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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사무엘을 찾아간 사울
삼상 28:3-25
요절 20 “사울이 갑자기 땅에 완전히 엎드러지니 이는 사무엘의 말로 말미암아 심히 두려워함이요, 또 그의 기력이 다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루 밤낮을 음식을 먹지 못하였음이니라.”
지난 주일에는 영적 침체에 빠진 다윗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말씀은 사울 왕이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 점을 치는 사건입니다. 사울은 그 동안 악신이 내릴 때마다 다윗에 대한 시기심과 분노에 사로잡혀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원수나라 블레셋의 용병이 되어버렸습니다. 사울은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온 블레셋과 대결전을 치러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의 군사력으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사울은 심히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 죽은 사무엘의 영을 불러 만났습니다.
서울 대학로 밤거리에 나가보면 포장마차처럼 된 곳에 점치는 사람들이 즐비하게 앉아 있습니다. 젊은 청춘남녀들이 점집에 들어가 점을 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경제가 어려워지면 무당이나 역술가들의 사업이 번창한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왜 점집을 찾아갑니까? 사람들이 왜 신접한 사람이나 무당을 찾아갑니까? 자기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믿습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가운데 있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그 섭리를 깨달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그 섭리를 깨달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저의 미래를 한꺼번에 다 가르쳐 준다면 저는 행복할까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미래를 한꺼번에 다 보여주신다면 그것은 운명이 되고 저주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안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깨달아 가는 그것이 우리에게 행복이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의 미래가 하나님의 선하신 뜻 안에서 열려 있는 것이 우리에게 행복이 됩니다. 그래서 각 사람이 자신의 미래를 개척해 나가는 과정 속에 행복을 누리도록 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무당을 찾아가서 자기의 미래를 점을 친다는 것은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울 왕은 블레셋과의 대결전을 앞두고 너무나 불안하고 두려워서 점쟁이를 찾아갔다가 사형선고를 받고 죽음을 재촉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 등을 돌린 한 인간의 최후가 어떤 모습인지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 내면에 남아있는 불신의 요소는 없는지 돌아보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회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신접한 여인을 찾아간 사울(3-7)
3절을 보십시오. “사무엘이 죽었으므로 온 이스라엘이 그를 두고 슬피 울며 그의 고향 라마에 장사하였고 사울은 신접한 자와 박수를 그 땅에서 쫓아내었더라” 사무엘이 죽었으므로 온 이스라엘 백성이 그의 죽음을 두고 슬피 울며 그의 고향 라마에 장사했습니다. 그런데 사울 왕은 사무엘을 생각하면서 나라 안에서 무당과 박수를 그 땅에서 다 쫓아내었습니다. 사울은 사무엘에게 기름 부음을 받고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었습니다. 사무엘의 도움으로 사사시대의 혼란을 극복하고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했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의 맨토였습니다. 그런데 왕으로서 권력을 잡은 후에 사울은 교만해졌습니다. 사무엘이 드려야 하는 제사를 지내기도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나라를 통치해야 하는데 사울은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는 사울에게 실패를 만회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진멸하라고 했는데 왕도 살려두고, 쓸만한 가축은 다 살려두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기 위해서 남겨두었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또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고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사울을 책망했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 15:23) 그후 사무엘은 사울을 떠났습니다. 사무엘은 죽는 날까지 다시 가서 사울을 보지 않았습니다(삼상 15:35).
