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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년 12월 25일 수요일[주님 성탄 대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
종종 희망이 없다면서 절망과 좌절에 빠진 사람들을 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함께하기보다 혼자 있으려고 합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인간은 희망없이는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내일을 살아갈 일말의 희망이라도 가져야 오늘을 살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암 투병 중에 계신 분을 많이 만났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포기하고 절망에 빠지는 사람도 보았고,
오히려 하느님께 의지하고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키우는 분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더 행복할까요? 끝까지 희망을 품었던 분이었습니다.
이런 분만이 또 실제로 건강도 찾으셨습니다. 지금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소한 일상 안에서 작은 희망을 잃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작은 희망이라고 별것 아닌 것으로 무시한다면,
점차 절망의 길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어느 젊은 아빠가 “우리 아이가 처음으로 저를 보며 ‘아빠’라고 했어요.
눈물 날 정도로 기뻤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아빠’라는 말이 대단한 것일까요?
세계 신기록에 등록될 정도로 유일한 것일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이처럼 작은 것에도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이유는 충분히 있습니다.
그냥 ‘없다’라고 단정지을 것이 아니라, 주위를 둘러봐야 할 것입니다.
분명히 희망의 이유가 차고 넘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아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단순히 이 땅을 시찰하기 위해 오신 것일까요?
그렇다면 힘없고 연약한 아기의 몸으로 오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우리와 늘 함께 계시려고 새롭게 태어나신 것입니다.
우리의 희망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아기를 보게 되면 거부감이 없어집니다. 얼굴만 봐도 기쁘고 행복합니다.
아기가 말을 하지 못해도, 아기가 밖에 나가서 돈을 벌어오지 않아도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아기와 함께 할 미래를 떠올리면서 더 큰 희망을 간직하게 됩니다.
예수님도 그렇습니다. 약하고 힘없는 아기의 몸이지만, 그 자체로 커다란 희망이었습니다.
거부감 없이 당신을 받아들이라고, 당신과 함께하고 있음 그 자체로 기쁨과 행복을 간직하라고,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을 떠나 근본적인 행복을 향해 나아가라고
이 땅에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었습니다.
희망의 시작은 기다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풍날, 여행 날, 합격발표날, 소중한 손님의 방문 날 등….
날짜를 하루하루 기다렸던 순간을 떠올려 보십시오. 설레임에 더 기뻤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 나라에서 주님을 직접 만날 순간을 떠올려 보십시오.
주님과 함께하는 지금, 이 순간들이 희망으로 나아가는 걸음걸음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 성탄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오늘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축하드립니다.
구세주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진심으로 기뻐하며 축하드립니다.
이 세상에는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그 많은 이야기들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는
분명 오늘 우리가 들은 ‘아기 예수의 탄생 이야기’일 것입니다.
이 ‘구세주의 탄생 이야기’는 너무도 아름다워, 매년 들어도 항상 새롭기만 합니다.
특히 오늘 성탄 전야부터 ‘희년’이 개막됩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지난 승천대축일에
<희망은 실망하지 않습니다>(로마 5,5)라는 제목으로 <희년선포 칙서>를 반포하시면서,
성탄 전야에 ‘희년’이 개막될 것임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희망의 순례자들’입니다.
유다의 랍비 전승에 의하면, 세계 역사에는 네 개의 결정적인 밤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 밤은 빛이 창조된 밤이고,
둘째 밤에는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봉헌할 준비를 갖춘 밤이고,
셋째 밤은 이집트의 압제에서 탈출한 밤이며,
넷째 밤에는 메시아가 다시 오시는 밤이라고 합니다.
첫째 밤은 탄생과 창조의 밤이요,
둘째 밤은 순명과 봉헌의 밤이요,
셋째 밤은 해방과 구원의 밤이요,
넷째 밤은 재림과 완성의 밤입니다.
그들은 이 네 밤을 동일시한다고 합니다.
오늘 밤, 바로 이 밤이 이 네 개의 밤입니다.
바로 이 밤이 창조로 새 생명이 탄생한 밤이요, 봉헌으로 하느님과 연결되는 밤이요,
탈출로 이루어진 구원의 밤이요,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한 ‘희망’이 이루어지는 밤입니다.
