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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게시판 스크랩 청주한씨 충성공 한명회 묘소
아모레퍼시픽 추천 0 조회 322 09.06.10 23:3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청주한씨 충성공 한명회 묘소

 

우리 한국 사람으로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은 충성공 한명회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그 분의 묘소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 한명회의 묘소는 우리가 잘 볼 수 있는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다만 우리가 그걸 잘 알지 못했을 뿐이다.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서울을 향해 달리다 반대편 로선 왼쪽에 있는 천안휴게소 앞을 통과하기 직전에 오른 쪽으로 건너다 보면 위 사진과 같은 사당이 눈에 들어 온다. 이것이 바로 청주한씨 충성공 한명회선생을 모신 사당이며 그 뒤쪽에 묘소가 있다.

 

소재지: 충남 천안시 수신면 속창리 


 

청주한씨 충성공 묘역

 

나는 천안에 살면서도 한명회의 묘가 천안에 있다는 사실을 잘 몰랐다. 지난번 "허브파라다이스"에 갔다가 권혁만 사장으로부터 이곳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한명회선생의 묘소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즉시 달려 갔다. 묘역 입구에 도착해 보니 "청주한씨 충성공 묘역"이라고 음각해 놓은 커다란 표지석이 서 있었다.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도 눈에 띨 수 있도록하기 위해 커다랗게 세워놓은 것이겠지만 이름이 없어서 일반인은  보고도 누구인지 잘 모를듯 싶었다.

 

                                                충성공 한명회 사당 전경

 

한명회선생은 1415(태종 15)~1487(성종 18)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준(子濬), 호는 압구정(狎鷗亭)·사우당(四友堂)이다. 할아버지는 예문관제학 상질(尙質)이고, 아버지는 증영의정(贈領議政) 기(起)이며, 어머니는 예문관대제학 이적(李)의 딸이다. 그의 딸이 예종비 장순왕후(章順王后)와 성종비 공혜왕후(恭惠王后)이다.
한명회는 苟?부모를 여의고 어린 시절을 불우하게 보냈다. 여러 번 과거를 보았으나 합격하지 못하고 권람(權擥)과 더불어 산천을 주유했다. 1452년(문종 2) 문음으로 경덕궁직(敬德宮直)이 되었다. 문종이 죽고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首陽大君)과 의기투합하여 무사 홍달손(洪達孫) 등 30여 명을 추천했다. 1453년(단종 1) 10월 수양대군이 김종서(金宗瑞) 등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한 계유정난 때 심복 참모로서 큰 공을 세워 군기녹사(軍器錄事)에 임명 되고 수충위사협책정난공신(輸忠衛社協策靖難功臣)의 호를 받았다. 곧이어 사복시소윤(司僕寺少尹)이 되었다가 1454년에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다.
1455년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좌부승지로 승진했으며, 그해 가을 동덕좌익공신(同德佐翼功臣)의 호를 받고 우승지가 되었다. 1456년(세조 2) 단종복위운동을 좌절시켰으며, 사육신의 주살(誅殺)에 적극 협조했다. 이어 좌승지·도승지를 거쳐 1457년 이조판서·병조판서가 되었고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졌다. 1459년 황해·평안·함길·강원 4도의 체찰사(體察使)가 되었으며, 1461년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에 봉해지고 판병조사(判兵曹事)를 겸했다. 그뒤 우의정·좌의정을 역임하고 1466년 영의정에 올랐으나 곧 병으로 사임했다.
1467년 이시애(李施愛)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모함을 받아 투옥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1468년 세조가 죽자 유교명(遺敎命)을 받들어 다른 대신들과 함께 승정원에서 숙직하며 서정(庶政)을 결재했다. 같은 해 남이(南怡)가 제거된 후 추충보사병기정난익대공신(推忠保社炳幾定難翊戴功臣)의 호를 받았다. 1469년(예종 1) 영의정에 제수되었으나 곧 사임했다.
성종 즉위 후 병조판서가 되었고, 1471년(성종 2) 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의 호를 받았다. 같은 해 대궐의 동·서쪽에 군영?설치할 것을 청하고 직접 서영(西營)을 거느렸으며, 흥학(興學)의 중요함을 역설하면서 성균관을 정비·확충하게 했다. 1484년 나이가 많아 벼슬을 그만두고자 했으나 허락받지 못하고 성종으로부터 궤장(杖)을 받았다. 궤장(机杖)은 조선조에 나이 70세된 대신들에게 임금이 안석과 지팡이를 하사하고 성대한 잔치를 베푼 것을 말한다.
이렇게 한명회선생은 세조의 총신으로 성종대까지 고관요직을 역임하면서 조선 초기의 군국대사에 많이 참여했으며, 부와 영화를 한몸에 누렸다. 사후에는 세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성(忠成)이다.(백과사전에서 발췌)

 

                                                   상당문(上堂門)

 

                                                  한명회는 1456년(세조 2) 단종복위운동을 좌절시켰으며, 사육신의 주살(誅殺)에 적극 협조했다. 이어

                                                  좌승지· 도승지를 거쳐 1457년 이조판서·병조판서가 되었고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졌다. 상당문(上堂

                                                  門)은 여기에서 유래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한명회 선생 사당

 

                                                    이 묘역을 관리하는 사람이 가까운 곳에 살고 있지 않고, 문을 잠가 놓은 상태여서 사당 내부는 들어 갈

                                                    수 없었으므로 부득이 밖에서 사진을 촬영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새로 세워 놓은 신도비

 

                                                    사당 밖의 마당 오른쪽에는 아래 사진의 비각안에 있는 상당부원군 충성공 한명회신도비(上黨府院君

                                                     忠成公 韓明澮神道碑)를 쉽게 읽어 볼 수 있도록 번역한 역문을 새겨 설치해 놓았다.

 

 

 

 

                                                    사당 앞쪽에서 올라가며 바라본 비각

 

묘수(墓수)에는 신도비를 비롯하여 문·무관석 장명등 석물을 갖추었다. 비석 받침은 160×114㎝로 측면에는 모두 10개의 안상을 새겼고 윗면에는 12개의 연화문을 복연(覆蓮)으로 조식했다. 이수는 두 마리의 용이 구름속에서 여의주를 조롱하는 모습을 조각하였다. 비분은 약 1천여자의 해서로 한명회의 행적을 기록하였다. 이 비는 조선 성종 19년(1488)에 세운 것으로, 선생이 서거한 그 이듬해의 일이다. 

신도비 비각

 

                                                                신도비는 묘의 방향과 같이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비 몸은 이무기가 새겨진 덮

                                                                개 돌은 대리석인데 비하여 비의 받침은 화강석으로 만들어져 있다. 비문은 서거정

                                                                (徐居正)이 지었다.

 

                                                    한명회선생 묘소 전경/ 묘소 앞에는 문·무관석 장명등 석물을 갖추고 있다. 

 

 

                                                      한명회선생 묘소 근경/묘비의 갓 모양이 특이한 것을 볼 수 있다.

 

                                                    돌로 둘러 쌓아 놓은 묘소

 

 

                                                      한명회선생 묘의 뒤에 있는 묘 

 

                                                      한명회선생 묘의 뒤에는 또 하나의 묘가 있는데 이는 한명회선생의 부인의 묘이다. 부인의 묘를 옆에

                                                      나란히 쓰지 않고 뒤에 위치하도록 한 것이 다른 곳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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