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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여성수필의 정체성 연구
여성의식의 특성
나. 참여적 사회성2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식모보다 낫다’ ‘식모 대우보다는 인간적이다’ 부리는 쪽이나 부림을 당하는 쪽이나 이런 생각을 갖는다는 건은, 무난한 노사관계를 위해선 행복한 일인지 모르지만 정말 ‘인간적’을 위해선 매우 불행한 일이다. 식모보다 낫다에 자족하는 사이에 어느덧 흡족한 대우를 받고 있는 것 같은 환상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식모보다 나은 대우가 마치 가장 모범적인 사람 대접인 것 같은 환상은 부리는 사람을 더욱 유리하게 하고 부림을 당하는 사람을 더욱 불리하게 할 따름이다. 왜냐하면 부리는 사람은 식모보다 나은 대우 이상 가는 근로자들에 대한 의무를 마냥 유보할 수 있는 대신에, 근로자들은 마땅히 누려야 할 식모보다 나은 대우 이상 가는 정당한 권리를 마냥 차압당하고도 억울한 줄도 모를 테니까. (굵게 강조 : 인용자)
- 박완서, 「여성과 노동」 중에서 -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로 대표되는 문학을 역사학과 비교하면서, 역사는 사실을 기록하지만 문학은 사실일 수 있는 것을 기록하며, 또한 문학은 보편성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역사학보다 더욱 철학적이라고 선언하였다. 이는 수필의 사회적 시대적 기능을 중시하는 말이다. 위 수필을 쓴 여성작가는 현실적인 상황문제, 특히 소외당하고 억울해 하는 다수의 젊은 여성 문제에 관심을 두고 있다. 민족 개조라는 입장에서 보면, 사회 현실의 고발을 통한 참다운 정의만이 문학의 정신이라는 이론이 가능할 것이다. 작가는 그 시대 그 민족과 국가가 처해 있는 상황을 누구보다도 선견지명으로 파악하고 정치적 제도나 인위적 속박에서 상실된 인간성을 되찾으며 불행과 고통을 함께 앓고 그 실상을 정확히 표현하는 것이 주책무라면, 박완서는 이런 역할에 충실하다고 하겠다.
여성소설가 박완서는 젊은 여성이 하는 식모 일이란 일의 성취감도 없고 사회적으로 단절되며, 독립성과 주체성이 부재하는 인생을 만들 뿐으로, 비록 노동법에는 위배되는 10 시간 이상의 중노동이지만 그래도 일이 끝나면 자유가 있고, 가끔 휴일도 있는 소년 근로자들이 식모살이보다 낫다는 인식에 이르자, 과거의 식모살이라는 것의 비인도적 성격을 반성하게 된다. 식모살이보다는 공장의 근로자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 여공들의 소망을 통해 비록 집이 가난하여 고등학교 교육은 못 받았을망정 소녀들이 얼마나 인간다워지기를 소망하는가를 안다. 작가는 그들이 언제까지고 식모보다 낫다는 걸로 만족할 수 없지 않는가를 반문하며, 여성근로자들이 잘 먹고 잘 입는 것 말고의 인간다움에 대한 각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의식을 투철하게 가져야만 일할 권리를 찾을 수 있으며 인간답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박완서가 주장하듯이 식모살이가 전적으로 가치가 없는 일은 아닐 것이며, 성차별 해소 또한 여성의 사회적 경제적 활동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는 사안은 아닐 것이다. 이 수필은 여성의 사회적 경제활동에의 참여 확대, 가사노동의 낮은 보수성에 대한 대안 제시, 여자의 손이 간 것에 대한 낮은 사회적 평가를 개선하는 일 등이 오늘의 여성이 안아야 할 종합적 과제라는 것을 말해 준다고 하겠다.
정영자는 근대가 여성을 배제하는데서 빚어지는 충돌을 절실하게 경험한 사례를 보여준다. 굴곡 많은 삶과 문학 속을 배회하던 개인주체를 갈망한 신여성과 현실에서 경험한 모성의 갈등을 여성문학 연구를 통해 드러낸다. 페미니스트 작가들이 모성에 대한 회의를 나타내는데 반해 그는 여성적 특성을 인정하는 모성적 원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일련의 글들에 모성 원리와 여권의 인식에 대한 입장을 여실히 드러낸다.
