼베 껍질을 벗긴 삼(麻)대궁을 일컫는데, 그 삼대궁의 모습을 비바우는 지금도 잘 보여주고 있고, 이 모습에서 ‘지릅-계립’이라는 지명이 나온 것이다.
◆하늘재에 몰리는 도예문화와 불교문화 이달 15일 한파경보가 내려진 하늘재의 관음리-미륵리 사이는 현세와 내세의 모습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관음리는 잘 포장된 길이었고, 미륵리의 길은 옛 그대로다. 가는 길손을 반갑게 맞아주는 노변(路邊)의 조선요 김영식 명장은 우리 일행에게 말차까지 손수 한 잔 만들어주었다. 하늘재의 터주대감이 한파 경보까지 녹여주었다. 그리고 160년 전에 만들어져 자신이 보호하고 있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망댕이가마’도 보여주었다. 최근 이곳에는 도예인을 비롯해 불교미술가, 문인 등이 새롭게 둥지를 많이 틀고 있다. 1999년 하늘재에 터를 잡은 김종섭 관음불교미술원 원장은 2005년부터 6년째 매년 11월 이곳에서 수많은 원혼을 달래고 극락왕생을 비는 불교의식의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고 했다. 육군 법사 출신이면서 불화(佛畵) 전문 화가인 김 원장은 하늘재가 삼국시대부터 임진왜란, 6·25전쟁을 거치면서 수많은 군인과 민간인, 의병이 숨진 곳이기 때문에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는 것이다. 또 우리나라 시조계의 중견작가 권갑하 씨가 ‘산다시월(山茶詩月)’이라는 창작실을 짓고, 서울과 관음리를 오가고 있다고 했다. 가장 최근에는 경기도 이천에서 활동하던 명장 김종욱 선생이 ‘관욱요’를 열고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주변엔 제법 산골 같지 않게 별장 같은 요장(窯場), 창작실들이 좋은 자리마다 차지하고 있었다. 관음리에는 지금 많은 사찰들이 앞다투어 들어서고 있다. 관음정토를 꿈꾸는 종교의 행렬이다. 옛 불교 유적인 삼층석탑, 반가사유상, 미륵보살입상들을 사이에 두고 다시 한 번 정토의 세계가 열리는 듯하다. 하늘재 정상에는 현세와 내세를 연결하는 바람이 세게 불고 있었다. 문경시가 2001년 세운 ‘계립령유허비’에는 하늘재의 역사와 역할이 소상하다. 청아한 기운을 가득 머금고 솔바람 들꽃 향기 그윽하게 피어내며 구름 한 점 머무는 고즈넉한 백두대간의 고갯마루. 태초에 하늘이 열리고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면서 영남과 기호지방을 연결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맡아 장구한 세월 동안 역사의 온갖 풍상과 애환을 고스란히 간직해 온 이 고개가 계립령(鷄立嶺)이다. 신라가 북진을 위해 아달라왕 3년(156) 4월에 죽령과 조령 사이의 가장 낮은 곳에 길을 개척한 계립령은 신라의 대로로서 죽령보다 2년 먼저 길이 열렸다. 계립령을 넘어서면 곧바로 충주에 이르고, 그곳부터는 남한강을 이용해 한강 하류까지 일사천리로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삼국시대에 신라는 물론 고구려, 백제가 함께 중요시한 지역으로 북진과 남진의 통로였으며, 신라는 문경지방을 교두보로 한강유역 진출이 가능했고, 이곳 계립령을 경계로 백제와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시켰다. 계립령을 사이에 두고 고구려 온달장군과 연개소문의 실지(失地) 회복을 위한 노력이 시도되었고 왕건과 몽골의 차라대가 남하할 때, 또 홍건적의 난으로 공민왕의 어가(御駕)가 남쪽으로 몽진(蒙塵)할 때도 이 고개를 이용했을 가능성이 있는 등 숱한 사연을 담고 있는 곳이다. 고려시대 불교의 성지인 충북과 문경지방에 이르는 계립령로 주변에는 많은 사찰이 있었으나 전란으로 소실되었고, 그 유적과 사지(寺址)만 전한다. 조선 태종 14년(1414) 조령로(지금의 문경새재)가 개척되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조령로가 험준한 지세로 군사적 요충지로 중요시되자 계립령로의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점차 떨어지게 되어 그 역할을 조령로에 넘겨주게 되었다.
◆내세의 세상 미륵리로 향하다 북쪽을 향해 걷는 길은 스산한 숲의 어둠이 짙다. 눈이 내려 길을 밝히지 않았으면 한낮이라도 캄캄할 뻔 했다. 동지 섣달 한파에 언 바람이 깊은 숲속에서 몸서리치게 운다. 인간이 한 번도 확인해 보지 못한 내세의 모습이 이런 곳은 아닐까? 매섭게 찬 기운이 몸을 더욱 굳게 만든다. 쭉쭉 뻗어 올린 나무들이 향하는 곳을 올려다보면 하늘이 걸려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걸려 왔다 갔다 하는 하늘엔 파란 기운이 언뜻언뜻 내세의 환영을 펼치고 있었다.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내세의 길에 처음 가보는 현세의 발자국이다. 숲과 길은 자신의 모습을 완고하게 지키고는 결국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다. 다만 내세도 현세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암시라도 주는 양 ‘김연아를 닮은 소나무’ 한 그루를 길 옆에 세워두었다. 지난해 온 국민들에게 환상의 아이스쇼를 펼쳐 짜증난 현세의 도피처로 나타났던 김연아의 ‘비엘만 스파이럴’모습을 소나무 한 그루가 재현하고 있다. 그리고 나타난 미륵세계. 56억7천만년 뒤에 이 세상에 출현, 석가모니불이 미처 구제하지 못한 중생을 구제한다는 부처님-미륵불이 추위에도 온화한 웃음으로 미륵리에 서 계셨다. 그곳은 관음 사람들이 그렇게도 궁금해 하던 세계였다. 대다수 미륵불은 서방정토를 바라보는데, 이곳 미륵불은 북쪽을 향하고 있었다. 현세의 관음 사람들이 가고 싶어 하는 북쪽 땅 한양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집요한 관음 사람들의 꿈을 이 미륵불은 담고 있는 것이다. 현세와 불과 오리 남짓 떨어진 내세. 미륵리. 불상 앞으로는 석등과 5층 석탑이 나란히 서 있다. 이곳의 물은 이제 한강으로 모여 흐른다. 관음 사람들이 낙동강을 따라 오다가 백두대간의 하늘재 고개를 넘어 다시 한강을 따라 갈 수 있는 곳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 옛날 신라가 고려에 망하면서 마지막 왕자요, 공주였던 마의태자와 덕주공주의 흔적이 빼곡히 들어선 월악산 계곡과 덕주산성, 덕주사를 지나면 그 끝이 미륵세계가 최초로 펼쳐지는 곳이다. |
첫댓글 이 길을 우리 선조들이 얼마나 많은 제각각 많은 이유와 사연 떄문에 걸어서 또는 노새나 나귀를 타고 지나 다니셨겠지요.....잘 보았습니다.
하늘재에있는포암사에다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