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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23일 월요일
제1독서 : 말라 3,1-4.23-24
복 음 : 루카 1,57-66
57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58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59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60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61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62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63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64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65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66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오늘의 묵상>
김재덕 베드로 신부
루카 복음서는 아기의 이름은 ‘요한’으로 짓게 된 일을 두고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1,66)
어쩌면 아기에게 ‘요한’이라는 이름을 지어 준 것이,
하느님께서 그를 보살펴 주고 계신 일로 받아들일 만큼 대단한 일인지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의 탄생 예고 장면을 보면,
즈카르야가 ”그의 이름은 요한“(1,63)이라고 쓴 것은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1,13)라는
주님의 천사의 말에 온전히 순종한 ‘믿음에서 나온 행동’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태어난 아기는 부모의 이 믿음 안에서 자랄 것입니다.
그 아기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부모에게 물려받을 것입니다.
기도하는 법도 그분을 사랑하는 법도 배울 것입니다.
‘거룩한 침묵’과 ‘온전히 하느님의 시선 안에 머무르는 시간’을 통하여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법도 배울 것입니다.(12월 19일의 ‘오늘의 묵상’ 참고)
실제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며,
거룩한 침묵과 온전히 하느님의 시선 안에 머무를 수 있는 장소인 ‘광야’에서 지냅니다.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도록 태어난 아기, 세례자 요한을 보살폈던 주님의 손길은
이미 그의 부모 안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손길’이 자녀를 특별하게 돌 볼 수 있게 협력하는 부모들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습니다.
자녀에게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물려주는 것보다 더 큰 유산은 없습니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것이다.”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미사 때 강론하면서 또 외부에 나가 강의하면서
항상 느끼는 것은 ‘말하기가 어렵다.’라는 것입니다.
사제로 25년 이상을 살았으니, 이제는 능숙할 때도 되지 않을까 싶지만,
여전히 어렵고 준비할 것도 참 많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어느 신부가 요즘 젊은 신부들의 강론이 형편없다는 식의 말을 합니다.
내용도 부족하고 어디선가 짜깁기 한 것이라고 평가절하합니다.
이 신부의 말을 들으면서 곧바로 든 생각은
‘자기는 강론을 잘한다고 생각하나?’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신부에 대한 신자들의 강론에 대한 평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습니다.
그냥 평범합니다. 그러나 본인이 생각하기에 자기는 제대로 하고 있고,
다른 신부가 강론을 잘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자만이 가득합니다.
운전자의 90%는 자기 운전 솜씨가 평균보다 낫다고 믿으며,
대학교수의 94%가 자기 강의 실력이 평균보다 높다고 생각합니다.
사업을 시작하는 사람의 90%는 반드시 성공하리라 생각하는 것
역시 스스로 과대 포장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겸손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자기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자기 부족함을 볼 수 있어야 더 나아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는 잘하고 있고 잘될 것이라는 생각만 있으면,
안 좋은 결과에 남 탓, 환경 탓만 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겸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보다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주님의 뜻을 기억한다면
먼저 겸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겸손 안에서만 하느님의 일이 완성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세례자 요한의 탄생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하느님의 일을 믿지 않아서 벙어리가 되고 말지요.
그런데 세례자 요한의 할례식에서 혀가 풀리고 말을 하기 시작할 수 있게 됩니다.
관습대로 아기 이름을 정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기 때문이었습니다.
자기 뜻을 낮추는 겸손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드러날 수 있었습니다.
혀가 풀려 말을 할 수 있게 된 후에도 제일 먼저 한 것은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것이 우리의 첫 번째 일이 되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겸손 안에서 하느님의 일이 완성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나만을 높이고,
주님을 오히려 낮추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구세주의 탄생에 앞서, 요한의 탄생을 전해줍니다.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웃들과 친척들도 그녀의 해산 소식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습니다(루카 1,58).
그것은 그들이 하느님께서 베푸신 자비를 보았을 뿐만 아니라,
감추어진 무언가가 벙어리가 된 즈카르야를 통해
실현되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이 탄생하자 그의 부모와 친지들은 아기가 어떤 이가 될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수행할 사명이 무엇일지 궁금해합니다.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루카 1,66)
그런데 여드레째 되는 날, 아기는 할례를 받고,
사제인 아버지 즈카르야와 아론 가문의 어머니 엘리사벳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가문의 이름을 따르지 않고 '하느님은 자비하시다'라는 요한이란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그 순간 즈카르야의 묶였던 혀가 풀리고,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루카 1,65).
