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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아장성 이야기
1986.7.27(일)
떠나는 여행길은 누구나가 즐거운 법.
무척 오랫만에 자일을 사리고 배낭을 꾸렸다. 이제는 떠나는 일만 남은 거다.
가는 거다. 첫 사랑 저 설악으로, 죽은 마누라 생각보다 더 더욱 간절한 그곳으로.
(총각 놈이 별 소릴 다 하네)
부산역엔 일행들이 다 나와 기다리고 있고, 다른 두 팀과 합세를 하니 마치 자갈치 시장에
배 들어온 것 같았다. 그들의 얼굴엔 벌써 신명이 깔려 싱글벙글 그저 흥겨운 표정들이었다.
잠시 후 김정, 최병, 윤경은 홍도를 향해 목포행 열차에 몸을 싣고, 우리(허씨,류씨,전씨,나)는 다른 팀(창만,상근,광준)과 함께 청량리로 가는 열차에 올랐다.
피서철 밤차는 의례히 복잡고 시끄러운데 왠지 한산하고 조용했다. 다행히 입석표를 끊고도 앉아 갈 수 있었다. 기차는 어둡고 조용한 밤 공기를 가로지르며 신나게 달렸다.
한편, 옆 팀은 좌석 때문에 아가씨들과 이야기가 오고 갔다. 좌석이 불편하니 표를 바꾸잖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아가씨들과 함께 동양화 48폭을 공부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 참, 요즘 젊은 사람들 너무 쉽게 가까워 지네 - - ‘
고도리를 치고 있더니 창만씨가 내 보고 치란다. 창만씨 대신에 내가 가세를 했다. 그런데 영 신통찮았다. “야야 ! 내 돈은 먼저 보는 놈이 임자란다. 막 가져가라 ! ” 하고 가세했다가 결국 쥐 박고 물러났다. 고스톱이 영 시들시들해졌다.
그러자 광준씨가 “우리 쥐포 많은데…”하고 말끝을 흐렸다.
“알았소, 내 구해 오리다” 하고 플랫포옴 간이식당에서 소주 3병(그게 있는 것 다다)을 구해 왔다. 그러니까 허씨 류씨 --- 내, 니 할 것없이 눈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쥐포(쥐)에다 소주(약) 더 하면 (쥐약) 금방 취한다.)
그러면서 허씨가 손을 내밀었다. “ 야,야 ! 술 끊었다며 ?” 하고 물으니 “약이다. 약 ! ” 하고 기어이 잔을 채웠다. 전씨도 손을 내민다. “ 술 안한다며 ?” 하고 물으니 “항상 주(酒)를 가까이, 주(酒)의 품안에서 …” 하면서 잘도 들이켰다. 순식간에 게눈 감추 듯 없어졌다.
한 잔씩 돌리니 속만 맹숭맹숭했다. 그리하여 기차 안에서 파는 맥주, 또 바닥나면 소주, 또 맥주… 계속 술 타령들이었다.
그러면서도 깊은 밤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밤차가 무척 잘 달린다는 생각을 하며 곁에 앉은 아가씨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는 새에 기차는 영주역에 닿았다.
영주역에서 강릉행 열차를 다시 갈아탔다. 서울서 내려오는 차라서 그런지 무척 복잡았다.
밤차 특유의 모습이 풍겼다. 복잡하게 운집한 사람들의 피곤한 모습, 시끄러운 음성들, 상대적으로 잠을 청하고 있는 사람, 사람들. 여름 밤차는 희비와 애환이 엇갈리는 포물선을 갖고 있었다. 낯선 거리로 여행길 떠나는 젊은이들의 묘한 기대와 생활을 벌어 보려는 자들의 모습이 늘 엇갈린다.
새벽녘에 자리를 확보하고 잠시 졸다보니 어느 새 여명이 찾아 들었다.
열차는 쉬지 않고 북으로 향했다. 그러는 사이 점차적으로 해가 솟기 시작했다.
보라 ! 저 동해의 저 붉은 태양을, 용광로 보다 더 뜨겁고, 우리네 젊은 가슴만큼이나 뜨거운 저 동해의 저 태양을.
