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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여라,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1) 조르지오 비구찌 주교
“서로에 대한 신뢰와 평화를 향한 인내가 필요합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세상 어디에선가는 격렬한 다툼이 벌어지고 있다. 피비린내 진동하는 싸움의 현장에서 ‘하느님은…, 어디 계신가?’ 주님을 찾는 고통에 찬 외침이 메아리친다. 눈 뜨고 볼 수 없는 처절한 아픔 속에서도 주님을 증거하는 이들이 있어 끝까지 하느님 나라를 향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다. 평화가 있는 곳에 주님이 계시다. 평화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곳에서 주님 사랑의 길을 내는 이들이 있다. 묵묵히 주님이 맡기신 희망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이들을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마태 5,9)에서 만나본다.
2018 평창 동계패럴림픽대회가 한창이던 3월 7~9일 서울에서는 ‘2018 글로벌 비즈니스 평화상 시상식 및 심포지엄’이 열렸다.
유엔글로벌콤팩트한국협회(GCNK)와 미국의 비정부기구(NGO) ‘종교자유와 비즈니스 재단(RFBF: Religious Freedom & Business Foundation)이 수여하는 ‘글로벌 비즈니스 평화상’은 평화 구축에 있어 리더십을 보여준 전 세계 전·현직 최고경영자들에게 수여하는 상이다.
전쟁과 갈등으로 피해를 입은 선수들을 포함해 역경을 극복한 인간승리를 강조하는 패럴림픽과 그 의미를 함께해 동·하계 패럴림픽이 열리는 2년마다 시행되고 있다. 올해 시상식은 지난 제15회 2016 리우데자네이루 패럴림픽에 이어 두 번째다.
7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시상식에 함께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모인 기업인들을 비롯한 참석자들은 2018 평창 동계올림픽대회를 통해 마련된 남북 대화 분위기를 높이 평가했다. 이들은 ‘올림픽 휴전에서 공동 평화로’라는 제목의 공동 선언문을 채택했다. 한반도 평화를 위한 기업인들의 활동을 독려하는 내용이 골자다.
이 행사에 함께한 이들 가운데 눈에 띄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미국 RFBF 이사장 브라이언 그림(Brian J. Grim) 박사 초청으로 한국을 찾은 이들을 만났다.
- '시에라리온'의 친구로 불리는 조르지오 비구찌 주교는 평화를 위해 일하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에게 말한다. "인류 공동체 전체에 대한 연민을 갖고 항상 정의를 추구하십시오. 평화는 정의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조르지오 비구찌(Giorgio Biguzzi) 주교는
1936년 이탈리아 북부 체세나(Cesena)에서 태어났다. 1960년 파르마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외방전교회에 입회했다. 미국 밀워키의 마케트대학교(Marquette University)에서 교육학 석사학위를 받고 시에라리온 마케니교구에서 청소년들을 가르쳤다. 1987년 마케니교구 교구장주교로 서품된 뒤로도 25년간 더 사목했다. 2012년 은퇴해 이탈리아로 돌아갔지만 지금도 평화를 위한 활동에 나서고 있다.
시에라리온의 친구
지금도 가끔씩 그날을 생각한다. 끝 모를 까마득한 어둠 속으로 한없이 떨어지다 일순간 빛의 세계로 솟구쳐 오르는 기억. 그리고 그 기억에 따르는 무수한 잔영들.
‘시에라리온의 친구’로 불리는 조르지오 비구찌(Giorgio Biguzzi) 주교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하느님 체험이다.
