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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비출 빛
탁이건
공산당 선언은 한 문장으로도 설명 가능하다. “모두가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사회”. 그렇다면 저자 칼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말하는 평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마르크스가 말하는 공산주의는 누구를 위한 평등이며, 그 평등에 문제점은 없는지, 평등이 개인의 욕구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알아보고 그 내용 속에서 내가 비출 빛을 찾고자 한다.
가. 공산당 선언 내용 요약
우선 공산당 선언의 기본적 내용을 알고 가야 전체의 글이 이해될 것 같다. 공산당 선언은 칼 마르크스와 엥겔스. 두 청년이 꿈꾸는 공산주의에 대한 내용이다. 책 중심에 서 있는 두 집단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의 불평등을 평등으로 바꾸고자 하는 공산주의 사상을 담고 있다.
부르주아:
중세 및 봉산사회를 타도하고 근대 민주주의 혁명을 주도한 시민 계급.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 계급의 집단이다. 여기서 말하는 생산수단이란 토지와 자본을 말한다.
프롤레타리아트: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에 고용되어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고 이 대가로 임금을 지급 받아 살아가는 임금 노동자 계급.
이 둘은 갑과 을이라고 생각하고 이해가 빠를 것이다.
1장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부르주아 부당한 착취에 대한 혁명과 지배권 장악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2장은 프롤레타리아 해방의 과정을 고찰하여 공산주의자의 실천적 의무를 말한다.
3장은 사회주의 사상의 여러 유파의 반동성. 보수성. 공상성을 검토하고 비판하였다.
4장 각국 공산당의 기본적 혁명 전략을 다루고 있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은 아주 먼 과거에서부터 왔다. 고대 로마에는 세습 귀족과 노예가 있었고, 중세시대에는 봉건영주와 농고가 있었으며, 그리고 근대에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가 있다. 책에서 부르주아는 중세의 농노가, 근대 초기 도시가 형성되며 성외 시민이 되었다. 그리고 이들 중 세계의 새로운 변화로 인하여 기회가 주어졌다.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과 많은 사건으로 세계 시장 범위가 넓어졌다. 이에 수요 증가와 기계를 이용한 대규모 공업을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국가권력 또한 부르주아에게 전해지게 된다.
그렇다면 프롤레타리아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책에서는 기계의 확대, 분업으로 인하여 하층민, 소기업가, 상인 등의 계층이 자립성을 잃고 프롤레타리아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단순했으며 쉽게 배울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들의 노동시간이 늘어만 갔지만, 임금은 줄어들었다.
그러면 공산주의는 어떤 이유로 사회에 자리 잡았을까? 책은 변증법의 과정을 거쳤다고 말한다. 변증법을 프롤레타리아와 맞춰 본다면 그들은 기계의 확대로 자립성을 잃음과 동시에 ‘소외라는 문제의식’에 맞닥뜨리다. 그 후 그들은 현실을 비판하며, 결국 행동을 통해서 자신들의 이념을 표출한다. 그 이념의 단결을 통해서 승리하게 된다.
칼 마르크스는 공산주의가 되면 토지몰수, 동등 노동 강제, 공장노동 폐지, 도농 격차 해소를 위한 노력 등 많은 것들이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이중 일부는 자본주의 체제 내에 반영되기도 했다.
나. 공산당선언이 말하는 평등의 문제점
‘욕구’는 ‘희망’보다 조금 더 바라는 것을 일컬으며, ‘욕망’은 ‘욕구’보다 ‘바라는 것’이 지나쳐 ‘부족을 느껴 가지거나 누리고자 하는 것을 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국립국어원-
내가 생각하는 이 책의 핵심은 부르주아도 프롤레타리아도 아니다. ‘모두가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사회’. 즉 공산주의. 평등이 책 공산당 선언의 핵심이다. 공산당 선언에서 말하는 평등은 농촌과 도시의 대립제거, 아동의 노동공장 폐지와 계급차별의 폐지이다. 하지만 나는 마지막 계급차별의 폐지 조항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위와 같이 공산당 선언은 모두가 평등하기 위해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라는 계급을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해야 불평등이 평등으로 바뀐다고 말한다. 그런데 모두가 평등해졌기에 사람들이 참아왔던 욕구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게 내가 생각한 공산당 선언의 문제점이다. 욕구의 문제를 평등이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평등이 욕구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까?
