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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22일 대림 제4주일
제1독서 : 미카 5,1-4ㄱ
제2독서 : 히브 10,5-10
복 음 : 루카 1,39-45
39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40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42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4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44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45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오늘의 묵상>
김재덕 베드로 신부
오늘 복음의 첫 문장(루카 1,39)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 무렵 마리아는 일어나 서둘러 산악 지방에 있는 유다의 한 고을로 갔다.’
태중에 계시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면서
성모님께서는 지금 있는 자리에서 ‘일어나’ 엘리사벳에게 ‘서둘러’ 가십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다녀간 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맏음으로 순명하셨지만,
오해와 근거 없이 떠도는 이야기들로 힘드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께서는 ‘일어나셨습니다.’
시선을 아래로, 문제가 있는 쪽으로 향하신 게 아니라,
위로, 하느님께서 계신 쪽으로 향하십니다.
그리고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지 생각하신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도움을 주어야 할지 생각하십니다.”(프란치스코, 대림 제4주일 삼종기도, 2021.12.19.)
출산을 앞둔 엘리사벳을 도우시려고
임신하신 몸으로 약 150킬로미터나 되는 거리를 ‘서둘러’ 가십니다.
‘일어나다’, ‘서둘러 가다’.
성모님의 이 행동으로 태중에 있던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첫 만남이 이루어지고,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충만해져 행복 선언을 합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신약성경에서 처음으로 이루어진 이 행복 선언은
많은 오해와 어려움 속에 계시던 성모님의 입에서
‘마니피캇’(마리아의 노래)이라는 하느님을 향한 기쁨의 찬미가 터져 나오게 합니다.(1,46-55 참조)
절망스러운 상황일수록 성모님의 본보기를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때일수록 ‘그 자리에서 일어나’
오히려 이웃에게 도움을 주는 신앙인이 됩시다.
우리는 이때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마태 25,40) 안에 계신 주님을 만나며,
그분께서 마련하신 특별한 은총과 위로를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루카 1,39)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강원도 춘천의 한 거리에서 맥주 2,000병을 싣고 가던
트럭의 적재함이 열리면서 순식간에 길이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쏟아지며 깨진 맥주병 때문에 자칫 2차 사고가 날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지요.
그런데 이 상황은 소동이 일어난 지 30분 만에 모두 해결되었습니다.
해결의 시작은 사고를 우연히 지켜보던 시민들의 자발적인 청소였고,
인근 가게 주인까지 빗자루를 들고 나와 동참했습니다.
이렇게 30분 동안의 청소가 모든 상황을 종결했습니다.
이를 기사화한 2022년 6월 30일 자 중앙일보 기사는 이렇게 마지막 문장을 남겼습니다.
“사태 수습을 도운 시민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각자 갈 길을 떠났다.”
이것이 함께 사는 세상의 모습이 아닐까요?
어려움을 함께 나누고, 그 자체로 만족할 수 있는 세상 말입니다.
그러나 자기 이익이 먼저라고 생각하면서
사랑 실천에 무관심으로 대응할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이 세상이 더 각박한 세상이 되어가면서
힘든 세상이라고 불릴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다행히 사랑을 간직한 사람이 더 많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아직도 부족합니다.
우리 모두 이 사랑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을 나누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자기 갈 길을 떠나야 합니다.
보상을 세상이 해주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분명히 갚아주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임신한 두 여인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성모님과 엘리사벳 성녀 모두 임신으로 인해 큰 고민이 있었을 것입니다.
성모님은 처녀의 몸으로 잉태했다는 사실, 엘리사벳은 나이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어려움과 고민으로 힘들어하는 상태에서 두 분이 만납니다.
만남이 이루어진 장소는 ‘아인카림’이라는 곳이었습니다.
성모님께서 계셨던 나자렛에서 150km나 떨어진 먼 고장이었습니다.