정부군과 반군 간 일진일퇴의 공방이 격심했던 어느 날, 반군 게릴라가 비구찌 주교를 찾아왔다. 잡아간 아이들을 돌려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생각할 것도 없이 길을 나섰다. 게릴라들과 약속한 곳을 찾아가니 밀림 속이었다. 한낮인데도 빛이 들지 않아 어두컴컴한 덤불을 헤치며 한참을 더 들어가니 아이들이 보였다. 순간 어둠 속에서 총부리가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함정이었다. 죽음의 냄새가 이런 것일까. 죽음을 직감한 순간에도 비구찌 주교의 눈은 아이들을 찾고 있었다. 총부리에 떠밀려 들어간 밀림 속 컴컴한 반군 아지트, 게릴라 지도자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솟구쳤을까, 먼저 기도를 드릴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기도를 시작하면서 예레미야 예언자의 기도를 떠올렸다.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예레 1,19)‘우리가 바라는 것이 주님께서 바라는 것과 같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방망이질 치던 가슴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반군들은 비구찌 주교가 차고 있던 시계와 구두, 옷가지들은 물론 주교 반지(anulus episcopalis)와 가슴 십자가(Pectorale)까지 모두 빼앗았다. 그리고 자신들의 요구 사항이 적힌 긴 리스트를 건넸다. 첫 번째가 모든 외국인(외국인 신부, 선교사들)들은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처음 사선(死線)에서 살아 돌아왔다.
비구찌 주교가 처음 아프리카 땅에 발을 디딘 것은 1974년 시에라리온 북부 마케니(Makeni)교구가 운영하는 중등학교 교사로 부임하면서였다. 1960년 이탈리아 북부 파르마(Parma)에서 사제품을 받은 후 미국으로 건너가 밀워키 마케트대학교(Marquette University)에서 교육학 석사학위를 받고난 직후였다. 그렇게 교사요 목자로서 10년간 가난한 이들 곁을 지켰다. 잠시 고국 이탈리아로 돌아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외방전교회(Saint Francis Xavier Foreign Mission Society) 일을 돕던 그는 1987년 제2대 마케니교구 교구장주교가 돼 2012년 은퇴할 때까지 25년간 더 사목했다. 아니, 그의 표현대로 ‘살았다’, 주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죽음의 길에서 되돌아온 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반군 중 한 명이 저를 알아본 모양입니다. 그 청년은 제가 가톨릭학교에서 교편을 잡던 시절 가르친 제자였습니다. 그는 교회 도움으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며 반지를 되찾아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반지는 그의 손으로 돌아왔다.
비구찌 주교가 사목하던 1990년대 시에라리온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반복되는 내전과 쿠데타로 혼란은 극에 달했다. 전쟁과 폭력은 일상이었다.
총을 난사하며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든 반군은 정부에 투표하지 못하게 한다며 산 사람들을 잡아다 팔을 자르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다이아몬드 광산을 소유한 정부와 반군 세력은 막대한 돈을 벌어들였지만 정작 시에라리온 국민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죽음밖에 없었다. 다이아몬드를 팔아 번 돈은 다시 무기를 구입하는데 사용돼 내전이 격화되면서 무차별 살상이 자행됐기 때문이다.
비구찌 주교는 또 한 번 반군에게 끌려갔다. 당장 떠나지 않으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것이라는 협박이 이어졌다. 정부 요인들은 물론 이웃종교인들까지 이미 떠난 뒤였다. 그러나 그는 떠나지 않았다. 죽음을 각오한 선택이었다. 오히려 가톨릭교회를 대표해 정부와 반군 간 대화의 중재자로 나섰다. 평화회담장엔 늘 그가 유일한 주교였다.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버릴 수 없기 때문에 항상 그들과 함께 머물렀습니다. 교회는 언제나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 곁에 머물며 우리가 그들의 편임을 알려야 합니다. 그리고 폭력의 시간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1991년 3월 23일 외세의 간섭으로 시작된 내전은 1999년 3월 27일 토고 로메에서 정부와 반군 간 ‘로메 평화 협정’이 체결되면서 평화의 길을 찾아가는 듯 보였다. 하지만 평화는 쉽게 오지 않았다. 다이아몬드 광산을 둘러싼 이권 다툼 등으로 다시 내전이 벌어졌다. 영국을 비롯한 영국 연방 회원국들과 유엔(UN)이 분쟁에 개입하면서 2002년 1월 28일에서야 내전에 종지부를 찍었다.
내전 종식 후 평화를 향한 발걸음이 더 바빠졌다. 평화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비구찌 주교가 가장 공들인 것은 무엇보다 ‘교육’이었다. 소년병으로 전장에 내몰렸던 아이들이 배운 것이라고는 총 쏘는 방법뿐이었다. 아이들은 거리의 범죄자로 전락하기 일쑤였고 폭력의 그림자는 모두를 위협했다.