왜냐하면 예상하지 못한 아기의 이름이 명해지면서 즈카르야의 혀가 풀린 사건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관여와 현존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사가는 말합니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루카 1,66)
그렇습니다.
먼저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입니다(루카 1,66).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의 손길이 오늘도 우리를 보살피고 계십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도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 자신을 묻고,
우리의 신원과 소명을 찬미하며 살아갑니다.
사실 우리 모두도 이름과 함께 각자의 신원과 소명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이요 수도승이라는 신원을 지니고,
그에 따른 직무와 소명을 따라 살아갑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말합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 하나의 사명입니다.
이것이 제가 이 세상에 있는 이유입니다.”(<복음의 기쁨> 273항 )
그리고 실존철학자 하이덱거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세상 안에 과업을 짊어진 채 던져진 존재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소명을 과업으로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구원과 사랑을 '마음에 새기며'(루카 1,66)
소명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하느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귀 기울여야 할 일입니다.
본훼퍼 목사님은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향하여 있는 존재이다.”
아니, 사실은 그보다도 먼저 그리스도는 우리를 향하여 있는 존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의 손길이 늘 우리를 보살피고 계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루카 1,66)
주님,
당신이 베푸신 자비를 봅니다.
감추어진 무언가가 제게 실현되고 있음을 봅니다.
저의 가린 눈을 열고, 당신의 관여와 현존을 볼 수 있게 하소서.
당신의 손길이 오늘도 저를 보살피고 계시오니,
당신 신비 안에 저 자신을 묻습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구원과 사랑을 소명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그것만이 오로지 제가 살아가는 이유가 되게 하소서. 아멘.
하느님께는 공수표가 없습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요한의 탄생은 그 기쁨이 남달랐습니다.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인, 이미 나이가 많은 여인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이웃과 친척들은 하느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알게 되었고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요한이라는 이름은 즈카르야(‘하느님께서 기억하시다’는 의미)가
성전에서 천사로부터 전해 받은 이름입니다.
친지들은 아기의 이름을 조상의 이름을 물려주려고 했지만,
아기의 부모는 하느님께서 주신 요한이라는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깊은 침묵 속에서 하느님과의 신뢰가 형성되어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이름을 쓴 순간 즉시 혀가 풀렸습니다.
하느님의 명령이 실천되었을 때 입이 열린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틀림없이 이루어집니다.
‘인간의 말에는 공수표가 많지만, 하느님께는 공수표가 없습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말씀에 대한 신앙입니다.’
요한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은총을 베푸신다.
주님께서 너그러우시다.” 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제 묵은 이름이 아니라 새 이름으로 태어난 요한은 그 이름값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몫에 충실했습니다.
혈육을 떠나 더 넓은 의미의 형제자매를 형성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요(루카3,4; 요한1,27),
능력을 가지고 오시는 분의 길잡이입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3,30).고 하며 구세주의 오심을 외쳤습니다.
그야말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주님을 드러내는 삶을 사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어서 자기의 이름을 남기려 하는 법인데
역시 하느님의 사람으로서의 모습이 다릅니다.
즈카르야는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함으로써 하느님의 역사에 순종하였습니다.
인간적으로 매여 있던 모든 고리를 끊어 버리고 하느님을 새롭게 만났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나를 옭아매고 있는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입이 열리고 즈가르야가 한 첫 말은 하느님께 대한 찬미의 노래였습니다.
그는 이제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을 선포하게 되고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도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루카1,66). 하고 말했습니다.
그 아기는 결국 주님을 드러내는 주님의 일꾼일 뿐이었습니다.
하느님이 주신 이름을 통하여 주님의 이름이 돋보였습니다.
우리와는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이름, 세례 때 주어진 새로운 이름을 통하여
주님을 드러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은혜를 받고 사는 사람인 동시에 은혜를 전하는 귀한 존재입니다.
우리의 새 이름을 기억하며 살아가기를 희망합니다.
성탄이 코앞에 왔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탄생이지만 기쁨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어려운 나라의 현실에서 주님의 손길이 더욱 간절해집니다.
“빛으로 오시는 당신은 제가 어둠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내어 드릴 마음의 방은 활짝 열려있는가요?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할례
조욱현 토마 신부
세례자 요한은 “여드레째 되는 날”(59절) 할례를 받는다.