그런 사무엘이 죽었습니다. 온 백성이 슬피 울며 그를 장사지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죽은 사무엘을 생각하면서 신접한 자와 박수를 그 땅에서 내쫓았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사울이 무당과 박수를 내쫓은 것은 그의 통치 초기에 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본문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여러분,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누가가 가장 슬피 울까요? 불효자식이 가장 슬피 울지 않겠습니까? 부모에게 효도한 자식은 흐느껴 울지만 불효자식은 통곡하면서 웁니다. 그만큼 잘못한 것이 많고 부모의 가슴을 아프게 했기 때문에 그 순간만큼은 부모를 위해 무슨 짓이든지 할 수 있을 것처럼 웁니다. 이처럼 사울도 맨토였던 사무엘이 죽었을 때에 자기의 죄를 뉘우치며 일시적으로 사무엘의 뜻을 받들어 신접한 자와 박수를 내쫓았을 수 있습니다(출 22;18; 레 19;31; 20:27; 신18:10-14). 죽은 사람의 소원을 들어준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무엘이 죽은 사건은 25장 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미 수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기록된 것은 사울이 블레셋과의 전쟁이 일어나자 다급해져서 죽은 사무엘의 영을 만나려고 무당을 찾아간 사건을 기록하기 위해서 배경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4,5절을 보십시오. “블레셋 사람들이 모여 수넴에 이르러 진 치매 사울이 온 이스라엘을 모아 길보아에 진 쳤더니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그의 마음이 크게 떨린지라” 블레셋 사람들은 수넴에 진을 치고, 이스라엘은 길보아에 진을 쳤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세밀하게 관찰하여 보고 두려워서 그 마음의 크게 떨렸습니다. 사울은 블레셋 군대의 수와 그들의 사기충천해 있는 모습을 보고 극심한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 마음이 크게 떨렸습니다.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께서 더 이상 자기와 함께 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사울은 다급하니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시므로” 사울은 블레셋 군대를 물리칠 수 있는 방법에 관하여 하나님의 뜻을 물으려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15:26; 16:14).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이 허둥지둥 여호와를 찾는 것을 보면 블레셋 군대로 인한 두려움과 공포심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묵묵부답이었습니다.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꿈은 가장 낮은 단계의 응답방법이었습니다. 다음에는 우림으로 응답하셨는데 이는 대제사장이 우림과 둠밈으로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다윗 때문에 놉에 있던 여호와의 제사장들과 그 가족들을 다 살해했습니다(22:18,19).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이 `우림과 둠밈'이 들어있는 '에봇'을 갖고 다윗에게 기버렸습니다(22:18-20; 23:6). 그러므로 우림으로도 응답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또 사무엘도 죽었습니다. 사무엘이 죽기 전에도 다윗을 죽이려고 한번 찾아갔을 뿐 영적인 관계성이 단절되었습니다. 그밖의 선지자들도 사울의 왕국을 떠나 망명객 다윗에게로 도망을 쳤습니다(22:5). 본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자기 뜻대로 산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기도는 허공에 외치는 것 같았습니다.
이 모습은 평소에 기도를 전혀 하지 않다가 발등에 불이 떨어지니까 그때 엎드려서 도와달라고 하는 사람과 다르지 않습니다. 평소에는 예배생활조차 제멋대로 게을리하는 교인일수록 중병에 걸리거나 자녀의 대학 입시를 앞두게 되면 그제야 무슨 '백일기도'니 '사십일 기도'니 난리를 칩니다.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그 믿음이라는 것이 꼭 무당 앞에서 무슨 복을 비는 것과 별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과연 그런 사람에게 응답해 주시겠습니까? 꼭 급한 불을 꺼야 할 때만 하나님을 찾는 사람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어떤 모습으로도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이때 사울은 어떤 방법을 모색했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사울이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하니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 사울은 신하들에게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고 했습니다. '신접(新接)한 여인'이란 죽은 자의 혼령을 통해 미래의 일을 알아보는 무당을 가리킵니다(레 19:31). 8절에 보면 사울이 변장을 하고 엔돌에 있는 신접한 여인을 찾아갔습니다. 엔돌은 블레셋의 진영과 인접한 곳이었기 때문에 블레셋 사람들의 눈에 뜨일까 두려워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밤중에 무당을 찾아갔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사울 왕의 맨탈리티를 알 수 있습니다. 그에게 종교성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신앙심은 없었습니다. 그는 종교를 자기 생활의 방편으로만 생각했습니다. 자기 생활에 필요하면 종교적인 의식을 통해서 도움을 받고자 했을 뿐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류가 없었습니다. 인격적인 관계성이 완전히 단절되었습니다. 사울도 이스라엘 백성이었고, 성령이 임했을 때는 예언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습니다. 하나님께 등을 돌렸습니다.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다급해지까 하니님께 기도했습니다. 블레섹과 대결전을 치러야 하는데 게임이 안 될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무리 물어도 하나님은 사울에게 어떤 계시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침묵하셨습니다.
