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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01. 묵상글 들 (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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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01.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가을이 익어갑니다. 우리 안에 사랑도 익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곧 ‘회개하지 않은 도시들에 대한 불행선언’(13-15절)부분과 ‘파견 받은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파견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같다’(16절)는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첫 부분에서 코라진, 벳사이다. 가파르나움이 심판을 받은 이유는 그들의 죄악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요, 더 나아가서는 회개하지 않은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이 사랑을 많이 받고도 회개하지 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곧 그들은 말씀을 듣지 못했거나 기적을 보지 못했거나 사랑을 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다른 도시들보다도 더 많은 사랑을 받았음에도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주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도 여전히 회개하는 일에는 더딘 저희에게도 해당하는 말씀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루카 12,47-48)
오늘 <복음>의 둘째부분에서, 우리는 우리 주님의 애태우시는 음성을 듣습니다. 죄인의 멸망을 바라지 않으시고, 회개하여 살기를 바라시는 사랑의 음성입니다.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이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루카 10,16)
이는 말씀을 전하는 이가 얼마나 존귀한 사명을 수행하고 있고, 얼마나 고귀한 신분인지를 깨우쳐줍니다. 동시에 파견 받은 이는 파견 받은 분에게 메여 있어야 함을 말해줍니다. 파견 받은 자는 파견하신 분을 대신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회개’에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말씀은 말씀을 듣는 이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파견 받고 있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곧 말씀을 듣는 이가 아니라 말씀을 전하는 이에게 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는 말씀을 듣고도 그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너희는 너희를 보낸 분께 매여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곧 말씀을 듣는 이들의 반응이나 결과에 매달리지 말고, 보내신 분께 매달려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말씀을 전하는 이에게 중요한 것은 먼저 말씀을 품고 있어야 하고, 말씀의 영을 따르는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열 두 사도를 파견하실 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20)
그렇습니다. 파견 받은 우리는 아버지의 영을 품고 있음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루카 10,16)
주님!
파견 받은 자의 사명이 얼마나 존귀한 것인지를 명심하게 하소서.
말씀을 듣고도 받아들이지도, 회개하지도 않는다 하여도
언제나 저를 보내신 당신께 매여 있게 하소서.
당신의 말씀을 품고, 당신의 영께 매여 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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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01.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회개의 삶
목말라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우물이 있는 곳을 알려주었습니다. 그것은 목마른 사람에게는 아주 기쁜 소식입니다. 그 소식을 듣고 우물을 찾아가는 사람은 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죽게 될 것입니다. 만약 살았다면 말을 잘 들은 사람이요, 죽었다면 말을 듣지 않은 사람입니다. 말을 듣지 않은 사람에게 주어진 죽음은 누가 그를 죽인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죽음에 떨어진 것입니다.
오늘 언급된 코라진, 베싸이다, 지역은 가파르나움과 함께 갈릴래아 호수 북동 해안에 삼각대를 형성하고 있고 예수님의 주 활동 무대로써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내신 예수님의 기적들이 특히 두드러진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동네들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생활하는데 더뎠습니다. 많은 은총을 입은 만큼 새 삶을 살아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께서 경고합니다. “심판 때에 띠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네가 하늘에 오를 것 같으냐?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루카10,15).
사실 띠로와 시돈은 이방인 지역으로 유다인들은 이 동네 사람들을 세속적인 관심사에 빠져버린 곳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다 인들은 자기네 동네와는 달리 하느님의 은총을 받지 못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동네보다도 못하다고 꾸중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 꾸중을 듣는 것이 속상하고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거두고 자신의 속을 본다면 얼마나 큰 은총인지요? 쓴 것이, 약이 된다는 말을 새삼 생각합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아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 세상의 자녀들보다도 못하다면 그만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알고도 실천하지 않았다면 매를 맞아도 많이 맞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오시면 어둠 속에 감추어진 것을 밝혀내시고 사람의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에는 각 사람이 하느님으로부터 응분의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1코린4,5).하고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의 행실대로 갚아주실 것입니다(에제18,30.로마2,6).
그러므로 말을 잘 듣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듣고 행하였을 때 잘 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에 순종한 이들을 봅니다. “노아는 모든 일을 하느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했습니다”(창세6,22). “주님께서 당신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을, 모세는 다시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였고, 여호수아는 또 그대로 실행하였다. 여호수아는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 가운데에서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다”(여호11,15). “욥은 이 모든 일을 당하고도 죄를 짓지 않고 하느님께 부당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욥기1,22). 히즈키야는 “주님께 매달려 그분을 따르는 일에서 돌아서지 않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들을 지켰다. 주님께서는 그와 함께 계시며, 그가 무슨 일을 하든지 성공하게 해주셨다”(2열왕18,6).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2,51).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2,8).
우리도 말 잘 듣는 사람, 즉 순종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목말라 죽어가는 사람에게 샘을 알려주어도 찾아가지 않으면 스스로 죽음에 떨어지는 것이듯 회개의 삶을 살지 않는 자체가 하느님을 떠나 죽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이 회개할 때 자루를 뒤집어쓰고, 재 위에 앉거나 머리에 재를 뿌린 것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외적으로 드러낸 행위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이나 비난까지도 감내하겠다는 마음가짐입니다. 진심이 담겼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며 진정한 회개의 삶으로 행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불행은 죄의 결과로 볼 것이 아니라 기회를 무시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기회를 잃어버리지 않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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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01.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 아기 예수를 사랑한 작은 꽃
아기 예수님을 사랑하여 작은 꽃이라는 애칭을 불린 데레사 성녀를 기리면서 전교 성월을 시작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를 인체에 비유한 바 있습니다. 그분은 교회의 머리이시고 교회는 그분의 몸이라는 것입니다. 머리는 인체를 움직이는 두뇌이므로 그분의 뜻이 가장 중요하고, 몸에서는 온 몸의 지체들과 세포들을 움직일 수 있는 피를 만들어내는 심장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 피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뜻도 사랑인데, 특히 인간을 먼저 지어내시고 완성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세상도 사랑을 원하고 좋아하지만 아직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난 하느님의 사랑을 몰라서 저토록 어둠에 놓여져 있습니다.
데레사 성녀는 이 비유에 담긴 오묘한 이치를 깨닫고, 자신은 봉쇄 수도원의 담장 안에서 살지만 기도를 통해서 전 세계 오지에서 복음을 전하며 예수님의 사랑을 증거하고 있는 선교사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영적으로 전해주고자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랑이라는 피는 기도를 통해서 영적으로 얼마든지 전해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도 거슬러 행합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가장 많이 베풀어주셨던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 같은 믿는 사람들도 저주를 받았습니다. 말씀을 듣거나 기적을 보고도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않았고, 그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 전해 주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봉쇄수도원에 살거나, 하느님을 모르는 이들이 사는 지방에서 선교하거나 몸이 떨어져 있어도 이들을 통공하도록 이어주는 것은 기도입니다. 기도에 담긴 하느님 사랑의 피가 영적인 통공을 이룩합니다. 특히 기도 중에서도 시편 기도가 유용합니다. 왜냐하면 시편은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 중에 신심 깊은 이들이 하느님께 바쳤던 찬양과 감사, 탄원과 속죄 등 모든 지향을 다 담고 있는 기도이기 때문이고, 이 기도에서 우리는 그들 아나빔들의 진한 신앙 감각을 느끼고 배우며 통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봉쇄수도원에 사는 데레사 성녀도, 전 세계 여러 오지에 나간 선교사들도 모두 시편이 잔뜩 써 있는 성무일도를 매일 같이 기도하였습니다. 이 성무일도에 담긴 시편 기도로 그들은 하느님 사랑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데레사 성녀는 선교의 수호자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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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01.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조명언 마태오 신부님.
미국을 여행 중인 어떤 형제님께서 주일미사 참석을 위해 성당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어디에 성당이 있는 모르기에 호텔에서 나가 교통경찰에게 성당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소개받은 성당으로 가는데, 가는 길에 보니 다른 성당도 있는 것입니다.
미사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오면서 아까 소개했던 교통경찰에게 더 가까운 곳에도 다른 성당이 있던데 왜 더 먼 곳을 소개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말합니다.
“어느 성당이 좋은 성당인지 제가 가보지는 못했지만, 이곳에서 교통정리를 해보니까 이 성당에서 나오는 신자들의 표정이 가장 행복하고 기뻐 보였습니다.”