해를 보면서 뭉클 뜨거워지는 가슴을 여민다.
우리네 젊은이는 무엇이든 할 수 있으리니, 저 붉은 태양과 같은 뜨거운 가슴만 있다면…
동해의 찬연한 햇살을 받으며 우리는 강릉에 도착했다.
▲ 소공원에서
1986.7.28(월)
강릉 터미널에서 우리는 창만씨 팀과 헤어져 먼저 속초행 버스에 올랐다. 차창 밖으로 시원한 바람과 눈에 익은 풍경들이 들어왔다.
허씨는 창에 머리를 비스듬이 기댄 채 잠이 들었다. 부러웠다.
설악산 입구를 지날 때 멀리로 육중한 모습을 한 울산암이 딱 버티고 앉아 있었다.
가슴이 방망이질 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속초 시내에 내려서 시장에서 이것 저것 물건을 사고 아침겸 점심 식사들 하고 시내 직행버스로 설악동으로 향했다. 설악동 여관촌을 지나 소공원울 향해 가는 도중 왼쪽편으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습을 한 토왕성폭포가 눈에 들어왔다. 가히 ‘비류직하 낙천적(飛流直下三千尺) 의시은하 낙구천(疑是銀河落九天)’이라 하겠다.
금강이 일만이천봉이면 설악은 가히 일만이천폭이라 하겠다.
그 가운데 대표할 만한 곳 중 하나가 토왕폭이라 아니 할 수 있으랴 !
그리하여 겨울이면 뭇사내들의 가슴을 온통 열정과 설렘으로 방망이질 하게 만들곤 하지 않는가.
토왕폭을 바라보며 넋을 잃고 있는 새 버스는 소공원에 닿았다. 등산객들과 관광객들로 혼잡을 이루고 있는 소공원 넓은 광장엔 따가운 여름 햇살이 가득 눈부시었다.
권금성를 오고가는 케이블카가 눈에 띄었다.
권금성 – 몽고와의 항쟁으로 지은 성 – 을 생각하면 참으로 아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저 전략적 요충지를, 난공불락의 성을 빼앗겼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던 일인 것 같았다.
다시는 그와 같은 일이 없도록… 절대자여 ! 이 땅에 평화를 –
우리는 배낭을 내려 놓고 기념촬영을 했다. 네 명이 단체로 찍는데 카메라 초점을 자기들에게 맞춰라고 골고루 고함이었다. 그러나 어찌 그대들이 큰소리 칠소냐 !
모든 걸 인물로 카-바 하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 (나는 안다)
소공원을 떠나 천불동 골짜기를 끼고 마등령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와선대, 비선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한가로이 피서를 즐기는 모습이란 참으로 신선했다.
비선대 앞 적벽에서 한 팀이 클라이밍을 즐기고 있었다. “자식들 ! 날 더운데 집에서 만화나 볼 일이지, 애써 저 무슨 고생이람…” 하고 냅다 소리를 질렀다.
적벽은 전체가 오버행 클리프다.
▲ 비선대 앞에서
비선대에 있는 입산통제소에서 신분을 밝히길 원했다. 조난에 대비함이리라. 우리는 신분 행선지를 밝히고 마등령으로 향했다. 가다보니 장군봉(금강굴이 있는 봉)에서도 어느 한 팀이 등반을 하고 있었다.
장군봉 옆으로 난 길이 상당히 가파르고 또한 너들길이라서 오르는데 애를 먹었다.
목도 마르고 쉬어 갈겸해서 오이를 까먹고 허씨와 나는 퍼지고 앉아서 쏘세지 채로 먹었다.
위에서 전씨와 류씨는 자꾸만 가자고 보챈다. 투덜투덜 거리며 너긋하게 길을 걸었다. 얼마나 걸었던가 몹시 피곤했다. 물이 있는 곳에서 라면을 끓여먹고 계속 길을 재촉했다.