인류의 반, 하늘의 절반인 여성이 움직이지 않고는 어떠한 변화 어떠한 변혁과 진보도 가능하지 않다는 슬로건을 가지고 여성 자신의 평등에 대하여 논의가 시작되고 있다.
대학마다 여성학 강의가 개설되어 여성의식의 새로운 성찰과 방향을 제시하며 앞 세대의 여성 역할과 그 좌표를 설정해 나가기도 한다. 최근에 오면서 여성문제에 대한 관심은 여성의 인간적 평등과 이해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여성 지도층의 각성과 함께 젊은 여성들의 욕구가 강렬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해방’이란 용어를 만들어 가면서 차별과 억압, 눈물과 체념, 인내와 순종 그리고 무보수의 노동에 대한 여성의 역사를 비판하며 진정한 여성 해방 없이는 평등한 인간해방이 없다는 논리 전개를 펼쳐나가고 있다.
그러나 ‘여성해방’이란 용어에 대한 과민성 반응과 그 격렬한 의미 수용과 함께 상당한 저항감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여성해방이란 남성이 가지고 있는 권리를 빼앗자는 것이 아니며 피해와 억압과 차별받는 것을 되돌려주자는 것은 더더욱 아니며 근본적인 인간평등을 그 근간으로 하는 것이다. (굵게 강조 : 인용자)
정영자, 「여성해방의 의미」 중에서 -
인용 예문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작품은 최근에 오면서 여성문제에 대한 관심은 여성의 인간적 평등과 이해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여성 지도층의 각성과 함께 젊은 여성들의 욕구가 강렬해졌기 때문이라 진단하면서, 차별과 억압, 눈물과 체념, 인내와 순종 그리고 무보수의 노동에 대한 여성의 역사를 비판하는 '여성해방'이란 용어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다듬고 있는 글이다. 인간의 생존에 관한 문제와 가치 규명, 보다 보편적 의미의 획득이 문학이 지향하는 바이고, 수필이 추구하는 이상이라면, 수필적 관심과 창작적 발상은 모든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애정과 신뢰에 두어져야 할 것이다. 정영자의 수필의 정신은 진정한 의미의 남여평등 실현을 추구한다. 여성작가가 말하는 여성해방은 근본적으로 인간 평등을 그 근간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일부 페미니스트 그룹에서 야기하고 있는 남성 대 여성 편짜기식이 여성운동이 아니라, 현실적인 바탕과 문화전통을 고려해서 부분적인 성역할을 인정하자는 주장이다. 여성의 힘이 사회 전반에 필요하고 변화의 바탕이 될 수 있다는 지혜를 깨닫는 여성이 되는 것이 우선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버지니아 울프가 제창한 '남성여성의 양성동체론과 심리학에서 말하고 있는 여성 속의 남성, 남성 속의 여성성을 수용하는 진정한 성역할의 조화 속에 여성의 행복한 삶이 보장된다는 작가의 논리는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하겠다.
이 작품의 가치는 페미니즘 수필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필요요건 중에 하나는 '계속 가부장제에 충격을 주며 그 실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일'이며, 이런 작업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일은 남성과 여성의 말과 글과 행동이 선천적으로 각기 달리 정해지지 않는다는 점을 인식시키는 데 있다. 여성학에서 역할의 융통성을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여성의 수필이 여성적 시각에서 여성의 여성적 특성을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나라의 현실은 비록 헌법이 남녀평등을 규정하고 있지만 남녀가 가정생활에서나 사회생활을 하는 데 차별을 받고 있기 때문에 평등의 법칙에 의해서 우리 사회가 움직여 나가도록 여성 작가가 현실안을 가지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인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여성학을 연구하는 페미니스트들이 목적지향의 수필을 쓰는 것도 부정적으로만 볼 수 없다고 하겠다.