이토록 깊고 오묘한, 구원이 탄생하는, 참으로 아름다운 밤입니다.
오늘이 바로 그 밤입니다.
기쁜 성탄입니다!
성탄!
이는 하느님께 드리는 인간의 “예”에 대한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오늘이 바로 이렇게 “예” 하고 답하기만 하면,
우리 안에서 예수님께서 탄생하는 날입니다.
하느님이 내려온 날입니다.
하느님이 내 안에서 인간이 되는 날입니다.
그리하여 ‘인간이 하느님이 되는 순례가 시작되는 날’입니다.
참으로 복된 날이요, 참으로 거룩한 날입니다.
성탄!
이는 '그분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짐입니다.
나를 껴안은 당신의 포옹으로 모든 이가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고,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이 안에 있게 된 날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이신 예수님과 함께 순례가 시작되는 날’입니다.
참으로 은총의 날입니다.
이토록 놀랍고 경사로운, 오늘이 바로 그 날입니다.
기쁜 성탄입니다!
성탄!
이는 오늘 제1독서에서 예언자 이사야가 말한 대로,
어둠 속을 헤매는 백성이 큰 빛을 보게 된 것이요,
캄캄한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쳐옴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말한 대로,
하느님의 구원의 은총이 모든 사람에게 나타남이요,
위대하신 하느님과 구세주께서 영광스럽게 나타나실 것을 희망하게 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천사가 말한 대로, 우리의 구세주가 탄생하심입니다.
이토록 오늘 우리 안에 빛이 찾아들고, 영광된 은총이 스며들고, 구원자가 탄생하셨습니다.
이토록 빛나고 영광된, 그날이 바로 오늘입니다.
기쁜 성탄입니다!
바야흐로 하느님의 자비는 온 땅을 적시고,
하느님의 생명은 온 누리에 돋아나는 밤입니다.
오늘 밤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고, 진리가 땅에서 움터납니다.
정의가 아기 예수에게서 돋아나고, 진리가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셨습니다.
하늘에서는 영광이, 땅에서는 평화가 울려 퍼집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오니, 참으로 찬양하고 흠숭하올 기쁜 밤입니다.
이토록 넘치게 자비로운, 그 밤이 바로 지금입니다.
기쁜 성탄입니다!
오늘 우리는 죄와 어둠에서 벗어나 빛을 입었으니 일어나 빛을 비추어야 하고,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풀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질병과 죽음에서 일어나 생명을 받았으니, 생명을 꽃피워야 하고,
평화를 받았으니, 평화를 이루어야 할 일입니다.
바로 오늘, 하느님께서 내려오시니 우리도 따라 내려가야 할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비우시니 우리도 비워야 할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가난해지셨으니, 우리도 가난해져야 할 일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새 인간이 되어야 한다.
참 생명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이토록 눈부시게 아름다운, 낮아지고 비워짐이 아름다운 밤입니다.
오늘이 바로 그 밤입니다.
기쁜 성탄입니다!
바로 지금이 은총의 시간, 구원의 때입니다.
오늘 이처럼 우리 가운데 구세주 살아계시오니, 우리는 천사들과 함께 찬양합시다!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루카 2,11)
오늘밤, 우리의 아기! 구세주 나셨습니다.
왕방울의 소의 눈이 기쁨에 경악하고,
어린양의 떨리는 탄성에 잠들었던 만물이 깨어납니다.
포대에 싸여 있듯, 뭇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다가
눕지도 않은 채 십자가에 못 박혀 세워질 연약한 아기,
내가 휘두른 채찍에 온몸이 부서질, 그러면서도 생명을 주시고자 저를 부르신 이여!
당신을 품에 안게 하소.
안은 당신 가슴에 머리를 묻고 새로 나게 하소서!
“목마르다”라고 외치는 당신 음성을 듣게 하소서.
제 생명을 주신 임이여!
당신은 남북이 철조망으로 가로막힌 우리의 마음속
투박한 담벽이 세워진 이곳에 ‘평화의 왕’으로 오십니다.
여기, 다윗의 조그마한 고을 한반도, 가로막은 울타리를 걷어내고,
딱딱하게 굳어버린 우리의 아성을 부수소서!