가끔 기도를 해도 답답하고, 성경을 읽어도 마음에 한마디도 들어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기도 응답이 잘 되는 것 같은데 자기는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대개 사람들은 더 이상 기도를 포기합니다. 다른 해결 방법을 찾아다닙니다. 하나님 앞에 엎으려 회개하고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온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께 매달려 주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자식이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부모를 찾아와 무릎을 꿇고 눈물로 잘못했다고,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않고 바르게 살겠다고 빈다면 외면할 부모가 있을까요? 육신의 부모가 그렇다면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께서는 더욱 더 긍휼히 여기지 않으시겠습니까? 탕자의 비유에서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창기와 함께 다 탕진하고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돌아온 그 자체를 기뻐하시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하나님께 매달리지 않고 신접한 여인을 찾아갔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그에게 소망이 없음을 말해 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울을 죽이기로 정하신 것이었습니다. 역대상에 의하면 사울의 죽임을 당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 주셨더라”(대상 10:13,14)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묵묵부답이신 것은 우리에게 회개를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도 기도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회개하기보다 무당을 찾아가거나 세속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버림을 받는 지름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기도응답이 없다고 점쟁이를 찾아가 남편의 진급이나 자녀의 시험 합격 등을 알아보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자녀들이 결혼할 때 궁합을 보거나 이사를 할 때 길일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강남에 점쟁이를 찾아오는 사람 중 4명중 한명을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무당을 찾아가는 것은 두려움 때문입니다.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이 너무 절망적일 때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무당을 찾아갑니다. 그러면 무당은 그 두려움을 이용해서 돈을 법니다. 그런데 점쟁이를 찾아가는 심정으로 소위 예언을 하는 사람을 찾아다니는 사람들도 그 맨탈리티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기도 응답이 없을 때 우리는 자신을 살피며 마음을 찢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저는 시련의 날에 요엘서를 읽으면서 저의 문제가 바로 저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것이 문제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욜 2:13) 영적으로 힘들다고 드러누워 있으면 안 됩니다. 마음을 찢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II. 죽은 사무엘을 찾는 사울(8-19)
8절을 보십시오. “사울이 다른 옷을 입어 변장하고 두 사람과 함께 갈새 그들이 밤에 그 여인에게 이르러서는 사울이 이르되 청하노니 나를 위하여 신접한 술법으로 내가 네게 말하는 사람을 불러 올리라 하니“ 사울이 무당을 찾아가서 무엇을 청했습니까? 신접한 술법으로 자기가 말하는 사람을 불러올리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복술 행위는 하나님께 가증한 행위로서, 율법에서 철저히 금지시킨 행위였습니다(신 18:10-14; 레 19:31; 20:27). 9,10절을 보면 여인은 사울이 자기들을 이 땅에서 멸절시켰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벌을 당하지 않게 하겠다고 맹세했습니다(9,10). 그리고 여인에게 사무엘을 불러올리라고 했습니다(11).
