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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학부모 혐오’와 교육공동체의 불가능성
근래 우리 사회에서는 교사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 만큼 학부모에 대한 이야기도 무성하다. ‘이상한 학부모’의 사례, 소위 ‘갑질’이나 무리한 요구를 하는 사례들이 언론과 SNS를 오르내리고, ‘학교폭력’ 또는 ‘교권 침해’의 가해자로 지목된 학부모에게는 사적 공격이 가해지기도 한다.
시대와 학교의 변화 속에 새롭게 불거진 문제는 분명히 있다. 그러나 동시에 ‘진상 학부모들이 문제’라는 담론은, 학부모(특히 어머니 쪽)들이 과보호나 과도한 교육열로 교육을 망치는 주범이라는 식의 손가락질을 받아 온 역사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 같다. 사실 ‘학부모’는 우리 사회의 시민 대중 전체라고 해도 될 만큼 다양하게 분포하는 수많은 사람의 집합이다. 따라서 이는 ‘시민의식이 문제’라거나 ‘한국 사회/교육이 문제’라는 말과 별 다를 바 없는 이야기를 특정 집단, 개인들의 문제인 듯 치환하는 화법이다.
《오늘의 교육》 77호 특집은 우리 사회의 학부모 담론을 비판하고, 학부모들의 교육에서의 위치를 논한다. 첫 번째 글 〈교육공동체의 (불)가능성과 학교라는 ‘장소’〉는 학부모들이 교육 주체로서 학교교육에 참여하기 힘든 현실에서 어떻게 ‘민원인’의 자리로 갈 수밖에 없는지를 짚어 본다. 필자는 한국의 학교 구조에서 교사의 권한과 통제권을 강화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음을 역설하며 그러한 장소와 행위를 만드는 구조를 성찰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임윤경의 〈교육의 시장화와 박제된 젠더 규범〉은 사회와 교육의 변화의 흐름을 짚으며, 교육 문제의 배경에 있는 노동 시장과 사회의 문제를 환기시킨다. 그러면서 여성 차별적인 사회 속에서 어떻게 여성-모성이 교육 소비자로 자리하게 됐는지를 분석한다.
‘정치하는엄마들’의 남궁수진 활동가와 ‘참교육을위한전국학부모회’ 곽경애 활동가는 학부모 입장에서 교권 정책과 학교 현실을 비판한다. 교육 상황이 학부모들의 참여나 소통을 위축시키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지적이다. 그리고 학부모가 교육 주체로서 해야 할 사회적·교육적 실천을 제안한다.
이수광은 현재 학교에서는 교육 주체 모두가 행복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전하며, 학부모들이 “악성 민원 집단”으로 호명되게 된 원인은 학교 체제의 구조적 틀에 있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올해 교사들이 제기한 질문이 교육 체제 전환으로 나아가기를 기대하며, 다른 한편으로 교사들의 생존을 위한 시스템적 대책 및 문화적 노력을 시급한 과제로 제시한다.
오래전부터 학부모는 교육의 주체 중 하나로 불렸다. 하지만 실제로 교육 주체로서 함께하기 어려운 여건에 놓여 있기도 했다. ‘(일부 악성) 학부모가 문제’라는 이야기를 하기 이전에, 학부모가 교육 주체가 될 수 없었거나 혹은 소비자·민원인으로만 등장할 수 있었던 현실을 돌아봐야 한다. 교육을 바꾸기 위해 학부모들에게 어떤 자리와 역할이 보장되어야 할지, 학부모들은 어떤 실천을 해야 할지 논의가 필요하다.
- 편집부
▶ 《오늘의 교육》 77호 특집 주제는 ‘학부모’이다. 최근 이슈가 된 사건과 우리 사회의 학부모 담론에 대하여 학교 안팎 조건, 구조와 정책 등을 논의하였다.
기획에선 기후 위기 앞에서 교사들과 청소년인권운동이 이미 발표했거나 준비 중인 선언에 담긴 문제의식을 전한다. 트랜스젠더퀴어가 학교교육에서 어떤 경험을 하고 있는지, 어떠한 변화가 필요한지 다룬 기획과 장애인 통합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기획이 이어진다. 기고에선 교육부가 올해 발표, 시행한 「교원의 학생생활지도에 관한 고시」의 모순과 문제점을 검토한다.