오, 임마누엘, 저희와 함께 계신 아기 예수여! 아멘.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성탄을 함께 기뻐하며 주님께서 베푸시는 사랑과 평화가
온 세상과 여러분 안에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서로 인사하시겠습니다. 예수님의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축하의 인사를!
성탄을 정성껏 준비하신 모든 분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동안에 노력했던 정성과 수고와 땀에 대해서 하느님께서 넘치도록 갚아주시길 빕니다.
아울러 변함없는 사랑으로 세상에 예수님을 낳아드리고,
날마다 순간마다 거듭 태어나는 성탄의 삶이 이어지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당신의 외아들을 내어 주셨습니다(요한3,16).
성탄은 바로 우리를 위해 인간으로 오신 하느님의 사랑을 일깨우는 날입니다.
이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있도록 해주는 빛이십니다.
예수님의 성탄은 아낌없이 내어 주는 ‘사랑과 나눔’의 부르심이며 요청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메마른 곳에 사랑을 전하고, 위로가 필요한 곳에는 위로를 주며,
용기를 잃은 이에게는 격려를 해주는 성탄절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4,12) 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2독서를 보면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어,
우리를 불의에서 해방시키시고 또 깨끗이 하시어,
선행에 열성을 기울이는 당신 소유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바로 인간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 구원자 예수님께서는 어디서 태어나셨느냐? 복음을 보면,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였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방이 없었다’는 것에 관심을 둔다면 그분께 내어드릴 방이 없었던 것이지
방은 얼마든지 있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여전히 가난하고 비천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지만
이런 핑계, 저런 핑계로 외면할 때가 많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분이 구세주요, 나를 구원하실 왕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렇게 문전박대하였을까요?
결국, 우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의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그분의 생애를 말없이 일러주고 있습니다.
구유는 밥통입니다. 그 안에 들어있어야 하는 것은 밥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바로 밥으로 오셨습니다.
밥은 자기를 완전히 내어주어서 다른 이의 영양이 됩니다.
자기는 죽고 남을 살립니다. 그리고 우리는 밥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밥이 되셨고,
오늘도 미사 안에서 성체 성사를 통해서 그 밥을 끊임없이 주십니다.
공짜로 주십니다.
그러나 밥상이 차려져도 매일 그 밥을 먹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어느 성당에서 성탄 축제가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구성원 모두가 참여하는 데 마음을 썼습니다.
그런데 다솜이라는 학생은 선천적으로 말도 더듬고 생각도 민첩하지 못한 장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다솜이에게 용기를 주고 싶어서 어떤 역할을 줄까?
고민했습니다. 마침내 동작도 대사도 아주 적은 배역을 찾았습니다.
요셉과 예수님을 잉태하고 있는 마리아를 맞이하는 여관 주인의 역할이었습니다.
마리아와 그 일행이 여관 문을 두드리면 “방이 없어요!” 하고 한마디 말만 하면 끝나는 것이었습니다.
다솜이도 또박또박 발음 연습을 했습니다.
연극의 내용상 요셉과 마리아가 여관 주인과 몇 마디 더 주고받는 상황이기 때문에
“제 아내가 아이를 낳을 것 같애요, 어떻게 좀 봐 주세요?” 라고 하면
“방이 없어요!” 라고 같은 말을 3번 반복하기로 정했습니다.
마침내 고통스러워하는 마리아를 부축하며 요셉은 다급히 여관 문을 두드렸습니다.
드디어 주인이 나왔습니다. 다솜이는 연습한 대로 또박또박 말했습니다.
“방이 없어요!”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는 가지 않고 여관 주인에게 매달렸습니다.
“제 아내가 곧 아이를 낳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방을 줄 수 없나요?”
“방이 없어요!”
다솜이는 또박또박 맡은 배역을 잘해 나갔습니다.
이제 한 번만 더 하면 대 성공입니다. 요셉이 마지막으로 사정합니다.
“이렇게 사정하겠습니다. 이 추운데 어디로 가란 말입니까?
곧 아기가 나올 것 같습니다. 제발 저희에게 방을 좀 주십시오!”
이 말을 듣자 갑자기 다솜이의 눈에 눈물이 글썽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러면요, 제 방으로 오세요!”
정말 예상치 못한 말이었습니다.
