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민심 잡고 조상의 뿌리 찾으리라”… 태종 이방원의 ‘고향행차’]
《조선 27대 왕들 중 전북 전주에서 태어난 이는 아무도 없다.
태조 이성계의 선조들이 살았던 곳이라는 점 외에는,
전주와 특별한 연결고리를 가진 왕도 없었다.
그럼에도 조선의 왕들은 전주를 마음의 고향으로 여겼다.
함흥 출생의 태종과 한양 출생의 세종은 공개석상에서 전주가 고향임을 애써 밝혔다.
최근 TV 사극으로 주목받고 있는 태종 이방원은 왕의 신분으로 전주를 방문한 유일한 군주이기도 했다.
태종의 자취를 좇아 풍패지향(제왕의 고향)인 전주를 찾았다.》
○사냥 핑계 대고 전주 찾은 이방원
1413년 10월 1일, 한양에서 출발한 태종의 어가는 마침내 완산성(전주성)에 도착했다.
그가 임금에 오른 지 13년 만의 일이자, 조선 임금으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고향을 방문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전주는 한양에서 직선거리로 500리(약 200km)가량 떨어진 곳이다.
임금이 순행하기에는 물리적으로 무리가 따르는 거리다.
게다가 전주는 태종으로서는 정치적 부담감을 안고 있는 곳이다.
태종은 ‘왕자의 난’ 등 권력을 쟁취하는 과정에서 자신과 반대편에 섰던 전주의 유력 가문들을 제거했다.
호남 출신 개국공신인 심효생(부유 심씨), 오몽을(보성 오씨), 이백유(완산 이씨) 등 쟁쟁한
인물들이 당시 죽임을 당했다.
태종은 이후 정권이 안정되자 전주의 민심을 달랠 필요를 느꼈다.
전주는 전국에서 물산이 가장 풍부한 호남의 수부(首府)다.
전남북과 제주도까지 관할하는 전라감영이 설치된 곳이기도 하다.
태종은 이런 전주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사족 세력과의 화해가
정국 운영에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상주 전주이씨대동종약원 문화위원은 “태종은 전주 사족과 정적(政敵) 관계인 신하들의
강력한 반대를 물리치고 사냥을 간다는 핑계를 대면서까지 전주를 전격 방문했다”며
“호남 민심을 수습하는 의미와 함께 자신의 뿌리를 찾아 후손의 예를 다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주에서의 태종은 매우 인자한 군왕이었다.
임금을 맞이하는 예법과 절차에 하자가 발생했어도 관련자들을 꾸짖거나 벌주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만 일을 잘해도 상을 내리고 칭찬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전주에서 벗어나자마자 엄격한 군왕으로 되돌아갔다.
그는 귀향 도중 임금이 사용하는 말인 내구마가 경기도 탄천교에서 물에 떨어져 즉사한
사건이 생기자, 책임자(광주판관)에게 80대 장형(杖刑) 및 파면이라는 가혹한 형벌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