이렇게 먼 거리까지 찾아온 성모님에게 엘리사벳은 큰 힘을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성모님도 엘리사벳에게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에게 큰 힘이 되면서, 지금의 어려움이 피해야 할 일이 아닌
오히려 하느님의 커다란 은총이었음을 깨달으셨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서로에게 힘이 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인정받으려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실 혼자서는 하느님의 일을 깨닫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서로 힘이 되어 주면서 하느님의 일이 우리와 함께 이루어짐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대림초의 모든 불을 밝히는 대림 제4주일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신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어떻게 하고 있나요?
성모님과 엘리사벳 성녀가 보여주셨듯이, 우리도 주님의 힘이 되어야 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대림 제4주일입니다.
성탄을 바로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오실 분’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며,
복음에서는 ‘오시는 분’이 어떻게 오시게 되는지를 보여줍니다.
먼저 제1독서에서 미카 예언자는 ‘오실 분’에 대한 네 가지 정보를 알려줍니다.
첫째는 그분은 ‘보잘것없는 작은 고을 베들레헴’(미카 5,1)에서 태어날 것,
곧 그분께서는 인간의 능력에 따라오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지혜에 따라오신다는 사실이요,
둘째는 “해산하는 여인의 아기”(미카 5,2)로 태어날 것,
곧 그분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오실 것이라는 사실이요,
셋째는 “목자로 나서리라.”(미카 5,3)는 것,
곧 그분께서 백성을 인도하고 먹여주고 보호해주고
안전하게 하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이요,
넷째는 “그 자신이 평화가 되리라”(미카 5,4)는 것,
곧 그분께서는 평화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평화이신 당신을 건네 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제2독서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오시는 분’이 짐승의 피로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내놓으실 ‘대제사장’으로 오실 것이요,
그것은 ‘당신의 뜻’이며 바로 그 뜻을 이루러 왔다(히브 10,7)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은 제2독서의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히브 10,7)라는 말씀의 실현을 보여줍니다.
곧 오늘 복음에서는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루카 1,45)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두 문장에 다 같이 들어있는 말은 “이루다”는 단어인데,
앞 문장에서는 능동형으로, 뒤 문장에서는 수동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오시는 분’이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분이심을,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 안에서
그 뜻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믿는 이들 안에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분은 그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하느님께서 이루시며,
우리는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응답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안에 계시는 그분이
당신의 뜻에 따라 일하시도록 수락하고 승복하는 일입니다.
곧 그분이 주인이 되시어 일하시도록
허용해 드리는 일이요, 그분을 믿고 신뢰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신뢰의 극치를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것도 구하지 않고, 아무것도 거절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들은 '하느님의 뜻'을
확실하고 이해하고 명확하게 알고서 응답하려 합니다.
마치 '하느님의 뜻'을 확실히 알기만 한다면 그것에 응답할 것처럼 여기지만,
사실은 마음이 불신에 가려졌거나, 그 뜻을 알아야 하는 자신을 앞세우거나,
자신이 그 뜻을 이루고 싶어서
'하느님의 뜻'의 불확실성을 탓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뜻'은 본질적으로 계시 되어있지만,
동시에 신비에 가려져 있습니다.
그러기에 ‘선한 뜻’(마태 11,26; 루카 10,21)을 지니신
주님의 사랑과 호의에 의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에 대한 마더 데레사의 일화가 있습니다.
영성 안내자로 살아가고 있는 존 캐버너가 자신이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다가
캘커타에 봉사활동 하러 갔을 때에, 수녀님께서 물었습니다.
“제가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존이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자 수녀님께서 되물었습니다.
“무엇을 기도해 드릴까요?”
존이 ‘하느님의 뜻을 확실하게 알고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하자
수녀님께서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그것을 위해 기도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확실한 것은 당신이 추구해야 할 것이 아니라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자 존이 물었습니다.
"그런데 수녀님은 모든 것을 확실하게 알고 또한 믿고 있는 분처럼 보입니다.