첫째, 끝없는 욕구. 욕구에는 끝이 없다. 욕구는 대부분의 사람들 삶의 원동력며, 누구나 삶의 목표가 있다. 사장부터 엔지니어, 음악가. 그리고 그 꿈을 이루었을 때, 그 충족감은 오래가지 못한다. 금방 익숙해져 계속해 새롭고 더 많은 것을 바라보게 된다. 대표적인 것은 돈이라고 생각한다. 한번 누리면 끝없이 누리고 싶은 욕구에 휩싸인다. 이와 반대로 평등사회는 모두가 동등하게 누리도록 만든다. 재산, 돈, 소유믈 등등… 욕구와는 정 반대이다. 평등사회는 이런 생리적 욕구를 통제하는 것과 같다. 욕구는 가장 생리적 감정이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특히 예민하다. 따라서 평등사회가 생리적 감정을 억압할 수 없고 해서도 안된다. 그 이유는 사회의 일원으로서 존중받을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둘째, 편견. 평등사회는 편견이 있다. ‘개인’의 욕구에 우호적이지 못하다. 반대로 모두에 공통적 욕구에는 우호적이다. 그렇다면 왜 개인의 욕구에는 우호적이지 않을까? 당연한 말이지만 평등사회는 누구든 공평하기를 원한다. 그렇다 보니 개인의 욕구에는 의심을 한다. 평등사회가 개인의 욕구에 무관하면 특정 사람들에게 돈과 소유물이 쌓이고 그들은 힘이 강해진다. 그 강해진 힘으로 정부를 대응할 힘을 얻는다(뇌물, 비리). 결국 그들은 부르주아가 되어 버린다.
이렇기 때문에 평등사회는 개인의 욕구에 조심스럽다. 이렇게 조심하는 이유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재발현을 막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모두가 평등해지는 것이 가능한가? 그리고 물질적인 면에서 평등해진다고 해도, 감정적으로 똑같이 충족감을 느낄 수 있을까? 우리의 욕구가 과연 모두 똑같은 정도로 일어날 수 있을까? 평등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저마다 다른 욕구를 어떻게 평등이라는 기준으로 충족시킬 수 있을까? 누군가는 돈을 더 원하고, 집을 원한다, 더 높은 계급을 원하고 보다 좋은 삶을 원한다. 속이 누군가는 좁고 누군가는 넓다. 이렇듯 무엇하나를 기준으로 잡기에는 어렵다. 평등이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욕구를 무엇으로 어떻게 채워줄 것인가?
욕구의 정도는 저마다 다양하다. 매슬로우의 이론에 따르면 생리적 욕구, 안전의 욕구, 소속의 욕구, 자존감에 욕구, 자아 현실의 욕구들이 있다. 이 다섯 욕구는 피라미드 형태로 표현되고 있다. 생리적 욕구가 가장 아래에 있으며, 자아현실 욕구가 가장 위에 있다. 생리적 욕구는 식욕, 휴식, 수면욕 등이 있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당신이 길을 걷다 저 멀리서 길냥이가 걸어온다. 당신에게는 휴대폰도 있고, 망치도 있고, 츄르도 있다. 길냥이와 친해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정답은 당연히 츄르를 주면 된다. 매우 쉬운 이야기다. 그렇다면 인간관계가 좋아지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그야 당연히 그 사람이 원하는 걸 주면 된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치킨을 가장 좋아하니 치킨을 주면 될 것이다. 하지만 현대 인간은 배고픈 길냥이와 달리 먹고 자고 싸는 욕구가 웬만큼 충족되었기에 치킨을 주어도 딱히 엄청 기뻐하지는 않는다. 이 질문을 미국의 작가 데일 카네기가 말하길 모든 인간은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은 욕구’가 있다고 말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을 우러러보고 존경받기를 원하다. 누가 지적하거나 욕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누가 칭찬하거나 인정해줬으면 하는 욕구가 있다. 이렇듯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사람도 똑같은 욕구를 가지고 있다. 부르주아는 프롤레타리아가 자신들을 우러러봤으면 좋겠고, 반대로 프롤레타리아는 부르주아가 무시하지 않고 독재하지 않았으면 할 것이다.
사람은 상황과 환경에 따라서 욕구와 만족도가 달라진다. 사람은 자신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것을 가진 사람 앞에서 자신이 덜 가지고 있더라도 크게 기분 나빠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분명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많은 걸 가진 사람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너무 압도적으로 많기에 오히려 주눅들어 하기도 하고 열등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면 어떨까? 모두가 평등하니까 사람들 그동안 억눌렀던 욕구를 표출한다. 남들보다 높은 계급,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눈독 들이며 사람들은 오만함에 휩쓸리게 된다. 그 이유는 ‘내가 다른 사람보다는 많이 가질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저사람들과 똑같다고?’ 하는 우월감과 오만함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우월감과 오만함은 사람과 사람을 적대시하게 만들며 평등을 무너뜨린다. 오만함과 열등감은 욕구를 낳는다. 그 욕구는 평등을 완전히 무너뜨린다.
