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7. 15(금) 색다른 투어 cafe의 아침편지
놓아버려라.
옳다 그르다.
길다 짧다.
깨끗하다 더럽다.
많다 적다를
분별하면 차별이 생기고
차별하면 집착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옳은 것도 놓아 버리고
그른 것도 놓아 버려라.
긴 것도 놓아 버리고
짧은 것도 놓아 버려라.
하얀 것도 놓아 버리고
검은 것도 놓아 버려라.
바다는
천개의 강
만개의 하천을 다 받아 들이고도
푸른 빛 그대로요
짠 맛 또한 그대로이다.
- 원효대사 -
원효대사 [元曉大師](617 - 686)
원효(元曉, 617년 ~ 686년 4월 28일(음력 3월 30일), 경상북도 경산시)는 삼국시대와 신라의 고승이자 철학자, 작가, 시인, 정치인이다. 원효는 법명이고, 속성(俗姓)은 설(薛), 속명은 사(思), 서당(誓幢) 또는 신당(新幢)이며, 별명은 모(毛), 호는 화정(和淨)이다. 아버지는 내말 설담날이며, 태종무열왕의 둘째 사위이고 설총이 그의 아들이다. 별명은 소성거사(小姓居士)이며 이외에도 서곡사미(西谷沙彌), 백부논주(百部論主), 해동법사(海東法師), 해동종주(海東宗主)라 불렸다. 고려시대에는 원효보살, 원효성사(元曉聖師)라 존칭되고, 화쟁국사(和諍國師)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본명은 설사(薛思)이나, 보통 한국에서는 법명을 따라 원효대사로 불린다. 경주 설씨와 순창 설씨의 중시조인 설총의 생부이며, 한국불교 최초의 깨달은 스님, 한국 최초의 대처승으로도 유명하였다.
원효대사의 일생
원효는 진평왕 39년 출생. 그는 항상 열심히 배우는 자세로 노력하여 유학, 불교, 도교에 대하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의 사람들이 믿고 있던 불교에 많은 관심을 가져 15,6세에 불교의 진리를 담고있는 삼학에 능하게 되었다. 화랑으로 여러 전투에 참가하면서 많은 죽음을 본 그는, 사는 것에 대한 깊은 반성과 속세의 삶에 대한 허무감 때문에 승려가 되기로 결심하여 황룡사에서 승려가 되었다.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가던 중, 해골에 괸 물이 상황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는 것에서 "모든 깨달음은 마음속에 있다."는 진리를 깨닫게 된다. 그래서 유학을 포기하고 돌아와 참선을 계속하면서, 그가 깨달은 진리를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려고 애썼다. 그는 남루한 옷을 입고 사람이 모인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중생을 구제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그의 노력으로 불교는 백성들 사이에 널리 전파되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정신적인 기둥이 되었다. 그는 한 때 파계하여 요석공주와의 사이에 설총을 낳기도 하였으나, '무애가'를 지어 부르며 백성들 속에 파고들어 불교를 전파하였다. 또한 당나라에서 들여온 '금강삼매경'을 왕과 고승들 앞에서 강론하여 존경을 받았고, 참선과 저술로 말년을 보내다 입적하였다. 그는 우리 나라 불교 사상 가장 훌륭한 승려로 추앙 받고 있다.
시대적 상황
당시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침략으로 몹시 시달림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인재 양성과 국력 증강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당시 불교는 왕과 귀족들의 종교였으며, 승려들은 산속에 들어가 참선을 하여, 일반 백성들이 불교를 접하기는 힘들었고 교리도 너무 어려웠다.
원효대사의 불교 사상
원효는 승려가 산 속에서 파 묻혀 참선만 하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니라, 일반 백성 속에 파고들어 어리석은 중생들을 깨우쳐 주는 것이 부처님의 참 뜻이라고 하였다. 그는 "모든 것은 사람의 마음에 달려있지 사물 자체에는 깨끗함도 더러움도 없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가 백성들에게 전파하려고 한 불교의 진리는 다음과 같다. "신분의 높고 낮음, 재산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누구나 불교의 진리에 가까이 갈수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실제로는 하나로 합해질 수 있다."