“제 방으로 오세요!” 연극의 대사는 아니었지만,
다솜이의 그 순수한 마음은 도움을 청하는
그들의 간절한 원의를 외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단순한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가난하게 오신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양한 모습으로 지금도 오시고 계십니다.
따뜻한 가슴으로 모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실 구세주이심을 알았더라면 사람들은 서로 자기의 집을 내드리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혀 예기치 않은 모습으로 오셨으니 그를 문전박대했습니다.
세상에 방은 많았지만, 그분이 태어나실 방은 없었습니다.
그 방은 오늘도 여전히 없을 수 있습니다.
그분은 여전히 겸손과 낮아지심으로 마구간을 선택하시고
가난하고 고통을 받는 이들 안에 오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기대하고 생각하는 분으로, 그리고 내가 원하는 때에 오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주님은 오늘도 방을 내어드리지 못한 어두움, 우리의 이 어둠을 벗겨 주시러 오십니다.
그리고 빛으로 오신 주님은 우리의 어둠이 깊을수록 더 밝게 비추실 것입니다.
따라서 그분을 볼 수 있는 눈, 그분의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는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곧 그분이 태어나실 안락한 방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시길 희망합니다.
그러므로 귀한 아기 예수님께서 가장 낮고 천한 마구간 구유에 누우신 이유를
새롭게 일깨우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밥이 되어주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모든 이에게 모든 것,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어주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나도 누군가의 밥이 되어줍시다.
구세주 탄생의 기쁨을 함께하며 다시 한번 축하드리고
매일 매 순간 우리의 마음 안에 구세주 예수님을 모셔 드리고 또 낳아드리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기쁘다 구세주 오셨네, 만백성 맞아라!”
달라스 성당에 와서 첫 번째 맞이하는 성탄입니다.
오늘 ‘예수 성탄’으로 사행시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예: 예수님 사랑이 가득한 밤,
수: 수줍게 웃는 얼굴들 가득하네.
성: 성탄의 종소리가 마음을 울리고,
탄: 탄생의 기쁨이 온 세상을 채우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4년 겨울, 유럽의 참호 전선은 추위와 공포로 가득했습니다.
병사들은 끊임없는 전투로 지치고, 고향을 그리워하며 성탄절을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12월 24일 밤, 서부전선의 한 구역에서
독일 병사들이 조용히 크리스마스 캐럴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들은 영국 병사들이 화답하듯 자신의 언어로 같은 노래를 부르며,
참호 사이에 따뜻한 연대의 기운이 피어올랐습니다.
다음 날, 양측 병사들은 조심스럽게 참호에서 나와 서로를 향해 손을 흔들며 성탄을 축하했습니다.
그들은 서로 손을 맞잡고 담배, 초콜릿, 심지어 작은 선물을 교환했습니다.
그리고 들판에서 축구 경기를 하며 잠시나마 전쟁을 잊었습니다.
그날만큼은 총성이 멈추고, 적대감 대신 형제애가 넘쳤습니다.
오늘만큼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선에도 평화가 찾아오면 좋겠습니다.
오늘만큼은 평화도 도시 예루살렘에도 평화가 찾아오면 좋겠습니다.
오늘만큼은 대한민국의 정치에도 평화가 찾아오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온 인류를 위한 가장 기쁜 날입니다.
어두운 세상에 참된 빛이신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날,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를 깨닫습니다.
그분은 위엄 있는 왕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가장 낮은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와 함께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죄로 인해 어두웠던 세상에 빛이 들어왔습니다.
이 빛은 우리 각자가 하느님의 자녀로 사랑받고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이 빛은 또한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세상이 아무리 어렵고 혼란스럽더라도,
예수님의 탄생은 우리에게 새로운 시작과 구원을 약속합니다.
오늘은 예수님 성탄 대축일입니다.
예수님 탄생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여전히 가난하고, 굶주리고, 헐벗은 이들이 있는 곳으로 오십니다.
병들고, 지치고, 외로운 이들이 있는 곳에 예수님께서는 오십니다.
성모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가난한 이들에게 기쁨을 주는 모습으로,
굶주린 이들을 배를 불리시는 곳으로, 교만한 이들을 내치시고,
권세 있는 자들을 일깨우시는 곳으로 오십니다.