고대 히브리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일단 모두 '스울'(Sheol) 즉 '음부'(陰部)라고 부르는 지하 세계로 들어간다고 보았습니다. 사울은 사무엘이 죽었으나 음부에 있을 것이므로 무당을 통해서 그 영을 불러올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무엘은 블레셋의 침공으로 인하여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자신의 입장을 이해해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영을 불러 블레셋과의 싸움과 관련해서 자신이 취할 행동에 대하여 조언을 받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그의 행위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었습니다. 죽은 자의 영을 다시 불러오는 것은 하나님이 금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관여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신접한 자들과 박수들과 그들과 관련이 있는 자들은 돌로쳐 죽이도록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사무엘을 불러올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12절을 보십시오. 여인이 사무엘을 보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당신이 어찌하여 나를 속이셨나이까 당신이 사울이시니이다” 사무엘을 불러올리라는 말과 그 사람의 풍채를 통해서 사울인 것을 알았습니다. 이 여인이 본 것은 사무엘이 아니라 사무엘의 모습을 가장한 사단의 어떤 형상을 본 것이었습니다. 사울이 무엇을 보았느냐고 물으니까 영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 모양은 노인의 모습인데 겉옷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그가 사무엘인 줄 알고 엎드려 절을 했습니다(14). 그러나 여기에 나타난 영은 사무엘의 영일 수 없습니다. 초혼술은 악령의 역사이며 사단의 속임수에 불과합니다. 성경은 사람이 죽게 되면 그 혼은 즉시 음부나 낙원으로 옮겨집니다. 지상의 세계와 교통할 수 없습니다(눅 16:19-31; 23:43; 고후 5:1). 그러므로 무당이 불러올린 영은 사무엘이 아니며 사무엘의 형제를 입고 나타난 사단이 부리는 귀신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사울은 그 귀신을 사무엘로 알고 그에게 엎드려 절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무엘이 사울에게 “네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를 성가시게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사울이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나는 심히 다급하니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나를 향하여 군대를 일으켰고,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다시는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내게 대답하지 아니하시기로, 내가 행할 일을 알아보려고 당신을 불러 올렸나이다”(15) 사울은 다급한 자기의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그러자 사무엘을 가장한 영이 신접한 여인의 입을 통해서 무엇이라고 대답했습니까? 16,1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너를 떠나 네 대적이 되셨거늘 네가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여호와께서 나를 통하여 말씀하신 대로 네게 행하사 나라를 네 손에서 떼어 네 이웃 다윗에게 주셨느니라” 마귀는 이 여자의 입을 통해서 자기들을 이스라엘 땅에서 쫓아낸 사울에게 보복을 가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의 이름으로 사울을 꾸짖고, 여호와의 말씀을 인용하여 사울의 나라를 빼앗아 다윗에게 주었다고 말했습니다. 마귀는 블레셋과의 전쟁을 치러야 하는 급박한 상황에 처하여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온 사울의 약점을 들추었습니다. 그것도 과장을 했습니다. 사무엘은 한번도 여호와께서 사울의 대적이 되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너의 대적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묻느냐고 조롱했습니다. 또 그의 나라가 망하고 다윗에게 이미 주었다고 했습니다. 사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이런 때에 그런 말은 사울을 더욱 낙담시키고 전쟁을 치러야 하는 임금의 사기를 꺾어버리는 일이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네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고 그의 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오늘 이 일을 네게 행하셨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너와 함께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니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 군대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라 하는지라” 또 사울이 치명적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사무엘에게까지 버림 받았던 사건을 들추어내었습니다. 그것은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말씀에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쏟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건을 근거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블레셋 사람들에게 넘길 것이요, 내일 아들들과 함께 죽어서 음부에 오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사실을 말했다고 하더라도 사형선고와 마찬가지였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14절에 "사단도 자기를 광명한 천사로 가장한다"고 했습니다. 마귀는 자기가 정의의 사자인 것처럼 사울에게 죽음을 선고했습니다. 그러나 그 의도는 사울을 살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사울의 기를 꺾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망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진짜 사무엘이라면 이렇게 말했을까요?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고 회개를 촉구했을 것입니다. 사울이 살 길이 무엇인지 깨우쳐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사울의 사기를 완전히 꺾어버렸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서 마귀는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사울은 죽은 사무엘을 만나서 도움을 받겠다는 어리석은 생각에 사로잡혀 무당을 찾아갔고 결국 무당에게 조롱당하고, 전쟁에 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주의에 사로잡혔습니다.