이렇게 기뻐하는 사람이 많은 성당이 가장 좋은 성당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하긴 나쁜 성당에 특히 부정적인 감정이 가득한 곳에 어떻게 기뻐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믿음이 가득한 곳에는 기쁨이 넘쳐납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곳에는 기쁨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있는 공동체는 어떤 것 같습니까? 기뻐하는 사람이 많습니까? 아니면 인상을 쓰면서 화를 내는 사람이 많습니까?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은 당신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기쁘게 이 세상을 사는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탄식이 이해됩니다. 갈릴래아 호수 북쪽 물가에 있는 도시들을 대상으로,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사실을 꾸짖습니다. 이는 저주가 아니라 탄식이며 마지막 호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은 당시에 상업적으로 활발한 도시였습니다. 주님께서 이 도시를 자주 방문하셨고 또 많은 표징을 보여주셨지만,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기쁨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계속해서 어렵고 힘든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제1독서의 바룩 예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죄를 짓고, 그분을 거역하였으며, 우리에게 내리신 주님의 명령에 따라 걸으라는 주 우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바룩 1,17.18)
지금 우리는 기쁘게 살고 있나요? 믿음으로 기쁘게 살아야 하는데, 믿음이 없어 기쁘게 살지 못하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어야 합니다. 세상 것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말씀에 집중하면서 참 기쁨을 간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더 이상 주님의 탄식을 부르는 말과 행동을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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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을 맛보는 능력은 관심을 갖는 일로부터 비롯된다(줄리아 캐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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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지난 7월부터 제 생활 리듬을 바꿨습니다. 3~4시에 일어나 일과를 시작하던 것을 5시에 일어나서 시작합니다. 책을 읽어보니 하루에 7시간 이상을 자야 정신 건강에 좋다고 해서, 나쁜 머리를 더 나쁘게 만들지 않으려고 밤 10시에 자고 5시에 일어납니다.
아침기도 후에 식사합니다. 요즘에 즐겨 먹는 것은 ‘떡’입니다. 냉동실에 있던 떡을 밖에 꺼내놓고 아침기도를 하고 나면 떡이 말랑말랑해져 있습니다. 냉동실에 넣기 전의 떡 맛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만약 떡 녹는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겠다면서 그냥 먹는다면 어떨까요? 아마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조금만 기다리지.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이 기다림의 시간을 생각해봅니다. 꽁꽁 얼었던 떡이 녹는 것을 기다리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도 녹도록 기다릴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합니다. 또 하느님의 마음을 녹이는 기다림의 시간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잘 기다리지 못합니다. 늘 급하고 ‘빨리빨리’를 외칩니다.
기다려야 합니다. 관계가 회복될 시간을 기다려야 하며, 자신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이것이 믿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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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01.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학교에서 배웠던 과목 중에 ‘논리학’이 있었습니다. 논리학은 나의 생각과 의견을 남에게 전하는 방법입니다. 논리학의 방법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3단 논법이었습니다. 3단 논법은 구체적인 사항을 예를 들면서 보편적인 가치를 드러내기도 합니다. 귀납법이라고 하였고, 경험론이라고도 하였습니다. 보편적인 예를 들면서 구체적인 상황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연역법이라고 하였고, 합리론이라고도 하였습니다. 한국은 1970년대에 산아제한 운동을 펼쳤습니다. 대표적인 표어가 ‘둘만 낳아 잘 기르자. 하나 낳아 젊게 살고 좁은 땅 넓게 살자.’가 있었습니다. 많은 전문가들은 산아제한 운동이 지속되면 고령화 사회가 될 것이라고 예측하였습니다. 그 결과 한국은 고령화 사회, 초 고령화 사회로 변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적인 변화는 교회에도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사제와 수도자의 성소가 자연스럽게 줄고 있습니다. 교회도 급속하게 고령화 되고 있습니다. 요즘은 출산장려 정책을 내놓고 있지만 한국의 출산율은 세계에서 가장 낮은 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의 질문에 답변을 하셨습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그들의 지식을 이용해서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하였습니다. 율법을 근거로 예수님과 제자들의 행동을 비판하였습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맞는지, 내지 않는 것이 맞는지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는 것에 대해서 율법에 어긋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겉을 씻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을 정결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과 요한의 제자들은 단식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신랑이 있는 혼인잔치에서는 단식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혼인잔치가 끝나면 단식할 때가 온다고 하셨습니다.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에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하시면서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었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누구에게서 오느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권위는 누구에게서 오느냐고 되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답변에 놀라워하였고,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구원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구원은 공간과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고 하십니다. 구원은 결단과 행동의 문제라고 말씀하십니다. 엘리야 시대에 가뭄이 들었지만 엘리야가 찾아간 것은 이방인 여인이었다고 하셨습니다. 엘리사 시대에 나병환자가 많았지만 엘리사가 치유한 것은 이방인인 나아만이었다고 하셨습니다.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인 것은, 실로암 탑이 무너져서 사람들이 죽은 것은 갈릴래아와 실로암이라는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하느님과 멀어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행동하지 않으면 하느님과 멀어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코라진과 베사이다는 구원의 방주가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가문, 혈통, 민족은 구원의 필요조건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성공, 업적, 능력도 구원의 필요조건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초라한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것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 잡던 어부들을 선택하신 것도 구원은 장소와 시간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결단하고 행동한다면,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삶의 방향을 바꾼다면 우리는 지금 이곳에서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바로 지금 이곳이 하느님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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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01.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인이 되십시오
-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의 생활화 -
가을은 기도의 계절입니다. 9월 순교자 성월에 이어 10월 묵주기도 성월, 11월 위령성월후 주님을 맞이하는 대림시기에 돌입합니다. 그러고 보니 전례력으로 벌써 한 해도 얼마 안 남은 느낌입니다. 어제의 끝은 오늘의 시작입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끝은 시작이요, 늘 새로운 시작이 있을 뿐입니다. 어제 80세 고령의 피정중인 수녀님이 수녀원에 들어오기전 본당신부님이 마지막 주셨다는 조언도 6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하루만 살아라!”
어제와 내일은 하느님께 맡기고, 날마다 처음이자 마지막 하루처럼 살라는 말씀이겠습니다. 어제 9월 마지막날은 성 예로니모의 사제 학자 기념일이었고, 오늘 10월 묵주기도성월 첫날은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입니다. 2017년까지 대축일로 지내다가 2018년 부터는 로마 보편 전례력에 따라 기념일로 지냅니다.
교회는 두 분 모두를 학자라 칭합니다. 두 분 성인이 참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성 예로니모가 사막의 선인장 꽃같다면 성년 데레사는 한떨기 장미꽃 같습니다. 성 예로니모가 80년 생애를 사신반면, 성녀 데레사는 고작 24년 생애를 사셨습니다. 성덕의 잣대는 ‘얼마나’의 햇수가 아니라, ‘어떻게’의 삶의 질인 사랑에 달렸음을 봅니다.
10월 묵주기도성월에 첫날 맞이하는 성녀의 축일은 늘 새로운 감동입니다. 코로나로 성가를 못 부르지만 그 전에 힘차게 불렀던 이문근 신부님 작곡하신 ‘성녀 소화 데레사’ 성가 292장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5절까지 감동적인 가사의 곡이지만 첫절만 소개합니다.
“위대한 사랑의 순교자 데레사여,
사랑의 길 찾아내신 소화여
첫째 기초 열렬한 사랑, 순결한 사랑
많이많이 구하소서, 우리 마음에
주 사랑의 절정에 달하신 데레사여
네 작은 길로 우리들을 이끄소서.”
시간 내어 오늘 꼭 성가 292장 소리내어 5절까지 기도하는 마음으로 불러 보시기 바랍니다. 성녀의 1987년 9월30일 마지막날 임종어도 감동입니다. 과연 내 마지막날 내 임종어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오, 저의 하느님, 사랑합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의 소명, 마침내 저는 그것을 찾았습니다. 제 소명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교회의 품 안에서 제자리를 찾았습니다. 저의 어머니이신 교회의 심장 안에서 저는 ‘사랑’이 될 것입니다.”
성녀 데레사는 24년의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한결같이 겸손하고 온유하였으며 꿋꿋하고 위대한 영혼의 성녀였습니다. 성녀는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사랑에 자신을 오롯이 바쳤고, 온통 자신을 휘감았던 어둠 가운데서도 순종의 정신으로 주님께 충실하였습니다. 성녀 데레사는 작은길, 작은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거룩함의 탐구에서, 성녀는 거룩함에 도달에, 사랑의 표현에 영웅적 행위들이나 위대한 업적들을 이루는 것이 불필요함을 깨달았습니다. 성녀의 고백입니다.
“사랑은 스스로 행위들로 증명한다. 나는 어떻게 사랑을 보이는가? 위대한 업적들은 나에게 허용되지 않는다. 내 사랑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꽃잎들을 흩어버리는 것들에 의해서다. 이들 꽃잎들은 모든 작은 희생, 작은 눈길과 말들, 그리고 사랑을 위한 가장 작은 일들을 행하는 것이다.”