마등령 정상이 눈에 보였다. 허씨와 나는 푹 퍼졌다. 위에서 류씨가 “곰, 돼지야 ! ” 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우리 둘이는 “어디 가나 봐라 !” 하고 눈을 돌려 천불동 쪽으로 바라 보았다. 천화대 릿지, 범봉이 무척 아름다웠다. 마등령 밑으로 신선들이 앉아 바둑을 두었음직한 바위가 칼날 같은 능선 가운데 정반처럼 편평하게 위치하고 있었는데 누가 절경이라 아니 할소냐. 우리는 둘이서 이런 저런 노래를 부르면서 그냥 즐거웠다. 위에서 류씨가 “야-이, 돼지야, 곰 새끼야 !” 하면서 계속 고래고래한다.
“ 야, 가지 말자 – 응 ?! “ 하고 의사를 굳히고 앉아 놀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류씨가 입을 한 발쯤 내밀면서 투덜투덜 내려온다. 할 수 있나 !
마등령 정상에서의 콜라 맛은 그저 콜라 맛이었다. (캔 하나 천원 – 싸다)
마등령 정상에서 그곳을 지키는 사람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새 날이 저물었다. 야영장으로 내려가니 젊은 팀들이 무척 많았다. 우리도 텐트를 치고 취사 준비를 했다.
내가 물을 구하기로 하고 물 있는 곳까지 갔다. 한참을 내려가도 보이지 않자 다시 올라와서 확인을 하고 허씨랑 함께 내려갔다. 내려가는 길이 이렇게 길고 험할 줄이야.
물소리가 귓전에 와 닿았다. 등물이라도 칠려고 마음을 먹었으나 손에 물이 닿는 순간 뭐가 탱자만해지고 (뭐가 뭐게 ?)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저 세수만 할 수 밖에.
저녁 공양 후 예불도 없이 그냥 누웠다.
1986.7.29(화)
아침 공기가 상쾌했다. 발끝에 와 닿은 이슬 머금은 풀잎 풀잎이 싱그러웠다. 하늘은 더 없이 푸르렀다. 이 여름날, 젊음은 이 자체가 축복이려니…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수렴동으로 향했다.
평탄하던 길이 끝나고 한참 가파른 부분이 나왔다. 올라 오려면 꽤나 애를 먹으리라.
얼마나 걸었을까 ‘오세암’이 눈에 들어왔다. 다섯살 꼬마가 부처가 되었다는 그곳, 만해 한용운 선사가 머물렀던 곳, 감회롭다. 사진 한 장 박고…
오세암 곁에 빈터가 눈에 띄었다. 주춧돌, 빛 바랜 기와들이 잡초에 묻혀 있었다.
돌 나르던 역사(力士), 기와 굽던 무리들, 불공드리던 스님들 다 어디로 가고 빈터에 잡초만 우거지니, 아 ! 제행무상(諸行無常). 아서라 부귀가 무어며 공명이 다 무어라더냐.
빈터 저만치 세월이 비껴감을 느낄 땐 그 따가운 여름 햇살이 덧 없었다.
▲ 오세암 마당에서 류씨와
▲ 오세암 법당 앞에서
▲ 오세암 법당 앞에서
수렴동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많은 남녀 학생들이 노래를 부르면서, 시끌시끌 얘기를 나누면서 올라오는데 모들들 표정이 한 없이 밝다. 젊음은 그 자체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석이려니…
등에 땀이 한 없이 흘렀다. 수렴동 골짜기에 닿자마자 웃옷을 벗고 그대로 물에 들어갔다. 물장구를 치고 놀고 있으니 , 류씨 왈 “ 야, 돼지 ! 물에 뜨네, 어 어 !” 하고 놀려댄다.
“네 발 달린 짐승은 다 물에 뜨는 법..” 하고 대답하니 곰도 들어오고 류씨도 들어온다.
세상만사 부러울 게 없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대피소에서 민생고를 해결하고 용아장성으로 발길을 돌렸다. (수렴, 구곡담 골짜기가 아가씨들도 많고 좋은데…)
▲ 수렴동 골짝
용아장성은 전체가 암릉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얼마쯤 올랐을까 ! 계곡이 까마득해졌다.
