銀을 주조할 수도 있고, 玉을 캘 수도 있다. 이런 사업은 君子가 하찮게 여기는 것이지만, 그중에서 마땅히 취할 것은 취해 백성들의 목숨을 구제하는 일 또한 聖人의 權道다.
토정 이지함.
아주 오래전에 필자는 필자의 아버지로부터 부귀(富貴)의 비법을 들었던 적이 있다.
가장 귀(貴)하게 되는 길은 미관말직(微官末職) 하나 맡지 않는 것이고, 가장 부자가 되는 길은 재산을 하나도 소유하지 않는 것이 그 방법이었다.
당시에 필자는 그 말이 참 멋있다고 생각을 했다. 흥미로워하는 필자에게 아버지는 한마디 덧붙여 주었다. 그 말을 한 사람이 바로 토정 이지함(土亭 李之?·1517~1578년)이라고. 아버지의 첨언에 토정 역시 참으로 멋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세월이 흘러 율곡(栗谷)을 공부하던 필자는 토정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율곡의 일기에는 토정이 꽤나 여러 번 등장한다. 그 내용들 가운데 필자의 기억 속에 가장 강하게 자리를 잡은 것은 토정이 아산현감에 부임할 당시의 일화였다. 당시 아산 주민들의 가장 큰 고통거리는 아산에 있는 큰 양어장(養魚場)에서 물고기를 잡아 바쳐야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정을 전해 들은 토정은 부임과 동시에 그 양어장을 메워 버렸다는 내용이다.
율곡의 이 기록을 읽고서 오래전 아버지와의 대화 내용이 다시 떠올랐고, <키워드로 풀어보는 조선의 선비정신>에서 다루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문제는 ‘키워드’였다.
연재를 시작하면서 필자가 ‘키워드’로 정한 글자는 인·의·예·지·신·성·경·중·화·충·효·심(仁·義·禮·智·信·誠·敬·中·和·忠·孝·心) 등 12개였다. 이 가운데서 토정과 잘 어울리는 글자를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토정을 그만둘까도 했지만, ‘미리 정한 글자들에 매여 있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미리 정하고 가는 길은 무리가 따르기 마련이다. ‘우리네 인생사가 어디 미리 정해 놓은 각본대로 살아지는가’해서 필자는 토정에게 맞는 글자는 다시 생각하기로 하고 일단 먼저 토정의 길을 찾아가 본다. 이 점에서 독자들의 양해를 구한다.
천문·지리·의약·관상 등에 밝아
토정 이지함은 고려 말의 대학자인 목은 이색(牧隱 李穡·1328~1396년)의 6세손(世孫)이다. 토정은 어려서 부친을 잃고 그의 형 이지번(李之蕃·?~1575년.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의 부친)의 보살핌 속에서 성장하였다. 처음에는 학문에 뜻을 두지 않았으나 형의 권고에 따라 발분(發憤)하여 침식(寢食)을 잊는 열성을 보였다. 화담 서경덕(花潭 徐敬德·1489~1546년)에게 잠시 배웠을 뿐 일정한 스승은 없었으나 천문·지리·의약(醫藥)·복서(卜筮)·율려(律呂)·산수(算數)로부터 지음(知音)·관상(觀相)·약방문(藥方文)에 이르기까지 통하지 않음이 없었고, 특히 그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은 추종을 불허하는 경지였다고 한다. 흔히 《토정비결》의 저자로 잘못 알려진 것은 이러한 그의 특이한 이력에 기인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뛰어난 자질을 가진 토정이 관료의 뜻을 접은 이유는 젊었을 때 친구인 안명세(安名世·1518~1548년)의 억울한 죽음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안명세는 촉망받던 사관(史官)이었는데, 을사사화(乙巳士禍)의 진상을 직필해서 시정기(時政記)에 넣어 둔 것이 누설되어 처형되었다. 토정은 경애하던 친구의 원통한 죽음을 겪은 이후 명리(名利)를 초월한 삶을 살고자 하였다.(김용덕. 《토정집》 해제)
이 글에서 필자는 토정의 기행(奇行)을 논하지 않을 것이다. 항간(巷間)에 알려진 대로 토정의 다양한 기행이 매력을 가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러한 재미있는 내용보다 필자가 토정에게 느낀 강력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우선이다. 필자를 사로잡은 토정의 가장 큰 가치는 목민관(牧民官)으로서의 백성에 대한 뜨거운 연민(憐憫)이었다. 무엇보다도 의미 있는 것은 토정이 백성에 대한 연민을 소심하게 가슴속에 숨기고만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복지국가(福祉國家)를 말하고 서민대책(庶民對策)을 논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그 안에서 서민을 찾아 내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이제 토정과 함께 이 땅의 서민(庶民), 그중에서도 가장 힘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가장 힘없고 불쌍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토정을 통해 만나 보자.
토정은 만년(晩年)에 탁행지사(卓行之士)로 특채되어 포천현감과 아산현감을 지낸다. 1573년 57세라는 늦은 나이에 현감으로 부임한 포천 땅에서 토정이 목격한 것은 ‘굶어 죽어 가는’ 주민이었다.
토정은 자신이 만난 어느 불쌍한 아낙네를 선조에게 소개한다. 마흔 살쯤 되어 보이는 아낙이 토정에게 들려준 사연은 다음과 같다.
곤궁한 백성의 삶을 직시
토정 이지함의 위패를 모신 충남 보령 화암서원.
“집에 척박한 땅이 조금 있는데, 지난해 농사가 잘못되어 끼닛거리가 떨어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남편의 굶주린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서 들판의 푸성귀를 뜯어다 삶아 주었는데, 남편은 억지로 두어 젓갈을 씹어 넘기다가 울면서 말하기를 ‘도저히 목구멍으로 넘길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남편은 결국 열흘 만에 죽고 말았습니다.”