저도 그렇게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자 수녀님께서 웃으며 대답하였습니다.
“저는 한 번도 확실하게 알고 믿은 적이 없습니다.
제가 늘 가지고 사는 것은 신뢰입니다.
그러므로 당신도 하느님을 신뢰하도록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길’은 우리가 이끌려가게 될 곳을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인도하시는 ‘그분을 신뢰하는 일’입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아브람을 불러내실 때,
목적지를 알려주거나 지도를 마련해 주지도 않으면서 “떠나라”라고 하셨고,
그는 아무것도 확실한 것이 없지만 신뢰로 믿음의 길을 갔듯이 말입니다.
성모님께서 그러하셨듯이 말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십자가에서,
그 모습을 보여주셨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알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주님이신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항상 ‘선한 뜻’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면 충분합니다.
믿음의 길은 확실하게 손에 잡히지도 않고 눈에 보이지도 않지만,
이미 우리 가운데 와 계신 분의 동행을 신뢰하고 의탁하는 일입니다.
곧 그분의 선한 뜻을 신뢰하는 일입니다.
그 모범을 보여주었던 샤를르 푸고의 기도를 함께 드려 봅니다.
"아버지,
이 몸을 당신께 바치오니,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저를 어떻게 하시든지 감사드릴 뿐,
저는 무엇에나 준비되어 있고 무엇이나 받아들이겠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저와 모든 피조물 위에 이루어진다면,
이 밖의 다른 것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 당신을 사랑하기에 이 마음의 사랑을 다하여 하느님께 제 영혼을 바칩니다.
당신은 제 아버지이기에 끝없이 믿으며, 남김없이 이 몸을 드리고,
당신 손에 맡기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저의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알고 이해하기에 행하는 것이 아니라, 믿고 행할 때 실현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 밝혀주고 있는 마리아가 행복할 수 있었던 이유였습니다.
마리아가 행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의 뜻이나 바람을 이루어진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주님!
제가 행복한 것은 저를 믿고 사랑하기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당신의 희망 때문입니다.
늘 저보다 먼저 사랑하고, 더 사랑하고, 더 믿고 더 희망하시기 때문입니다.
결코 사라질 수도, 빼앗겨질 수도, 멈춤도 없는,
당신의 희망이 바로 오늘 제가 진정 행복한 이유입니다. 아멘.
믿음은 말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한이 없으십니다.
당신의 사랑을 한없이 주고 싶어서 외 아들을 세상에 보내주셨고
그 아들을 통하여 구체적인 사랑을 체험케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랑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은
마리아라는 한 인간의 믿음에 따르는 순명을 통해서 오셨습니다.
이 시간 믿음에 관해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 마음 안에 주님을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는 아브라함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어렵게 얻은 아들 이사악을 하느님께 제물로 바쳤습니다.
이사악은 외아들이었고 그를 두고 하느님께서는
“이사악을 통하여 후손들이 너의 이름을 물려받을 것이다.” 하고
약속해 주신 아들이었지만, 그를 기꺼이 바쳤습니다(히브11,17).
하느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하느님을 온전히 만났습니다.
번제물을 바치러 산으로 올라가는 도중에 아들 이사악이
“아버지! 불씨도 있고 장작도 있는데,
번제물로 드릴 어린양은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참으로 가슴이 미어지는 물음입니다.
아들을 제물로 바치려 하는 데 아들이 그 제물이 어디 있느냐? 고 묻는 것입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차마 ‘제물은 바로 너다’ 하고 말하지 못합니다.
‘번제물로 드릴 어린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신단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아들 이사악을 묶어 제단 장작 위에 올려놓고 칼을 들어 죽이려 할 때 천사가 나타나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마라. 그 아이에게 아무 해도 입히지 마라.” 말합니다.
덤불에 뿔이 걸린 숫양 한 마리를 제물로 바칩니다.
아브라함은 그곳의 이름을 “야훼이레” 라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손수 마련하신다는 의미입니다(창세22장).
