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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24일 화요일
제1독서 : 2사무 7,1-5.8ㄷ-12.14ㄱ.16
복 음 : 루카 1,67-79
그때에 요한의 67 아버지 즈카르야는 성령으로 가득 차 이렇게 예언하였다.
68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69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
70 당신의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을 통하여 예로부터 말씀하신 대로
71 우리 원수들에게서,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72 그분께서는 우리 조상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당신의 거룩한 계약을 기억하셨습니다.
73 이 계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로
74 원수들 손에서 구원된 우리가 두려움 없이
75 한평생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당신을 섬기도록 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76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
77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
78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79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오늘의 묵상>
김재덕 베드로 신부
즈카르야는 구세주 에수님을 통하여 이루어질 구원을 노래합니다.(루카 1,78-79 참조)
예수님께서는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되실 것입니다.
그들도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크신 자비”(1,78)를 베푸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세례자 요한을 향한 즈카르야의 예언을 눈여겨봅시다.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1,76-77)
하느님의 구원은 ‘죄를 용서받아’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뒷날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며 광야에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3,3)를 선포합니다.
이제 곧 구세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있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구원을 이루어 주시려고 오십니다.
그리고 즈카르야는 이 구원이 죄의 용서로 이루어진다고 선포합니다.
고해성사는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구원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이 문 뒤에는 크신 자비를 베푸시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크신 자비를 베풀어주십니다.
여러분을 구원하시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신비를 여러분에게도 이루어 주시려고 오늘 우리에게 오십니다.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1972년, 철학자 휴버트 드 레이퍼스는 자신의 책 ‘컴퓨터가 할 수 없는 것’에서
컴퓨터에게 체스를 가르치려고 한 다양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컴퓨터는 인간 초보 플레이어조차 이길 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컴퓨터로는 주방 보조를 대체하는 것 정도로 멈출 것이라고 예측 했습니다.
이 예측이 틀린 것을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컴퓨터가 세계 체스 챔피언을 꺾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게 되었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주방 보조는 아직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아직 아무리 정교한 로봇도 바쁜 레스토랑의 테이블에서 접시를 치우고,
식기 세척기 안에 깨지기 쉬운 접시와 유리컵을 넣고 꺼내는 데
필요한 복잡한 기술을 갖지 못했다고 합니다.
우리의 미래는 아무도 모릅니다.
오로지 주님만이 아시며, 우리는 그 흐름에 몸을 맡길 따름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미래를 예측하고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종종 어떤 일을 행하는데 이렇게 될 것이라면서 수정하거나 멈추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다양한 방법으로 이끄시는 그 손길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겸손과 모든 가능성에 대한 열린 마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즈카르야의 노래를 보게 됩니다.
갓 태어난 아들 세례자 요한을 안고서 아버지인 즈카르야가 주님을 찬미하는 내용입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의 잉태 소식에 세상의 관점을 가지고 판단했다가
벙어리가 되었던 즈카르야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완전히 달라진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의 관점이 아닌, 하느님의 관점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세상의 관점으로 미래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관점으로 미래를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녀에 대해 세속적인 판단을 내리지 않습니다.
돌잔치에서 아기의 미래를 예측해 보는 소소한 행사인 돌잡이가 있습니다.
엽전, 마패, 붓, 복주머니, 오방 색지, 명주실, 바늘 쌈지 등이 준비됩니다.
이 중의 하나를 잡으면 아이의 미래가 보인다는 것이지요.
즉, 엽전을 잡으면 인생에 재물 운이 따른다는 식입니다.
그런데 준비된 이 모든 것은 세상 것입니다.
세상의 관점으로만 미래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즈카르야도 그렇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벙어리가 되는 하느님 체험을 통해 완전히 바뀌고 맙니다.
철저히 하느님의 뜻에 맞춰서 ‘즈카르야의 노래’를 노래합니다.
이제 오늘 밤이면 아기 예수님께서 태어나십니다.
대림 시기의 마지막 날을 보내며,
우리 역시 세상의 관점보다 하느님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독서는 다윗 가문에 영원한 왕좌가 약속되고, 화답송 역시
“영원토록 네 후손을 굳건히 하고 대대로 이어갈 네 왕좌를 세우노라.”(시 89,5)고 노래합니다.