바위를 오르려는데 뱀이 한 마리 눈에 들어왔다. (저거 어디에 좋다던데, 흐흐흐)
그 놈이 돌틈 사이로 들어 갔는데 그리로 지나야만 했다.
‘야, 발 뒤꿈치 깨물면 어쩌나 ..’ 하고 투덜거리는데 류씨가 클라이밍 다운을 시도하려고 이리 저리 애를 쓰는 건 스탠스가 만만찮다.
‘저러다 저 아래로 떨어지면 꽤나 아플텐데..’
“말아라, 말아”
자일도 꺼내고 벨트도 하고 안자일렌을 하고 출발을 했다. 류씨가 선두 허씨가 둘째 전씨가 셋째 내가 후미를 봤다. 후미를 보니 영 불편했다. 내리막에서는 확보를 봐 줄 사람이 없었다. 어느 정도 가다보니 금정산 무명암보다 더 재미있는 ‘뜀 바위’가 나온다. 돌과 돌 사이를 건너 뛰어야 하는데 아차하면 천길단애 저 밑으로 떨어질 것 같았다.
드디어 길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트라이캠, 너트, 런너 등을 류씨에게 건네주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사실 그때까지는 그에게는 확보물이라곤 ‘자일’ 그것 뿐 중간 확보용 장비가 없었다.
앞서가던 류씨 배낭에서 시에라컵이 경쾌한 소리를 울리며 가야동 계곡의 한 지류인 골짜기로 떨어졌다. 골이 얼마나 깊은지 반사음이 한번 들리더니 그 다음 소리가 없었다.
모두들 기분 좋다고 손뼉치고 야단들이었다. (남이 안된 것 보면 왜 이리 기분이 상쾌할까.)
류씨가 “야, 주우러 갈까 ? “ 하고 물어본다.
“응, 그래 ! 죽어 봐야 맛을 알지” (사실 저 밑까지 자일 한 동으로 내려간다는 건 저승행이다) “ 잘 죽어야 될 텐데…”하고 모두들 키들 거린다.
계속 가다가 보니 격시등반을 할 곳이 왕왕 나왔다. 내 앞의 전씨는 어디서 배웠는지 노상 ‘앙카’다. (살아 볼려고…)
류씨가 지나가면서 트라이캠 2호를 아주 튼튼하게 설치 해 놓아서 좀처럼 빼기가 힘들었다.
‘ 아이고 사람잡네’
▲ 용아장성 가운데 쯤 한 포즈...
구절양장 같은 산길이 끝이 없었다. 덥고 목마르고 되기도 하고 애고 죽겠다.
그 때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왔다. 바로 가까이에서 구름이 바람에 날려 어디론가 자유롭게 날아가고 있었다. 갑자기 구름이고 싶었다. 이 무거운 멍에, 세상 근심 모두 떨쳐 버리고 훨훨 자유롭고 싶었다. 그리하여 이 산 저 들을 누비고 싶었다.
▲ 장성 가운데서..
가도 가도 끝었는 절벽길, 돌아다 보면 아찔해 진다.
아마 옛날의 신선들이 이 곳을 다녔으리..
갑자기 신선이 되고 싶었다. 신선, 신선…(아 ! 신선이 된 돼지 – 말 되네, (애가 날이 더워서 더위 먹었나, 지 정신이 아니네))
이미 날이 저물었다. “대장, 못가겠다. 쉬었다 가자 !”
그래도 류씨는 막무가내 진행이었다. 자일이고 뭐고 다 풀었다. 해가 저물어 땅거미가 밀려오기에 암릉 옆으로 난 길을 택했는데 더 험했다.
“아이고, 못가겠다. 돼지 잡든지 삶든지 마음대로 해라…”
“이 모퉁이만 돌자”하고 대답하는데 어쩌냐.
슬랩이 하나 나온다. 오른쪽으로 트래버스 하는데 슬랩 가운데 홀더 하나가 기가 막히게 패어 있었다. 잡기 좋게.
그러나 자일을 풀었기에 신중을 기해야만 했다.