80년대 후반 여성을 독립적인 인격체로 평가해야 한다는 여성 운동의 활성화로 문학 부분에서도 여성 문제에 대한 이론 작업과 창작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른바 '페미니즘 문학'이라 불리워지는 여성문학은 지금까지 부정과 금기의 항목으로 내팽개쳐 왔던 여성의 범주를 좀더 적극적으로 검토해 보려는 문학운동이라 할 수 있다. 여성을 최후의 식민지로 남겨 두려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실체를 규명하고, 남녀가 함께 해방된 미래상을 꿈꾸는 여성 해방 문학은 본질적으로 가치 지향적이고 실천적인 문학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대여성소설에 있어서는 '여성해방'이 단순히 문제 제기 뿐만 아니라 문제의 해결을 위한 비전이 제시되어 있다면, 수필에 있어서는 그것이 단순히 문제 제기나 그 문제가 무엇인가에 대한 서술에 그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1980년대 이후 여성 차별이 중요한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게 되었고, 그리하여 문학의 모든 장르가 여성의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고 있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수필계에는 사회수필이 별로 많지 않으며, 사회수필 중에서 중요한 한 분야라고 할 수 있는 페미니즘 수필을 쓰는 사람은 거의 찾아 볼 수 없으며, 이런 작업에 앞장서야 할 여성수필가들조차 외면하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현재 우리나라에서 발표되는 대부분 여성 수필가들의 작품은 언제나 여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여성적'인 시각일 수는 있으나 '여성주의적'인 시각은 아니다. 후자는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가부장적이며, 이런 사회는 평등의 법칙이 아니라 강자의 법칙이 지배하는 반인간적인 사회며, 그러므로 이런 체제는 변화되어야 한다는 현실적인 개혁의지에서 출발한 것이 여성학이다. 이 전제로 출발한 여성학은 1960년대 여성해방 운동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에 남녀 차별은 엄연히 상존하고 있지만 이런 현상을 외면하고 있다는 것은 문제다.
이 문제를 고의적으로 외면하는 사람들의 유형을 몇 가지로 설명한 댈리(Mary Daly)의 사상에 의하면, 첫째, 어떤 사람은 이 문제를 시시한 것으로 취급함으로써 외면한다. 그는 "이 세상에는 여성 문제보다 더욱 중요한 전쟁, 인종차별, 공해와 같은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마치 성차별이 제3세계에 대한 약탈, 흑인에 대한 약탈, 지구에 대한 약탈과 아무런 관련이 없기나 한 듯이. 둘째, 어떤 사람은 이 문제를 특수화시킴으로써 외면한다. 그는 "그것은 가톨릭의 문제며, 가톨릭의 문제는 중세시대의 문제"라고 말한다. 마치 가부장제도가 오늘날에는 존재하지도 않기나 한 듯이. 셋째, 어떤 사람은 이 문제늘 보편화시킴으로써 외면한다. 그는 "진정한 문제는 여성 해방이 아니라 인간해방"이라고 말한다. 주로 지식인들이 사용하는 이 말은 확실히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명제가 성 차별을 외면하기 위하여 사용될 때는 분명히 옳지 않은 명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여권주의적 수필은 여성의 경제활동과 사회활동이 점고되고 동시에 남녀동등권이 확충됨에 따라 여성 수필가들을 위해 '페미니즘적 수필'이라는 새로운 주제적 장르가 생긴 것이다. 이런 수필들은 대체로 우리의 전통적 사회 현상이나 문화현상을 여권주의적 입장에서 비판하는 것이다. 또 여성문제에 대한 고발과 기존 가치 체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며, 나아가 미래 사회의 바람직한 남녀평등상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여성수필에 있어서 여성의 문제는 몇몇 페미니스트 수필가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작품에서 억압의 철폐나 사회 구조의 변화를 요구하는 강력한 메지지 차원으로 승화되지 못하고 있으며, 주로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를 통해 여성의 문제를 자각하는 선에서 제시하는 단계에 머물고 있다.
이정림은 페미니즘 수필가로 불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가다. 사회 현실에 대하여 상당한 문제 의식을 가진 만만치 않은 여성이다. 그의 수필 <키를 잡을 수 있는 여성>은 여자라는 조건이 이 사회에서는 생각지도 않은 많은 불평등 요소가 되는 사실을 고발한 작품이지만, 황필호는 이정림이 쓴 사회수필은 대부분이 개인적 감상으로 일관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이 작품의 의 결론인 제도의 개선보다 의식의 개선이 더 중요하다는 발상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취향일 뿐이며 , 의식과 제도가 동시에 개혁되어야 한다는 사회과학적인 시각이 결여된 입장이다. 의식 개혁이 우선하느냐, 제도가 우선하느냐, 혹은 양자가 동시에 개혁되어야 하느냐는 여기서 논할 문제는 아니다. 다만 진정한 페미니즘적 시각은 여성 차별의 원인을 남성과 여성의 의식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제도의 개선에서도 동시에 찾아야 한다.