그리고 복음 환호송은 이렇게 환호합니다.
“떠오르는 별, 영원한 빛, 정의의 태양이신 주님, 어서 오소서.
어둠 속 죽음의 그늘 아래 앉아있는 이들을 비추소서.”
‘즈카르야의 노래’에서 따온 이 구절은 바로 이 시대의 희망이요, 우리의 기도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도 여전히 어둠과 질곡이 판을 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어둠이 짙기에 우리는 빛을 더더욱 기다립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가 성령으로 가득 차 노래합니다.
우리가 매일 아침기도 때 드리고 있는
이 ‘찬가’(Benedictus, 찬미 받으소서)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전반부(1,68-75)는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셨음을 찬양드리는 노래입니다.
곧 선조들과 예언자들에게 약속하시고 예언한 구원을
아기 예수님을 통해 실현하심을 찬미합니다.
특히 여기에서는 구원받은 인간이 하느님을 섬기는 데 지녀야 할
두 가지 덕목을 ‘거룩함’과 ‘의로움’으로 노래합니다.
“우리가 두려움 없이 한평생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당신을 섬기도록 해 주시려는 것입니다.”(루카 1,75)
후반부(1,76-79)는 어제 복음의
“이 아이가 대체 무엇일 될 것인가?”(루카 1,66)에 대한 답변에 해당합니다.
곧 태어날 아기가 장차 어떤 일을 할 것인가를 노래입니다.
여기에서는 “지극히 높으신 분”은 하느님을,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은 예수님을,
그리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로 세례자 요한을 드러내 줍니다.
곧 세례자 요한을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의 선구자’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 노래의 ‘끝부분’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루카 1,78-79)
여기서 “크신 자비”라는 말의 직역은 ‘자비의 내장으로’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곧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그 크고 깊으심에서 그리스도는 오시어,
어둠과 죽음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고 평화로 이끌 것입니다.
결국 빛이 오면 어둠은 물러날 것입니다.
아무리 어둠이 기승을 부려도 어둠이 짙으면 새벽이 멀지 않듯,
빛은 막을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힘으로 오십니다.
그렇습니다.
이미 타오르는 빛이 우리의 발길을 밝히고 있습니다.
구세주께서 이 어두운 이 세상에 오시어 참 빛을 밝히실 것입니다.
어둠 속 우리를 당신 빛 속, 평화의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오늘 밤 우리는 그 빛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은 등불을 밝혀 들고,
참 빛을 맞이할 태세를 갖추어야 할 때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되어 우리를 찾아오시어~”(루카 1,78)
주님!
제 안에 오신 빛, 자비시여.
저를 비추소서.
당신 마음으로 저를 채우소서.
제가 자비로워지리이다.
당신 얼굴로 저를 비추소서.
제가 평화로워지리이다.
제 안에 오신 별, 빛이시여.
저를 밝히소서.
제가 환해지리이다.
그 크고 깊으심으로 저를 어루만지소서.
제가 새로워지리이다. 아멘.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주객전도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인과 손님의 위치가 바뀌었다는 뜻으로,
사물의 선후, 경중, 본말이 서로 뒤바뀌었음을 말합니다.
국가의 지도자는 지도자의 위치가 있고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국민은 각자의 자리가 있고 지도자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도자라고 하는 이들, 앞으로 지도자가 되겠다고 하는 이들의 권위가 보이지 않습니다.
권위는 고사하고 기득권을 지키려는 속 보이는 모습들이 멀미가 날 지경입니다.
자기 잇속을 챙기느라 백성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각자의 본분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세상의 어둠이 짙을수록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둠을 비추는 빛이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복음의 즈카르야의 노래는 이스라엘을 해방하시는 하느님을 찬미하는 부분과
하느님의 예언자로 태어난 아기의 장래를 축복하는 부분으로 구분됩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베푸시는 해방은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바를 그대로 이루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덕분에 이스라엘은 원수들의 손에서 벗어나
떳떳하게 주님을 섬기며 주님 앞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약속을 어길 수도 있고, 때로는 파괴할 수도 있는 변덕스럽고 약한 존재이지만,
하느님은 절대로 파기하시지 않고 요지부동하십니다.