여기까지 말하고는 흐느끼느라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던 그 여인은 한참 동안 숨을 안정시키고 말을 이어 갔다.
“제 기혈(氣血)이 말라 버려 세 살 된 아이가 목이 말라 부르짖지만 젖을 먹이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는데, 단옷날 밤중에 어린아이의 수족(手足)이 겨울철에 추위로 괴로워하는 것처럼 떨고 있었습니다.
저는 놀라서 일어나 손을 아이의 입에 대 보니 숨이 끊겨 있었습니다. 곳간으로 뛰어가 쌀독 밑바닥을 쓸었고, 요행히 쌀 몇 알을 주워서 급히 씹어 물에 타서 입에 넣어 주었더니 조금 뒤에 호흡이 통하였으나 앞으로 며칠이나 더 버틸 수 있을는지….”
여인은 더 이상 말을 이어 나가지를 못했다. 토정은 이 여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없이 울고 또 울었다. 하지만 이러한 애달픈 사연은 그 여인뿐만 아니라 흉년(凶年)이 들면 온 고을 사람들이 겪는 것이었다. 여기서 필자는 더 이상 글을 쓰기가 어려워진다. 이상의 내용 외에 아무 것도 덧붙이고 싶지 않다. 이 이야기를 반복해서 읽고 또 읽으며 가슴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뜨거운 느낌을 독자와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얼마나 생생한가. 백성의 삶을 돌보아 주는 사람, 즉 고을의 책임자를 우리는 ‘목민관(牧民官)’이라 부르지 않았던가. 목민관은 무엇보다도 먼저 백성들의 실제 삶을 주목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필자를 감동시킨 것은 이러한 내용을 조금도 가감(加減) 없이 임금에게 보고했다는 점이다. 참으로 훌륭하지 않은가.
사람이 굶어 죽어 가는데 무슨 이론(理論)이 필요하고 무슨 주의(主義)가 필요한가. 사람을 살려 내는 것보다 더 급하게 고려할 귀중한 가치관이 있을 수 있는가.
토정은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세 가지를 제시했다. 먼저 제왕(帝王)의 창고는 세 가지가 있음을 전제하고, 도덕(道德)을 간직하는 창고인 인심(人心)을 바르게 하는 것이 상책(上策)이고, 인재를 뽑는 창고인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의 관리를 적절히 하는 것이 중책(中策)이며, 백 가지 사물을 간직한 창고인 육지와 해양을 적극적으로 개발하는 것을 하책(下策)으로 정의했다.
광·어업 통한 빈민구제 대책 제시
그러나 토정이 중점을 둔 것은 하책이었다. 여기서 토정의 탁월함이 보인다. 상책과 중책은 원론적(原論的)이다. 다시 말하면 실제의 일보다는 이론과 원칙에 가까운 내용들이다. 하지만 하책은 구체성이 있기 때문에 실질적인 효력을 가져올 수 있다. 그러나 관료들은 흔히 그 근본적이고 원칙적인 일에 초점을 두는 경향이 강하다. 실효보다는 명분론(名分論)에 가치를 부여하고자 한다. 그 결과 실질적인 효과를 가져오기보다는 단지 다양한 제목들만 나열하는 모습을 보일 뿐이다.
토정은 상책과 중책은 기대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입장에서 더 이상 논의할 사안이 아니었기에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하책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그것은 적극적인 자원의 개발과 연결된다. 당시 포천현은 농업 중심의 경제정책으로는 자립할 수 없는 제도적·환경적 조건이었다. 중앙정부는 중앙의 구휼미를 푼다든지 넉넉한 다른 고을의 곡식을 꾸도록 하는 정책을 실시하였지만 이런 정책은 토정이 보기에는 말 그대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토정은 우선 제도적 측면에서 국가의 각종 규제를 풀어 줄 것을 건의했다. 산의 은(銀)과 옥(玉)도 백성들의 재물이 될 수 있고,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물 또한 부족한 식량을 대신할 방도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가 제시한 바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은을 채굴하도록 허락해 달라. 하지만 은 채굴의 성공 확률을 사실 장담할 수 없었다. 게다가 성공했다고 해도 일확천금(一攫千金)의 노림수에 마음이 흔들리기가 쉽다. 토정은 일의 진행과정을 낱낱이 보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은 채굴 과정을 세세하게 보고할 것을 약속했다.
둘째, 전라도 만경현의 양초도(洋草島)라는 주인 없는 무인도(無人島)를 어업기지로 삼게 해 달라. 물고기를 잡아서 양식과 바꾸겠다.
셋째, 역시 주인 없는 무인도인 황해도 풍천부 초도(椒島)를 염전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해 달라. 소금을 구워 양식과 바꾸겠다.
넷째, 이러한 사업을 통해 포천현이 자립(自立)을 이루어 내면 포천현이 가졌던 모든 이권(利權)을 다른 고을로 넘기겠다.(황광옥. 《한 권으로 읽는 한국철학》)
오늘날의 관점에서 봐도 손색없는 훌륭한 제안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토정의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토정은 포천현감직을 그만두기에 이른다.
악법 때문에 장가 못간 백성
충남 보령에 있는 토정 이지함의 묘소.
천현감을 그만둔 지 4년이 지난 1578년 62세의 토정은 아산현감으로 부임하였다. 아산에 도착해서 양어장을 메운 사실은 앞에서 이미 언급한 사안이다. 포천에서 ‘굶어 죽어 가던’ 가족을 목격했던 토정이 아산에서 목격한 것은 ‘원통한 백성’이었다. 토정은 아산에서 만난 원통한 사연의 주인공, 김백남(金百南)이란 자를 실명(實名)으로 선조에게 소개한다.