창세기 19장에 보면 소돔의 멸망과 롯의 구원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주님께서는 롯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천사들을 통해 그 가족들의 살길을 알려줍니다.
롯의 사위들은 그 소리를 우습게 여겼고,
천사들은 결국 롯과 그의 아내와 두 딸의 손을 잡고 성읍 밖으로 데리고 나와 말했습니다.
“달아나 목숨을 구하시오.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되오.
이 들판 어디에서도 멈추어 서지 마시오.
휩쓸려가지 않으려거든 산으로 달아나시오”(창세19,17).
마침내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과 불이 퍼부어졌고 온 성읍들과 온 들판들이
땅 위에 자란 모든 것들이 멸망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다 소금 기둥이 되어버렸습니다’(창세19,26).
돌아보지 말라고 했으면 돌아보지 말아야죠. 왜 돌아봅니까? 믿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하느님께서 살려주신다고 길을 알려주었는데
그대로 하지 않고서는 하느님께서 벌을 내렸다고 원망을 합니다.
하느님께서 벌을 내리신 것이 아니라 내가 죽음을 자초한 것입니다.
자업자득입니다.
민수기 21장4절 이하에는 구리뱀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갈대바다로 가는 길에 들어서서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합니다.
“당신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양식도 없고 물도 없소. 이 보잘것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21,5).
그러자 주님께서 불 뱀을 보내어 그것들이 백성들을 물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많이 죽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이 모세에게 와서 간청했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당신께 불평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뱀을 치워주시도록 주님께 기도해 주십시오.”
그래서 모세가 기도하자 주님께서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에 달아놓았습니다.
뱀에게 물렸어도 그 구리뱀을 쳐다본 사람은 죽지 않았습니다(민수21,9).
그러나 보지 않은 사람은 죽었습니다.
믿음은 그렇다고 아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그대로 하는 사람은 새로 태어나고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은 생명에서 멀어집니다.
이 죽음 역시 하느님의 벌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것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정말 믿는 대로 행동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죽은 믿음입니다.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갑니다.
‘서둘러 갔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대로 행동하는 신앙의 결단입니다.
마리아에게 신앙은 알고 있는 지식과 마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겨지는 과정입니다. 신앙에 ‘어영부영, 우물쭈물, 할까말까’는 없습니다.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천사를 통해 하신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이해하기 어렵고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처지를 알면서도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하고 말하였습니다.
종은 주인의 뜻대로만 움직여야 합니다.
종에게는 주인에 대한 의무만 있을 뿐 권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종을 자처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을 잉태하게 되었고 빛이신 주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성모님은 엘리사벳이 말한 대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고 믿었기에” 행복하신 분이십니다.
많은 사람은 성모님을 예수라는 훌륭한 아들을 낳아서
젖을 먹인 여인이기 때문에 행복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더 근원적인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였기 때문에 행복합니다.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예수님께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하고 말했을 때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11,29).
이 말씀은 행복하려면 ‘말씀을 품고 살아라’ 는 의미입니다.
믿음은 이리저리 계산하고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때 상상하지 못했고, 기대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납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믿는 바를 행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노력하는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1코린 15,58).
우리의 어머니 마리아께서
주님의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는 믿음 안에 주님의 탄생을 가져왔듯이
이제 우리의 믿음으로 이 세상에 구세주 예수님을 낳아드려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세상의 빛이 되어, 또 하나의 작은 예수님이 되십시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가톨릭 신자임을 드러내는 도구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묵주’라고 생각합니다.
신자들은 자동차 안에 ‘묵주’를 걸어 놓기도 합니다. 손가락에 ‘묵주반지’를 끼기도 합니다.
레지오 단원들은 주회를 하면서 ‘묵주기도’를 바칩니다.
꾸르실료 교육의 봉사자들도 늘 손에 묵주를 들고 기도하면서 봉사합니다.