비구찌 주교는 그런 아이들을 모아 직업훈련을 시켰다.
“소년들에게 목공과 재봉 기술을 가르쳤습니다. 교육이 끝나면 목수가 될 아이들에게는 공구 박스를, 재봉사가 될 아이들에게는 재봉틀을 선물했습니다. 아이들은 직업을 갖게 됐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평화의 씨앗을 뿌려갔습니다.”
2005년 9월 마케니대학교를 세웠다. 시에라리온 최초의 가톨릭 대학이자 북부에서는 유일한 대학이었다. 그는 특히 의과대학 설립과 발전에 공을 들였다.
“당시 시에라리온 인구는 700만 명이었지만 의사 수는 200명이 안 됐습니다. 의사 수는 부족했고 의료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이들은 너무 적었어요. 전쟁과 가난으로 병든 사람들을 도울 의사를 길러내는 일이 급선무였습니다.”
장애인을 위한 특수학교를 세우고 복음의 기쁨을 전하는 ‘라디오 마리아 방송국’을 설립한 것도 평화의 길을 넓히기 위한 비구찌 주교의 선택이었다.
종족, 종교, 정치적 견해를 초월한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그의 뜻이 알려지면서 전 세계 곳곳에서 자원봉사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런 땀방울들이 모여 대학 문을 연 지 4년 만에 시에라리온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학교가 됐다.
그는 평화를 위해서는 ‘신뢰와 인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서로에 대한 신뢰와 평화를 향한 인내. 너무 익숙한 답처럼 들리지만 그의 조언은 폭력의 현장에서 평화를 위해 일해온 경험에서 길어낸 지혜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그러한 지혜가 극심한 갈등과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지칠 줄 모르고 평화를 향해 나아가게 했다.
비구찌 주교는 평화를 위해 일하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에게 말한다.
“인류 공동체 전체에 대한 연민을 갖고 항상 정의를 추구하십시오. 평화는 정의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시에라리온은
아프리카 서부 대서양 연안에 위치한 나라. 1961년 4월 27일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7만1740㎢ 면적에 인구는 2015년 현재 707만5641명. 1991~2002년 다이아몬드를 둘러싸고 내전을 치렀다. 내전은 400만 명의 난민과 7만5000명의 무고한 죽음, 그리고 팔다리가 잘린 2만 명의 장애인을 남겼다. 또 25만 명의 여성들이 다양한 형태의 성적 학대를 받았고 7000여 명의 소년병들이 어른들의 전쟁에 내몰려야 했다. 시에라리온의 지옥도는 영화 ‘블러드 다이아몬드’(Blood Diamond, 그레그 캠벨, 2006)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2) 필립 맥도나휴 전 아일랜드 대사
“만남 통한 대화의 문 열릴 때 평화의 길 시작돼”
- 필립 맥도나휴씨는 “북아일랜드 평화협정 체결 과정에서 종교가 큰 역할을 했다”면서 “한반도 평화를 위한 과정에도 그리스도인의 역할이 중요할 것”이라고 말한다.
유럽에는 한국과 많이 닮은 나라가 있다. 아일랜드가 그렇다. 그 유사성으로 많은 유럽인들이 한국을 ‘동양의 아일랜드’라고 부른다. 무엇이 그토록 닮아서 그런 이름까지 붙었을까.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에 우리나라는 중국 일본 러시아 등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오랫동안 고난과 시련을 겪어야 했다. 이 점에서 아일랜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릴 정도로 강성했던 영국과 인접해 있어서 12세기 이래 800년 가까이 식민 지배를 받아야 했다. 특히 16세기 중반 영국이 성공회로 국교를 바꾼 반면, 아일랜드는 가톨릭 신앙을 유지하면서 갈등이 증폭되기만 했다. 종교적 신념을 강요하는 한편 아일랜드에 영국 개신교 이주민을 보내는 식민화 정책을 펼치면서 두 나라 간 갈등은 극에 달했다.