김백남은 당시 나이가 환갑이었는데도 결혼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족(士族)이었던 그가 그 나이가 되도록 장가를 가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토정은 그 까닭을 직접 챙겨 보았다.
토정에게 들려준 김백남의 사연을 생생하게 적어 본다.
“우리 고을에는 인력이 부족하여 선비의 후예로 하인이나 잡급직(雜給職)에 종사하는 자가 많고, 그들이 혹 다른 고을로 이사하면 일족(一族=일가붙이)이 침해를 당하곤 합니다. 사람들은 그 화를 피하되 함정을 피하듯이 하는데, 김백남은 진즉에 군적부(軍籍簿)에 이름이 올라 있었던 탓에, 딸을 둔 집에서는 인척으로 연루될까 싶어 사위로 삼지 않았기에 여태껏 장가를 들지 못했던 것입니다.
김백남은 형제들 중에서도 건실한 자여서, 그의 누이인 김씨는 나이가 오십이 되도록 시집을 못 가고, 형인 김견 역시 오십칠 세가 되도록 장가를 못 든 채 죄다 김백남에게 더부살이로 얹혀살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가장 불쌍하게 인식되었던 대상은 흔히 환과고독(鰥寡孤獨)으로 불리는 사람들이었다. 환과고독이란 홀아비, 과부, 어리고 부모 없는 사람, 늙어서 자식이 없는 사람들로 외롭고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을 말한다. 당연히 국가에서 가장 먼저 관심을 가져 주어야 할 대상이다.
그런데 김백남은 홀아비가 아니라 장가도 못 가 본, 실로 ‘하늘 아래 다시없는 딱한 백성’이었다.
홀아비도 되어 보지 못하고 다 늙도록 노총각으로 남아 있는 수많은 ‘김백남’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임금이라면 역사상 가장 포악한 임금으로 남아 있는 걸·주(桀·紂)보다 나은 점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걸·주와 같은 타락된 생활은 하지 않았더라도 백성들의 삶이 걸·주가 다스리던 상황보다도 더 심각했다면, 임금이 자신은 걸·주처럼 사치와 향락을 일삼지 않았다는 자기변명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매뉴얼 사회의 한계
토정은 선조에게 제2, 제3의 김백남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일족에게 연대책임을 지우는 악법(惡法)을 폐지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과 함께 토정은 자신의 이 주장에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반대를 한다고 해도 선조가 조정의 신하들을 따르지 말 것을 요청하였다. 아무리 토정이라 해도 모든 관료들이 반대해도 따르지 말라는 주장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토정은 무슨 자신감으로 모든 관료들이 반대해도 자신의 주장이 채택되어야 한다고 임금에게 역설(力說)한 것일까? 여기서 토정은 자신의 주장은 바로 의문의 여지가 없는, 다시 말하면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내용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신료(臣僚)들은 토정에 의하면 의문의 여지가 없는 문제들을 따지고 있었다. 분명한 사실에 왜 신하들의 말을 들어야 하는가. 낭비다 그리고 핑계이다. 그것은 하지 않겠다는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의문의 여지가 없는 사안들을 거론하는 사람들은 매뉴얼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다. 굶어 죽어 가는데 우선 있는 것 활용해 급한 불을 끄는 것 외에 무슨 공식이 필요한가. 하지만 사람들을 이것저것 재고 따지고 있다. 매뉴얼을 찾고 있는 것이다. 물론 정상적인 경우엔 매뉴얼이 필요하다. 지켜져야 한다. 하지만 공식대로 해서는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매뉴얼이 가능한 것은 사람이 사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에는 문제가 없는 평상시에 한해서다.
이미 매뉴얼 사회의 대처 방식은 문제가 많다는 지적들이 나오고 있다. 지금 일본은 쓰나미로 큰 고통을 겪고 있다. 그런데 쓰나미가 아니라 그 대처 방식이 더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지진 때문에 도로가 끊기고, 차량을 움직일 연료가 모자라 구호 물자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것이다. 도로가 문제라면 구호품을 실은 대형 선박을 피해 지역으로 급파한 후 헬기로 투하하면 되는데도, 일본의 관료들은 매뉴얼에 헬기를 이용한 구호품 전달은 없다는 이유로 구호품을 전달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결국 대지진과 같은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매뉴얼만 붙들고 있는 것은 무책임한 보신주의(補身主義)다.
토정의 權道
여기서 필자는 권도(權道)라는 단어를 생각해 본다. ‘권도’란 ‘상도(常道)와 대비되는 단어로 상황에 맞게 행동하는 것’을 뜻한다. 상(喪) 중의 임금이 너무나 슬픈 나머지 건강에 적신호(赤信號)가 켜졌다면 비록 상중이라 할지라도 죽이 아닌 고깃국을 먹을 수도 있다는 것이 권도의 하나의 사례이다.
필자는 이것에서 도움을 받아 토정과 짝을 이룰 만한 ‘키워드’를 찾아냈다. 바로 ‘권(權)’이다. 토정이 선조에게 말한 권도의 내용을 살펴보자.