입이 한 뼘쯤 나왔다. ‘뭐, 용아장성이 아기자기 해, 내 곁에 앉았던 아가씨 얼굴이 아기자기 하지..’
이미 어두워졌기에 활동을 할 수 없었다.
물도 떨어지고 다리도 풀렸다. 텐트 칠 곳이 없기에 이리 저리 둘러다보니 비박지가 한 곳 나왔다. 암릉 꼭대기 바로 밑에 경사진 곳에 둘이서 누우면 딱 맞을 정도의 비박지를 발견 ! 그냥 판쵸 매트리스 깔고 노영하자니 전씨가 꼭 텐트를 치잔다. 텐트가 반정도 허공에 떴다. 웃음도 안나오고 기가 찰 노릇이었다.
류씨가 한참 아래로 내려가 임의로 샘을 한 곳 파서 물을 떠왔는데 밑에 흙이 수북하다. 그래도 꿀맛이 여기다 견줄소냐.
초코파이 하나 오이 반쪽으로 저녁을 때웠다.
나는 갑자기 잘 곳이 없었다. 할 수 없이 런너를 꺼집어 내어 나무 끝에다 묶고 카라비나를 걸고 해먹을 쳤다. 한 쪽은 걸었는데 다른 한 쪽은 걸 데가 없었다. 절벽을 이리 저리 더듬다 보니 크랙이 눈에 띄었다. 망치로 흙을 긁어 내고 너트를 넣었다. 크랙이 아주 자그마 했기에 헥센트릭 1호가 기가 막히게 딱 맞았다. 바로 밑이 벙어리 크랙이라서 트라이캠을 다시 하나 더 설치했다.
잠을 청하면서 하늘을 올려다 봤다. 시꺼먼 구름이 온통 하늘을 뒤덮었다.
‘무슨 놈의 날씨가 이리 변덕스럽담. 날씨와 여자는 믿을 게 못 된다더니..’
낙뢰라도 떨어지면 이제 깔끔하게 가는 거다. ↑ 로..
걱정을 한참하고 있으니 별이 또 초롱초롱하다.
제군들 ! 산에서는 기상 변화가 심하니 만반의 준비를 하고 여자 또한 변덕이 심하니 필히 수집, 검토, 분석, 종합평가야라..
이거 곰(허씨) 왔다고 진짜 곰 오면 어쩌랴 하면서 잠을 청했다.
▲ 고단한 몸을 해먹에 매달고...
1986.7.30 (수)
해먹에 매달려 있다가 몇 번씩 눈을 떠다 보니 이미 아침 햇살이 밝았다. 신선한 바람이 저 하늘 끝에서부터 불어오고 있었다. 발 아래 까마득한 곳에서 여러 사람들이 오고 가는 게 눈에 띄었다. 아침도 생략하고 또 길을 청했다.
우리의 전씨 ‘앙카’ 소리와, 얼마나 외쳤던가 ‘멀고먼 봉정암’을…좌우지간 그 소리에 반나절이 또 갔다. (이때 까지만 해도 우리의 전씨, 봉정암이 암자가 아니고 무슨 큰 바위인줄 알았다나… 하이구야 !)
길가엔 솜다리가 종종 눈에 들어오고..
어느 암릉에 올라서니 포탄 자국 총탄 자국 생채기를 안고 있는 고사목들이 이지러져 혹은 검게 타버리고 혹은 희게 빛이 바랜 채 어느 세월에서부터인가 풍우에 떨고 있었다.
몇 해 전 수렴동 골짜기에서 산화 될대로 된 박격포탄을 주워 들었던 때가 생각났다.
도대체 이념이란 게, 사상이란 게 무엇이기에 우리는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며 이 강산을 피로 물들여야 했단 말인가. 아, 답답ㅎ다.
▲ 장성 중간에서 곰과 함께...
▲ 장성도 끝나 가려나...
▲ 하강지점
장성도 끝나 가려는가, 하강 지점이 보인다. 소나무에 자일을 묶고 하강을 시도한다.
머쟎아 그렇게도 전씨가 외쳐 부르던 봉정암에 도착했다. 제법 많은 등산객들이 오고 간다.