저도 손에 묵주반지를 끼고 있습니다. 매일 아침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하루를 시작합니다.
성지순례를 할 때면, 버스 안에서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성모님의 전구로 안전한 성지순례가 될 수 있도록 청하였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2002년 "묵주기도의 신비"라는
회칙을 발표하며 "빛의 신비"를 추가하였습니다.
이제 묵주기도는 20개의 신비(환희, 빛, 고통, 영광)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예수님의 공생활,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
예수님의 부활을 묵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서울 대교구는 2027년 세계 청년대회를 위해서 묵주기도 10억 단을 봉헌하기로 했습니다.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면 좋겠습니다.
대림 시기는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지난 3주간 대림 시기의 말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대림 제1주일의 주제는 ‘깨어있음’입니다.
신앙인은 두 가지 차원의 시간 속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는 물리적인 시간입니다.
우리는 이 물리적인 시간을 기준으로 우주의 역사는
150억 년, 지구의 역사는 45억 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물리적인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집니다.
다른 하나는 의미의 시간입니다. 가치의 시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탄생을 기억하며, 구세주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것은
물리적인 시간이 아닙니다. 그것은 의미의 시간입니다. 가치의 시간입니다.
우리가 깨어있다는 것은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가난한 이들의 모습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깨어남입니다.
대림 제2주일의 주제는 ‘인간의 권리’입니다.
교회는 대림 제2주일은 ‘인권 주일’로 정했습니다.
사람은 성별, 이념, 세대, 피부색, 계층으로 차별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는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가난한 이, 가장 헐벗은 이, 가장 아픈 이, 감옥에 갇힌 이에게
사랑을 주면 그것이 바로 주님을 사랑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산과 언덕은 평평해지고, 골짜기는 메워질 것입니다.’
원의 중심에서 원의 둘레는 모두 같은 거리에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 우리는 모두 같습니다. 지위도, 능력도, 업적도, 학력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교만, 욕심, 허영, 이기심이라는 언덕과 산을 깎아내려야 합니다.
믿음, 희망, 사랑으로 골짜기를 채워야 합니다.
나눔, 헌신, 희생으로 골짜기를 채워야 합니다.
편견과 선입견을 버리고 오직 사랑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대림 제3주일의 주제는 ‘자비’입니다. 자비의 또 다른 말은 ‘공감’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어 오시는 이유는
바로 ‘죄, 악,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이유도 나의 죄를 대신해서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자비이고,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자비로운 마음을 가진다면, 공감의 능력이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자선은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자선은 신앙인이라면 꼭 해야 하는 의무입니다.
나누는 것은 많이 가진 사람만의 몫이 아닙니다.
나누는 것은 많이 배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구원은 특정한 사람만이 받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께 의지하는 사람만이
나눌 수 있고, 그 안에서 기쁨을 얻을 수 있고
그런 사람만이 우리에게 구세주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대림 제4주일입니다.
대림 4주일을 지내면서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는 ‘신비’를 묵상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는 것은 바로 나를 위한 것입니다.
부족하고, 죄를 많이 지었고, 별로 잘한 것도 없는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모든 권능과 모든 권세를 가지진 분이 아주 연약한 아이의 모습으로
비천한 마구간에 태어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모여 기도하고,
주님께서 하신 약속들이 꼭 이루어지리라고 믿는다면,
주어진 하루하루를 감사하며, 기쁘게 생활한다면
바로 이곳에도 분명 주님께서는 오실 것입니다.
2000년 전에 엘리사벳과 마리아를 사랑하셨던 그 주님은
이 자리에 있는 우리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주시다니...
조욱현 토마 신부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주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루카 1,43).
엘리사벳의 이 말은 주님을 기다리는 교회의 느낌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그러면서 오늘의 전례는 깨어 기다림의 표본이 되시는 마리아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복음 전 노래를 부른다.
이 마음의 자세는 새로운 강생의 기적이
우리 안에서도 이루어지도록 하는 데 필요한 자세이다.