그런데 이 욕구, 열등감과 오만함보다 앞서서 문제점이 하나 있다. 평등의 기준이다. 이 평등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절대적 평등과 상대적 평등이다.
절대적 평등에 의하면 아이, 성인, 노인 그 누구든, 어떤 일을 했든 모든 이가 똑같이 임금을 받아야 한다. 성인이 상대적으로 아이와 노인보다 일을 많이 했을 수도 있지만 그들은 모두 똑같이 받는다. 이 절대 평등은 장점보다는 우려되는 점들이 너무 많이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나태해질 우려가 있다. 모든 이가 무조건 똑같이 받기 때문에 대충하고 게을리할 경우가 있을 것이다.
상대적 평등에 의하면 평등한 것에는 평등하게, 불평등한 것에는 불평등하게 대우한다는 것으로 합리적 차별을 인정한 것. 예를 들면, 성인은 상대적으로 아이와 노인에 비해서 훨씬 많이 일한다. 또한 빠른 시간 안에 일을 처리할 수 있기에 그에 맞는 공정한 조건과 임금 조정이 필요하다.
그럼 무엇이 평등의 기준인가? 무엇이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불평등을 평등으로 이끌었을까? 절대적 평등인가? 아니며 상대적 평등인가? 무엇이 프롤레타리아 손을 잡고 끌어 올렸으며, 무엇이 부르주아 손을 잡고 끌어 내렸는가? 그것이 평등인가? 그렇다면 칼 마르크스의 평등은 무엇인가? 그에게는 프롤레타리아의 부상이 평등인가? 아니면 부르주아의 전락이 평등인가? 결국은 공산주의는 프롤레타리아의 손을 잡았으며 그들을 부상시켰다. 그것이 그들이 생각한 평등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부패해졌다. 그 부패 또한 평등인가? 결국 그들은 부르주아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모두가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사회’의 문제점은 프롤레타리아의 부패다. 그 부패가 결국은 제2의 부르주아를 낳는다. 사실 그들은 평등을 원했던 것이 아닌 부르주아를 꿈꾸었던 것일 수 있다. 또한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를 꿈꾸던 사람들은 ‘레닌주의’라는 결과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자유론의 의하면 당신의 친구가 채식주의자든 육식주의자든 제국주의를 옹호하든 나치를 옹호하든 일뽕에 취했든 중뽕에 취했든 공산주의에 빠졌든 절대로 그의 입을 막아선 안 되며, 오리혀 친구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줘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듯 나도 칼 마르크스가 공산주의 빠졌든, 사이비 종교를 믿든, 절대평등에 빠졌든 절대 그의 생각이 틀렸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그의 평등은 많은 이들에게 평등이 되었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그것이 절대적이든 상대적이든. 이렇듯 나는 모두가 평등하길 바라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다. 그것을 실천해서 공산주의의 창시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나의 결론을 평등을 얻기 위해서는 그와 동등한 것을 내놓아야 한다. 그것이 프롤레타리아의 부패일 수도 있고, 레닌주의일 수도 있다.
다. 공동의 평등과 개인의 욕구의 조화
평등과 욕구의 조화는 공적과 사적으로 나뉜다. 평등은 공적으로 사회의 국가와 시민이 같이 수행해야 한다. 욕구는 개인적인 상황이며 내면의 성숙함으로 성장해야 한다. 그렇다면 평등와 욕구 속에서 수준높은 욕구가 무엇인지와 둘의 조화 속에서 내 안의 빛을 찾고자 한다.
사회가 평등사회로 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평등의 핵심 키워드는 ‘모두’와 ‘공동’이다. 다수도 소수도 아닌 모두여야 한다. 평등으로 가는 길은 국가의 주도 아래 구성원들이 국가의 방침을 따라야 한다. 누구 하나 의욕적으로 주도해서는 달라지지 않는다. 핵심은 모두가 한 뜻으로 의기투합이 필요하다. 문제점은 모두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더라도 같은 뜻이기에는 쉽지 않다. 좋은 뜻에도 악의가 있을 수 있고, 나쁜 뜻에도 선의가 있을 수 있다. 또한 의견이 다르고 그 의견을 좁히는 문제를 해결해야 하며 의견을 좁히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충돌이 생긴다. ‘평등’이라는 핵심 방향을 각자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기를 원할 것이다. 이러한 감정이 ‘욕구’에서 비롯된다. 이 개인의 욕구가 사람에게 해를 끼친다면 그 감정은 더 이상 욕구가 아닌 탐욕으로 변질한다.