가톨릭 교회의 자랑이자 참 보물은 교회 하늘에 무수히 반짝이는 별들같은 성인성녀들입니다. 영원한 회개의 표징, 희망의 표징, 구원의 표징이 되고 삶의 좌표가 되는, 하느님 계시다는 결정적 증거가 되는 성인성녀들입니다. 인생 허무와 무지, 무의미에 대한 결정적 답이 되는 성인성녀들의 존재입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성인 보유에 있어 세계 4위에 속합니다. 우리 천주교 신자 안에는 순교영성의, 또 성인의 영적 유전인자인 디엔에이(DNA)가 있음을 믿습니다. 기념하고 기억하라고만 있는 성인 축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 성인이 되라 격려하는 성인 축일입니다.
“여러분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저한테 묻는 다면 “성인이 되고 싶습니다.” 단 하나의 대답일 것입니다. 사실 진실한 천주교 신자라면 누구나의 참 소망은 성인이, 성녀가 되고 싶은 소망일 것입니다. 사실 이런 청정욕淸淨慾은 얼마든지 좋고 하느님도 기뻐하시기에 꼭 이루어질 것입니다.
저는 제 주변에서도 성인처럼, 성녀처럼 사는 분들을 무수히 만나고 만날 때 마다 “성인이 되십시오”, “성녀가 되십시오” 지체없이 말씀드리곤 합니다. 그러면 모두가 흡족한 표정을 짓습니다. 어제도 어느 자매가 고백성사시, “거룩한 사람, 의로운 사람, 빛의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라 고백하기에 지체없이 “성녀가 되십시오. 바로 인생의 궁극 목표입니다.”라 격려했습니다.
우리 모두 성인이 되라고 불림 받고 있습니다. 주님을 닮은 꽃처럼 참나의 모양과 크기, 색깔과 향기를 지닌 고유한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성인이 될 때 참행복, 참부자, 참자유인이요, 누구나의 의무이자 책임이자 권리인 성소라 할 수 있습니다.
성인이 되는 답은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뿐입니다. 기도의 여정, 회개의 여정에 한결같이 충실하는 것입니다. 새벽마다 강론을 쓰는 시간은 저에겐 기도의 시간, 회개의 시간이 되고 주님 사랑을 공부하는 시간이 됩니다. 그러니 매일 끊임없이 기도해야 하고, 회개해야 하고, 주님을 공부해야 하고,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기도와 회개가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입니다. 기도와 회개에 따른 겸손과 온유, 진실과 순수, 자비와 지혜의 선물입니다. 결국 사랑 하나로 요약되는 선물입니다. 더불어 주님이 삶의 목표와 방향이, 삶의 중심과 의미로 더욱 굳건히 자리 잡습니다. 그러니 참으로 살게 하는 것은, 참으로 성인이 되어 살게 하는 것은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의 사랑뿐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과 독서가 이를 입증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 “불행하여라!” 라는 불행선언의 대상인 코라진과 벳사이다와 가파르나움은 우리의 반면교사가 됩니다. 회개의 표징인 기적에도 회개하지 않는 무지의 병이 깊은. 무디어진 이 세 마을 사람들은 바로 우리의 기도와 회개를 촉구하는 반면교사가 됩니다. 아무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복음의 세 마을보다 죄없다고 장담할 수 없을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끊임없이 기도하는 이들!”
“행복하여라, 끊임없이 회개하는 이들!”
바로 답은 이 둘뿐입니다. 마음의 눈만 열리면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이들이 알게 모르게 회개의 표징들이 됩니다. 비단 복음의 제자들만 아니라 주변에서 만나는 하나하나를 통해 주님을 만나 회개하게 됩니다.
“너희 말은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형제들의 말을 듣는 회개의 순종이 바로 주님께, 아버지께 순종하는 길임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이런 순종이 없을 때 필연코 죄의 유혹에 끌리게 됩니다. 참으로 끈임없는 기도와 회개가 이웃에 활짝 열린 겸손과 순종의 사람이, 성인이 되게 합니다.
오늘 제1독서 바룩서의 바빌론 유배시 이스라엘을 대표한 바룩의 참회기도는 얼마나 깊고 진실하고 아름다운지요! 그대로 우리의 회개의 기도로 삼아도 좋겠습니다.
“주 우리 하느님께는 의로움이 있지만, 우리 얼굴에는 오늘 이처럼 부끄러움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죄를 짓고, 그분을 거역하였으며, 우리에게 내리신 주님의 명령에 따라 걸으라는 주 우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다른 신들을 섬기고 주 우리 하느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지르며, 저마다 제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대로 살았습니다.”
참 철저한 참회기도입니다. 무지에서 파생하는 온갖 병과 악과 죄입니다. 탓할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을 잊은 나의 무지의 죄입니다. 끈임없는 기도와 회개를 통해 주님을 만나고 주님과 사랑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치유되는 무지의 병이자 참나의 실현인 성인이요, 이는 우리의 평생과제요 공부가 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회개한 우리 모두의 무지의 어둠을 밝혀 주시어 성인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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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01.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루카 10,13)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많이 행하신 고을들에게 불행을 선언하십니다. 그 고을 사람들이 예수님의 현존과 가르침, 기적을 충만히 누렸음에도 죄악에는 기민했고 믿음에는 게을렀던 탓입니다.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루카 10,13)
꾸짖음의 내용을 잘 들어 보면 그 안에는 사실 꾸짖는 이의 기대와 바람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은총을 받았음에도 하느님께로 방향을 전환하지 않는 이들에게 불행 선언을 통해 "회개"를 강력히 촉구하시는 겁니다.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 쓰는 행위는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면서 모든 죄와 잘못에 대해 자비를 청하는 태도입니다. 하느님 앞에 자신이 죄인임을 인식하고 용서를 구하는 자세지요. 자루옷은 어떤 장식도 없는 투박하고 거친 천으로 자신의 비천함과 고행을 드러내며, 재는 세상 것에 한눈 팔고 달리다가 끝내 맞이하게 될 허무한 종말을 상징합니다. 자신의 근원과 목적을 외면하는 이는 결국 다 타고 남은 재의 신세가 되고 말 것이지요.
그런데 이 말씀에서 예수님의 실패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 고을들을 각별히 사랑하시고 더 많은 정성과 애정을 쏟아부으셨음에도 그들을 회개시키지 못하셨다는 걸 예수님도 인정하고 계시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의 사랑이 제대로 보답받지 못해서라기보다, 구원을 가로막는 완고하고 굳은 마음을 그들 스스로 고수하는 것이 안타까워서 꾸짖으시는 겁니다.
제1독서에서는 절절한 회개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죄를 짓고, 그분을 거역하였으며, 우리에게 내리신 주님의 명령에 따라 걸으라는 주 우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바룩 1,17)
이것이 패망과 유배라는 민족적 고통과 치욕 앞에서 이스라엘이 스스로 고백하는 자성의 골자입니다.
하느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여 당신 백성으로 삼으신 이스라엘의 죄는 그분과의 관계성을 파괴하는 데서 기인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 말씀보다 당장 자신들을 더 영화롭고 풍요롭게 해 줄 다른 목소리를 듣고 따르면서 그분과 점점 멀어졌고, 그렇게 멀어질수록 하느님 백성의 거룩함을 잃고 맙니다.
이민족에게 패방하여 이국 땅에서 타향살이를 해야 하는 유배의 기간은, 이방신들 사이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인 야훼 신앙을 되찾아 수호하며 다시 그분과의 관계를 간절히 갈망하게 될 때까지 지속될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내쳐버린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뼛속까지 통회하고 스스로를 낮추는 이는 반드시 해방의 선물을 맞이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가정과 사회, 신앙 안에서 각자에게 허락하신 여정을 충실히 살아갑니다만, 때때로 잠시 멈추어 자신의 구심점과 방향성을 점검하는 순간이 꼭 필요합니다. 회개는 주님과의 관계성을 회복하고 존재적 소명과 정체성을 가다듬는 노력이지요.
부족하고 나약해도 아버지의 사랑을 믿고 언제라도 그 품 안으로 달아드는 어린아이처럼 정화와 성화의 노력에 결코 지치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께서 우리를 위해 전구해 주실 것입니다.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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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01.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너 벳사이다야, 너 가파르나움아!"(루카10,13.15)
'회개하자!'
오늘은 '작은 꽃'으로 불리는 '소화 데레사 성녀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먼저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한 자매님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소화 데레사 성녀는 동정을 간직하셨고, 교회로부터 '선교의 수호자'로, '교회 학자'로 선포되었습니다.