차례
10 이윤엽의 오늘 홍범도 장군 내일을 향해 쏴라 | 이윤엽
11 읽은 이야기 | 인해
특집 ‘학부모 혐오’와 교육공동체의 불가능성
18 교육공동체의 (불)가능성과 학교라는 ‘장소’ | 몽글
- ‘서비스’가 된 공교육과 ‘민원인’이 된 학부모
44 교육의 시장화와 박제된 젠더 규범 | 나임윤경
- 교사성과 학부모성에 대한 성찰의 필요성을 제기하며
57 학부모는 교문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가 | 남궁수진
- ‘노학부모존’을 만드는 정책과 사회 분위기를 비판한다
67 학교가 변하기를 바라고만 있을 순 없다 | 곽경애
- 위기의 학교, 학부모가 주체로 서야
77 학부모, 교육 주체로 다시 호명하기 | 이수광
후속│교실의 슬픔, 교육의 불가능성
90 교사들은 왜 거리로 나왔고 무엇을 남겼나? | 정용주
110 정책이 조장한 학부모와 교사의 동상이몽 | 변진경
- 교육-보육 논쟁과 연결하여 본 서이초 사건
기획│기후 정의를 위한 선언과 실천
122 학교에서 기후 정의를 위해 | 김성보
- 〈기후 정의 교사 선언〉 해설
132 청소년인권운동의 기후 정의 선언을 만든다는 것 |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
기획│‘젠더 문제아’들이 바꾸는 학교의 풍경
141 트랜스젠더퀴어의 경험을 학교교육에 기입할 수 있을까 | 루인
157 좌담 트랜스젠더퀴어는 옆 반에 있다 | 꽁치(한성), 가람, 해, 너굴, 소망, 똘추
- 트랜스젠더퀴어로서 경험한 학교와 청소년기
181 낡은 정상성의 학교와 불화(不和)하는 트랜스젠더 | 남미자
191 트랜스젠더퀴어가 ‘평범한 일상’ 그 다음을 꿈꿀 수 있도록 | 꽁치(한성)
- 되돌아가는 마음으로 학교 밖 성소수자를 위한 교실을 준비하며
205 학교에서 성별의 경계를 허물다 | 유랑(유아름), 꼬꼬(이다솜)
- 교사와 학생이 함께 시도한 변화의 기록
기획│‘특수’라는 벽장을 넘어 교육 보편의 담론으로 ②
227 특수와 일반의 이분법을 넘어 포용교육으로 | 김헌용
- 한 장애인 교사의 시선
241 통합교육의 기쁨과 슬픔 | 조경미
- 학교에는 장애 학생도 있습니다
연속 기획│변방에서 온 편지
256 외국인이기 전에 청소년으로, 자신의 빛을 찾아갈 수 있기를 | 신혜영
- 이주배경청소년문화교류센터 ‘투소프카’ 이야기
272 관계의 폐쇄성을 극복하고, 작은 것들의 연대를 시작하자 | 황민호
연재
동맹의 교실, 해방의 교육학 ③
281 있다 | 서한영교
- 배운다는 사건, 그리고 무장된 사랑
동물이 존중받는 세상을 위한 교육 ③
307 동물과 생명을 주제로 마음을 두드리는 교육 | 최민경
- 동물권교육 학습 지도안이 만들어진 과정
기고
317 「교원의 학생생활지도에 관한 고시」가 꿈꾸는 학교는? | 하영
리뷰
331 버티게 해 주는 ‘생존 경제교육’을 위하여 | 한승민
- 《부자 되기를 가르치는 학교》
341 세계에서 가장 나중에 퇴장하는 불구의 미래를 그리며 | 나영정(타리)
- 《페미니스트, 퀴어, 불구》
356 오늘 읽기 | 공현
358 세 줄 세 책
360 어제와 오늘의 어린이 책 | 박진환
362 내가 밀고 있는 단체 비마이너 | 이문영
책 속에서
장소를 만든 구조는 사라진 채 개인만이 그 장소에 덩그러니 남게 되면, ‘폭력 교사’ 혹은 ‘무능력한 교사’와 ‘악성 민원인’만이 남게 된다. 학교라는 구조가 어떤 ‘장소’를 만들고 그 ‘장소’에 어떤 사람들을 배치하는지, 배후의 권력과 그 권력의 효과는 무엇인지 질문하지 못한 채 일부 몰지각한 개인을 비난하고 처벌하는 데 머물게 되는 것이다. 미디어에 의해 이 일부 몰지각하고 비규범적인 개인의 서사가 확대 재생산될 때 특정 개인에 대한 비난과 혐오의 정동은 커지고 구조의 효과는 더 깊이 숨어든다.