“육지와 바다는 온갖 재물을 간수해 둔 곳간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실물이 눈에 훤히 보이는 것으로, 이 자원을 이용하지 않고 나라를 다스린 경우는 역사상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 자원의 창고를 활용한다면 백성들에게 돌아가는 이익과 혜택은 한이 없습니다. 농사짓는 일과 나무 심는 일은 백성들이 살아가는 바탕 그것입니다. 은을 주조할 수도 있고, 옥을 캘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업은 모두 사리사욕(私利私慾)을 꾀하게 하여 이익을 즐기고 재물을 탐하고 인색하게 만드는 일이므로, 소인배(小人輩)들이 좋아하고 군자(君子)는 하찮게 여기는 것이지만, 그중에서 마땅히 취할 것은 취해 백성들의 목숨을 구제하는 일 또한 성인(聖人)의 권도이니, 이야말로 하책이라 하겠습니다.”
평상시가 아닌 위기 시에는 하찮게 여기는 일이라도 기꺼이 해야 하는 것이 바로 성인의 권도인 것이다. 권도를 잘 이해하는 사람들은 매뉴얼에 얽매일 위험이 없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토정의 가슴속에는 백성들에 대한 연민이 가득했다. 백성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한 사람에게 매뉴얼은 사치다.
지난 겨울 지하철역에서 노숙자가 동사(凍死)했는데, 행인 중 어느 누구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뉴스 보도를 본 적이 있다. 오늘도 서울역을 비롯한 많은 곳에 있는 수많은 노숙자들을 보면서 우리들의 가슴속에는 과연 연민을 느낄 여지가 얼마나 남아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에 앞서 정치의 세계에 있어 연민이란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벤담과 토정
여기서 문득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공리주의(功利主義)를 주장한 것으로 잘 알려진 벤담(J. Bentham. 1748~ 1832)이다. 벤담은 걸인수용소를 설치할 것을 제안했었다.
거리에서 걸인들을 만나면 내가 느끼는 행복이 줄어들기에 이들을 한 곳으로 모아 거리에서 안 보이게 하자는 것이 그 취지였다.(마이클 센델. 《정의란 무엇인가》)
결국 벤담의 주장에는 자신의 행복을 위한다는 생각이 그 출발점이다. 하지만 토정은 아니었다. 토정의 정치는 그 걸인을 위하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
벤담은 반박할 것이다. 남을 위한다는 것 역시 가만히 따져 보면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것에서 나온 것이라고. 자신의 정신적인 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냐고. 하지만 토정은 반박할 것이다. 사람이 죽어 가는데 그러한 계산을 할 겨를이 어디에 있는가. 공리주의 자체가 계산이다. 그런데 그러한 계산을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아니 계산 이전에 본능적으로 반응해야 하는 것이 필요한 영역이 있다.
토정은 사람의 심성이 선(善)한가 악(惡)한가 등을 논하지 않았다. 임금에게 그 고을 사람들의 삶 자체를 직접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조정에서 권력을 탐하는 행위는 어린아이 장난에 불과하다.
하지만 민생(民生)을 외면하는 삶은 하늘에 죄를 짓는 것이다. 벤담은 자신을 위해 걸인들에게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토정은 그 걸인을 위해 그들에게 관심을 보였다. 걸인을 진정으로 위하는 길은 그들과 함께 삶을 사는 길일 것이다.
그래서 토정은 아산 관아에 걸인청(乞人廳)을 세우고 고을의 걸인들을 모아 생활하게 하였다. 하지만 아산현감 토정 이지함은 걸인들의 허기만 채워 준 것이 아니었다. 최소한 짚신이라도 만들어서 자립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고자 노력했다.
시대가 변했는데 무슨 옛날이야기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 곁에 불쌍한 이웃이 있고, 원통한 이웃이 남아 있는 한 토정의 이야기는 옛날이야기로 남아 있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
大人說
이제 서두에서 언급한 부귀에 대한 토정의 견해로 돌아가 이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오래전에 아버지께서 말씀해 주셨던 부귀에 대한 토정의 이야기는 《토정집》 가운데 <대인설>(大人說)이란 제목의 글에 나와 있었다. 토정은 말한다.
‘존귀함은 벼슬을 하지 않는 것보다 더 존귀한 것이 없고(貴莫貴於不爵),
부유함은 탐욕을 부리지 않는 것보다 더 부유한 것이 없으며(富莫富於不欲),
강함은 다투지 않는 것보다 더 강한 것이 없고(强莫强於不爭),
슬기로움은 알지 않는 것보다 더 슬기로운 것은 없다(靈莫靈於不知).’
토정은 물질과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을 ‘대인(大人)’이라 칭했다. 그런데 우리네 삶에서 이것이 과연 가능할까. 만약에 불가능한 것이라면 토정은 세상을 비웃으며 홀로 말장난을 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많지 않은 분량의 《토정집》을 읽다 보면 토정의 물질과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는 일반인이 아닌 지도자에게 하는 말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토정은 선조에게 말한다.
“도덕의 창고를 열면 자신이 비록 가난하고자 할지라도 마침내 부(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역사 이래 태평성대를 이룬 요순(堯舜)이 살았던 집은 초가였고, 입은 옷은 청올치[葛怖] 옷(=천한 사람이 입는 옷)이었으며, 먹은 음식은 머위 국이요, 사용했던 그릇은 질그릇이었습니다.
그러니 요순은 마땅히 지극히 가난한 필부(匹夫)와 같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내 몸을 윤택하게 하고 남은 광채가 천하에 덮고 상하에 미쳐서 수(壽)를 얻고 녹(祿)을 얻고 자손이 보존되어 백성들을 이제에 이르기까지 요순을 존경하고 친애(親愛)하지 않는 자가 없으니 부(富)의 지극함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崔鎭弘 ⊙ 1963년생. ⊙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서울대 정치학 박사. ⊙ 현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 ⊙ 저서 : 《법과 소통의 정치》.