열다섯 살의 나이로 가르멜 수도원에 들어가신 데레사 성녀는 결핵을 앓다가 스물네 살의 젊은 나이에 선종하셨습니다. 그런 성녀를 교회는 선교의 수호자와 교회 학자로 선포했는데, 단순하게 생각하면 데레사 성녀에게 그러한 선포는 잘 어울리지 않는 옷 같아보입니다.
하지만 데레사 성녀는 끊임없이 기도하셨습니다. 죄인들의 회개와 사제들을 위해서, 특히 선교지역에서 사목하는 사제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을 감동시켰고, 회개로 이끌었습니다.
비록 선교지역에 가서 땀을 흘리는 복음선포는 하지 못했지만, 끊임없는 기도로 함께하셨고, 유명하고 권위있는 신학대학은 나오지 않았지만, 데레사 성녀의 삶과 글이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올바른 길로 이끌었으니, 교회 학자로 선포되고, 선교의 수호자로 선포됨은 마땅한 결과라고 생각됩니다.
소화 데레사 성녀는
하느님과의 끊임없는 인격적인 대화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사랑에 감사와 찬미를 드렸을 것이고, 보다 더 충실하지 못한 죄를 고백하면서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청했을 것입니다.
오늘 독서는 바빌론으로 유배된 이들이 주님 앞에서 죄를 고백하면서 참회의 기도를 바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땀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은 세 고을, 곧 코라진과 벳사이다와 가파르나움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감사와 찬미의 기도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청하는 기도를 끊임없이 바치면서 회개의 길로 나아가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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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01.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 고을은 도대체 무슨 일로 “불행하여라!”라는 예수님의 ‘불행 선언’을 듣게 되었을까요?
『성경』 부록에 있는 ‘신약 시대의 팔레스티나’ 지도를 살펴보면, 코라진, 벳사이다 그리고 카파르나움이 갈릴래아 호수 북쪽에 삼각형 모양으로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 고을은 예수님께서 주로 활동하셨던 갈릴래아 호수 주변의 고을이었습니다. 카파르나움은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처음 시작하셨던 곳이며(마태 4,13; 마르 1,21; 루카 4,31 참조), 벳사이다는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고(마르 8,22 참조), 제자들과 함께 자주 들르셨던 동네였습니다(마르 6,45; 루카 9,10 참조). 그러한 이유로 오늘 복음인 루카 복음과 병행하는 마태오 복음에서는 이곳들을 “예수님께서 ……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마태 11,20)이라고 알려 줍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가장 많이 활동하셨고 가장 많은 기적을 일으키셨던 고을이었지만, 그곳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기적과 말씀을 보고 들었지만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구약 시대부터 수많은 임금과 예언자가 보고 싶어 하고 또 듣고 싶어 했던 것들을 직접 보고 들었으면서도 그들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내려진 ‘불행 선언’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이제 우리를 돌아봅니다.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미사 안에서 당신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빵의 기적을 보여 주십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것을 보고 들을 수 있는 바른 눈과 귀를 가지고 있는지요? 우리의 눈과 귀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불행하여라!”가 아니라 “행복하여라!”라는 말씀을 들려주실 수 있도록 우리의 눈과 귀가 오롯이 그분을 향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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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01.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너희가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 이 말씀은 교회가 이 어린 성녀의 살아있는 모범으로 그 자녀들에게 제시하는 복음적인 이념이다. 프랑스의 알랑송에서 태어난 데레사는 15세에 리지외에 있는 가르멜 수녀원에 9년을 살았고, 그곳에서는 특별한 영적인 노력을 하였다.
성녀는 그의 언니 첼리나의 명을 들어 내적 체험을 썼는데 그것이 “영혼의 이야기”이며, 이것으로 성녀가 존경을 받게 되는 자서전이다. 그리고 성녀는 그의 작품 “영적인 아이의 작은 길”에서 무한한 봉헌을 하고 있다. 성녀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는 좋으신 하느님께 아무것도 거절하지 않았다!” 이 말은 자신의 “성소”를 발견한 교회의 마음으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힘을 말하는 것이다.
성녀는 짧은 기간의 수도 생활이었지만, 그리고 한번 들어가면 바깥 구경을 전혀 할 수 없는 봉쇄 수도원에 살았으면서도, 그 안에서 전교 지방에 있는 선교사들을 위해, 전교 지방을 위해 기도하고 희생을 하였다. 자신은 한 번도 전교 지방에 가서 전교해본 일이 없으면서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포교사업의 수호자’로 선포되었다.
성녀는 수도원 안에서 몇 년간의 수련장으로 일했으며, 많은 사람을 위해 영적인 삶의 스승이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성녀를 조금씩 세상의 구원을 위한 사랑에 자신을 모두 바치도록 인도하셨다. 여기서 ‘포교사업의 수호자’가 될 수 있었다. 자신의 모든 삶을 이를 위해 바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성녀는 작은 일에 충실하였다. 문을 조용히 닫는다든지, 복도를 다닐 때 조용하게 하는 것 등이다. 성녀는 특별한 업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일상으로 성녀가 되신 것이다.
또한, 성녀는 성체를 통해 자신의 사도적 역할을 발견하였고, 이 성체는 오늘 우리에게 역시 성체의 “영적인 가난”을 통하여 무엇보다도 전교 지역의 교회에 대한 큰 지향을 통하여 성녀를 닮을 가능성을 제공하고 있다. 축성된 적은 양의 빵과 포도주를 통하여 공동체의 전례 안에서 “가장 미소한 분”이 되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사람을 사랑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길을 십자가로써 가르쳐 주셨다. 십자가 위에서 끝까지 당신 자신을 낮추시면서 아버지의 뜻을 완전히 이루셨다.
오늘 복음 말씀처럼 어린이는 도움을 받고, 보호와 지도를 받아야 하는 존재이다. 이렇게 도움을 받아야 살 수 있는 어린이처럼 하느님 앞에 인간은 하느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한다. 언제나 하느님께 달아 들고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면서 자신을 낮출 수 있는 사람은 진정 하느님 앞에 어린이와 같은 사람이고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다. 하느님의 말씀과 하느님의 뜻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즉시 실천하는 그래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이 바로 어린이와 같은 사람이며, 그러한 삶을 사신 유일한 어린이이신 아드님을 닮는 것이다. 그러한 어린이와 같은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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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01.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루카 10, 16)
날이 새니
다시
가을이다.
주님의 뜻은
단순한
사랑으로
다시
깊어진다.
사랑은
단순하다.
단순함과
함께
걸어가는
우리들
시간이다.
하느님
사랑 안에
살아가는
우리들 삶이다.
감당할 수 있는
십자가를 주시는
하느님이시다.
순수한 아픔이
순수한
기쁨으로
다시
영롱하다.
우리 모두는
순간의 삶을
살고있다.
잠시 지나가는
우리들 삶이다.
성녀 소화
데레사는
순간 순간의
슬픔과 아픔
기쁨과 행복까지
하느님께
내어드린다.
아름다운 봉헌이
아름다운 삶으로
이끌었다.
물리칠 수 없는
우리의 작은
일상안으로
하느님께서
들어오셨다.
우리의 작은
일상에서
하느님을
만난다.
작은 일상의
마음이 소박한
사랑임을
뜨겁게
깨닫는다.
사람의
행복이
하느님의
행복이다.
행복은
하느님을
향하는
마음!
마음이다.
마음이
사람을
만든다.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우리들에게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작은 일상
작은 나눔
작은 기도
그리고
단순한 사랑을
보여주신다.
이 단순한
사랑의 힘이
모여
울타리에 갇힌
우리들 사랑을
깨워 보편적인
교회의 사랑으로
날아오르게 하신다.
사랑은
영원하다.
사랑을 따르는
우리들
일상의
여정이다.
일상(日常)이
사랑이다.
가을이
일상 안으로
점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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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01.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회개하지 않는 고을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심판 때에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루카 10,13-15).”
이 말씀은,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회개하지도 않는 사람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이라는 특정 도시의 멸망을
예고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를 향한 경고 말씀이고,
늦기 전에 믿고 회개하라고 호소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날의 우리 입장에서 생각하면,
신앙인들 전체를 향한 경고 말씀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창세기에 있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이야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에 벌을 내리려고 하실 때,
아브라함이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진정 의인을 죄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 혹시 그 성읍 안에 의인이
쉰 명 있다면, 그래도 쓸어버리시렵니까? 그 안에 있는 의인 쉰 명 때문에라도
그곳을 용서하지 않으시렵니까? 의인을 죄인과 함께 죽이시어 의인이나
죄인이나 똑같이 되게 하시는 것,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온 세상의 심판자께서는
공정을 실천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창세 18,23-25)”
이 말은 질문 형식으로 되어 있긴 하지만,
“하느님은 지극히 공정하신 분”이라는 신앙인들의 믿음을 표현한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느님께 간청한 것은, 어떤 도시를 심판하시더라도
그 도시에 살고 있는 의인들은 구원해 달라는 것, 그리고 그 도시에 의인들이
정말로 살고 있다면 그들을 보아서라도 그 도시를 용서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같은 도시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의인과 죄인을 함께 심판하시면
안 된다는 뜻이고, 의인의 ‘선한 영향력’을 믿어 주셔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간청을 받아들이셨지만, 아브라함이 기대했던 것과는
다르게 소돔과 고모라에는 의인이 없었고, 두 도시는 멸망했습니다.