욕구는 온전히 개인적인 것이다. 욕구는 개인의 부족한 점을 채우고자 하는 감정이다. 이 감정을 평등사회에서도 유지하기 위해서는 평등사회가 제공하는 개인의 욕구 수용 범위 안에서 채워야 한다. 예를 들어, 개인의 욕구는 타인에게 피해주지 않아야 하며, 그 욕구를 평등사회 틀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일종의 범위 안에서 말이다. 그럼 공동의 평등 속 개인의 욕구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해결 방법은 욕구의 수준을 높이는 일이다. 꼭 이것이 해결방법 만은 아니다. 굳이 이 방법을 제시한 이유는 내 안의 빛을 찾는 것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수준 높은 욕구는 무엇일까? 그렇다면 욕구가 사람들과 자신이 볼 때 수준 높아 보일까? 남을 위한 욕구인가? 자신만을 위한 욕구인가? 자신만을 위한 욕구는 사람들이 이기적이라 하고 공동의 경우에는 위선적이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둘 다 동시에 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나에게 수준 높은 욕구는 자신이 원하고자 하는 일이나, 꿈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적이든 공적이든 남이 뭐라고 하든 욕구에 집중하는 것이 수준 높은 욕구라고 생각한다. 개인의 욕구는 사회에게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 그 이유는 모든 인간은 존엄하기 때문이며 사회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 욕구가 사회구성원에게 피해를 준다면 수준높은 욕구라고 하기 어렵다.
여기서 질문. 나는 왜 평등을 고집하며 평등은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내가 평등을 고집하는 가장 큰 이유는 억울한 사람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모두가 공평하며 성별, 권리, 인격, 행복의 추구 등의 차별을 두지 않는 상태가 나에게는 온전한 사회로 다가오는 동시에 꿈꾸는 사회이다. 온전한 사회에선 불행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불행하다면 그것은 온전한 사회가 아니다. 나에게는 온전한 사회는 곧 행복한 사회이다. 꼭 이런 사회가 오기를 나는 욕망을 넘어 가끔은 탐욕하기도 한다.
평등은 어떤 집단이든, 어떤 국가에도 있을 수 있다. 우리 모두가 함께 살아간다. 하지만 그 속에서 누구는 돈을 많이 벌고 누구는 적게 번다. 이러다 보니 보이지 않는 선이 생겼다. 그 선이 피라미드 형식으로 사람들을 두 그룹, 또는 수많은 그룹으로 나누었다. 그렇게 현대의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가 생겨났다. 이렇다 보니 과거와 똑같이 평등의 기본토대는 무너지고 불평등이 쌓여갔다. 이런 불평등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정서적으로 불안하게 만들고 사람을 믿지 못하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사회는 사람들을 이기적이게 만들었다. 이런 불평등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크다. 사회, 정치적 불평등을 테러로 표출되기도 하고 불평등은 소수의 사람들 주체성을 잃게 만들기도 한다. 나는 평등이 행복의 밑받침이라고 생각한다. 불평등 속에서는 모두가 행복할 수 없다. 근대의 다수는(부르주아)는 행복했지만 소수는(프롤레타리아) 행복하지 못했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많이 호전되어 소수는 억압받지 않고 다수는 억압하지 않는 서로를 존중하는 사회라고 생각한다. 나 또한 그 영향을 받아 내 안의 빛을 찾는데 도움이 되었다.
사회는 나의 욕구를 결핍 상태로 만든다. 나의 욕구를 자극한다. 나는 결핍상태를 충족하기 위해서 사회로 나아간다. 나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 또한 나의 욕구가 사회에 보탬이 되기를 바라면서 걸어나간다. 결국 평등과 욕구의 서로 공존하고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서로가 존중해야 하며 양보해야 한다. 개인은 사회의 목표를 존중과 욕구를 줄여야 하고, 사회는 개인의 욕구를 존중하며 꿈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줘야한다. 이런 사회가 너무 현실화 하기에는 불가능하고 이상적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이상적인 사회를 당신이 꿈꾸고 이상적인 사회변화에 노력을 한다면 시간이 걸리더라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다. 내 안의 빛은 이런 꿈꾸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를 지키는 일이다. 내가 사회를 지키려는 이유는 나의 빛을 찾아준 사회에게 보답하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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