흠이 있고, 주름이 가득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 공동체에도 당신의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십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진정한 이유입니다.
화려한 궁전에서는 예수님의 탄생을 알지 못했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들은 자신들이 지닌 부와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하느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시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가난한 목동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 영광을 드렸고, 그 기쁨을 찬미했습니다.
멀리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별’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가짜별을 본 것이 아닙니다.
‘믿음, 사랑, 희망’이라는 진실의 별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탄생을 함께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성탄의 기쁨은 인생이 기쁨과 즐거움만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성탄의 기쁨은 가난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탄의 기쁨은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성탄의 기쁨은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슬픔과 고통이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슬픔과 고통 속에서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영광을 찾는 것입니다.
기쁨과 즐거움이 인생의 전부도 아닙니다.
그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은총과 하느님의 축복을 감사하게 여기는 마음이 참된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성탄의 기쁨은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습니다.
가난한 목동들, 주님의 탄생을 기뻐하기 위해서 먼 길을 왔던 동방박사들,
오늘 주어진 하루에 충실하며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사람들에게 성탄은 기쁨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삶이라면 우리 모두도 기뻐할 자격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기뻐합시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사람이 되신 말씀과 볼 수 있는 영광
조욱현 토마 신부
생명의 말씀이 인간이 되셨다. 잃어버린 생명을 다시 찾아주기 위함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은
바로 이분을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알아듣게 되었으며 참 주님으로 고백했다.
그분이야말로 생명을 가지신 분이며, 생명을 주시며,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으로 고백했다.
잠깐 밤 미사에서도 언급했지만, 부활 사건을 통해 그리스도의 모든 삶을 보기 시작했으며,
이 성탄도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그 참된 의미를 보기 때문에,
지금 탄생하신 그분은 힘없는 한 아기의 모습이 아니라,
진정 주님이시며, 세상을 구원하시는 구세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하느님이신 그 말씀이, 그 아들이
우리 인간의 모습을 취하셔서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오신 것도 바로 당신의 생명을 통해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어 당신의 생명에 함께 하려 하심이다.
우리를 당신과 같은 모습으로 만들어 주시기 위한 모습임을 알아야 한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그분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올바로 가져야 한다.
그분은 바로 나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며,
나를 구원해 주시는 그리스도 즉 하느님의 아들로서 받아들여야 한다.
큰 축일이기 때문에 참여하는 미사가 아니다.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며, 이제 우리가 말씀으로 변화되어 가야 한다.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리라 믿으셨던 마리아,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을 보고 믿은 목동들의 모습을 본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고, 다시 우리의 삶을 통해서 이 세상에 나타나시길 원하신다.
그래서 제1독서에서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 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저 발!”(이사 52,7)하는 말씀이 우리에게서 이루어지며,
그 말씀이 구체적으로 이 세상에 우리를 통해 계속해서 태어나시게 해야 한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가진 우리의 모습이 그분의 모습과 같이 될 때,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나타낼 수 있으며,
우리를 보는 이들이 그 안에 생명을 가진 자라고 볼 수 있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때가 다 되었을 때, 당신 외아들을 통하여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지금은 당신 아들의 모습을 닮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말씀하고 계시다.
그 말씀이 구체적으로 태어나게 하시는 사업을
즉 구원사업을 바로 우리 자신을 통해서 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이 말씀을 잉태하며, 낳아주기 위해서는
고통의 신비인 십자가의 신비를 체험하지 못하면 어렵다.
자신의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체험이
바로 말씀을 낳아주는 마리아의 모습, 그리스도의 모습이 될 것이다.
여기서 진정한 용기가 필요하다. 자신을 이겨보려는 끝없는 노력이다.
우리에게 오신 그리스도는 말씀하신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우리 가운데 계신 주님께 진정한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도우심을 청하자.
이 용기로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 되도록 그리하여 우리의 모든 삶이
이 성탄의 신비를 언제나 나타낼 수 있도록 기도하자.
레오 교황님의 말씀을 듣자.
“그리스도인들이여, 여러분의 품위를 인식하고,
이제 하느님의 본성을 함께 나누어 받게 된 자들로서
부패한 행실로 말미암아 이전의 비참한 상태로 돌아가지 않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이 어떤 머리와 어떤 몸의 지체인지 생각하고 어둠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나라와 광명으로 옮겨졌음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성세성사를 통하여 성령의 궁전이 되었습니다.