영국과 아일랜드 간 갈등의 역사는 1921년 12월 6일 북아일랜드 6개주를 제외한 남아일랜드 26개주의 자치를 승인한 ‘영국-아일랜드 협정’(Anglo-Irish Treaty)으로 ‘아일랜드 자치국’이 들어서면서 종지부를 찍는 듯했다.
하지만 평화협정은 모든 갈등을 ‘평화’로 봉합하지 못했다. 북아일랜드 때문이다. 1968년 ‘2등 시민’으로 대우받던 북아일랜드 내 가톨릭 신자들의 시민권 운동으로 촉발된 ‘북아일랜드 분쟁’은 영국과 아일랜드 두 나라뿐 아니라 인간 이성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이후 30년간 이어진 양측의 유혈 충돌로 발생한 사망자만 무려 3700여 명. 부상자를 포함한 사상자 수는 5만 명을 훌쩍 넘는다.
인류 이성이 새롭게 눈을 뜬 20세기 선진국에서 일어난 일이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믿는 방식은 다르지만 한 하느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갈라진 형제’들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북아일랜드 분쟁’은 자신들이 믿는 주님을 멋대로 재단한, 그래서 결국 주님의 자리에 악마를 불러들인 인간의 오만함을 돌아보게 한다.
1998년 4월 10일 북아일랜드 수도 벨파스트 근교 스토몬트(Stormont). 영국 토니 블레어(Tony Blair) 총리와 아일랜드 버티 아헌(Bertie Ahern) 총리 등 가톨릭·개신교 대표들이 한 테이블에 앉았다. 1996년 6월 시작돼 2년 가까이 이어온 마라톤 협상 끝에 북아일랜드 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벨파스트 협정(Belfast Agreement)’이 체결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협정이 체결된 날이 주님 부활 대축일 이틀 전인 성금요일이었기 때문에 ‘성금요일 협정’(Good Friday Agreement)이라고도 불린다.
“성금요일 협정은 100년에 한 번 나올 만한 역사적 돌파구였습니다.”
‘성금요일 협정’ 체결을 전후한 1994~1999년 영국 주재 아일랜드대사관에서 일하며 ‘평화 특사’로 협정 과정에 참가했던 필립 맥도나휴(Philip McDonach)씨는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가슴이 벅차오르는 모양이었다.
3월 7일 서울에서 열린 ‘글로벌 비즈니스 평화상’ 시상식에 참여하기 위해 처음 한국을 찾은 맥도나휴씨는 “‘북아일랜드 평화 프로세스’가 주는 교훈이 한국을 비롯한 다른 분쟁지역에서도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평화협정이 추진되던 당시 그는 영국, 북아일랜드 지도자들과 아일랜드 정부 관계자들의 만남을 주선하는 일에 가장 힘을 기울였다.
평화를 위한 첫걸음은 만남입니다. 만남을 통해 대화의 문이 열릴 때 평화의 길이 시작됩니다.”
가톨릭을 비롯해 성공회, 장로회 등 다양한 그리스도교 종파가 모이는 대화 모임에 참여한 것도 그때의 경험이다. 두려움을 무릅쓰고 ‘테러리스트’로 불리던 개신교 정치범들을 감옥으로 찾아가 만나는 일도 평화의 길을 내기 위한 한 과정이었다.
북아일랜드 분쟁은 영국과 아일랜드 간 반목의 역사는 물론, 가톨릭·개신교 사이의 종교 갈등, 북아일랜드 내 민족주의와 연합주의의 대립 등이 얽힌 복합한 문제였다. 갈등 양상이 복잡했던 만큼 갈등을 풀어나가는 일도 쉽지 않았다.
맥도나휴씨는 영국령으로 잔류를 원하는 얼스터연합당(UUP) 당수 데이비드 트림블(William David Trimble)과 사회민주노동당 당수 존 흄 (John Hume)을 한 테이블에 앉히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두 사람은 북아일랜드 분쟁을 종식시킨 공로로 1998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다.