銀을 주조할 수도 있고, 玉을 캘 수도 있다. 이런 사업은 君子가 하찮게 여기는 것이지만, 그중에서 마땅히 취할 것은 취해 백성들의 목숨을 구제하는 일 또한 聖人의 權道다.
토정 이지함.
아주 오래전에 필자는 필자의 아버지로부터 부귀(富貴)의 비법을 들었던 적이 있다.
가장 귀(貴)하게 되는 길은 미관말직(微官末職) 하나 맡지 않는 것이고, 가장 부자가 되는 길은 재산을 하나도 소유하지 않는 것이 그 방법이었다.
당시에 필자는 그 말이 참 멋있다고 생각을 했다. 흥미로워하는 필자에게 아버지는 한마디 덧붙여 주었다. 그 말을 한 사람이 바로 토정 이지함(土亭 李之?·1517~1578년)이라고. 아버지의 첨언에 토정 역시 참으로 멋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세월이 흘러 율곡(栗谷)을 공부하던 필자는 토정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율곡의 일기에는 토정이 꽤나 여러 번 등장한다. 그 내용들 가운데 필자의 기억 속에 가장 강하게 자리를 잡은 것은 토정이 아산현감에 부임할 당시의 일화였다. 당시 아산 주민들의 가장 큰 고통거리는 아산에 있는 큰 양어장(養魚場)에서 물고기를 잡아 바쳐야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정을 전해 들은 토정은 부임과 동시에 그 양어장을 메워 버렸다는 내용이다.
율곡의 이 기록을 읽고서 오래전 아버지와의 대화 내용이 다시 떠올랐고, <키워드로 풀어보는 조선의 선비정신>에서 다루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문제는 ‘키워드’였다.
연재를 시작하면서 필자가 ‘키워드’로 정한 글자는 인·의·예·지·신·성·경·중·화·충·효·심(仁·義·禮·智·信·誠·敬·中·和·忠·孝·心) 등 12개였다. 이 가운데서 토정과 잘 어울리는 글자를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토정을 그만둘까도 했지만, ‘미리 정한 글자들에 매여 있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미리 정하고 가는 길은 무리가 따르기 마련이다. ‘우리네 인생사가 어디 미리 정해 놓은 각본대로 살아지는가’해서 필자는 토정에게 맞는 글자는 다시 생각하기로 하고 일단 먼저 토정의 길을 찾아가 본다. 이 점에서 독자들의 양해를 구한다.
천문·지리·의약·관상 등에 밝아
토정 이지함은 고려 말의 대학자인 목은 이색(牧隱 李穡·1328~1396년)의 6세손(世孫)이다. 토정은 어려서 부친을 잃고 그의 형 이지번(李之蕃·?~1575년.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의 부친)의 보살핌 속에서 성장하였다. 처음에는 학문에 뜻을 두지 않았으나 형의 권고에 따라 발분(發憤)하여 침식(寢食)을 잊는 열성을 보였다. 화담 서경덕(花潭 徐敬德·1489~1546년)에게 잠시 배웠을 뿐 일정한 스승은 없었으나 천문·지리·의약(醫藥)·복서(卜筮)·율려(律呂)·산수(算數)로부터 지음(知音)·관상(觀相)·약방문(藥方文)에 이르기까지 통하지 않음이 없었고, 특히 그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은 추종을 불허하는 경지였다고 한다. 흔히 《토정비결》의 저자로 잘못 알려진 것은 이러한 그의 특이한 이력에 기인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뛰어난 자질을 가진 토정이 관료의 뜻을 접은 이유는 젊었을 때 친구인 안명세(安名世·1518~1548년)의 억울한 죽음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안명세는 촉망받던 사관(史官)이었는데, 을사사화(乙巳士禍)의 진상을 직필해서 시정기(時政記)에 넣어 둔 것이 누설되어 처형되었다. 토정은 경애하던 친구의 원통한 죽음을 겪은 이후 명리(名利)를 초월한 삶을 살고자 하였다.(김용덕. 《토정집》 해제)
이 글에서 필자는 토정의 기행(奇行)을 논하지 않을 것이다. 항간(巷間)에 알려진 대로 토정의 다양한 기행이 매력을 가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러한 재미있는 내용보다 필자가 토정에게 느낀 강력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우선이다. 필자를 사로잡은 토정의 가장 큰 가치는 목민관(牧民官)으로서의 백성에 대한 뜨거운 연민(憐憫)이었다. 무엇보다도 의미 있는 것은 토정이 백성에 대한 연민을 소심하게 가슴속에 숨기고만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복지국가(福祉國家)를 말하고 서민대책(庶民對策)을 논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그 안에서 서민을 찾아 내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이제 토정과 함께 이 땅의 서민(庶民), 그중에서도 가장 힘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가장 힘없고 불쌍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토정을 통해 만나 보자.
토정은 만년(晩年)에 탁행지사(卓行之士)로 특채되어 포천현감과 아산현감을 지낸다. 1573년 57세라는 늦은 나이에 현감으로 부임한 포천 땅에서 토정이 목격한 것은 ‘굶어 죽어 가는’ 주민이었다.
토정은 자신이 만난 어느 불쌍한 아낙네를 선조에게 소개한다. 마흔 살쯤 되어 보이는 아낙이 토정에게 들려준 사연은 다음과 같다.
곤궁한 백성의 삶을 직시
토정 이지함의 위패를 모신 충남 보령 화암서원.
“집에 척박한 땅이 조금 있는데, 지난해 농사가 잘못되어 끼닛거리가 떨어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남편의 굶주린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서 들판의 푸성귀를 뜯어다 삶아 주었는데, 남편은 억지로 두어 젓갈을 씹어 넘기다가 울면서 말하기를 ‘도저히 목구멍으로 넘길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남편은 결국 열흘 만에 죽고 말았습니다.”