다시는 마귀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여러분의 더러운 행실로써
그 성전에 거하시는 고귀한 손님을 멀리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피의 비싼 값을 치르고 여러분의 몸을 사셨습니다.”
이 미사를 통하여 우리 자신을 다시 한번 봉헌하며,
진정으로 구원받은 자로 사는 삶을 살도록 우리의 결심을 봉헌하자.
주님께서 가장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제물은 번제물이 아니라 자선이라고 했다.
진정한 사랑의 삶이며, 사랑의 제물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감사의 생활이며, 말씀을 낳아주는 삶이며 성탄의 삶이다.
“여러분 가정에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우리에게
구세주로 오신 주님의 은총이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자기처럼 될 것을 믿지 않으면 구하러 내려가지 않는다.
전삼용 요셉 신부
성탄 축하드립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셔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분께서 내려오신 이유는 우리를 올려주시기 위함입니다.
어둠에 속한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요한 1,12-13)
그렇다면 어떤 이들이 그리스도를 맞아들이는 이들이겠습니까?
그분이 우리를 당신처럼 높여줄 분임을 믿고 받아들이는 이들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이 될 수 있음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하느님이 사람이 되심이 의미가 없어집니다.
루마니아의 14세 소년 크리스티안 마리안 베키아노(Christian Marian Vecchiano)의 이 이야기는
사랑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생생한 예를 보여줍니다.
아주 좁은 우물 파이프에 세 살 아기가 버려진 우물에 빠졌습니다.
구조대가 도착하였지만, 아기를 구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우물 입구가 30cm로 어른은 들어가 아기를 데리고 올라올 수 없는 상황입니다.
아기는 줄을 붙잡고 올라올 수도 없었습니다. 깊이가 15m나 되었기 때문입니다.
파이프를 깨면 아기 생명이 위험했습니다.
굴착기로 11시간 동안 팠지만, 15m 깊이까지 주위를 파며 내려가는 데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경찰들이 모여있는 이곳을 구경하러 온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크리스티안은 자신이 다리를 묶고 거꾸로 내려가 아기를 잡고 올라오겠다고 말합니다.
처음에 어른들은 말렸지만, 그 방법밖에는 도리가 없었습니다.
크리스티안은 그 어둡고 좁은 통로로 내려가 아기를 데리고 올라옵니다.
부모는 기뻤고 크리스티안도 행복했습니다.
크리스티안은 마을의 영웅이자 루마니아의 영웅이 되었고
현재 결혼하여 아기를 낳고 잘살고 있습니다.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던 크리스티안은
이 일로 국가의 보조와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내려오신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성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동등함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 2,6-8).
하느님께서 하늘에서 땅의 어둠으로 사람이 되어 내려오셨다면
분명 다시 올라갈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인간을 구하기 위해 오셨다면,
인간도 당신의 모습으로 회복시킬 수 있음을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둠은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요한 1,11-12)
그런데 누가 하느님 자녀가 되는 권한을 받아들일까요?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만큼 자신도 올라갈 수 있음을 믿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이 되고 하늘에 살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이것이 겸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어둠에만 갇혀있어야 하는 존재라면
하느님께서 왜 인간을 위해 이 어둠 속까지 내려와야 하셨을까요?
가톨릭 교리서(460항)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되셨으니, 이는 사람이 하느님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주위에서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이야기를 많이 봅니다.
또 난간에 걸린 아기를 목숨을 걸고 구한 영웅들도 많습니다.
이수연 씨는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어도 남의 나라 땅에서
선로에 쓰러진 취객을 도우려다 숨지고 말았습니다.
이들이 믿었던 것은 하나뿐입니다. ‘나도 살 수 있고, 저들도 나처럼 될 수 있다.’
또한 그렇게 구함으로써 자신이 사는 곳에 살 자격을 얻기도 합니다.
프랑스에서는 2018년에 한 불법 체류자가 5층 높이 난간에
매달려 있는 아기를 구하기 위해 벽을 타고 올라가 아기를 구했습니다.
대통령은 그를 프랑스에 살 자격이 있다고 하여 프랑스 시민으로 삼고 직장도 구해주었습니다.