사실,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태어나시지 못한다면
이 성탄은 나에게 있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미가서는 유다의 땅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탄생하리라는 예언의 내용이다.
오늘 복음에는 마리아와 엘리사벳 모두가
아기의 출산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두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
러나 그 내용은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아기에게 집중되고 있다.
세례자 요한이 태중에서 뛰었다는 것은
역사가 이미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마리아가 서둘러 간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29절)은
나자렛에서 150km 이상 되는 예루살렘 서쪽 6km 지점에 있는 ‘아인카림’(Ain-Karim)이다.
마리아가 이 긴 여행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랑과 봉사의 정신이 컸었음을 말해준다.
마리아가 걸음을 서둘러 길을 떠난 것은,
“그 예언을 의심해서이거나 천사가 알려준 내용이
불확실해서거나 그 증거에 대한 의심이 생겨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녀에게 하신 약속 때문에 기뻤고
바로 그 내적인 기쁨에서 오는 열정에 따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헌신적으로 수행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령의 은총으로 서두르지 않을 수가 없었던 때문이다”(S. Ambrosius, In Lucam 2,19).
곧 해산하게 될 늙은 친척을 돕기 위한 이 먼 여행의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강생을 통해 자기 자신을 낮추고 봉사하기 위해 겪어야 했던
보다 힘든 여정에 대한 완곡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엘리사벳은 성령을 가득히 받아(41절) 이러한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에
마리아를 만났을 때는 이미 마리아를 ‘주님의 어머니’로 인식하고 있었다(43절).
그리고 성서는 그리스도를 잉태한 마리아를 구약의 계약의 궤와 같이
하느님의 현존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즉 엘리사벳은 자기 집으로 그 하느님의 현존이 옮겨와 있다는 사실에 놀라며
큰 소리로 마리아께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신”(42절) 분이라고 찬양한다.
마리아가 이렇게 위대하게 된 것은 그녀의 신적인 모성(母性)이다.
그러나 이러한 영광이 주어질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주님의 말씀에 대한 그녀의 완전한 신앙이다.
마리아는 자신의 신앙으로 ‘계약의 궤’가 되었고 ‘주님의 어머니’가 되셨다.
여기서 엘리사벳은 최초로 축복의 인사를 한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45절).
이제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언자를 거쳐 마리아에 이르기까지
흘러 내려온 이 신앙을 우리가 본받아야 한다.
하느님의 위대한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마리아와 같이 ‘말씀하신 대로’(루카 1,38)
우리에게 행하시도록 그분께 온전히 맡겨드림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언제나 알고 또 그렇게 실천하여야 한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께서는 마리아보다도 더 온전히 당신을 아버지께 의탁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모든 것을 다 바치시기까지 하셨음을 히브리서 저자는 말하고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뜻을 항구히 아버지께 봉헌함으로써
가장 이상적인 희생을 실현했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몸을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히브 10,10).
주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바로 이 희생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곧 다가오는 성탄의 축제를 통해 거행하게 될 강생의 신비는
근본적으로 파스카 신비에 정향 되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리아로부터 받은 육은 성금요일의 희생적 봉헌을 위한 것이며,
부활 날 다시금 그 몸을 둘러싸게 될 영광을 위한 것이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으로써
마치 엘리사벳이 한 것처럼 마리아도 받아들이게 된다.
마리아를 받아들이고 그분의 삶을 본받을 수 있을 때,
즉 ‘길을 떠나 서둘러’(루카 1,39) 이웃으로 향할 수 있을 때,
비록 그 여정이 험하고 고통을 수반하겠지만,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
즉 사랑을 낳아줄 수 있는 자가 될 것이다.