그러나 작가의 이런 개인적인 감상은 "사람을 어머니로 하여 태어난 인간들의 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으리라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성폭행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남자 수위를 입고 떠난 당신」에서 어느 정도 극복되고 있다. 고독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면서 고독을 사랑하는 나이인 대학교 2학년때 성폭행을 당해 보름 만에 자살을 기도하고, 10년 후에 드디어 자살에 성공한 여성, 그리하여 그녀의 가족은 시신에 남자 수위를 입히면서, 여자였기 때문에 겪었던 성폭력에서 벗어나 다시 태어날 땐 남자로 태어나길 발원할 수밖에 없었던 여성의 일대기를 담담하게 묘사한 이 작품은, 자살의 미화라는 단순한 감상에서 벗어난 작가의 굳은 의지로 끝을 맺는다.
가족이 그렇게 발원했지만, 그러나 당신은 내세에 남자로 태어나지 말고 다시 여성으로 태어나시길 빕니다. 그리하여 여인만이 가질 수 있는 모든 행복을 마음껏 누리시길 바랍니다. 그러다가 당신이 마지막 갈 때에는, 원삼에 녹의 홍상의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으로 떠나시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굵게 강조 : 인용자)
- 이정림, 「수의로 입고 떠난 당신」중에서 -
한 작가에 거는 독자의 기대는 현실을 얼마나 리얼하게 그려내느냐 하는 기술적인 문제보다는 삶에 대해 얼마나 깊은 의식을 갖고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해 고뇌하며, 나름의 해석을 도출하는가에 있을 것이다. 위의 수필은 여성수필가 이정림이 왜 쓰는가의 물음에 대해 ‘우리들의 자유로운 삶을 위해, 보다 인간다운 삶, 보다 행복한 우리들의 삶 또한 그 삶에 대한 깊은 사랑 때문에 쓰고 있다’고 답해주는 글이다. 이 수필은 작가가 분노를 가라앉히고 독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함축적인 암시로 표현함으로써 문학성을 갖춘 중수필적인 사회수필이 되었다.
더 나아가서 여성수필가는 이것이 서른한 살의 꽃다운 청춘을 자살로 끝낸 한 여성의 문제만은 아니라고까지 말한다. "이 사회에는 또 어느 구석에 당신처럼 죽음보다 더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여성이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것이 어찌 그들만의 비극으로 돌릴 수 있는 문제이겠습니까?"라는 진술을 통해서 작가는 종래의 개인주의적 감상으로부터 한 걸음 벗어난 것으로 보이며, 그것이 바로 이 글을 진정한 해방적 여권을 추구하는 페미니즘 수필로 만든다고 볼 수 있다.
쉐퍼와 프라이는 강간을 분석하면서 영토의 개념에 의존한다. 영토는 한 개인이 살아가는 곳이다. 이 영토 중심에 일단의 ‘개인-자산들’과 그 재산들의 실질적인 거주지인 육체가 있다. 이 영토의 중심부에서 떨어진 곳에 개인이 사고나 행위를 할 때 사용하는 물건들과 공간들이 있다. 한 개인의 영토 중심부를 침범하는 것은 개인에게 최대의 해를 가하는 것이다. 강간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들의 개인적인 정체성에 주변적이 아니라 중심적으로 연루되어 잇는 인간의 자아의 부분들을 간섭하는 행위를 포함하여 한 인간을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여성을 분열시킬 위험이 있는 범죄행위다. 다시 말해 여성의 육체상의 자율권을 빼앗음으로써 그 여성을 인간 이하로 만드는 것이다.