우리도 낳을 수 있어야 살 자격도 얻습니다.
6살 워커라는 아이는 4살 자기 여동생을 구하기 위해
얼굴에 90바늘을 꿰매야 하는 상처를 입으면서도 끝까지 셰퍼드와 싸웠습니다.
이는 자신도 회복될 수 있고 여동생도 지켜낼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가족의 일원이 될 자격을 스스로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기가 아닙니다. 우리도 동의하여 예수님의 손을 잡아야 합니다.
이것을 ‘착한 뜻’이라고 합니다.
아기가 무엇보다 엄마의 손을 잡지 않으면 살 수 없음을 아는 것처럼,
우리도 창조자 하느님 구원의 손을 잡지 않으면 살 수 없음을
아는 사람만이 하느님 자녀가 되어 영원히 살게 됩니다.
“하늘 높은 데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착한 뜻이 있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주님은 오늘도 여전히 우리 가운데 늘 새롭게 탄생하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기쁨이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함께 하시길 빕니다.
이토록 은혜로운 밤, 누군가와 함께할 수 있다는 것, 참으로 큰 은총입니다.
저희 수도자들도 이토록 외진 시골에서, 저희끼리만 지내면, 세상 울적한 분위기일 텐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들, 가족 같은 동네 주민들,
먼 길 마다하지 않고 와주신 피정객들과 함께 하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이토록 어렵고 혼란스러운 가운데서도 또다시 아기 예수님의 성탄이 돌아왔습니다.
이번 성탄 아기 예수님께서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극심한 고통과 깊은 상처 그 사이로 분명히 탄생하시리라 굳게 믿습니다.
반드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며, 우리를 더 나은 길로 인도해 주시리라 확신합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임마누엘 하느님,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만사형통할 때도 함께 하시지만,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질 때도,
죽음의 골짜기를 걸어갈 때도 함께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오늘 우리의 처지가 아무리 비참하다 해도,
오늘 우리가 아무리 큰 죄 속에서 산다 할 지라도,
이런 우리를 어여삐 보시고,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 안에 새롭게 탄생하십니다.
크게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오늘, 이 대축제를 만끽해야 하겠습니다.
한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은 너무나 소중하고 엄숙한 순간이어서,
그에 걸맞는 예우를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해 유능한 의료진이나, 그도 아니라면
탈 없는 출산에 도움을 줄 분들의 보살핌 아래 태어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왕의 왕이요, 인류의 구세주가 되실 예수님의 탄생 여건은 해도 해도 너무했습니다.
출산에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아무런 경험이 없는 요셉 성인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소와 말들이 이게 뭐지 하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보고만 있었습니다.
지극일 호의적이지 않은 출산 환경이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너무나 독특하고 이해되지 않는 육화강생의 방식이
오늘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대체 무엇일까 고민해 봅니다.
제가 자주 타고 다니는 모닝 승용차가 27만 킬로를 육박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아무런 문제 없이 잘 달리고 있는데, 꼭 저를 보는 것 같습니다.
저도 수도 생활 40년째로 폐차장 가기 직전 중고차인데도,
하느님께서 은총을 베푸셔서 아직 잘 달리고 있습니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면 참으로 우울하고 서글프기 마련입니다.
여기저기 시름시름 아프고, 고장나고, 매일 이 병원 저 병원 전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기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우리네 삶 한가운데도
탄생하시고 길이 머물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연세 들었다고 우울해할 일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오늘도 여전히 우리 가운데 늘 새롭게 탄생하시며,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보여주십니다.
지금 큰 고통 속에 계신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십자가에 허덕이고 계신 분들도 계십니다.
어디 가서 하소연할 곳 없어 답답한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 분들도 꼭 기억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여러분들의 힘겨운 일상 그 한 가운데 매일 탄생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십니다.
여러분들이 흘리고 있는 눈물과 쓰라린 상처 그 사이에 굳건히 현존하십니다.
그러니 고통 속에서도 기쁘게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겠습니다.
고통이 다가올 때면 즉시 탄생하신 구세주의 이름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탄생하신 분의 이름은 예수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분이란 의미입니다.
또 다른 하나의 이름 임마누엘,
이제 와 항상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실 주님이란 의미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