그래도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과
롯의 두 딸은 구해 주셨습니다(창세 19장).>
아브라함의 말을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류 전체의 종말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때가 되면 인류 전체를 대상으로 한 종말과 심판이 이루어질 텐데,
그날에는 구원받을 사람과 멸망할 사람을 구분하는 일이
철저하고 완벽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치우시어, 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버리실 것이다(루카 3,17).”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루카 17,34-35).”
단순히 악인과 함께 있었다는 이유만으로(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억울하게 의인이 악인처럼 멸망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단순히 의인과 함께 있었다는 이유만으로(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부당하게 악인이 의인처럼 구원받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의인의 ‘선한 영향력’과 악인의 ‘악한 영향력’도 생각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2베드 3,9).”
주님께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은, 의인들의 ‘선한 영향력’을 믿으시기 때문입니다.
온 도시가, 또는 온 나라가, 또는 온 인류가 부패하고 타락하더라도
의인들이 몇 명이라도 있다면,
그들의 ‘선한 영향력’ 덕분에 사람들이 회개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렇게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에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인들의 ‘선한 영향력’보다 악인들의 ‘악한 영향력’이 더 커서,
의인들마저도 ‘악한 영향력’에 물들어 버리면,
인류 전체가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는 ‘선한 영향력’과 ‘악한 영향력’이
서로 줄다리기를 하는 시대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에 설 것인가는 각 개인의 선택입니다.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티로와 시돈은 하느님과 예수님을 모르고 살았던 사람들과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하느님도 몰랐고 예수님도 몰랐기 때문에
심판 때에는 어느 정도 정상참작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심판과 처벌 자체가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을 몰랐더라도 죄는 죄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7-48).”
신앙인이 더 엄한 벌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 때문에, “결과가 그렇게 된다면
차라리 종교와 신앙 없이 살다가 심판받는 것이 더 낫겠다.” 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그런 생각은 어리석은 생각일 뿐입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을 알 기회가 없었던 것과
알았으면서도 안 믿은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루카 10,16).”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들에게 권한과 권위를
주시는 말씀인데, 오늘날의 우리 입장에서 생각하면,
사도들의 증언과 선포를 예수님의 말씀으로,
또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라는 가르침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의 편지가 신약성경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그들의 말이 예수님과 하느님에서 비롯되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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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01.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자비의 집으로 돌아가는 회개의 순례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루카 10,16)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활동의 주무대였던 카파르나움 주민들을 다음과 같이 책망하십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10,13) 그분께서는 카파르나움 주민들의 회개를 강력히 촉구하신 것입니다(10,15).
티로와 시돈에서 ‘기적들이 일어났더라면’, 곧 하느님의 능력과 자비가 드러났더라면 그들은 회개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코라진과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의 주민들은 하느님의 자비를 받아들이지도 않고, 제 뜻대로 살아가며 회개하지 않았다는 지적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자비만 바랐지 그와 무관하게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네 삶은 어찌 보면 불의와 차별로 채워지고 고통과 시련의 바다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은 존재하는 모든 것, 만나는 모든 피조물과 인간이 다 하느님 자비의 선물입니다. 시간과 공간, 가족들과 친구들, 재능과 건강, 재물과 좋은 성품, 신앙 등이 다 주님의 은총의 표지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을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지 않습니까? 하느님께서 자비의 선물을 거저주시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비이신 당신께로 돌아오라는 신호입니다. 당신께로 돌아와 자비를 살고 자비를 나누라는 초대이지요. 그런데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자신의 뜻만을 추구한다면 그 사람은 실은 ‘실천적 무신론자’라 할 것입니다.
그저 신앙을 능동적으로 실천하지 않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관계없이 자기만의 삶을 추구하는 것이지요. 그 끝에서 기다리는 것은 죄와 어둠뿐이며, 스스로를 영혼의 파멸로 내몰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영혼의 잠에서 깨어나야겠습니다. 깨어 일어나서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하느님의 뜻을 삶의 중심으로 삼으로 마음 열어 회개해야겠습니다.
인생은 순례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순례는 자비이신 하느님을 찾아가는 여정입니다. 그것은 나를 떠나 그분께로 되돌아가는 몸짓입니다. 나를 버리고 비우며, 그 여백에 주님의 자비를 채우기 위한 비움의 움직임이 우리다운 순례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순례는 회개의 순례라 할 수 있습니다.
회개하여 하느님의 자비의 집에 들어가는 사람은 주님의 자비가 얼마나 큰지 깨닫게 되지요. 자비를 체험한 사람은 회개의 응답으로 감사와 찬미를 드리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회개했다는 표지는 감사와 행동의 찬미로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우리를 자비로 초대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의 책망을 가슴 깊이 받아들여야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자비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제 본성대로 살아가는 자신의 마음과 의식과 몸을 주님께로 되돌리도록 해야겠습니다. 카파르나움 주민들처럼 주님의 자비 앞에 행실을 바꾸지도 않고 그 사랑에 응답하지도 않은 채 계속 악에 기울어 살아가는 뻔뻔함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도 돌과 같이 굳은 마음을 열고,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선과 자비를 발견하고, 감사와 찬미를 행동으로 실천하는 회개의 하루가 되길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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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01.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 “너 코라진, 너 벳사이다, 너 카파르나움!”
바룩서는 희랍어 칠십인 역인 셉뚜아진따(LXX) 역에서 “바루크 (Βαρουχ)”라는 이름으로 되어 있는데, 본분에서 바룩이라는 저자는 예레미야 예언자의 제자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모두 6장으로 되어 있는 본문은 다양한 내용과 시대적 배경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저자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전승에는 바룩이라는 저자이거나 아니면 바룩의 사상에 따라 수집하고 정리, 편집한 무명의 저자로 보고 있습니다.
본서의 저자는 네리야의 아들로 바빌론 치세의 어려운 역사적 상황에서 유일신 사상을 가진 익명의 유대인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서문에 이어 본문은 참회기도로 “주 우리 하느님께는 의로움이 있지만, 우리 얼굴에는 오늘 이처럼 부끄러움이 있을 뿐입니다.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 주민들, 우리 임금들과 우리 고관들과 우리 사제들, 우리 예언자들과 우리 조상들에게도 부끄러움이 있을 뿐입니다.”(바룩 1,15-16)라는 내용으로 시작됩니다.
이 본문과 5장으로 구분되어있는 예레미야의 ‘애가’의 내용들 중에서 예루살렘의 멸망은 죄의 댓가라고 하는 ‘죄스러운 고백’과 비슷한 면이 스며있습니다.
“저희의 머리에서는 면류관이 떨어졌습니다. 오, 애통합니다, 저희가 죄를 지었으니! 이 때문에 저희의 마음은 괴롭고 이런 것들 때문에 저희의 눈은 어두워졌습니다.” (애가 5,16-17)
모세는 호렙산에서 하느님께서 당신 손가락으로 쓰신 두 증언판(탈출 31,18)을 받아들고 내려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가 없는 동안에 수송아지를 만들어 축제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화가 난 모세는 돌 판들을 산 밑으로 내 던져 깨 버립니다. 그리고 모세는 다시 산으로 올라 사십 일을 주님과 지내며 하느님의 계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판에 기록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다른 신에게 경배해서는 안 된다. 주님의 이름은 ‘질투하는 이’ 그는 질투하는 하느님이다.”(탈출 34,14) 신명기 저자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와 맺으신 계약을 잊지 않도록 조심하고,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금하신 그 어떤 형상으로도 우상을 만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주 너희 하느님은 태워 버리는 불이시며 질투하시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신명 4,23-24)
사랑의 하느님께서 계약을 맺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른 신들을 섬기며 당신과 불성실한 관계를 갖는 것을 못 보시는 것입니다.