- 본문 27쪽, 몽글, 〈교육공동체의 (불)가능성과 학교라는 ‘장소’〉
한국 사회가 고학력 여성들의 자본주의적 생산성 대신 과도한 모성적 생산성을 목도하는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70~80%였던 노동 시장 참여율이 결혼 이후 출산과 더불어 50% 안팎으로 크게 줄고, 여성에게 편중된 육아와 가족 돌봄 현실을 무시한 유리 천장에 막혀 노동 시장에 참여한 여성이라도 고위직으로 오르기 어려운 한국 여성들은, 경제 영역에서의 생산성 발휘 기회가 차단되자, ‘풍선 효과’가 그러하듯, 대신 집 안에서 자녀들을 상대로 한 모성적 생산성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이다. 언급했듯, 자녀 교육에 관한 한 하위문화가 거의 없다시피 한 한국 사회에서 고학력 중산층 그녀들의 사교육 실천은 다른 계층의 여성들에게도 확산되어 박탈감 또는 불안감을 안기며 낮은 수준으로나마 이를 좇아가게 했다.
- 본문 50-51쪽, 나임윤경, 〈교육의 시장화와 박제된 젠더 규범〉
‘건강한 참여형 학부모’와 ‘진상 학부모’의 경계는 어디일까? 그 경계는 누군가 규정하기보다, 공동체와 공동체를 둘러싼 사회의 건강한 지지 안에서 찾을 수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완벽한 학교란 없다. 마찬가지로 완벽한 교사, 학교 노동자도 없다. 그렇기에 우리에겐 공동체라는 것이 존재한다. 교육공동체 속에서 서로의 부족함을 찾고 메꿀 수 있다. ‘건강한 참여형 학부모’를 포함한 바람직한 교육공동체는 공동체를 둘러싼 사회의 건강한 지지와 협력 안에서 가능하다. 그러나 2023년 현재, 우리 사회는 건강한 비판이나 대안 제시보다는 학부모와 학생을 향한 혐오와 배제의 날을 세웠다.
- 본문 60쪽, 남궁수진, 〈학부모는 교문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가〉
2023년부터 본격적인 일상 회복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학부모회의 회복은 더디기만 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너무나도 익숙해졌을까, 아님 그것이 인간의 본능이었을까. 학부모들의 학교 참여가 활발하던 시기에는 마치 저절로 굴러가는 자동차에 몸만 실으면 되는 형상이었다. 하지만 학부모회의 침체기는 한순간에 찾아왔고, 그 자동차가 저절로 굴러가던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해 주었다. 학부모들이 타고 있던 그 자동차를 움직이게 하는 건, 구성원들의 헌신과 노력, 에너지, 시간 등이 실질적으로 꽤 많이 투입되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본문 70쪽, 곽경애, 〈학교가 변하기를 바라고만 있을 순 없다〉
다른 차원에서 보자면, 교사들의 질문 속에는 교육 체제 전환에 대한 요구가 강하게 담겨 있다. 현재와 같은 배타적 경쟁을 강화하는 교육 체제 속에서는 그 어떤 교권 보호 조치도 미봉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간파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교육 체제 전환의 동력이 교원 세계 내부에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일면적인 판단이긴 하지만, 교사들만의 힘으로는 한계가 뚜렷하다. 함께 ‘제도 실패’를 추궁하고, 새로운 교육 질서 구축을 촉구하는 사람들이 ‘교육 시민’의 틀로 세력화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논의의 장에 학부모를 초대하고, 이들과 함께 스크럼을 짜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본문 85쪽, 이수광, 〈학부모, 교육 주체로 다시 호명하기〉
교육의 문제는 그 안에서만 탄생하거나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코로나19로 등교가 제한되던 시기, 보호자 없는 집에서 라면을 끓이다 큰 화상을 입은 ‘라면 형제’ 사건을 보며 많은 어른들이 안타까움을 느꼈다. 누구의 책임일까? 긴급 돌봄을 제대로 운영하지 않은 학교의 책임일까? 아이들을 방치하고 나간 싱글맘의 책임일까? 감염병이 창궐하든 말든 집에 돌볼 아이가 있든 없든 출근을 강요하는 회사들이 너무나 많은 우리 사회 평균적인 노동 환경은 무죄일까? 사각지대투성이인 우리나라 복지 시스템은 아무런 잘못이 없을까? 촘촘하게 짜인 복지망이 없는, 고립되고 위태로운 환경 속에서 보호자들은 점점 더 바빠지고 아이들은 점점 더 방치되고 있다. 그걸 어떻게 학교가 모두 해결할 수 있을까? 더구나 수십 년 전 틀과 체제는 하나도 바꾸지 않고서, 변화를 위해 제대로 된 투자도 하지 않으면서, 그 틀 그대로 바뀐 세상에 대응만 해 달라고 학교에 요구만 해 댈 수 있을까.