여드레째 되는 날에 받은 할례는
예수께서 부활하시는 날 모든 피조물이 죽음에서 풀려나는 것을 예시한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의 아들이 요한이라는 이름을 받은 것은
그 이름이 하느님의 은총 또는 은총을 지닌 자를 뜻하기 때문이다.
이 이름은 요한이 장차 선포할 복음의 은총, 그 은총을 세상에 내리실 주님을 가리킨다.
즈카르야가 요한의 이름을 확인해 주고 입이 열려 말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한 것은 그 아기의 이름이 지닌 힘이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 아버지에게 목소리를 되찾아주었고, 사제에게 말하는 능력을 회복시켜 주었다.
가브리엘이 잠근 것을 갓난아기가 열었다.
요한이 태어나 할례를 받았을 때,
그의 아버지는 예언자요 사제가 되었고, 말이 쓸모 있게 되었다.
요한이 할례를 받고 이름을 받았을 때,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65절).
그것은 가문에서는 사용하지도 않던 요한이라는 이름을 부부가 고집하는 것과
성전에 들어갔다가 나온 즈카르야가 벙어리가 되었다가
요한이 할례를 받던 날, 입이 열려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세례자 요한은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80절) 사람을 강하게 하는 것은 정신이다.
그래야 육체의 지혜,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악습을 이길 수 있다.
정신이 육신을 굴복시킬 수 있다. 우리가 그러해야 한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삶이 “오시는 분”(묵시 1,4)을 위해
그 길을 닦고, 준비하는 것임을 공공연히 말하면서 사신 분이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은 많은 사람에게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을 갖게 한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오시는 하느님의 아들 탄생은 어떠해야 하겠는가?
그분의 탄생 앞에 우리가 내어놓아야 할 예물은 어떤 것으로 준비해야 하겠는가?
그분의 탄생 자체가 우리 인간의 구원 시작이며,
그분의 탄생은 이미 십자가를 품고 있는 탄생이다.
세례자 요한이 먼저 와서 주님의 길을 준비하였듯이,
우리 자신 역시 그분을 바라보며, 그분의 오심을 준비하는, 길을 만드는 삶으로
다른 사람들을 주님께로 이끄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지금, 이 순간을 올바로 사는 것이다.
우리 모두 존재 자체로 하느님 은총의 표지요 도구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예나 지금이나 한 아기가 태어나면 어떤 이름을 지어줄까,
부모나 조부모들이 고민을 참 많이 했습니다.
과거에는 작명에 있어서 오랜 전통인 돌림의 룰에 따라
중간이나 마지막 한자만 선택하니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가정에서는 아이의 인생이 더 잘 풀리고,
큰 인물이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을 안고 작명소를 찾았습니다.
어린 시절 저도 어르신들을 따라 작명소를 가본 적이 있었습니다.
꼬질꼬질한 하얀 한복을 입고 수염을 길게 기른
어르신께서 큰 방석 위에 앉아 계셨습니다.
한자로 가득한 두꺼운 책을 뒤적이고, 고민을 거듭하더니,
멋진 붓글씨로 이름을 적어주셨는데, 사례비가 만만치 않아,
저도 나중에 크면 작명소나 차릴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노인 중의 노인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사이에 아기가 생겼다는 소문은
당시 아인카림에서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다들 두 사람을 두고 수군거렸습니다.
“세상에, 정말이지 기가 찰 일일세.
그 연세에 어떻게 그게 가능한 일인가? 비결이 대체 뭐지?”
특히 엘리사벳은 이웃 사람들의 눈총과 수군거림이
너무나 싫고 부끄러워 다섯 달 동안이나 숨어 지냈습니다.
그러나 큰 부끄러움과 동시에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베푸신
놀라운 은총과 자비에 감사하며 이렇게 속으로 되뇌었습니다.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 주셨구나.”(루카 1,25)
이윽고 해산달이 되어 엘리사벳은 주변 사람들의 우려와는 달리
아주 건강한 아기를 순산했습니다.
호기심 가득했던 이웃과 친척들이 몰려와서
태어난 아기를 구경하며 축하도 하고 신기해하기도 했습니다.