원효대사의 업적
당시 신라사회는 원광(圓光)과 자장(慈藏)의 교화에 큰 영향을 입었으나 왕실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불교와 일반 서민불교 사이에는 여전히 괴리가 있었다. 이러한 때 혜공·혜숙(惠宿)· 대안(大安) 등이 일반 서민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가 그들에게까지 불교를 일상생활화시켰다. 원효 역시 이들의 뒤를 이어 당시의 승려들이 대개 성내의 대사원에서 귀족생활(그들은 엘리트의식에 사로잡혀 민중은 무지와 나약 때문에 어떻게 해도 석가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없다고 판단, 애써 민중을 외면했다.)을 하고 있었던 것과는 반대로 지방의 촌락, 길거리를 두루 돌아다니며 무애호(無碍瓠; 이상한모양의 큰 표주박으로 두드리면서 無碍歌를 불러서 붙여진 명칭)를 두드리고 〈화엄경〉의 "모든 것에 걸림 없는 사람이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났도다"라는 구절로 노래(무애가無碍歌=모든 것에 걸림이 없다는 뜻의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가무와 잡담중에 불법을 널리 알려 일반 서민들의 교화에 힘을 기울였다. 이는 불교의 이치를 노래로 지어 세상에 유포시킴으로써 부처님의 가르침을 무식한 대중에까지 알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 노래에 담겨있는 무애사상은 원효의 사생활에도 잘 나타난다. 그는 거사들과 어울려 술집이나 기생집에도 드나들고 혹은 석공들의 쇠칼과 쇠망치를 가지고 다니며 글을 새기기도 하고, <화엄경>에 대한 해설서를 지어 그것을 강의하기도 했다. 또 어떤 때는 여염(보통사람이 모여있는)집에서 유숙하기도 하고 혹은 명산대천을 찾아 좌선하기도 하는 등 어떤 일정한 틀에 박힌 생활태도가 없었다. 이와 같이 행적도 뚜렷한 규범이 없었고, 사람들을 교화하는 방법도 일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원효의 이러한 행적은 귀족중심의 불교를 대중에 확산시키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출처 : 네이버 지식iN)
참고사항
원효사
경기도 전통사찰 제77호인 원효사(元曉寺)는 의정부시 호원동 도봉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아담한 비구니 사찰로서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입니다. 도봉산(道峰山) 기슭에는 무수히 많은 사찰들이 자리잡고 있는데 망월사, 회룡사 등과 함께 원효사(元曉寺)는 도봉산의 대표적인 사찰로 손꼽히고 있으며 원효사가 위치하고 있는 곳은 맑은 계곡과 함께 여러 암봉들이 마치 병풍처럼 감싸 안고 있는 명당 중의 명당이라 합니다. 신라 선덕여왕(632~649)때 원효대사가 한동안 이 곳에 안거하면서 수도처로 삼았다고 하며 이러한 연유로 비구니 우일스님이 1954년에 이곳에 원효대사의 동상을 세우고 절의 이름도 원효사(元曉寺)라 하였습니다.
지난 밤 길을 잃을 정도로 과음을 했던 탓인지 아침에 늦잠을 자고 말았습니다. 허겁지겁 아침밥을 먹는둥 마는둥하고 집을 나왔습니다. Am 7시 30분에 시내버스에 올랐습니다. 그러고 보니 요즘 1주일째 1711호 시내버스는 나의 전용 출퇴근 버스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버스 안에서 간밤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으나 잘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분명 1711호 버스로 차창 빡의 이길을 갔었을터인데, 차안에서 깊은 잠에 빠졌던 탓으로 기억이 나지 않았지요. 그런데 억한 일이 있어서도 아닌데 지난 밤에는 왜? 절제를 하지 못하고 그렇게 많이 마셨는지? 내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워낙 주량이 쎈 이청학 고향 선배를 따라 잡다보니 주량을 오버했나 봅니다. 오늘도 날씨가 찌는 듯이 무더웠습니다. 피로가 겹쳐 근무중에 많이 졸았지요. 그래서 자리를 뜨지 않고 책상 앞에서만 조용히 지냈습니다. 그런데 오늘도 퇴근 후, 마포 소재의 "외백 중화요리 식당"에 또 가야만 했습니다. 오래전부터 성당의 옛 형제와 자매님들과 선약이 되어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만큼은 아무리 분위기가 좋고 또 중화요리 안주가 좋더라도 절대 주님을 모시지 않겠다는 각오로 승용차를 갖고 식당으로 갔습니다. 사흘째 연속으로 이곳 '외백' 중화요리집을 찾은 탓으로 종업원들도 눈인사를 하면서 아는척을 하였습니다. 우리 모임의 총무인 호총은 요리 3개만 시키고 쟁반짜장만을 먹자고 했는데, 쥔장 원사장께서는 우리들을 위해 서비스 차원에서 요리를 몇가지 더 제공해 주었습니다. 극구 사양했지만 자신이 마음이라면서 성의를 받아 달라고 했습니다. 이렇까봐 '여기를 안오려고도 했었는데...'
울뜨레아 간사인 야고보 형제님 부부는 양주를 갖고 오셨지만, 오늘 만큼은 절대 유혹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얀주가 좋아서 모두가 건배를 했지만, 지난 밤의 일화를 이야기하고 양해를 구한 탓으로 형제분들은 술을 권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멋진 형제분들입니다. 저녁 만찬이 끝나고 2차로 용마루 고개에 있는 커피숖에서 차한잔을 나누고자 했습니다. 허나 상기인은 커피점 앞에서 인사를 한 후 승용차로 귀가를 했습니다.
일찍 귀가했기에 마나님과 함께 지역내 슈퍼마켓으로 장을 보는데 따라 갔다가 이제는 건강를 챙겨야 한다는 생각이 났기에 인근 헬스크럽에 들려 문의도 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동네 놀이터에 잠깐 들려 마나님과 함께 그네도 타고 또 간이 체육시설을 이용해 보기도 했습니다.
아~! 이렇게 좋은 것을... 이제는 일찍 일찍 퇴근하여 마나님과 함께 집 근처 일대와 북악산 기슬을 산책 해야겠다고 다짐을 해 보았습니다. 그간 참으로 난 바보처럼 살았습니다. 흑~흑~흑~
- 오늘의 일기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