이 여정에서 우리는 또한 십자가의 신비와 파스카의 기쁨도
아울러 충만히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기쁨 때문에 우리는 더욱 주님의 오심을 간절히 기다릴 수 있고
사랑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마리아께서 아들을 잉태하시고 낳아주실 수 있었던 그 삶을 묵상하면서
우리도 그 삶을 본받아 실천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이웃을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봅시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인간적 시선으로만 바라보면 아인카림에서 있었던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은
참으로 비극적인 동시에 희극적인 모습일 것입니다.
이제 겨우 열서너 살 된 천진난만한 소녀
마리아가 아이를 가져 난감한 상태였습니다.
나자렛에 그대로 있자니,
동네 우물가 아낙네들의 입방아를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았겠죠.
엘리사벳 역시 삶을 잘 마무리해야 할 노년기에
아이를 가져 배가 점점 불러오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기상천외한 일이었기에,
엘리사벳은 바깥출입도 않고 숨어지냈습니다.
이런 두 여인이 오늘 아인카림에서 만나
기쁨과 환희로 가득 찬 노래를 주고받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 광경을 목격했다면,
둘 다 맛이 갔구나, 하면서 혀를 찼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루카 복음사가는 믿을 수 없는 일을 믿는 소녀와
놀라운 기적을 이루신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파를 경이로운 시선,
기쁨과 찬미의 시선으로 바라보라고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이 특별한 사건을 성령의 바람을 탄,
단순하고 가벼운 시선으로 바라볼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복잡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참으로 이해하지 못할 특별한 체험을 한 그들이었지만,
이렇게 따져보고 저렇게 따져보며 잔머리를 굴리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모든 것을 내어 맡기며, 복잡한 마음을 단순화시켰습니다.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인류 구원을 위한 청사진에
기쁜 마음으로 호응하며, 전폭적으로 신뢰하였습니다.
그 결과 맑은 정신, 깨어있는 마음으로
안갯속같이 희미한 자신의 신앙 여정을 기쁘게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순탄하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이 가벼워야 합니다.
단순해야 하고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때 삶에서 마주치는 작은 것들 안에서도 주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의 본보기가 되어 주신
마리아와 엘리사벳에게 깊은 감사와 찬미를 드립시다.
우리도 이웃을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봅시다.
때로 너무나 나와 다른 그이기에 잘 이해되지 않을지라도
경이로운 시선으로 그들을 유심히 바라볼 때,
그 안에 현존해 계시는 하느님을 명확히 뵐 수 있을 것입니다.
서공석 세례자 요한 신부
오늘 복음은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한 이야기였습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배려로 受胎하였다는 사실을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듣고,
즉시 길을 떠나 엘리사벳을 방문합니다.
오늘 복음은 마리아가 “길을 떠나 서둘러” 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듣는 순간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고도 말합니다.
이너서 나오는 엘리사벳의 발언입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마리아를 영접한 엘리사벳이 기쁨에 차서 하는 축복의 인사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에 시작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하신 말씀과 행동을 回想하면서
예수님은 당신이 가르친 대로 실천하였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중심이 된 신앙공동체들은
예수님에 대해 그들이 깨달은 바와 그들이 실천하던 바를 글로 남겼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의 「복음서」들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기 전의 일들,
특히 그분의 탄생과 어린 시절에 관한 일들은 그들이 회상할 수 없는 부분이었습니다.
그들이 「복음서」에 남긴 에수님의 탄생과 幼年期에 관련된 기록들은
역사적 사실을 보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담아 전하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들은 「구약성서」를 참고하여 그 이야기들을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그 이야기들에서 우리가 알아들어야 하는 것은 제자들의 믿음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인류를 위해 어떤 축복과 기쁨인지를 표현합니다.
오늘 현대인은 정확한 사실들에 대해서 일차적 관심을 가지지만,
옛날 사람들은 그들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담아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이야기들을 만들어 전하였습니다.
기록하고 전달하는 수단이 지극히 한정되어 있던 시대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쉽게 전달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서
그것이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게 하였습니다.