하느님은 약속을 기억하시고 신실하게 성취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원수들 손에서 구원된” 사람들이 두려움 없이
한평생 거룩하고 의롭게 주님을 섬기도록 해 주셨습니다(루카1,75).
이것은 죄악으로부터의 해방이요, 영적인 구원입니다.
하느님의 예언자로 태어난 요한이
제 몫을 감당하여 주님의 길을 닦고 알려주는 것도
“하느님의 크신 자비”(루카1,78) 덕분입니다.
시작도 마침도 모두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요한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로서 주님의 길을 준비하였습니다.
“나 이제 특사를 보내어 나의 행차 길을 닦으리라”(말라기3,1).
“사막에 길을 내어라”(이사40,3).고 외치는 소리가 될 것입니다.
예언의 말씀은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마침내 요한은 오시는 주인의 길을 닦고
자신은 그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도 없다는 겸손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세상은 주인의 행세를 하려는 사람들이 넘쳐나서 큰일입니다.
주객이 전도되고 있으니 문제입니다.
시작도 마침도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니,
주님께 의탁하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에 헌신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 안에서 아기 예수님을 만나 뵙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할례
조욱현 토마스 신부
세례자 요한은 “여드레째 되는 날”(59절) 할례를 받는다.
여드레째 되는 날에 받은 할례는 예수께서 부활하시는 날
모든 피조물이 죽음에서 풀려나는 것을 예시한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의 아들이 요한이라는 이름을 받은 것은
그 이름이 하느님의 은총 또는 은총을 지닌 자를 뜻하기 때문이다.
이 이름은 요한이 장차 선포할 복음의 은총, 그 은총을 세상에 내리실 주님을 가리킨다.
즈카르야가 요한의 이름을 확인해 주고 입이 열려 말을하고 하느님을 찬미한 것은
그 아기의 이름이 지닌 힘이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 아버지에게 목소리를 되찾아 주었고,
사제에게 말하는 능력을 회복시켜 주었다.
가브리엘이 잠근 것을 갓난아기가 열었다.
요한이 태어나 할례를 받았을 때,
그의 아버지는 예언자요 사제가 되었고, 말이 쓸모 있게 되었다.
요한이 할례를 받고 이름을 받았을 때,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65절).
그것은 가문에서는 사용하지도 않던 요한이라는 이름을 부부가 고집하는 것과
성전에 들어갔다가 나온 즈카르야가 벙어리가 되었다가
요한이 할례를 받던 날, 입이 열려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세례자 요한은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80절) 사람을 강하게 하는 것은 정신이다.
그래야 육체의 지혜,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악습을 이길 수 있다.
정신이 육신을 굴복시킬 수 있다. 우리가 그러해야 한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삶이 “오시는 분”(묵시 1,4)을 위해
그 길을 닦고, 준비하는 것임을 공공연히 말하면서 사신 분이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은 많은 사람에게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을 갖게 한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오시는
하느님의 아들 탄생은 어떠해야 하겠는가?
그분의 탄생 앞에 우리가 내어놓아야 할 예물은 어떤 것으로 준비해야 하겠는가?
그분의 탄생 자체가 우리 인간의 구원 시작이며, 그분의 탄생은 이미 십자가를 품고 있는 탄생이다.
세례자 요한이 먼저 와서 주님의 길을 준비하였듯이, 우리 자신 역시 그분을 바라보며,
그분의 오심을 준비하는, 길을 만드는 삶으로 다른 사람들을 주님께로 이끄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지금, 이 순간을 올바로 사는 것이다.
‘이것’ 아닌 은총의 다른 통로는 없다.
전삼용 요셉 신부
어느 날 파우스티나 성녀는 어떤 영혼을 위해 기도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즉시 주님께 9일 기도를 바치기로 결심하고,
미사 시간에 양쪽 다리에 고행용 쇠사슬을 착용하고 기도와 함께 고행하기로 합니다.
그렇게 3일이 지나고 고해성사 때가 되어 영적 지도자 신부님에게 고해성사를 보러 갔습니다.