바빌론 유배의 참혹함은 이스라엘의 죄의 댓가라고 믿는 바룩서의 저자는 또한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다른 신들을 섬기고 주 우리 하느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지르며, 저마다 제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대로 살아왔습니다.”(바룩 1,22)
하느님과 예수님의 특징은 무한히 죄인들에게 사랑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그런 순정을 변덕스럽고 차가운 사람들은 그 사랑을 다 헤아릴 줄 모르고 하느님께 등을 돌리기도 합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하느님께 충실하지 못하고 변덕스러운 그들의 모습을 계속해서 탓합니다.
하느님께서 배신한 인간에게 섭섭한 마음, 분노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전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고향과 가까운 카파르나움, 코라진, 벳사이다의 마을을 사랑하며 아끼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냉담한 태도입니다. 주님께서 코라진과 벳사이다 마을 사람들에 대한 섭섭한 심정을 드러내십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심판 때에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루카 10,13-14)
또한 주님께서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15절)
축복을 빌어주셔도 모자라실 주님께서 세 도시 코라진, 벳사이다, 그리고 카파르나움에게 악담을 퍼붓습니다.
주님께서 가셨던 이방인의 도시 티로와 시돈 (마태 15,21; 마르 7,24.31; 루카 6,17)도시를 추겨 세우며 말씀하신 것입니다.
특히 시돈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는 아합 왕의 부인 이제벨의 고향입니다.(1열왕 16,31)
시돈 사람들은 이방인의 여신 ‘아스타롯’과 깊게 연결되었습니다.(1열왕 11.5; 11,33)
예수님께서는 사랑하고 아끼는 도시를 탓하시며 이방인 도시까지 들먹이면서까지 당신의 섭섭함을 강하게 표현하십니다.
문학적인 표현에 ‘반어법(反語法)’이라고 있습니다. 속 뜻과는 반대의 표현을 하는 문학적 기교입니다.
하느님의 특성을 가지고 계신 예수님께서 사랑을 무한히 베푸시지만 등을 돌리는 그들에게 깊은 푸념을 내뿜으시지요. 이것은 내심 사랑의 마음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우리말에 사랑하는 부모가 자식에게 섭섭해서 ‘이 웬수’라는 표현과 ‘니가 그따위로 해서 잘 되나봐라.’라는 독설을 내뿜는데 그 안에는 속상함도 담겨 있고 푸념도 담겨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모의 독설의 표현과는 달리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늘 잘 되기를 바라는 깊은 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파견한 제자들에게 다시 시선을 돌려서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전권을 주시고 그들을 두둔하시는 것입니다.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16절)
사랑의 특징은 둘도 아닌 하나입니다. 그래서 불과 같고 그런 모습의 질투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상에 대해 강한 부정적 반응, 질투의 모습을 보이십니다.
예수님께서도 갈라지고 냉냉한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 마을에 대해서도
강한 반어법의 표현을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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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01.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하느님께서는 한사코 작은 오솔길만을 걸었던 데레사를 구원의 빛나는 대로(大路)로 안내하셨습니다!
산 너머 갯바위로 소풍을 갔다가 예쁜 구절초 무리들을 만났습니다. 구절초는 모두 다 똑같은 줄 알았더니 색상도 조금씩 다르더군요. 흰색, 연보라색, 진보라색...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아슬아슬한 절벽 작은 틈 그 사이에도 보란 듯이 자리 잡고 피어난 녀석들의 모습이 눈물겨울 정도로 예뻤습니다. 그 자태가 너무 어여뻐서 연신 사진을 찍었습니다.
예쁘고 여여쁜 이유 중에 하나가 작음이었습니다. 작은 꽃잎이지만 그 안에 갖출 것 다 갖추었더군요. 피정 센터 산책길에도 번식을 좀 시켜보려고 몇 뿌리 캐서 돌아오는 길에 한 가지 작은 깨달음이 제 머릿속을 스쳐지나갔습니다.
‘작으니 사랑받는구나!’ 아마도 이런 공식은 하느님과 우리 인간과의 관계 안에서도 똑같이 적용되지 않을까요? 만일 우리가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을 받고 싶다면, 그분 품에 푹 잠기고 싶다면, 그 비결은 무엇이겠습니까?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작은 야생화처럼 작아지는 것이 아닐까요? 올라가지 않고 내려가는 것이 아닐까요? 교만을 버리고 겸손을 선택하는 것이 아닐까요? 탄탄대로가 아니라 좁은 길을 걷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면에서 우리가 눈여겨봐야할 성인이 한분 계십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좁은 길의 성녀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입니다. 그녀의 삶이 마치 깊은 산속 외딴 곳에 홀로 피어난 아름다운 한 송이 작은 꽃 같다고 해서 ‘소화(小花)’ 데레사라고도 불립니다.
언뜻 보기에 그녀의 생애는 성인(聖人)이 되기에 많이 부족해보였습니다. 1873년에 태어나셨다가 1897년에 돌아가셨으니 불과 24년간의 짧은 생애를 살았습니다. 성덕을 쌓기에 충분한 시간과 나이가 아니라는 생각도 할 수 있겠습니다. 요즘 그 나이의 다른 젊은이들 바라보면 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짧디짧은 수도생활의 연륜, 그것도 봉쇄수녀원 안에서, 그마저도 지병으로 골골하면서...도무지 대단한 뭔가를 해낼 조건이 아닌 그녀의 생애였습니다. 그러나 웬걸, 데레사는 자신의 탁월한 봉헌생활을 통해 나이와 연륜이 성덕과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었습니다.
오늘날 가톨릭교회는 그녀를 그 어떤 성인보다 크게 칭송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빛나는 성덕은 온 세상을 비추고 있습니다. 교회는 봉쇄 수녀회 수도자였던 그녀를 전 세계 선교의 수호성인으로 선택했습니다.
그녀가 개척한 성덕의 길은 대체로 3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지극한 겸손, 복음적 단순함, 하느님을 향한 깊은 신앙, 이 세 가지 요소는 결국 사랑으로 통합되었습니다.
데레사는 하느님을 마치 사랑하는 연인(戀人) 대하듯 대했습니다. 그녀가 하느님과 주고받은 대화 곧 기도는 마치도 너무 사랑해서 죽고 못하는 연인들끼리 주고받은 연서(戀書)같았습니다.
그녀는 하느님 앞에 언제나 한 송이 작은 숨은 꽃이길 원했습니다. 그녀가 개척한 성덕의 길은 ‘작은 길’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한사코 작은 오솔길만을 걸었던 그녀를 구원의 빛나는 대로로 안내하셨습니다.
그리고 작디작은 그녀를 당신의 넓고 따뜻한 가슴에 꼭 안아주셨습니다. 숨은 것도 다 아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그녀 특유의 빛나는 작은 길을 온 세상 사람들 앞에 낱낱이 드러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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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01.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지옥에 가는 이유: ‘행복’을 원하지 않아서>
오늘 복음은 회개하지 않는 고을들이 지옥에 떨어질 것을 말씀하십니다.
한 고을은 한 사람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라고 하실 때, ‘하늘’과 상반되는 ‘저승’은 곧 지옥을 나타냅니다. 이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모든 이들의 운명입니다.
복음이란 무엇일까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 이 소식이 기쁩니까? 이 소식은 나의 죽음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의로움과 기쁨과 평화입니다. 의로우신 분은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모 마리아께서 성령으로 아드님을 잉태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를 잉태하여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나는 죽고 그리스도로 삽니다. 내가 죽고 나 대신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하면 기쁩니까? 오늘 저주받은 고을들도 그렇게 주저하였습니다.
이렇게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사실 행복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은 “행복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누구나 다 행복해지고 싶어 한다.”라고 말합니다. 맞는 말이지만, 틀린 것이 더 많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행복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행복이라고 믿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미 무엇이 행복인지 규정해 놓았기 때문에 복음이 맛이 없는 것입니다. 술이 행복이라고 믿는 사람에게 술을 끊으면 더 행복해진다고 말하는 것이 어떻게 기쁜 소식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자기의 자서전에서 평생 122명의 여인과 잠자리를 하였다고 말해 전 세계에서 유명하게 회자되는 한 남자가 있습니다. 바로 ‘카사노바’입니다.
그는 “나는 느낀다. 고로 존재한다.”, 혹은 “나는 여자를 사랑했다. 그러나 내가 진정으로 사랑한 것은 자유였다.”, “나는 여자를 위해 태어난 남자다.”라는 등의 말을 남겼습니다.