여기까지 말하고는 흐느끼느라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던 그 여인은 한참 동안 숨을 안정시키고 말을 이어 갔다.
“제 기혈(氣血)이 말라 버려 세 살 된 아이가 목이 말라 부르짖지만 젖을 먹이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는데, 단옷날 밤중에 어린아이의 수족(手足)이 겨울철에 추위로 괴로워하는 것처럼 떨고 있었습니다.
저는 놀라서 일어나 손을 아이의 입에 대 보니 숨이 끊겨 있었습니다. 곳간으로 뛰어가 쌀독 밑바닥을 쓸었고, 요행히 쌀 몇 알을 주워서 급히 씹어 물에 타서 입에 넣어 주었더니 조금 뒤에 호흡이 통하였으나 앞으로 며칠이나 더 버틸 수 있을는지….”
여인은 더 이상 말을 이어 나가지를 못했다. 토정은 이 여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없이 울고 또 울었다. 하지만 이러한 애달픈 사연은 그 여인뿐만 아니라 흉년(凶年)이 들면 온 고을 사람들이 겪는 것이었다. 여기서 필자는 더 이상 글을 쓰기가 어려워진다. 이상의 내용 외에 아무 것도 덧붙이고 싶지 않다. 이 이야기를 반복해서 읽고 또 읽으며 가슴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뜨거운 느낌을 독자와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얼마나 생생한가. 백성의 삶을 돌보아 주는 사람, 즉 고을의 책임자를 우리는 ‘목민관(牧民官)’이라 부르지 않았던가. 목민관은 무엇보다도 먼저 백성들의 실제 삶을 주목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필자를 감동시킨 것은 이러한 내용을 조금도 가감(加減) 없이 임금에게 보고했다는 점이다. 참으로 훌륭하지 않은가.
사람이 굶어 죽어 가는데 무슨 이론(理論)이 필요하고 무슨 주의(主義)가 필요한가. 사람을 살려 내는 것보다 더 급하게 고려할 귀중한 가치관이 있을 수 있는가.
토정은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세 가지를 제시했다. 먼저 제왕(帝王)의 창고는 세 가지가 있음을 전제하고, 도덕(道德)을 간직하는 창고인 인심(人心)을 바르게 하는 것이 상책(上策)이고, 인재를 뽑는 창고인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의 관리를 적절히 하는 것이 중책(中策)이며, 백 가지 사물을 간직한 창고인 육지와 해양을 적극적으로 개발하는 것을 하책(下策)으로 정의했다.
광·어업 통한 빈민구제 대책 제시
그러나 토정이 중점을 둔 것은 하책이었다. 여기서 토정의 탁월함이 보인다. 상책과 중책은 원론적(原論的)이다. 다시 말하면 실제의 일보다는 이론과 원칙에 가까운 내용들이다. 하지만 하책은 구체성이 있기 때문에 실질적인 효력을 가져올 수 있다. 그러나 관료들은 흔히 그 근본적이고 원칙적인 일에 초점을 두는 경향이 강하다. 실효보다는 명분론(名分論)에 가치를 부여하고자 한다. 그 결과 실질적인 효과를 가져오기보다는 단지 다양한 제목들만 나열하는 모습을 보일 뿐이다.
토정은 상책과 중책은 기대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입장에서 더 이상 논의할 사안이 아니었기에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하책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그것은 적극적인 자원의 개발과 연결된다. 당시 포천현은 농업 중심의 경제정책으로는 자립할 수 없는 제도적·환경적 조건이었다. 중앙정부는 중앙의 구휼미를 푼다든지 넉넉한 다른 고을의 곡식을 꾸도록 하는 정책을 실시하였지만 이런 정책은 토정이 보기에는 말 그대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토정은 우선 제도적 측면에서 국가의 각종 규제를 풀어 줄 것을 건의했다. 산의 은(銀)과 옥(玉)도 백성들의 재물이 될 수 있고,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물 또한 부족한 식량을 대신할 방도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가 제시한 바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은을 채굴하도록 허락해 달라. 하지만 은 채굴의 성공 확률을 사실 장담할 수 없었다. 게다가 성공했다고 해도 일확천금(一攫千金)의 노림수에 마음이 흔들리기가 쉽다. 토정은 일의 진행과정을 낱낱이 보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은 채굴 과정을 세세하게 보고할 것을 약속했다.
둘째, 전라도 만경현의 양초도(洋草島)라는 주인 없는 무인도(無人島)를 어업기지로 삼게 해 달라. 물고기를 잡아서 양식과 바꾸겠다.
셋째, 역시 주인 없는 무인도인 황해도 풍천부 초도(椒島)를 염전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해 달라. 소금을 구워 양식과 바꾸겠다.
넷째, 이러한 사업을 통해 포천현이 자립(自立)을 이루어 내면 포천현이 가졌던 모든 이권(利權)을 다른 고을로 넘기겠다.(황광옥. 《한 권으로 읽는 한국철학》)
오늘날의 관점에서 봐도 손색없는 훌륭한 제안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토정의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토정은 포천현감직을 그만두기에 이른다.
악법 때문에 장가 못간 백성
충남 보령에 있는 토정 이지함의 묘소.
천현감을 그만둔 지 4년이 지난 1578년 62세의 토정은 아산현감으로 부임하였다. 아산에 도착해서 양어장을 메운 사실은 앞에서 이미 언급한 사안이다. 포천에서 ‘굶어 죽어 가던’ 가족을 목격했던 토정이 아산에서 목격한 것은 ‘원통한 백성’이었다. 토정은 아산에서 만난 원통한 사연의 주인공, 김백남(金百南)이란 자를 실명(實名)으로 선조에게 소개한다.