우리는 물을 길러다 부지런히 점심 공양 준비를 했다. 어제 점심 이후로 제대로 챙기지 못했기에 비록 공양거리가 라면이지만 그 무엇보다 반가왔다. 장골 넷이서 끓여도 끓여도 끝이 없었다.
민생고도 해결했겠다, 시나브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소청에 도착했다.
바람이 머리카락을 헤집고, 뒤를 돌아다 보니 용아장성이 한 눈에 들어온다.
저 멀고도 험한 길을 넘어왔단 말인가 !
▲ 장성을 끝내고
▲ 소청봉에서 - 발 아래 용아장성이 펼쳐진다.
▲ 소청에서 무더기로..
소청에서 다음 행선지를 정했다. 아주 민주적(?)으로 전원 합의 하에 대청은 빼먹고 막바로 희운각, 천불동으로 내려 가기로 했다. 천불동 내려가는 길은 목적을 오로지 하는 것이 있었기에 바람같이 내려왔다.
비선대를 곧장 지나치고 와선대에 도착하니 세상 모든 근심이 일거에 사라졌다.
막걸리를 시키고 이것 저것 부른다. 이 한 잔을 위해서 얼마나 달려 왔던가 !
산행 뒤끝의 막걸리 맛, 산을 오르내리지 않는 자 그 뉘라서 알리오 !
넷이서 얼마나 잔 기울이기 놀이를 했던지 그 좁은 와선대 가게마다 돌아 가면서 술을 팔아 주었다. 아마도 술을 1차에서 끝냈다는 이야기를 내 알지 못하는 바…
1986.7.31(목)
새벽에 몸이 차가워 눈을 떠보니 일행들은 보이지 않고 내 혼자 바위 위에 누워 있었다.
황급히 몸을 일으켜 살펴보니 숲에서 자기네들끼리 텐트를 치고 자고 있지 않은가
지난 밤에 여러 잔 기울인 건 기억이 나는데 배낭을 어디 두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에이, 잃어 버릴 것 같았으면 출발할 때 쯤 잃어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몸만 달랑 갔다왔으면 되는 건데…’ 하고 투덜거리는데 어디서 많이 본 게 물 속에 동동 떠있는 게 아닌가.
배낭 옆에 달아둔 헬멧이 물에 떠 있었다. 반갑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했다.
비스듬한 바위 위에서 베고 자다가 굴러 떨어졌나보다,
‘저거 언제 말려서 집에 가나 ?’ 하는 생각에 부지런히 배낭 속의 물건들을 꺼내 말렸다.
▲ 뒤로 보이는 장비 말리느라 고생 무지하다.
칠월 마지막 날, 한 낮의 뙤약볕을 받으며 속초 터미널에 도착했다.
버스는 동해 바닷가를 따라 시원스레 달렸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것 온통 푸르름이었다.
백사장 위로는 울긋불긋한 텐트와 파라솔들이 즐비하고 오가는 사람들 표정이 사뭇 밝았다.
곳곳에 보이는 철조망이 길 떠나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할 뿐…
지금 이 나라 이 국토는 허리가 두동강 났지만 언젠가는 저 철조망 걷히고 모두가 왕래가 자유로운 그 날이 오기를 바라며 차창 밖으로 희망의 미소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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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어휴 . 새삼 용아장성하던 때가 생각나는 군요 나는 뜀바위 지나서 개구멍 통과하면서 혼 났어요^^
좌측으로 오세암이 성냥갑만하게 보이데요....두번다시는 개구멍 지나가고 싶지않네요 . 그러나
한번은 꼭 가볼만 한 곳이라 생각됩니다.
즐겁게 잘 읽었습니다.
개구멍!
진짜 짜릿히지요. ^0^
몇 번 갔지만
또 가고 싶네요...
멋진글 잘읽었읍니다 그시절이면 군대에서 막상병계급장 달때였엏을꺼 같은데 그게 벌써 27~8 년전이네요 지금은 금지코스라 장비가 더 좋아도 못가는 설레이는 코스지요
그렇네요.