카사노바는 배우인 아버지와 성악가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는 성직자가 되는 길을 택합니다. 키도 크고 외모도 출중한 동시에 천재였습니다. 그래서 라틴어, 그리스어, 프랑스어, 히브리어에 능통했고 스페인어, 영어도 어렵지 않게 구사할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대학교 때 학습 능력이 대단하여 고전 문학을 줄줄이 꿰었음은 물론 신학, 법학, 자연과학, 예능 등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성적을 유지했습니다. 이는 훗날 경제, 정치, 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엘리트들과 교류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특히 춤, 펜싱, 승마 등 몸으로 하는 모든 궁중 예술과 카드놀이에서 여느 귀족 가문의 기사보다도 특출한 재능을 발휘했습니다. 가장 놀라운 것은 그의 환상적인 기억력입니다. 카사노바는 70년 평생 자기가 본 얼굴들을 하나도 잊지 않았고, 자신이 듣고 읽고 말하고 본 것을 모두 다 기억했다고 합니다.
그가 서품 준비에 한창이던 때 일흔 나이의 사제 말리피에로가 어린 가수 테레즈를 농락하는 것을 봅니다. 혼란스러운 그도 백작의 딸인 루시아라는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되지만 자신은 그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여 욕정을 절제한 채 그녀를 떠납니다. 하지만 훗날 그녀가 어느 호색한에게 농락당했다는 것을 알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립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이성으로 절제하지 않겠다는 결심이었습니다.
그 후 여러명의 여자와 특별히 높은 신분의 여자들과의 관계로 그는 성직에서 쫓겨나고 감옥에 갇히기도 합니다. 그 이후로 평생 여기저기를 도망 다니며 많은 여자를 꾀고 돈을 위해 사기를 치고 다니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는 평생 도망치며 감옥을 들락거리고 세상을 떠돌다 다시 베네치아로 돌아왔지만 한 여자에게도 제대로 사랑받지 못한 채 73세의 나이로 외롭게 세상을 떠납니다. 가장 오래 사귄 사람이 3개월입니다. 사실 그는 문란한 생활 때문에 성병에 자주 걸려 40대 중반부터는 성기능 장애가 오기도 했습니다.
천재로 태어나 성직자의 길을 택하여 위대한 그리스도의 도구가 될 수 있었던 그는 결국 자신이 믿는 행복을 찾아 떠났고, 그렇게 자신이 원한 자유로운 떠돌이 생활을 하다 외롭게 죽었습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이렇습니다. 천재였지만 실제로 이룩한 업적은 하나도 없고, 돈으로 여자의 성을 착취한 호색한이며, 그 돈을 벌기 위해 약한 사람들을 괴롭히고 사기를 치던 정말 쓰레기 같은 삶을 살았다는 평가입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이렇습니다. “나는 철학자로 살았고, 그리스도인으로 죽는다.”
카사노바는 분명 그리스도를 택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지만 그에 어울리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철학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행복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하느님이십니다. 이 정도는 그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평생 여자의 성을 착취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행복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행복이라고 믿는 철학을 추구한 것입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살면서 결국 돈도, 명예도, 성도 나를 온전히 행복하게 해줄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이미 “행복은 돈이다.”, 혹은 “행복은 명예다.”라는 식으로 결정해 버리면 참 행복이 왔을 때는 그것을 밀쳐내고 맙니다. 그래서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이와 같은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간신히 나뭇가지 하나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외면하던 하느님을 불렀습니다.
“하느님 살려주십시오.”
“그래, 그럼 그 손을 놓아라.”
“당신 말고 다른 분은 안 계시는가요?”
위의 사람은 살기를 원하는 게 아니라 자기 생각이 맞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도 행복을 원하는지, 행복에 대한 내 생각이 맞기를 원하는지 고민해보아야 합니다.
사람이 자녀를 낳으면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하느님도 그렇습니다. 사람은 하느님이 만드셨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행복한지 하느님만 아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으로 살아야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사랑은 당신 자신이기 때문에 나를 버리고 당신으로 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행복입니다. 하느님이 행복입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행복을 찾지 않고 이미 그 행복을 인간의 수준으로 규정하여 복음을 밀쳐내면 오늘 저주받은 마을들의 운명을 피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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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01.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이승화 시몬 신부님.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어떤 존재일까?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깨달을수록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습니다.
동시에 그분의 사랑을 담기엔
우리가 참으로 나약하고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우칩니다.
나의 약함에도 불구하고
유혹에 쉽게 빠지며 악으로 넘어가기 쉬운 나에게
하느님은 사랑의 손길로 다가오십니다.
그렇기에 나와 하느님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겸손한 자세가 되어 하느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눈앞의 결실을 자랑하기보다
하느님의 도움에 감사하게 되고
나의 힘만으로 무엇을 해내려 하기보다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며 충실하게 임하게 됩니다.
작은 일이라도 하느님의 일이라 생각하며 충실할 때,
하느님께서는 겸손한 이를 통해
더 큰 일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겸손하지 않고 교만한 이들의 모습이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코라진과 벳사이다입니다.
하느님이 주신 선물을 잊고
인간적인 노력과 힘과 욕심에만 의탁하였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할수록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기에
우리는 겸손과 성실한 자세로 오늘을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모범을 보인 이가
오늘 기억하는 성녀 소화 데레사입니다.
기도하는 가정에서 태어난 성인은
어린 시절부터 기도 생활에 충실하였고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겠다는 결심으로
수녀원에 들어가게 됩니다.
작고 어린 나이에도 주어진 역할에 충실했고
죄인들의 회개와 선교하는 사제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합니다.
성녀의 성덕은
겸손한 자세로 하느님과 맺은 관계에서 나오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자세를 보여줍니다.
겸손과 성실.
두 가지 덕을 기억하면서
오늘도 하느님과 함께 그분께 의탁하며 보낼 수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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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01.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제1독서 (바룩1,15ㄴ-22)
히브리어 성경에 없는 바룩서는 칠십인역 그리스어 성경을 통해서 전해졌다. 히에로니무스는 유다인들이 읽지도 않고 가지고 있지도 않다는 이유에서 바룩서를 라틴어로 옮기지 않았다.
히브리어로 '바룩'은 '축복받은 자'라는 뜻이다.
6장의 예레미야의 편지를 빼고는 이 책의 저자로 알려진 바룩은 유다 왕궁의 서기관이며, 동시에 예례미야의 비서 겸 제자요 친구로서, 예언자의 삶과 신탁을 후대에 전해 준 중요한 인물이다.
저자와 저작 연대와 집필 장소에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이는 서문의 정보가 신빙성이 없어서 바룩서의 저자는 바룩의 이름을 빌려 쓴 차명 작품으로 본다.
작중연대는 바빌론 유배 기간이지만, 주요 부분의 저작연대는 이르면 유배 이후 시대부터 늦으면 헬레니즘 시대(기원전 200-60년)까지 폭넓게 생각한다.
집필장소도, 바룩서의 원문이 히브리어로 쓰였고, 그 내용이 바빌론 포로들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공동체에 대한 권고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팔레스티나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바룩서는 다섯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1장 1-14절은 도입부로서 저자나 저술 장소와 시기, 저술 상황을 밝힌다.
둘째, 1장 15절-3장 8절로 유배자들의 기도이다.
세째. 3장 9절-4장 4절은 지혜와 율법에 관한 성찰이다.
네째, 4장 5절-5장 9절은 유배의 신학적 반성과 회복에 대한 희망이다.
다섯째, 6장의 예례미야 편지는 예례미야가 바빌론으로 유배살이를 하러 떠나는 포로들에게 써 보낸 것으로 되어 있다.
오늘 독서 1장 15ㄴ-22절은 바로 둘째 부분에 해당되는 산문으로된 유배자들의 기도이다. 저자는 여기서 신명기 신학을 전개한다.
곧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를 돌아보며 반성하고(1,15-2,12), 주님의 자비를 간절히 청한다(2,13-3,8). 과거에 대한 반성은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에 중점을 두고, 간절한 청원은 현재 바빌론 유배 상황에 촛점을 둔다.
이스라엘은 과거 이집트 탈출 시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반역을 일삼았다. 그 결과 모세를 통하여 주님께서 경고하신 재앙과 저주(신명기27-30장)가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재앙의 근원은 하느님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잘못이다. 하느님은 자애롭고 공정한 분이시다. 그분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해방하시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그곳에서 하느님 대신 그 땅의 잡신들을 섬기고 그분의 뜻을 거역하며 살았다.
주님께서는 예언자들을 시켜 경고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그 경고를 듣지 않아 결국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였다. 애가에서처럼 제 자식의 살을 먹는 끔찍한 상황을 언급한다(2,3; 신명28,53-54참조).
이스라엘은 이제 공정하신 하느님 앞에서 아무것도 요구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그분의 자애에 매달릴 뿐이다(3,1-2).
이같은 신명기적 신학사상과 관련하여 바룩서의 저자는 세 가지 점을 부각시킨다.