그는 평화협정 체결 과정에서 종교가 큰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북아일랜드 인구 다수가 믿고 있는 장로회, 영국 국교인 성공회, 아일랜드 다수 종교인 가톨릭교회는 평화를 위한 대화에 앞장섰다.
“종교는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우리 종교들은 신학적으로 같은 토대 위에 있었습니다. 영국과 아일랜드 정부도 종교적 철학을 바탕으로 보편적 진리를 찾고 그 진리 위에 구체적 계획들을 세워가는 과정을 존중했습니다.”
맥도나휴씨는 한반도 평화를 위한 과정에도 그리스도인들의 역할이 중요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반도 상황을 보면 남한과 북한뿐만 아니라,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까지 다양한 정치적 이해관계들이 얽혀 있습니다. 하지만 국적을 불문하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공유하는 가치와 진리가 있습니다. 평화를 위해 보편적 이상을 도출해가는 과정에 그리스도인들이 참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는 평화를 대하는 태도로 흥미로운 예를 들었다.
“한국에 와서 행사에 참여하면서 축하공연을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가여운 제비를 대하는 두 형제의 이야기였어요. 동생은 불쌍한 제비의 다리를 고쳐줘 복을 받지만 형은 재물을 탐해 일부러 제비의 다리를 부러뜨렸고 벌을 받게 됩니다.”
‘흥부전’ 얘기다. 그는 평화를 대하는 태도도 제비를 대하는 태도와 같다고 말했다. “평화를 바란다면 서로의 상처를 소중히 다루고 치유하려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평화를 바란다고 말하면서 폭력을 행사한다면 모든 걸 잃게 됩니다.”
그는 단순히 전쟁을 하지 않는 상황적 평화가 아닌 ‘긍정적인 평화(Positive Peace)’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누구도 억압받거나 배제되지 않는 상황을 말한다. 또한 평화는 한 걸음 한 걸음 이해와 협력을 향해 걸어가는 ‘여정’(journey)이라고 정의한다.
한반도에 모처럼 훈풍이 분다. 하지만 그간 경험을 통해 평화를 향한 여정이 쉽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다. 이 여정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상처를 치유하는 흥부가 될 것인지, 평화를 내어 놓으라고 윽박지르며 폭력을 행하는 놀부가 될 것인가….
필립 맥도나휴씨는
분쟁의 땅 아일랜드에서 태어났다. 조부모 대부터 영국과의 오랜 분쟁을 체험하며 자랐다. 아일랜드인으로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수학한 것은 평화의 사도로서 소중한 경험이 됐다.
1994~1999년 영국 주재 아일랜드대사관에서 일하며 북아일랜드 평화 프로세스에 참여했다. 1999년부터 2017년까지 인도, 교황청, 핀란드, 러시아, 유럽안보협력기구(OSCE)에서 아일랜드 대사로 활동했다. 시와 희곡을 쓰는 작가이기도 하다.
평화의 제도화와 관련해 협정이라는 법률적 형태도 중요하지만, 군사적 신뢰구축부터 군축까지 실질적인 평화정착 과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법적인 평화’가 아니라, ‘사실상의 평화’를 더 고민하고, ‘결과로서의 평화’가 아니라 ‘과정으로서의 평화’를 더 많이 연구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북아일랜드는
오랜 세기 분쟁의 땅이었다. 1922년 ‘영국-아일랜드 조약’에 따라 아일랜드 자치국이 수립됐지만 영국은 개신교 신자 집중 거주지역인 북아일랜드 6개 주를 독립에서 제외시켜 ‘북아일랜드 분쟁’의 여지를 남겼다. 소수였던 북아일랜드 가톨릭계 주민들은 심한 차별을 받아야 했고 이는 북아일랜드 분쟁의 원인이 됐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 (5) 평화학과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에게 유일한 잣대는 주님 말씀뿐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와 평화
그리스 아테네 인근 케피소스 강가에 프로크루스테스(Procrustes)라는 힘센 거인이 살고 있었다. 프로크루스테스란 이름은 ‘늘리는 자’란 뜻이다. 포세이돈의 아들인 그는 강변에서 여인숙을 운영했다. 여행에 지쳐 쉬고 싶은 이들을 유인해 쇠로 만든 침대에 묶어놓고는, 침대보다 키가 크면 머리나 다리를 잘라 죽이고, 침대보다 작으면 잡아 늘려 죽였다. 프로크루스테스에게 침대는 편히 쉴 수 있는 도구가 아닌 끔찍한 사형대였던 셈이다.