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싸울 의욕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있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자기 아버지 집에 보내서 다섯 형제들에게 말하여 지옥에 오지 않도록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무엇이라고 대답했습니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 것이라”(눅 17:29) 그래도 보내달라고 하니까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사울의 문제는 사무엘이 살아 있을 때 그의 말씀을 들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매주일 듣게 되는 설교 말씀을 가지고서 각 사람의 순종 여부를 테스트하십니다. 그 점수 역시 하나도 빠지지 않고 매기고 계십니다. 정말 그 들은 '말씀을 생활에서 순종하고 체험하고 있는지' 저와 여러분은 사실상 매일 시험을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설교를 듣고서 완전히 순종은 못하더라도 그나마 마음이 찔리고 양심에 가책이라도 느끼고 있으면 아직은 기회가 주어져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완전히 버리신 존재가 되면 그야말로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단계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마귀의 밥이 되어 버립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어떻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갖가지 스트레스와 불안감에 사로 잡혀 살아가고 있습니다. 분명 오늘의 세대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우주과학과 유전공학이 발달한 세대이기 때문에 미신과 같은 것은 발을 부치지 못할 것 같은데도 이상한 일은 더욱 미신이 판을 치는 반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사단은 항상 우리와 가까이 있다가 죽은 사람들의 영을 가장해서 우리를 미혹합니다. 대개 귀신들린 사람들을 보면 조상들이 귀신들린 경우가 많습니다. 무당인 집안에 계속 무당들이 나옵니다. 제사지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신자들은 제사를 드릴 때 정말 죽은 아버지의 영혼이나 할아버지의 죽은 영혼이 살아 와서 제사 음식을 먹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예수 믿는 사람은 낙원에 들어가고, 불신자들은 지옥에 갑니다. 거기에는 한번 들어가면 다시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런데 더러운 귀신들은 조상들의 영인 것처럼 와서 절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를 지내는 것은 마귀에게 절을 하는 것입니다. 또 제사제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기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조상 신을 섬기지 않은 것이 조상에게 큰 죄를 짓는 것처럼 여기도록 합니다. 무당을 데려다가 굿을 하고 죽은 혼령을 불러다가 물어보고 한 일이 바로 이와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은 다시 돌아올 수 없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간교한 사단의 장난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평소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설령 어떤 위기를 당해도 회개하고 기도하는 대신 점쟁이를 찾아가서 묻거나 귀신의 힘을 빌려 자신의 운명을 알아보려는 것은 스스로 파멸을 자초하는 길입니다.
III. 땅에 완전히 엎드러진 사울(20-25)
20절을 보십시오. “사울이 갑자기 땅에 완전히 엎드러지니 이는 사무엘의 말로 말미암아 심히 두려워함이요 또 그의 기력이 다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루 밤낮을 음식을 먹지 못하였음이니라” 사무엘의 말을 들은 사울은 두려워하고 기력이 진하여 땅에 엎드려져 버렸습니다. 마귀에게 조롱당하고 자신이 지은 죄로 인해 절망하고, 사형선고까지 받았으니 더 이상 일어설 힘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죄악을 다 드러내고,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울은 두려움에 떨다가 한 가닥 소망을 걸고 사무엘을 만났는데 파멸의 메시지를 듣고나니 혼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블레셋 군대를 보도 두려워 떨었는데 이제는 자신에게 닥쳐올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니 땅에 쓰러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여인은 사울이 심히 고통당함을 보고 떡 한 조각이라도 먹고 기운을 차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거절했습니다. 신하들이 강권하니 겨우 땅에서 일어나 침상에 앉았습니다(22,23). 그 여자는 자기 집에 있는 살진 송아지를 잡고 무교병을 만들어서 대접을 했습니다. 사울과 그 신하들이 먹고 그 밤에 돌아갔습니다(25).
이처럼 하나님께 버림받는 것이 가장 두렵고 슬픈 일입니다. 하나님께 버림을 받게 될 때 인간에게는 도무지 구원의 희망이 없습니다. 로마서 1장에 보면 하나님께 버림 받은 인간의 비참한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로마서 1장 21-23절을 보십시오.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또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모습이 절 나타나 있습니다.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버려두십니다. 부끄러운 욕심에 내 버려두십니다.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상실한 마음대로 버려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십니다. 합당하지 못한 일이 무엇입니까? 29-32절을 보십시오.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에 찾고 순종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사 55:6). 장차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서 최후의 심판을 받을 때 칭찬 받은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참으로 우리의 마음을 우울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없는 인간의 내면이 얼마나 어둡고 절망적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응답이 없을 때 낙심하거나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를 포기하거나 점쟁이를 찾아가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마음을 찢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사는 길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평소에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말씀에는 순종하지 않고 신비한 체험을 구하면 마귀에게 미혹되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삶이 가장 축복된 삶인을 확신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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