참 세월이 무념무정 합니다.
지금이라도 가고 싶은 곳이지요.
벌금 물고 한 번 갈까요 ? ㅎㅎ
저 때 한2주앞에 교련복입고 설악갔어요.@@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젖가락님 !
언제 한 번 산에서 뵈옵시다. ^&^
멋진글 잘 읽었습니다..저시절(86년) 저는 오대산에서 설악산까지 종주한 후...설악산에서 등반했던걸로 기억합니다...
멋진 시간을 보냈네요 !
저는 오대산에서 설악산까지 종주는 못했습니다.
다시 한 번 더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아마도 또 산에 있겠지요.
감사합니다. ^-^
공갈공명님 멋지십니다.
저는 저 시기에 제대 한 달 남겨놓은 말년 병장이었네요.
에효~ 저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말년 병장시절이니까
다시 돌아가고 싶은 것 아닌가요 ?
이병이라면 ? ^_^
청춘이, 인생이 한 번 뿐이니까 아름다운 것이 겠지요.
저 시절로 갈 수 있다면...
이참에 버너만 자작하지 마시고
'타임머신'도 하나 만들어 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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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멋진 추억에 멋진사진들 입니다^^
잘봤습니다^^
감사합니다. ^0^
공갈 공명님 젊은시절 넘 멋지십니다...^^
무슨 과찬의 말씀을...
감사합니다. ^&^
저역시 한줄한줄 읽어가며 옛추억을 떠올렸습니다 산악회서 하계산행 들어가면 비선대산장을 베이스캠프로 잡았죠 선배가 산장지기라 특혜가... 사진은 올봄 찍은 용아장성입니다 봉정암의 지붕도 보이죠 ^^
햐~, 용아장성를 그대로 다 담으셨네요 !
늘 좋은 산행하시길 기원합니다. ^&^
94년 천화대 바위뛰면서 설악골 텐트치고, 저녁 비선대 산장지기가 저녁술한잔하자고해서 갔더니 약술이며, 양주며 엄청 얻어 먹었던것이 생각납니다. 지금은 추억이네요!
@산딸기(박주영 용인) 광희형님이셨는데 많지도 않은 나이에 작고하셨습니다 저는 지금도 비선대 들르면 감자전에 강냉이술을 꼭 먹습니다 ^^
멋진글 잘읽었습니다 저도 한 일행인듯한 착각이 드네요
요사이도 산에 자주가시나요?~~
어이구 다사랑님 !
감사합니다.
일주일에 한 번 밖에 못갑니다.
^&^
설악에 살어리랏다. 설악에
젊은날의 초상
이뻐 죽갓습니딘.
호호호
그러게 말입니다.
나는 뭘 믿고 저리 이쁜지 모르겠습니다.
호호호 ~
A텐트 가지고 혼자서 2박 3일 일정으로 설악산을 넘던 기억이 나네요.
저 때 사진은 항상 분위기가 비슷하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A형 텐트라 ~
참 추억 많고 사연 많은 텐트지요...
오래 전부터 산에 다니셨네요.
감사합니다. ^&^
옛날 빨강색 설악자일(?) 생각이 나네요. 저는 89년 처음 설악 종주뛰었는데, 백담사 위에서 수영하고, 봉정암에서 1박하고,
지금은 매년 후배들 하계훈련뛰는데 가서 같이 바위한번뛰고 옵니다. 올해는 노적봉....매년갈때마다 왼쪽 엄지 발가락이 빠짐니다. 다 자라면 또 빠지겠지요. 옛날 산행기 보니 추억이 새록새록합니다.
11미리 40미터...설악자로 선등하려면 죽음입니다 이런소리하면 마닐라삼로프나 군용자일로 암벽하신 선배님들이 빠졌다고 하실려나? ㅎㅎ
예, 저 자일 설악자일입니다. ^&^
저도 가끔씩 추억에 잠깁니다.
@베가본드(오세창*인천)
예, 저거 11밀리 40M 설악자일입니다.
바위는 그런대로 쓸만하지만
얼음에는 좀 그렇지요.^0^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