성의 성치학을 쓴 밀레트가 동시대 페미니즘엣 발견한 것은 여성억압의 원천인 성별체계를 파괴하고 모든 생존 수준에서 여성과 남성이 동년배가 되는 새로운 사회를 구축하려는 노력이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성의 이중적 기준으로 여성의 성적 자유는 철저히 죄악시되고 있다. 밀레트에 의하면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는 만성과 여성 사이의 생물학적 차이점을 과장하여 남성은 항상 지배적인 역할을, 여성은 항상 종속적인 또는 여성적인 역할을 맡도록 규정짓는다. 여성작가는 여성이 여성의 주인으로서, 주체로서 서기 위해서는 여성억압의 밑뿌리 즉 가부장에의 체계부터 먼저 이해해야 한다는 점을 위의 수필을 통해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여성이 중심에 서는 세상이 반드시 올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런 암시는 곧 여성들이 남성 중심사회에서 투쟁해야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고도 하겠다.
여성소설가 이경자의 「반쪽 어깨에 내리는 비」는 여성의 문제를 매우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다. '여성이 바로 여성의 주인이다.'고 전제한 작가는 '여자들이 남자를 밑뿌리부터 알아서 이해하게 되고, 그래서 여자의 삶을 속박하는 매듭들을 제대로 찾아 제대로 풀어낼 수 있게 되고, 또 남자들이 여자의 입장에 서서 남자와 여자의 문제를, 그리고 여자의 문제를 들려다보는 노력 없이는 여성해방이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여자의 역할이 단지 남자의 일을 처리하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비품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남성우월적 사고 방식은 따지고 보면 남자들의 손해이며, 인간의 슬픔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한편 박완서의 ‘여자답기 전에 사람답게’는 우리 사회의 여성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보여주는 글이다. 작가는 남성 중심 사회의 우리 사회는 일자리 속에도 여자 길들이기 음모가 겹겹이 도사리고 있다고 보고 있다. 남자는 대학에서 배운 지식을 마음껏 발휘할 직업을 주는데, 여자에겐 오로지 여자다움을 발휘할 수 있는 일거리만 주어진다는 것이 남성중심주의 사회의 비판의식으로 발전한다. 작가는 이글을 통해서 지닌 몇 십 년 동안 여성이 법적 지위나 제도적인 권리의 향상은 괄목할만 한데도 불구하고 생활의 구체적인 모습에 있어서의 변화가 거의 없다는 것을 아프게 환기시켜 주고 있다.
여성이 결혼을 최대의 목적으로 삼고, 그 결혼으로 하여 모든 꿈과 이상을 소유하려고 하며, 그것에 의지하고 기대버린 채 가족에만 골똘하는 것으로서 스스로의 목적을 변명해 버렸다고 하자, 그러면 어느 훗날, 자기의 인생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만 맨주먹이라는 사실 앞에서 얼마나 서글프며 때로는 통곡해 마지 않는 회오의 병에 시달리게 될는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주부들이 모인 어느 광장에도 자기의 싸움을 판가름해 줄 사람은 없다. 다만 다소의 자극과 상식을 얻어갈 뿐이다. 그럴 땐 자기 인생을 후회 없이 다시 출발하는 마음가짐으로 스스로 자기 능력을 파악하여 일상을 걸레질하고, 게을리하였던 독서와 나무가꾸기와 더불어 자기 소질을 가꾸어가는 끊임없는 노력 끝에 자기가 벌인 싸움판의 승리자가 되는 것이 아닐까?