- 본문 119-120쪽, 변진경, 〈정책이 조장한 학부모와 교사의 동상이몽〉
첫째, 나중으로 미루면 안 된다. 지금은 견디고, 학생들이 나중에 커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둘째, 학생에게만 떠넘기면 안 된다. 학생들은 오히려 책임이 적다. 셋째, 종말론으로 가르쳐선 안 된다. 기후 우울증을 낳을 수 있고, 핵 발전 찬양처럼 비과학적 대안에 이끌릴 수 있다. 넷째, 신기술만 강조해선 안 된다. 허황한 낙관으로 행동 변화가 없을 수 있다. 다섯째, 개인의 소비 양식문제를 너무 강조해선 안 된다. 현대 사회에서 소비자의 선택권이란 이미 만들어진 제품의 상표 선택뿐이다.
- 본문 126-127쪽, 김성보, 〈학교에서 기후 정의를 위해〉
왜 사람은 남성 아니면 여성이어야 하는가? 태어날 때 지정된 범주를 왜 일평생 유지하면서 살아야 하는가? 그런데 젠더 범주가 한 사람의 일생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면, 왜 젠더 범주는 본인이 아니라 의사가 결정할 권한을 갖는가? 내가 아닌 타인이 규정한 범주로 사는 것이 조금도 행복하지 않을 때에도 왜 수긍하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런 일련의 질문이 논바이너리라는 정체성 범주에 내재된 정치학이다. 그렇기에 학교의 교육은 꽁치에게 치마를 허용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트랜스젠더퀴어를 포용한다는 식으로 결코 단순하게 구축될 수 없으며 익숙한 규범과 관습 자체를 문제 삼을 수 있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 본문 154쪽, 루인, 〈트랜스젠더퀴어의 경험을 학교교육에 기입할 수 있을까〉
교육부는 성소수자라는 용어를 삭제한 이유를 “성 정체성이 확립되는 시기인 청소년기에 성소수자에 대한 교육이 성 정체성을 혼란시킬 수”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트랜스젠더를 비롯한 성소수자는 엄연히 우리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동료 시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과정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내용을 삭제함으로써, 성 정체성이 형성되는 중요한 아동·청소년 시기에 트랜스젠더 청소년들이 내가 누구인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만든다. 실제로 다른 집단에 비해 트랜스젠더 청소년들이 우울증 및 정신 질환을 훨씬 많이 겪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성별이분법이 강력하게 작동하는 학교와 사회에서 트랜스젠더 청소년들은 호르몬 치료는커녕 자신의 몸이 원하지 않는 모습으로 변화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괴롭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 본문 184쪽, 남미자, 〈낡은 정상성의 학교와 불화(不和)하는 트랜스젠더〉
고시에 따르면 학생은 생활 지도에 따라 지도되는 대상으로, 교원의 ‘금지’와 ‘허가’를 토대로 생활하는 존재다. 예컨대 학생이 수업 중에 휴대전화를 일시적으로 사용하고자 할 때는 “사전에 교육 목적 사용, 긴급한 상황 대응 등을 위하여 휴대전화 사용이 부득이한 것인지를 적시하여 학교의 장과 교원에게 허가받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또한 수업 중 졸거나 엎드려 잠을 자는 행위는 “면학 분위기에 영향을 줄 수 있으므로” 지도가 가능하다. 학생의 행동은 면학 분위기에 긍정적일 때에만 ‘허용’될 수 있으며, 그렇지 않거나 소위 ‘건전하지 않은’ 행위가 의심될 때에는 언제든지 “소지 물품을 조사”되고 압수될 수 있는 것이다.
- 본문 324-326쪽, 하영, 〈「교원의 학생생활지도에 관한 고시」가 꿈꾸는 학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