첫째, 유배의 진정한 의미이다. 유배는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이름과 계약을 다시 기억하고, 자신들의 죄악에서 유일한 하느님이신 주님께로 돌아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둘째, 토라(모세오경)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스라엘이 죽음의 길에 들어선 것은, 하느님께서 조상들에게 주신 지혜의 샘이요,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인 토라를 저버린 탓이다. 바룩서는 토라를 소유한 이는 다른 지혜가 필요없다고 말한다.
세째, 바룩서의 저자도 애가의 저자처럼 예루살렘을 여성으로 인격화한다. 다만 애가는 시온(예루살렘)을 딸로 표현한 데 반해, 바룩은 홀어미를 표현한다. 이 홀어미는 모든 것을 빼앗기고, 심지어 자식들마저 낯선 땅으로 떠나 보내고, 지금 큰 슬픔에 잠겨 있는데, 바룩서 저자는 하느님께서 그들을 낯선 땅에서 돌려보내시리라고, 절망에 빠진 홀어미를 위로할 뿐만 아니라 그를 들어 올리시고, 정의와 평화와 거룩함의 새로운 소명을 주실 것이라 선언한다(5,3-5).
"주 우리 하느님께는 의로움이 있지만, 우리 얼굴에는 오늘 이처럼 부끄러움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죄를 짓고, 그 분을 거역했으며, 우리에게 내리신 주님의 명령에 따라 걸으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우리는 주 우리 하느님을 거역하고, 그 분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을 예사로 여겼습니다~당신 종 모세를 통하여 경고하신 재앙과 저주가 오늘 이처럼 우리에게 내렸습니다~우리에게 보내주신 예언자들의 온갖 말씀을 거슬러~저마다 제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대로 살아왔습니다."(바룩 1,15ㄴ-22참조)
오늘 복음 루카 10장 13-16절에 예수님께서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의 도시들에 대해 불행을 선언하신다.
성경에 등장하는 예루살렘을 비롯한 도시들의 모습은, 바로 내 자신과 내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와 교회와 사회와 나라와 이 시대에 적용하면 영신적으로 무난하다.
복음의 세 도시는 라삐들의 종교교육이 성행하고, 상업이 번창했던 부유한 도시였다. 그러나 오만과 자기식의 의, 고집과 자기도취에 빠져, 예수님께서 그렇게도 많은 기적들을 보여주시며 사랑을 쏟았건만, 주님 말씀에 귀를 막고 돌아오지 않아, 지금 나무람을 받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평소 생활은 어떤가? 오늘 독서와 복음을 연계시켜 묵상해 볼때, "돌아오라 ~~사랑한다~~" 외치는 기도 공동체 성가 386장 "주의 성심을 바라 보아라" 의 가사가 절절히 들리는 듯 하다.
회개하도록 외치시며 사랑을 쏟으시는 주님의 사랑을 우리 자신이 거역했을 때, 그 사랑은 믿음을 가진 다른 사람들에게로, 다른 공동체로 흘러감을 알아야 한다.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복음(루카10, 13~16)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심판 때에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13~14)
'코라진'(chorazin)은 '나무가 많은 곳'이란 뜻으로 오늘날 발견되는 유적에 의하면 당시에 상당히 중요한 도시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코라진'은 예수님의 초기 활동 지역이었던 '카파르나움'(Capernaum)에서 약 3km 이내에 인접한 도시였다. 현재는 '텔 흄'(Tel Hum)으로부터 동부쪽으로 5km정도 거리에 있는 '케라제'(Kerazeh)일 것으로 추측한다.
또한 '벳사이다'(Bethsaida)는 '어획 장소'(고기잡는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갈릴리 호수 동북쪽 연안에 위치한 조용한 성읍이었다. 원래 명칭은 '벳사이다 율리아스'(Bethsaida Julias)로서, 헤로데 필리보 임금이 건설하여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딸 율리아스를 기념하는 뜻에서 그렇게 붙여졌다.
이곳은 시몬 베드로, 안드레아, 필리보의 고향이기도 했다(요한1,44; 12,21). 특히 벳사이다는 예수님께서 눈먼 소경의 눈을 뜨게 하였던 곳이었다(마르8,22).
하지만 루카 복음에 있어서 예수님께서 벳사이다에게 불행 선언을 하신 가장 큰 이유의 배경에는 루카 복음 9장 10~17절의 기사가 자리잡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거기에서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말씀해 주시며 필요한 이들에게는 병을 고쳐 주셨으며(루카9,11), 또한 황량한 빈 들에서 먹을 것이 없는 군중들에게 '오병이어'로 남자 장정만도 오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먹이시는 전대미문의 놀라운 기적을 베푸셨다(루카9,13~17).
이것을 볼 때, 갈릴리 지방의 주요 도시였던 코라진과 벳사이다는 예수님께서 많은 권능과 기적을 베푸신 활동의 주요 무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그곳 사람들은 믿음에는 보잘 것 없어 예수님의 복음을 수용하지 못했던 것이다.
'불행하여라, 너'에 해당하는 '우아이 소이'(Uai soi; Woe to you)에서 '우아이'(uai)는 엄숙한 경고나 고통, 분노 그리고 동정심 내지 연민의 감정이 서려 있는 탄식을 표현하는 의성적 감탄사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불행을 선포하신 것이 단순히 심판과 보복만의 선언이 아니고, 불신앙에 대한 책망 속에는 그들을 향한 동정과 연민의 안타까운 심정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한편, 고대 페니키아의 도시였던 티로와 시돈은 당시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다.
이곳은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갈릴리 지방과 인접해 있어서 예수님께서 이곳을 방문하신 적이 있었는데(마태15,21; 마르7,24.31), 예수님께서 이 도시들을 언급하신 것은 코라진과 벳사이다의 완고하고 사악함을 더 구체적으로 지적하기 위해서이다.
구약적인 배경에서 '티로와 시돈'은 하느님의 심판 선고를 받은 사악한 이방 도시였다(이사23장; 에제26~28장; 요엘4,4~8).
'티로와 시돈'은 갈릴리 북방에 있는 페니키아의 항구 도시로서 '티로'는 B.C.2750 년경에, 그리고 '시돈'은 B.C. 1400년 이전에 건설되었다.
매우 오랜 역사를 지닌 이 두 도시는 번영과 쾌락과 이교도의 도시로서 유명하며, 하느님을 거역하고 하느님의 백성을 억압한 결과(아모1,9; 요엘 4,4~6) 하느님으로부터 심판을 받았다(이사23장; 에제26~28장)
그런데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티로와 시돈'보다 갈릴리의 도시들이 더 사악하고 완고한 곳이라고 선언하시고 있는 것이다.
'티로'(Tyro)는 '바위'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티로'라는 지명을 거론하시면서 '코라진과 벳사이다' 사람들이 바위보다도 더 마음이 굳어지고 사악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마치 비가 와도 조금도 물이 스며들지 않는 바위처럼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자루옷'으로 번역된 '삭코'(sakko; sackcloth)는 낙타의 짧은 털과 같은 거친 직물로 만든 옷이며, 흔히 슬픔과 탄식을 표현할 때 맨 살 위에 바로 입었다(2사무3,31; 1열왕21,27).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서적인 회한(悔恨)을 표현하기 위해 '재'(먼지; ash)를 머리 위에 끼얹거나(애가2,10), 잿더미 위에 앉거나(요나3,6), 재 위에 드러 눕기도 하고(에스테르4,3), 그 위에 뒹굴기도 하였다(미카1,10).
이렇게 구약에서 회개의 행위를 표현할 때 관용적으로 쓰던 표현을 사용해서 이방인들인 '티로와 시돈' 사람들보다도 더 완고하고 사악한 '코라진과 벳사이다' 사람들의 상태를 효과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이제 루카 복음 10장 14절에서 '심판 때에'에 해당하는 '엔 테 크리세이' (en te krisei; at the judgment)라는 말로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심판관으로 재림하셔서(사도17,31; 2베드2,9) 죄악에 대하여 엄격히 심판하시지만, 허락되었던 특혜와 특권을 감안하셔서 더 많이 받은 그 책임을 저버린 자들에게 더 큰 심판을 하신다는 것을 드러내신다.
이것은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12,48ㄴ)는 영적 원리에 의한 것이다.
성경 속에 나오는 도시는 나 자신과 내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에 적용하면 된다.
인간이 회개할 때까지 끝까지 참고 기다리시며 인간의 자유 의지를 존중해 주시는 인격적인 주님 대전에 언제까지 회개하지 않고 고집을 부릴 수 있겠는지에 대해 깊이 성찰해야 한다.
동시에 더 많은 은총과 현세적 축복과 영적 혜택을 입은 사람이 그것을 거부했을 때에는 더 큰 내세의 심판과 형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에 대해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12,48ㄴ)의 영적 원리에 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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