노라의 해방이나 차털리부인의 고발은 이 시대에선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또한 현모양처의 자리만이 여성의 삶의 최대 가치를 발휘하게 되는 길도 아니게 되었다. 가족을 바람직한 길로 이끌어야 하고, 스스로 택한 길에 책임을 져야 하며, 노후대책을 설계해야 하고, 여가선용 속에서 자기 능력을 계발하여 생산적인 활동을 할 줄 아는 부단한 노력의 주인공이 되는 주부의 위치야말로 얼마나 값지랴. 그것이 바로 그 위대성과 새로움을 아는 무한한 자기 사랑의 길, 아니 인간적인 자기가 되는 길이 아닐까. (굵게 강조 : 인용자)
- 서인숙, 「새로운 여인상」 중에서 -
여성수필가 서인숙의 「새로운 여인상」은 중년의 주부들이 아내와 엄마라는 자리만이 인간의 전부가 아님을 자각하여, 가사에 남은 시간과 일상의 권태스런 밑바닥을 헤치며, 주부대학으로, 교양강좌로 전시장으로 에어로빅장으로 몰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이들의 눈에 맺혀 있는 자기를 찾고 싶은 뜨거운 철학성의 의미를 남성중심주의적 가치관에 대항하여 새롭게 인식하고 있는 글이다. '여성이 결혼을 최대의 목적으로 삼고, 그 결혼으로 하여 모든 꿈과 이상을 소유하려 하고, 그것에 의지하고 기대버린다면, 먼 훗날 통곡해마지 않는 회오의 병에 시달리게 될지도 모른다면서 주부들의 '이대로 살 수 없다'는 외침을 긍정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그리고 여가 선용 속에서 자기의 능력을 계발하여 생산적인 활동을 하는 부단한 노력의 주인공이 되는 주부의 위치야말로 진정한 자기가 되는 길이 아닐까 하고 반문하고 있다. 여성수필가는 주부들이 배움의 광장에 나가 자극과 상식을 얻어 가정으로 돌아가 일상의 주체가 되어 항상 자기의 능력을 파악하여 자기 소질을 가꾸어 나가서 자기가 벌인 싸움판의 승리자가 되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 이런 주부들의 자기 찾기 현상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보이면서도 그는 조심스럽게 주부의 자아찾기 붐에 대해 한계를 그어 두고 있는데, 이러한 주부들의 자기 찾기가 ‘노라’의 해방이나 ‘차타레부인’의 탈선에까지 이어져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현모양처의 자리에 서라는 것도 아니다. 스스로 택한 길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주부로서 가족을 바람직한 길로 이끌어야 하고, 노후 대책도 세우면서 여가 선용을 통해, 가정의 주체가 되는 새로운 여인상을 제시하고 있다.
현대에 이르러 비로소 자의식은 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가 담당할 수 있는 사회적 역학과 가능성들에 대해 지속적으로 성찰하는 것이 가능해졌으며, 전통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게 되었다. 이제 자신의 삶의 가능성이 변화하고 확대되거나 축소되는데 따라 자신의 정체성을 선택하고 만들어내며, 또한 다시 만들 수 있게 되었다. 한편, 현대성은 타자 지향형 또한 증대시킨다. 가능한 정체성의 수가 늘어나게 되면,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확증되고 인정받는 정체성을 얻기 위해 타자의 인정을 받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현대에도 여전히 사회적으로 규정된 가능한 역할, 규범, 관습, 기대들과의 상호 작용 구조가 존재하며, 사람들은 이것들 안에서 선택하고 재생산하면서 복합적인 상호 인정의 과정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획득해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타자는 현대에서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필요한 한 구성요소가 된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페미니스트 관점에서 우리 사회가 보여주는 문제는 남자됨과 여자됨의 실질적인 여건과 범주에 따른 규범화가 남성중심적 지배구조, 즉 가부장제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현실을 인식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남성 자신들은 정치적 참여에 있어서 어떠한 제약도 받지 않는 자유로움과 가능성을 열어놓은 채, 여성들의 사회 활동과 정치 참여 및 자기 개발은 금기시하고 여성을 남편들의 내조자 또는 남성 상관들의 보조자 혹은 남자들의 수혜자로 규정해 놓았다. 당연히 여성들은 현실 도피적이고 무관심한 수동적이고 결핍된 존재로 이해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현실 참여가 여성 억압의 주요변수이고 남녀의 권력관계를 포함하는 사회구조의 근간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드러내 보여준다.
위와 같은 페미니즘 수필은 여권의 인식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60년대 이래의 근대화가 이룩한 한국 산업자본주의와 그 문화인 한국 사회의 모순이 한 극점에 이른 것이 ‘광주’로 시작된 80년대라 할 수 있다. 사회수필은 80년대가 보인 한국의 군사문화와 권위주의의 끔찍한 얼굴에 직면하면서 이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몸짓에서 생성되었다. 전면적인 부정이라는 점에서 페미니즘 수필은 급진적이다. 문제는 사회 참여를 표방하는 수필이 억압 탈출의 의지를 보여주면서도 극단적인 반문학성을 통해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러한 반문학성에서 페미니즘 수필은 기존의 여성문학 수필과 변별된다. 어떤 의미에서 페미니즘수필의 한 기법적 특성인 주제의식의 외면화 등은 수필문학의 본질적 특성을 무시하는 사고에서 나온 지나친 현실 인식의 표현 중시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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