오늘의 복음이 전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을 受胎한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갔고,
엘리사벳과 그녀 태중의 아기는
마리아와 그 태중에 있는 예수님을 기뻐 영접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대단히 소박합니다. 위대한 것도 화려한 것도 없습니다.
한 여인 안에 장차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생명이 수태된 것입니다.
그 잉태는 마리아를 위대하게 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축복과 기쁨에 넘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은 특정의 사람을 영광스럽게
혹은 존경받는 인물로 만들어 주는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 일하시면, 우리는 사람들을 섬기고 그들을 기쁘게 합니다.
오늘 마리아는 서둘러 가서 엘리사벳과 그 태중의 아기를
축복과 기쁨으로 가득 차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수태되면서부터 사람들 안에 축복과 기쁨을 발생시키며,
섬기는 분이었다는 초기 교회의 믿음입니다.
하느님은 지킬 계명을 주고, 정성을 바치라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지배자들이 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축복과 기쁨이십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들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다스리고 명령하며, 죄인으로 판단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이를 고쳐주고, 죄인에게 용서를 선포하여, 삶의 기쁨을 맛보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섬김이고, 사람들에게 새로운 미래를 열어 주는 축복이었습니다.
생명을 주고 살리는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고 그들을 축복하여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셨습니다.
우리가 소중하다고 흔히 생각하는 것은 財物과 權力입니다.
그러나 재물과 권력이 소중히 보이는 곳에,
사람들은 정직하지 못하고 무자비하며, 남에게 군림하려 합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에게 빌고 바쳐서 재물과 권력을 얻어 누리려고도 합니다.
하느님에게 많이 바치면 많이 주신다 혹은 하느님의 마음에 들면,
그분으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런 믿음을 가르치는 종교 지도자들의 가슴에는
하느님을 後光으로 재물과 존경을 탐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 유대교 지도자들이 한 일이고,
인류 역사 안에 종교 지도자들이 흔히 쉽게 한 일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그런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하느님은 은혜롭고 사람을 살리는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짐 진 여러분은 나에게로 오시오.
내가 여러분을 쉬게 하겠습니다.”(마태 11,28)
예수님은 유대교 지도자들이 죄인이라며 버린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11,30)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은혜로운 하느님, 삶의 기쁨을 주는 하느님을 가르쳤습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에서도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간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축복과 기쁨을 나누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은혜롭게 베풀어진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그 은혜로움을 알고, 자기 주변 사람들에게도 그 은혜로움을 전달합니다.
그것이 宣敎입니다.
교회가 일찍이 교육과 의료에 눈뜨고, 그 분야에서 많은 일을 한 것도
교육으로 삶의 은혜로움을 사람들의 마음에 심고,
생명이 위협받는 사람들에게 의료로써 은혜로움을 되찾아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가 한 일은 예수 믿어서 구원받으라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깊은 곳, 그 태중의 아기까지도 기뻐 뛰놀게 하는 축복이었습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 두 사람이 주인공인 오늘의 복음은 요란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소박한 일상적인 이야기입니다. 은혜로운 하느님을 만나는 기쁨은 그런 곳에 있습니다.
매일의 일상적 삶 안에 우리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은혜로움을 볼 줄 아는 視線과 아버지의 뜻을 소중히 생각하는 마음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은혜로움을 본 사람은 주변의 사람들과도 그것을 나누어 그들도 같은 기쁨을 체험하게 합니다.
은혜로움의 기쁨을 체험한 사람은 이웃도 기쁘게 합니다.
오늘 복음의 마리아가 엘리사벳에게 한 일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이 주시는 축복과 기쁨을 영접하고 이웃과 그것을 나누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수태되면서부터 축복이고 기쁨이었다는 오늘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理論의 대상도 아니고, 높은 玉座에서 우리를 지배하는 분도 아니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삶 안에 축복과 기쁨으로 살아계십니다.
그것을 이웃과 나누는 잔치가 되게 하는 그리스도 신앙인의 삶입니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