잔혹한 방식으로 수많은 사람을 죽인 프로크루스테스의 악행은, 미로의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친 그리스 영웅 테세우스에 의해 종말을 맞는다. 테세우스를 죽이려 했던 악당은 오히려 자신의 침대에 묶인 채 머리와 다리가 잘려 죽고 만다.
이 이야기에서 유래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는 타인을 억지로 자기 기준에 맞추려는 획일화 작업에 사용되는 폭력적 도구를 일컫는다. 이렇듯 어떤 한 가지 기준으로 모든 것을 다 그것에 꿰맞추려는 사람을 프로크루스테스라고 한다.
이 표현은 마르크스가 헤겔의 관념론적 사유 방식을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와 같다고 비꼬면서부터 널리 인용되기 시작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이야기는 폭력에 대한 당대 사람들의 인식을 보여준다. 테세우스의 손에 자신이 하던 똑같은 방식으로 죽임을 당한 ‘프로크루스테스’가 만든 ‘침대’(기준)는 결국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거나 공감하지 못하는 ‘기준’이 자신마저 파멸의 길로 이끄는 폭력임을 들려주고 있다. 아울러 ‘눈에는 눈 이에는 이’처럼 받은 만큼 되갚는 동해복수(同害復讐)가 정의를 실현하는 길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과학 기술이 눈부시게 발달한 오늘날에도 ‘현대판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난무하고 있다.
1974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영국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August von Hayek·1899∼1992)는 저서 「치명적 자만」(The Fatal Conceit, 1988)에서 인간 사회에는 오랜 ‘잘못된 믿음’이 일으키는 ‘치명적’인 흐름이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것을 ‘치명적 자만’이라고 불렀다.
인류 역사는 진리 또는 최고의 선이라고 여긴 사상과 이념, 제도가 오히려 인간 공동체를 더욱 피폐하게 만든 무수한 사례를 보여준다. 그러한 역사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단적인 예가, 인간 집단지성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국가가 모든 이들이 꿈꾸는 이상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는 완전한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이다. 근대 이후 인류 역사에 등장한 수많은 사상과 제도들이 모든 사람들이 풍요를 누리면서 평화롭게 공존하는 세상을 내세웠다. 이런 믿음에서 생겨난 대표적인 사상이 사회주의다.
그렇다면 국가가 모든 이들이 평화를 누리는 이상사회를 디자인하는 것이 왜 불가능한가. 하이에크는 이러한 물음에 공동체를 원하는 대로 디자인하는데 필요한 모든 지식을 갖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국가가 모든 것을 알고, 조율할 수 있다는 것은 무책임하고 정직하지 못한 ‘지적 자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런 인간의 자만은 인류 역사에서 치명적인 결과로 드러났다. 평화로 포장된 수많은 사상과 이념 등은 잠시도 끊길 틈 없는 다툼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 끝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을 것 같은 가난과 폭정, 문명 파괴 등 폭력적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평화’를 내세운 결과가 ‘폭력’의 악순환을 낳는 아이러니다.
공유지의 비극 vs 사유화의 비극
자기 집 화장실과 공중화장실이 있다. 어느 쪽이 더 깨끗할까. 답은 자명하다. 자가용 자동차와 빌린 차가 있다. 어느 차가 더 깨끗할까. 답을 내놓기 쉽지 않다.
공중화장실과 렌터카. 둘 다 다수가 이용하는 대상인데 왜 이런 차이가 생길까. 답은 그것이 ‘공짜’인지 아닌지 여부에 달려있다. 별도 비용을 지불하지 않는 공짜는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만큼 빨리 손상되기 마련이다.
경제학에서는 이를 ‘공유지의 비극(The Tragedy of the Commons)’이라고 한다.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개릿 하딘(Garrett Hardin) 교수(환경학과)가 1968년 과학 저널 <사이언스>지에 기고한 논문 ‘공유지의 비극’으로 유명해진 말이다.