김백남은 당시 나이가 환갑이었는데도 결혼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족(士族)이었던 그가 그 나이가 되도록 장가를 가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토정은 그 까닭을 직접 챙겨 보았다.
토정에게 들려준 김백남의 사연을 생생하게 적어 본다.
“우리 고을에는 인력이 부족하여 선비의 후예로 하인이나 잡급직(雜給職)에 종사하는 자가 많고, 그들이 혹 다른 고을로 이사하면 일족(一族=일가붙이)이 침해를 당하곤 합니다. 사람들은 그 화를 피하되 함정을 피하듯이 하는데, 김백남은 진즉에 군적부(軍籍簿)에 이름이 올라 있었던 탓에, 딸을 둔 집에서는 인척으로 연루될까 싶어 사위로 삼지 않았기에 여태껏 장가를 들지 못했던 것입니다.
김백남은 형제들 중에서도 건실한 자여서, 그의 누이인 김씨는 나이가 오십이 되도록 시집을 못 가고, 형인 김견 역시 오십칠 세가 되도록 장가를 못 든 채 죄다 김백남에게 더부살이로 얹혀살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가장 불쌍하게 인식되었던 대상은 흔히 환과고독(鰥寡孤獨)으로 불리는 사람들이었다. 환과고독이란 홀아비, 과부, 어리고 부모 없는 사람, 늙어서 자식이 없는 사람들로 외롭고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을 말한다. 당연히 국가에서 가장 먼저 관심을 가져 주어야 할 대상이다.
그런데 김백남은 홀아비가 아니라 장가도 못 가 본, 실로 ‘하늘 아래 다시없는 딱한 백성’이었다.
홀아비도 되어 보지 못하고 다 늙도록 노총각으로 남아 있는 수많은 ‘김백남’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임금이라면 역사상 가장 포악한 임금으로 남아 있는 걸·주(桀·紂)보다 나은 점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걸·주와 같은 타락된 생활은 하지 않았더라도 백성들의 삶이 걸·주가 다스리던 상황보다도 더 심각했다면, 임금이 자신은 걸·주처럼 사치와 향락을 일삼지 않았다는 자기변명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매뉴얼 사회의 한계
토정은 선조에게 제2, 제3의 김백남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일족에게 연대책임을 지우는 악법(惡法)을 폐지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과 함께 토정은 자신의 이 주장에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반대를 한다고 해도 선조가 조정의 신하들을 따르지 말 것을 요청하였다. 아무리 토정이라 해도 모든 관료들이 반대해도 따르지 말라는 주장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토정은 무슨 자신감으로 모든 관료들이 반대해도 자신의 주장이 채택되어야 한다고 임금에게 역설(力說)한 것일까? 여기서 토정은 자신의 주장은 바로 의문의 여지가 없는, 다시 말하면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내용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신료(臣僚)들은 토정에 의하면 의문의 여지가 없는 문제들을 따지고 있었다. 분명한 사실에 왜 신하들의 말을 들어야 하는가. 낭비다 그리고 핑계이다. 그것은 하지 않겠다는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의문의 여지가 없는 사안들을 거론하는 사람들은 매뉴얼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다. 굶어 죽어 가는데 우선 있는 것 활용해 급한 불을 끄는 것 외에 무슨 공식이 필요한가. 하지만 사람들을 이것저것 재고 따지고 있다. 매뉴얼을 찾고 있는 것이다. 물론 정상적인 경우엔 매뉴얼이 필요하다. 지켜져야 한다. 하지만 공식대로 해서는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매뉴얼이 가능한 것은 사람이 사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에는 문제가 없는 평상시에 한해서다.
이미 매뉴얼 사회의 대처 방식은 문제가 많다는 지적들이 나오고 있다. 지금 일본은 쓰나미로 큰 고통을 겪고 있다. 그런데 쓰나미가 아니라 그 대처 방식이 더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지진 때문에 도로가 끊기고, 차량을 움직일 연료가 모자라 구호 물자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것이다. 도로가 문제라면 구호품을 실은 대형 선박을 피해 지역으로 급파한 후 헬기로 투하하면 되는데도, 일본의 관료들은 매뉴얼에 헬기를 이용한 구호품 전달은 없다는 이유로 구호품을 전달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결국 대지진과 같은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매뉴얼만 붙들고 있는 것은 무책임한 보신주의(補身主義)다.
토정의 權道
여기서 필자는 권도(權道)라는 단어를 생각해 본다. ‘권도’란 ‘상도(常道)와 대비되는 단어로 상황에 맞게 행동하는 것’을 뜻한다. 상(喪) 중의 임금이 너무나 슬픈 나머지 건강에 적신호(赤信號)가 켜졌다면 비록 상중이라 할지라도 죽이 아닌 고깃국을 먹을 수도 있다는 것이 권도의 하나의 사례이다.
필자는 이것에서 도움을 받아 토정과 짝을 이룰 만한 ‘키워드’를 찾아냈다. 바로 ‘권(權)’이다. 토정이 선조에게 말한 권도의 내용을 살펴보자.
“육지와 바다는 온갖 재물을 간수해 둔 곳간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실물이 눈에 훤히 보이는 것으로, 이 자원을 이용하지 않고 나라를 다스린 경우는 역사상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 자원의 창고를 활용한다면 백성들에게 돌아가는 이익과 혜택은 한이 없습니다. 농사짓는 일과 나무 심는 일은 백성들이 살아가는 바탕 그것입니다. 은을 주조할 수도 있고, 옥을 캘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업은 모두 사리사욕(私利私慾)을 꾀하게 하여 이익을 즐기고 재물을 탐하고 인색하게 만드는 일이므로, 소인배(小人輩)들이 좋아하고 군자(君子)는 하찮게 여기는 것이지만, 그중에서 마땅히 취할 것은 취해 백성들의 목숨을 구제하는 일 또한 성인(聖人)의 권도이니, 이야말로 하책이라 하겠습니다.”