영적 지도자에게는 숨기는 것이 없어야 했기 때문에 자신이 하는 고행을 말하려고 했고
영적 지도자도 그것을 당연히 허락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영적 지도자 신부님은 허락도 없이 그런 고행을 하는 것에 매우 놀라고
건강 때문이라도 그런 고행을 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고행하는 대신 예수님께서 왜 당신을 낮추셔서 세례를 받으셨는지 묵상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녀에게는 하느님에 대해서 묵상하는 것은 고행이 아니라 즐거움이었습니다.
정말 힘든 것은 자기 생각을 바꾸고 고해신부님의 말에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희생 같지도 않은 것으로 한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을까?’
그러나 수녀님은 고해신부의 말에 순종하여
고행용 쇠사슬을 풀고 묵상하기 위해 성당에 앉았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이런 말씀이 들렸습니다.
“나는 네가 은총을 주라고 청한 그 영혼에 그 은총을 나누어주었다.
그러나 네가 스스로 선택한 고행 때문에 준 것이 아니다.
오히려, 네가 나의 대리자에게 완전히 순명했기 때문에,
네가 전구하고 자비를 청한 그 영혼에 은총을 주었다.
네가 너 자신의 의지를 접을 때에
나의 은총이 네 안에서 군림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두어라.”
예수님은 파우스티나에게 노트 한쪽 페이지에 엑스 표를 하고
그 위에 “오늘부터 나 자신의 뜻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쓰게 하시고,
그 뒷면에는 “오늘부터, 언제나, 어디서나, 그리고 모든 것에 있어
나는 하느님의 의지를 행한다.” 라고 쓰게 하십니다.
하느님은 더 많이 포기하는 이에게 더 주십니다.
자녀가 스스로 나가서 돈을 벌어오겠다고 나간다면
부모가 주는 것은 의미가 없어집니다.
부모에게만 의지할 수 있는 자녀가 된다면 부모의 모든 것을 받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천사의 말대로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으라고 하면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합니다.
그랬더니 입이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게 됩니다.
은총은 순종을 통해서만 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저는 이제는 즈카르야도 파우스티나 성녀도 자신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얼마나 큰 고통을 감수해야 했는지 조금은 이해가 갑니다.
자신의 뜻을 접는다는 것은 자신을 버리는 일인데 그것만큼 고통스러운 일은 없습니다.
저는 논문을 쓰면서 이것을 많이 느꼈습니다.
학생의 생각이 교수님의 생각과 똑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차피 논문은 교수님이 통과시켜 주는 것이기 때문에
교수님이 바꾸라고 하는 것은 바꾸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동안 공부를 하여 머리가 커질 대로 커진
저로서는 제 생각을 바꾸는 것이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박사 논문 첫째 장을 제출하고는 교수님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라
걱정하여 음식을 먹고 체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바꾸라면 다 바꾸어주겠다.’라고 생각을 하게 되기까지는 여간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나 자신을 포기하는 만큼 은총이 찾아왔습니다.
신학생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교수 신부님이 가르치는 것은 거의 이단 교리에 가까웠습니다.
동기와 저는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정통 교리를 써야 할 것인지, 교수가 가르친 것을 써야 하는지.
그 친구는 자신의 소신대로 썼고 아주 낮은 점수를 받았고
저는 교수가 가르친 것을 잘 이해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저에겐 후한 점수를 주셨습니다. 물론 그 친구의 용기가 대단하기는 하였습니다.
그러나 점수를 받으려고 하면서 그 점수를 주는 대상을 무시해서는 안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제르투르다 성녀는 예수님께서 자신 기도를 너무 잘 들어주셔서 놀랐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고 합니다.
“네가 내 뜻을 따라주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나도 네 뜻을 따라주기로 결심했다.”
내 뜻을 많이 말해봐야 소용없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말하지 않아도 다 아십니다.
그 은총을 받기 위해 그분의 뜻에만 집중해야 합니다.
그분과 그분이 파견한 교회에 모든 것을 맡기고 순종하려는 의지를 지녀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들어주실 것입니다.
대림 시기의 마감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사화를 마무리 짓는 즈카르야의 노래를 들려준다.