누구에게나 개방된 풀밭(공유지)이 있다. 합리적인 목동이라면 자신에게 돌아오는 이익을 위해 가축 수를 늘리는 게 당연한 선택이다. 다른 목동들도 가축을 늘린다. 풀밭에 가축을 풀어놓음으로써 발생하는 이익은 목동들에게 골고루 돌아간다.
하지만 인간이 욕심을 주체하기 힘들다는 데 비극의 씨앗이 담겨 있다. 목동들은 계속 가축 수를 늘리고 풀밭은 제한돼 있기 때문이다. 결국 풀밭이 감당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선 가축 수 때문에 모두가 함께 파멸하고 만다. 목동 개개인은 합리적 선택을 했지만 이러한 개인들의 죄의식 없는 행동이 그들을 둘러싼 환경에 돌이키기 힘든 피해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공유지의 비극’을 생각해볼 수 있는 영역은 우리 주위에 널려있다. 가깝게는 환자들에 대한 과잉진료로 인한 건강보험의 질 저하, 남획으로 인한 어업자원 고갈, 해마다 반복되는 보도블록 교체 공사…. 눈을 돌려 세계를 바라보면, ‘기후변화에 관한 유엔 기본협약’(United Nations Framework Convention on Climate Change·UNFCCC)도 마찬가지다. 전 세계 인류가 지구촌이라는 ‘공유지’에 머무는 이웃이라는 점에서 지구 온난화를 막기 위한 기후변화협약도 공유지를 둘러싼 논쟁으로 볼 수 있다.
최근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파리기후협약 탈퇴를 선언함으로써 전 인류가 이로 인한 피해를 입을 것이라는 ‘공유지의 비극’을 경고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사유화의 비극’이라는 말도 생겼다. 주택을 수십 채씩 지닌 부자들에 대한 증세 문제가 대표적이다. 극단적인 사유화로 부의 편중과 양극화 현상이 심화돼 인류 공동의 자산이 공동선을 위해 쓰이지 못하고 낭비된다는 것이다.
‘공유지의 비극’이나 ‘사유화의 비극’은 공통점이 있다. ‘이해타산을 따지는 합리적인 개인이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개인주의에 매몰된 개인의 이익 추구는 결국 공동체나 다른 이들의 이익을 침해함으로써 어떠한 형태로든 폭력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게 된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속적으로 ‘개인주의’를 비판하며 경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평화학과 그리스도인
폭력 극복을 목적으로 하는 평화학은 결국 극단적 개인주의가 공멸이라는 파국으로 번지지 않도록 하는 해법을 찾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평화학자들이나 평화활동가들은 공히 평화를 위한 교육과 종교의 역할을 강조한다.
1991~2002년 내전을 치른 아프리카 시에라리온에서 목숨을 걸고 평화협정을 이끈 조르지오 비구찌(Giorgio Biguzzi) 주교(82·전 마케니교구장)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루려는 평화는 ‘주님의 평화’이지만 많은 이들이 평화의 실체를 잘 모르고 있다”고 말했다.
지식인들일수록 ‘주님의 평화’에서 멀어지기 쉽다. 하느님을, 평화를 잘 안다는 자만 때문이다. 이들은 ‘이성’이 ‘평화’를 담보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류 역사는 올바른 믿음과 이를 바탕으로 한 가치관이 동반되지 않는 ‘이성’이 얼마나 광폭해질 수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근대 이후 경험한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베트남전 등이 대표적이다.
따라서 참된 믿음이 동반되지 않는 이성은 참된 ‘이성’이라고 할 수 없다. 프로크루스테스가 자기가 만든 침대 길이에 맞춰 사람을 재단한 것과 마찬가지로, 현대의 이성과 과학문명도 이성주의로 포장된 비인간적인 논리와 이데올로기로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있다.
‘이성’(ratio)이라는 말은 ‘비율’, 또는 ‘잰다’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유일한 잣대(ratio)는 주님 말씀뿐임을 알 때 그만큼 ‘주님의 평화’가 자라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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