여드레가 지난 후 이웃들과 친척들은 아기의 할례식에도 참석했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말을 못 하고 있는 아버지 대신해서
태어난 아기의 이름을 즈카르야라고 정하고 명부에 적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엘리사벳이 크게 외쳤습니다.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은 ‘하느님의 은총’ 혹은 ‘은총의 지닌 사람’이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이름은 요한이 후에 선포할 복음의 은총,
그리고 이 세상에 결정적인 은총을 가져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아직도 의구심으로 가득했던 이웃과 친척들이
재차 즈카르야에게 아기에게 어떤 이름을 주고 싶다고 물었습니다.
그는 서판에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습니다.
즈카르야가 서판에 요한이라는 단어를 쓰자마자,
즉시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인한 주님의 은총이 즈카르야에게 내렸습니다.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했는데,
첫 마디가 하느님을 찬미하는 기도였습니다.
이렇게 요한은 태어나면서부터 주님의 은총을
주변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시작했습니다.
오랜 광야 생활을 거쳐 위대한 예언자로 거듭난 요한은
세례 갱신 운동을 통해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은총을 전하는 역할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 역시
존재 자체로 하느님 은총의 표지요 도구입니다.
수많은 하느님의 은총 속에 살아온 우리들입니다.
그분으로부터 받은 은총을 내 안에 담고만 있지 말고,
은총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에게 기꺼이 나눠주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늙은 엘리사벳은 마지막 예언자를 낳았고,
젊은 처녀 마리아는 천사들의 주님을 낳았습니다.
아론의 자손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를 낳았고,
다윗의 자손은 땅의 힘센 하느님을 낳았습니다.
아이 못 낳는 여자는 죄를 탕감하는 사람을 낳았지만,
동정녀는 죄를 없애시는 분을 낳았습니다.”
(시리아인 에프렘, 타티아누스의 네 복음서 발췌 합본 주해)
주목받지 못하는 아기
심상태 요한 세례자 몬시뇰(논문, ‘에큐메니컬 마리아론의 기본 입장’에서)
요한은 이웃과 친넉들의 지대한 관심 속에서 떠들썩한 축하를 받으며 태어난다.
그도 그럴 것이 늙은 부부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이 드디어 부모가 되었기 때문이다.
요한의 탄생은 아기 예수가 마굿간에서 누구의 주목도 받지 못하고
쓸쓸히 태어나는 매우 대조적인 모습이다.
바로 이것이 루카 복음사가의 의도이다.
복음사가는 자신의 복음에서 예수의 어린시절을 소개하면서
줄곧 요한과 예수의 극적인 대비를 하고 있다.
즉 요한의 탄생 예고와 예수의 탄생 예고를 대조해 주며
요한의 어머니와 예수의 어머니의 만남을 통해
번갈아 묘사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생후 여드레가 되는 날은 할례를 하면서 이름도 짓는 날이다.
요한의 할례식에는 다시 축하객들이 그득 모였고,
아기의 이름은 관례대로 아버지의 이름을 딴 ‘즈카르야’로 명명하려했다.
아버지는 아직 말문이 닫혀있어, 서판에 ‘요한’이라고 이름을 써야했다.
바로 그 순간 그의 입이 열려 하느님을 찬미하게 되었다.
탄생 예고 때부터 바로 터져 나왔어야 할 찬미가
무려 열 달 하고도 여드레가 지나서야 간신히 터져나온 것이다.
그 순간 즈카르야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그는 아마도 벙어리 냉가슴 앓듯 혼자만 알고 있었던 저간의 일들을 모두 털어놓고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이 하느님의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을 증언하였을 것이다.
이것을 듣고 보고 있던 이웃들은 모두 놀라움과 두려움에 휩싸였다.
하느님의 권능을 그 자리에서 확인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일은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고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하고 말하였다.
바로 요한은 사람들의 특별한 관심과 이목이 집중되는
성장 과정을 거치게 된다는 말이다.
복음사가가 요한의 탄생과 할례식, 그리고 성장과정에서
사람들의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음을 거듭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복음서의 주인공, 우리의 아기 예수는
요한과 같은 관심도 축복도 받지 못하는 지극히 가난한 상황에서
무엇 하나 주목받지 못하는 성장 과정을 겪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네 복음서 어디에도 예수의 성장 과정은 언급이 없다는 것이 그 증거다.
성인이 되기 직전인 열두 살 되는 해까지.
이렇게 해서 별달리 주목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주변인의 처지로 내려오셔서
그들의 희망과 빛이 되어주신 아기 예수님께
우리도 즈카르야처럼 뒤늦은 감사와 찬미를 바친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