아홉 달 동안 잠겼던 혀가 풀리면서 성령을 가득히 받아 외치는
즈카르야의 노래는 세례자 요한 탄생사건의 결론이다.
즈카르야의 노래도 마리아에 대한 엘리사벳의 칭송(1,42-45)과
마리아의 노래(1,46-55)와 마찬가지로 성령께서 그의 입에 담아주신 말씀이다.
엘리사벳도 즈카르야도 “성령을 가득히 받아”(41절; 67절)
하느님께 칭송을 외쳤고, 찬미의 노래를 불렀다.
마리아의 경우는 지극히 높으신 성령의 힘으로 말미암아(1,35)
예수를 잉태하였으니 이미 주님께서 마리아와 함께 계심을(1,28) 알아야 한다.
성서학자들은 즈카르야의 노래도 마리아의 노래처럼 루카복음서 집필시기 이전에
유다계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던 감사가, 또는 찬미가로 추정한다.
그 이유는 유대교로부터 소외당하고 버림받았던 가난한 자들이
원수들과 그들을 미워하는 사람들의 박해를 받아
죽음의 암흑과 그 그늘 아래 앉아 있던 사람들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그 가난한 사람들이 메시아 예수의 구원을 체험하고,
또 실제로 구원의 은혜를 받아 이제는 두려움 없이 거룩하고 올바르게 하느님을 섬기며,
평화의 길로 들어선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루카는 이러한 메시아 예수의 구원사적 업적을 세례자 요한의 탄생사건과 연결시키고 있다.
‘아가야’(76절)하고 시작하는 노래의 후반부는 선구자 요한에 대한 내용이다.
이것은 “이 아기가 장차 어떤 사람이 될까?”(1,66) 하는
사람들의 생각에 대한 루카의 답변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즈카르야의 노래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첫 부분(68-75절)은 신실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찬미의 부분이다.
하느님께서는 소외당하고 버림받은 가난한 사람들을 당신 백성으로 삼아 구원해 주셨고,
앞으로도 가난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되어 그분의 구원을 입을 것이다.
구원의 목적은 백성들이 거룩함과 올바름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다.
둘째 부분(76-79절)은 직접적으로 구원을 준비하는 선구자 세례자 요한에 관한 내용이다.
그는 구약의 마지막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특사요 예언자”(말라 3,1)로
먼저 와서 메시아 주님의 길을 닦는다.
그는 죄를 용서받는 세례를 외칠 것이며,
백성들을 준비시켜 구원받는 길로 인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구원의 모든 것은 ‘하느님의 자비로우심’ 덕분이다.
이로써 ‘하느님은 자비로우시다’는 뜻을 가진 요한의 이름이 다시금 강조된다.
이는 즉, 하느님의 구원이 요한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직접 하늘의 태양처럼 죽음의 그늘 어둠 속에 있는
백성을 비추시어 빛이 되시는 자비를 베푸신다는 것이다.
이 빛이 백성의 앞을 비추어 그 발걸음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신다는 것이다.
오늘 즈카르야의 노래로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미 오심’과
‘다시 오심’을 준비하는 4주간의 대림 시기를 마감한다.
세상의 종말과 최후의 심판을 묵상하는 ‘다시 오심’의 분위기로 시작된 대림시기는
지난 2월 17일부터 ‘이미 오심’에 대한 준비로 그 절정을 이루었다.
우리는 마태오복음과 루카복음의 前史를 통하여
이 준비가 놀라움과 기쁨으로 충만하였음을 보았다.
인류의 聖祖들로부터 즈카르야와 엘리사벳과 세례자 요한,
그리고 마리아와 요셉을 통하여 펼치시는
하느님의 놀라우신 인류 구원계획은 이렇게 준비 되었던 것이다.
그 계획은 바로 하느님 스스로의 ‘사람이 되심’이다.
이제 그 성취가 우리의 눈앞에 놓여있다.
오늘 밤 우리는 그 성취를 우리의 눈으로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성취가 인간의 눈에는 漫然 불가능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오직 성령 하느님께 자신을 여는 자만이 그 성취를 보게 될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