평상시가 아닌 위기 시에는 하찮게 여기는 일이라도 기꺼이 해야 하는 것이 바로 성인의 권도인 것이다. 권도를 잘 이해하는 사람들은 매뉴얼에 얽매일 위험이 없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토정의 가슴속에는 백성들에 대한 연민이 가득했다. 백성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한 사람에게 매뉴얼은 사치다.
지난 겨울 지하철역에서 노숙자가 동사(凍死)했는데, 행인 중 어느 누구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뉴스 보도를 본 적이 있다. 오늘도 서울역을 비롯한 많은 곳에 있는 수많은 노숙자들을 보면서 우리들의 가슴속에는 과연 연민을 느낄 여지가 얼마나 남아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에 앞서 정치의 세계에 있어 연민이란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벤담과 토정
여기서 문득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공리주의(功利主義)를 주장한 것으로 잘 알려진 벤담(J. Bentham. 1748~ 1832)이다. 벤담은 걸인수용소를 설치할 것을 제안했었다.
거리에서 걸인들을 만나면 내가 느끼는 행복이 줄어들기에 이들을 한 곳으로 모아 거리에서 안 보이게 하자는 것이 그 취지였다.(마이클 센델. 《정의란 무엇인가》)
결국 벤담의 주장에는 자신의 행복을 위한다는 생각이 그 출발점이다. 하지만 토정은 아니었다. 토정의 정치는 그 걸인을 위하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
벤담은 반박할 것이다. 남을 위한다는 것 역시 가만히 따져 보면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것에서 나온 것이라고. 자신의 정신적인 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냐고. 하지만 토정은 반박할 것이다. 사람이 죽어 가는데 그러한 계산을 할 겨를이 어디에 있는가. 공리주의 자체가 계산이다. 그런데 그러한 계산을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아니 계산 이전에 본능적으로 반응해야 하는 것이 필요한 영역이 있다.
토정은 사람의 심성이 선(善)한가 악(惡)한가 등을 논하지 않았다. 임금에게 그 고을 사람들의 삶 자체를 직접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조정에서 권력을 탐하는 행위는 어린아이 장난에 불과하다.
하지만 민생(民生)을 외면하는 삶은 하늘에 죄를 짓는 것이다. 벤담은 자신을 위해 걸인들에게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토정은 그 걸인을 위해 그들에게 관심을 보였다. 걸인을 진정으로 위하는 길은 그들과 함께 삶을 사는 길일 것이다.
그래서 토정은 아산 관아에 걸인청(乞人廳)을 세우고 고을의 걸인들을 모아 생활하게 하였다. 하지만 아산현감 토정 이지함은 걸인들의 허기만 채워 준 것이 아니었다. 최소한 짚신이라도 만들어서 자립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고자 노력했다.
시대가 변했는데 무슨 옛날이야기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 곁에 불쌍한 이웃이 있고, 원통한 이웃이 남아 있는 한 토정의 이야기는 옛날이야기로 남아 있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
大人說
이제 서두에서 언급한 부귀에 대한 토정의 견해로 돌아가 이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오래전에 아버지께서 말씀해 주셨던 부귀에 대한 토정의 이야기는 《토정집》 가운데 <대인설>(大人說)이란 제목의 글에 나와 있었다. 토정은 말한다.
‘존귀함은 벼슬을 하지 않는 것보다 더 존귀한 것이 없고(貴莫貴於不爵),
부유함은 탐욕을 부리지 않는 것보다 더 부유한 것이 없으며(富莫富於不欲),
강함은 다투지 않는 것보다 더 강한 것이 없고(强莫强於不爭),
슬기로움은 알지 않는 것보다 더 슬기로운 것은 없다(靈莫靈於不知).’
토정은 물질과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을 ‘대인(大人)’이라 칭했다. 그런데 우리네 삶에서 이것이 과연 가능할까. 만약에 불가능한 것이라면 토정은 세상을 비웃으며 홀로 말장난을 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많지 않은 분량의 《토정집》을 읽다 보면 토정의 물질과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는 일반인이 아닌 지도자에게 하는 말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토정은 선조에게 말한다.
“도덕의 창고를 열면 자신이 비록 가난하고자 할지라도 마침내 부(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역사 이래 태평성대를 이룬 요순(堯舜)이 살았던 집은 초가였고, 입은 옷은 청올치[葛怖] 옷(=천한 사람이 입는 옷)이었으며, 먹은 음식은 머위 국이요, 사용했던 그릇은 질그릇이었습니다.
그러니 요순은 마땅히 지극히 가난한 필부(匹夫)와 같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내 몸을 윤택하게 하고 남은 광채가 천하에 덮고 상하에 미쳐서 수(壽)를 얻고 녹(祿)을 얻고 자손이 보존되어 백성들을 이제에 이르기까지 요순을 존경하고 친애(親愛)하지 않는 자가 없으니 부(富)의 지극함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崔鎭弘 ⊙ 1963년생. ⊙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서울대 정치학 박사. ⊙ 현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 ⊙ 저서 : 《법과 소통의 정치》.
첫댓글 토정비결의 저자 이지함 선생께서 백성들이 광산과 어장의 자원활용을 외치며 가난극복에 앞장 서셨군요.